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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2막 - 창을 가진 여자, 방패를 가진 남자, 2장
아침에 겨우 일어나 몸을 씻고 호텔 식당으로 내려오니, 이미 혜은 씨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혜은 씨의 옷차림이 어제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분명 혜은 씨는 갈아입을 옷 같은 게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갈아입을 옷은 필요 없다고 하셨으면서…….”
“후후후, 필요 없다고 했지 갈아입지 않는다고 하진 않았어요. 날 어떻게 보고.”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지부장님에게서 제 SP에 대해 듣지 못했어요?”
“아니, 혜은 씨가 순간이동을 하는 건 잘 알지만…….”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혜은 씨의 SP는, 단순히 초고속 퇴근 능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마 한국에 있는 방으로도 순간이동 가능하신 겁니까?”
“현성 씨, 목소리가 너무 커요.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랬군요.”
혜은 씨는 잠깐 득의양양하게 미소를 짓더니, 물을 조금 마시고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내 SP는, 내가 나 자신의 방으로 인식한 곳을 이동할 수 있어요. 즉 이 호텔 방에 체크인한 순간부터, 호텔 방도 내 자신의 방으로 일단은 인식한 거죠.”
“……체크아웃하면?”
“그럼 더 이상 이동할 수 없게 되죠.”
“하아…….”
그렇다면 세계 곳곳에 별장을 둔다면, 세계 곳곳을 그냥 넘나든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세계 곳곳에 별장을 둘 만큼 돈이 많진 않으니까, 그렇게 자유롭진 못하지만요.”
“…….”
“그러고 보니 현성 씨에게는 이게 첫 SP 활동이네요. 진짜 SP 관련 활동.”
“예…….”
“사무 일만 하다가, 갑자기 이런 일을 맡게 됐으니…… 별로 실감 안 나죠?”
“…….”
솔직히 실감을 느낄 새도 없이, 너무나 갑자기 일이 진행되어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조차 되지 않는다.
“후후후, 뭐든 처음에는 다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
“현성 씨도 이제 어른이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의연하게 대처하면 돼요. 아,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너무 방심하진 말구요.”
놀리는 것인지 격려를 해 주는 것인지 살짝 헷갈리긴 했지만, 어쨌든 혜은 씨의 말에 틀림은 없다.
너무 긴장하지도, 너무 방심하지도 말자. 나는 그렇게 계속 속으로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아침 식사를 끝마칠 무렵, 료코 씨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료코 씨의 차를 타고…… 미카 사에지마라는 여성의 집으로 향했다.
“작전을 시작하는 겁니까?”
“호호호, 작전이라고 하니까 왠지 거창하네요.”
긴장 어린 내 질문에 료코 씨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작전 아닌 작전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가장 먼저, 제가 미즈 사에지마의 집으로 찾아가서, 간단한 대화를 시도해 볼 거예요. 물론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내야죠.”
“집 밖이라면……?”
“우리 카페에요. 미즈 사에지마를 우리 카페로 불러내서, 그곳에서 차분히 더 대화를 해 보고,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카페 안에서 신변을 구속할 겁니다.”
“카페 안의 다른 손님들은 어떻게 합니까?”
“카페 안의 다른 손님은, 미스터 윤과 혜은, 그리고 마코토가 될 거예요.”
즉, 우리가 일반 손님으로 위장을 하고 진짜 다른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긴 카페 자체가 SP 일본 지부 소유니까, 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제 SP는(이 대목에서 료코 씨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침묵의 숙녀]라고 해요.”
“침묵의 숙녀?”
“제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이라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만들 수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료코 씨는 가만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차 안에는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놀란 나는 분명 뭔가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도대체 무슨 단어를 말한 건지 내 귀에조차 들리지 않았다. 료코 씨가 재차 입술에 손을 대자, 그제서야 차 엔진 소리를 비롯한 소음들이 들려왔다.
“……굉장하군요.”
“이 SP로, 카페 안의 소동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할 거예요. 그와 동시에 마코토가 미즈 사에지마를 재울 겁니다.”
“재우다뇨?”
“마코토의 SP는 [수면 악수]라고 하는데, 악수를 해서 상대방을 재울 수 있어요.”
“…….”
솔직히 이젠 놀랄 기운도 없다. 뭔가 나의 SP가 평범하게까지 느껴졌다.
