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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일본 지부 카페 앞에는 [CLOSED]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물론 오늘의 작전을 위해 세운 것일 터이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 보니, 테이블의 위치가 살짝 옮겨져 있었다. 이것도 물론 작전을 위해 옮긴 것일 터이다.
“저는 여기에 앉아서 미즈 사에지마와 대화할 거예요. 미스터 윤과 혜은은 저쪽에 앉고, 마코토가 오면 이쪽에 앉는 거죠. 그리고 마코토까지 들어오면, 마야가 슬쩍 카페 문을 잠가 버릴 겁니다.”
카페의 문이나 창문은 선탠 유리로 되어 있었기에 밖에서는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덧붙여 미카 사에지마가 앉을 자리는 카페 문을 등지고 있었다.
“제가 마야를 불러서 커피 값을 계산하면 대화로 해결됐다는 신호고, 제가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하면 할 수 없이 신변을 구속해야 한다는 신호로 할게요.”
“미스터 시나가와도 신호에 대해 알고 있나요?”
“작전에 변경이 없으면 마야가 전화로 마코토에게 알릴 거예요.”
“신변을 구속할 때는 어떻게……?”
나는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질문했다.
“만약 제가 신호를 보내거나, 미즈 사에지마가 혹시라도 공격적으로 나오면, 이쪽 자리에 앉은 마코토가 나서서 슬쩍 미즈 사에지마의 손을 잡을 겁니다. 그렇지만 미즈 사에지마가 완전히 잠들려면 몇 분이 필요하니까, 만약 그사이에 난동을 부리면 그때에는…….”
“예…… 알겠습니다.”
“현성 씨. 다시 말하지만, 상대방이 여자라고 해서 방심하다간 위험해요.”
“명심할게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고, 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작전을 짜고 난 후 우리는 마코토 씨의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미카 사에지마와의 약속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료코 씨와 마야 씨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코토 씨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했고 혜은 씨는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락을 기다리다가…… 약간 초조해진 나는 문득 혼자서 카페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나이 지긋한 흑인 노부인이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분이 헬렌 씨 같았다.
“아, 당신이 미스터 윤이죠? 반가워요. 헬렌 그로닝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미즈 그로닝.”
헬렌 씨는 몸의 거동이 조금 불편하신 듯싶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인자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그나저나 헬렌 씨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는 걸 보니, 내가 요즘 화제라는 이야기가 조금 실감났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행동을 조심해야 할 듯싶었다.
“박 교수님은 잘 계시죠? 그분을 뵌 지도 꽤 됐네요.”
“덕분에 잘 계십니다.”
“예전에 그분의 친절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항상 감사하고 있죠.”
헬렌 씨와 나는 잠시 박 교수, 즉 아저씨의 근황과 예전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언젠가 헬렌 씨의 몸 상태가 안 좋아졌을 때, 아저씨가 그녀를 간병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일도 부디 평화롭게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대화로 해결하거나…… 혹은 미즈 그로닝이 기억을…….”
“그게…… 제가 나서서 기억을 지우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
“그건 어찌 됐든 한 사람의 인생을 외부에서 억지로 바꿔 버리는 거니까요.”
“그렇군요.”
“예전에는 심리 치료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의 안 좋은 기억을 지워 줬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어요. 사람은 안 좋은 기억에서 배우는 것도 많으니까.”
“예…….”
“선지자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아무래도 이분은 그 [선지자]라는 분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았다. 모처럼의 기회이니 선지자에 대해 좀 더 물어보려는 찰나, 안쪽 방의 문이 열리고 지로라는 아이가 나왔다.
이 지로라는 아이는 보통의 다른 아이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제 금요일 밤에도 그렇고 지금은 토요일 오전인데도 여기 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평범한 가정에서 지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로는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쭈뼛쭈뼛 다가와서는 조금 서툰 영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 저기…… 당신이 불사신 맞죠?”
“아, 그게…… 음…… 맞아. 현성이라고 해. 현성 윤.”
“전 저로예요. 지로 스기나미.”
뭐가 그리 좋은지 지로는 갑자기 밝게 웃었다.
“불사신이라니 정말 굉장해요. 그럼 아무 무서운 것도 없잖아요.”
“아니, 나도 아무것도 안 먹으면 굶어 죽어. 인간이니까.”
“그래도 정말 굉장해요. 그에 비하면 제 SP는 정말 쓸모없어서…….”
아직 영어가 서툰 탓인지, 지로는 순간 일본어로 말을 했다. 나는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얼핏 [SP]라는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로의 SP는 뭐지?”
“에…… 저의 SP요?”
“응, 너의 SP는 뭐니?”
지로가 SP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지로의 SP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로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방 안에 있던 티슈 상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길 보세요.”
내가 티슈 상자 쪽을 바라보자, 티슈 상자는 갑자기 공중으로 떠올라 천천히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말문을 잃었고, 우리를 옆에서 지켜보던 헬렌 씨는 박수를 쳤다.
공중에서 느릿느릿한 속도로 움직이던 티슈 상자는, 결국 내 손 안에 살며시 떨어졌다.
“이게 제 SP인 [보이지 않는 손]이에요.”
“굉장한데, 텔레키네시스(Telekinesis:염동력)잖아.”
내가 솔직히 감탄하고 헬렌 씨가 박수를 쳐 주자 지로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기쁜 표정이었다.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에요. 보시다시피 [보이지 않는 손]은 힘도 약하고, 그리 멀리까지 나갈 수도 없어요.”
“그래도 정말 굉장해. 내 SP는 평소에는 정말 별 쓸모없거든.”
내 말에 지로는 씩 하고 웃는다.
“난 형처럼 되고 싶어요. 형 같은 SP가 있으면 누구라도 도울 수 있을 텐데……(이것도 지로는 일본어로 말했다).”
중간 중간 일본어를 하는 지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긴 했지만, 나는 뭔가 분위기를 바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 혹시 그거 아니?”
“예?”
내가 말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일본 소년 만화 중 하나였다. 난 이미 중학생 때부터 팬이었고 예주가 핀잔을 줘도 신간이 나오면 항상 발매 당일에 사는 만화였다.
“아, 물론 알아요. 제가 거기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도 그 캐릭터가 좋아, 특히 24권에서…….”
당연히 지로도 그 만화를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일본인 꼬마하고도 통하는 화제가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느꼈다. 내 취미가 쓸모 있을 때도 있군.
그렇게 지로와 나는 잠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난 게임은 그다지 하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로와 내가 20분 정도 이야기를 했을 때쯤, 우리들이 있던 2층으로 료코 씨가 올라왔다.
“미스터 윤, 미즈 그로닝하고는 벌써 인사를 나누셨나 보군요.”
“방금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미스터 윤이 지로하고도 친하게 지내서 다행이네요.”
“아…… 예.”
료코 씨는 가만히 손을 뻗어 지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로는 가만히 있었다. 원래부터 조금 얌전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런데 방금 마코토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겠네요.”
“알겠습니다.”
“미즈 그로닝, 혹시 모르니 안쪽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계셔 주시겠어요?”
“그러도록 하죠, 미즈 아마노.”
“지로도, 잠시만 들어가서 기다리렴.”
“……예.”
헬렌 씨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고, 지로가 그런 헬렌 씨를 부축해서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지로는 방문을 닫기 직전, 내 쪽을 보며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