“문제는, 수면 악수로 사람이 잠들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그사이에 미즈 사에지마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죠.”
“그럼…….”
“예, 그때는 미스터 윤이 나서서 그녀를 막아 주시면 됩니다.”
작전을 들으니 어쩐지 모든 것이 간단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렇게 간단히 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 * *
미카 사에지마의 원룸 아파트는, 큰 길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결국 우리는 료코 씨의 차에서 내려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들어간 곳은, 그 원룸 아파트가 아니라 반대편 골목에 위치한 조그마한 여관방이었다. 그곳은 바로 감시역인 마코토 씨가 빌려 놓은 방이었다.
“계속 지켜보느라 피곤하죠?”
“아뇨, 괜찮습니다. 밤에는 마야가 교대해 줬으니까요.”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잠은 아까 깬 것 같은데, 아직 아무 움직임도 없네요.”
료코 씨와 마코토 씨의 대화에 이어, 혜은 씨와 마코토 씨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혜은 씨는 일본 지부 회원 전부와 구면인 듯싶었다.
이곳 여관방의 창문을 통해, 길 건너편 미카 사에지마의 원룸이 조금 들여다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 안이 훤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얼핏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은 기색은 알 수 있었다.
“그럼 일단 첫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네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일을 대비해서, 미스터 윤과 마코토가 제 옆에서 대기해 주세요.”
“하지만 지부장님이 스스로 나서시는 것은…….”
“괜찮아요. 경계는 충분히 할 테니까. 혜은은 여기서 감시와 연락을 맡아 주세요.”
수분 후, 료코 씨는 대담하게도 그 위험한 여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와 마코토 씨는, 원룸 아파트 복도의 구석에 숨어 그런 료코 씨를 지켜봤다.
길 건너편 여관방에서는 혜은 씨가 이쪽을 보고 있었으며,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즉시 행동으로 들어갈 태세를 취했다.
“……누구시죠?”
“사에지마 미카 씨?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방문을 열지 않은 채 위험한 여자는 예의 료코 씨와 대화를 시작했다. 여자의 말투는 날카로운데다 급했고 그와 대조적으로 료코 씨의 말투는 차분했다.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기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이 여자를 끌어내기 위한 대화이리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가요?”
“지부장님이 저 여성에게,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 말해 줄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계세요.”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은 내 질문에, 마찬가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마코토 씨가 대답해 주었다.
대화는 생각보다도 더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나와 마코토 씨는 긴장한 채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화 도중 방문이 살며시 열렸을 때, 우리는 최고로 긴장했지만, 예의 위험한 여자는 잠깐 료코 씨의 모습과 그 주변을 둘러보고는, 재빨리 문을 닫고 대화를 계속했다.
그 후 10분 가까이 지나서야 대화가 끝나고 료코 씨는 우리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내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길 건너편 여관방에서 집합했다.
“지금부터 두 시간 정도 뒤에,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하자는 약속을 받아 냈어요. 마코토는 여기서 남아 감시와 연락을 계속하다가, 미즈 사에지마가 카페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면 뒤따라서 손님인 척 들어오세요.”
“알겠습니다.”
“미스터 윤과 혜은은, 저와 함께 카페로 돌아가 준비를 하도록 하죠.”
“예.”
우리는 다시 료코 씨의 차를 타고 이번에는 일본 지부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 미즈 사에지마는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듯해요. 되도록 난폭한 일 없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미즈 그로닝은 이미……?”
“예, 아침에 도착하셔서 지금 카페에 계십니다.”
난 같이 뒷좌석에 앉은 혜은 씨에게, 그 헬렌 그로닝이란 분의 SP에 대해서 슬쩍 물어봤다.
“그분의 SP는 [망각의 선율]이라고 해요. 그분이 상대방에게 특정한 키워드의 노래를 불러 주면, 상대방은 키워드에 해당하는 기억을 잃어버리죠.”
“아예 완전히 잊어버리는 겁니까?”
“완전히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을 상대방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메워 버려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다시 가르쳐 주려 해도 알아듣지 못하죠.”
“…….”
“정신에 영향을 주는 최면 같은 거라, 현성 씨라고 해도 저항할 수 없어요. 원래 헬렌 씨는 이 방법으로 심리 치료를 하셨다고 하네요.”
무서운 SP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 또한 막을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