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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2막 - 창을 가진 여자, 방패를 가진 남자, 3장
사에지마 미카는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용케 약속 장소인 카페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카페는 미카가 잘 아는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들어가 본 적은 없었지만…….
‘아마노 료코라고 했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카페가 가까워지자, 미카는 아까 자신의 방문을 두드린 중년 여성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얼핏 고풍스런 숙녀 같은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나이는 자신의 어머니뻘 정도 아닐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에지마 씨 스스로도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근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우리는 많은 걸 알고 있답니다. 사에지마 씨가 궁금해하는 것도 전부 대답해 줄 수 있죠.”
“그럼 빨리 말해 보세요…… 전부 다…….”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이따 낮에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런 대화 끝에 미카는 지금 카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무슨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물론, 집 밖으로 나오고부터 미카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충분히 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매복한 사람이 있는지,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고 또 둘러봤다.
‘그 여자가 무슨 경찰이나 뭐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래 보이진 않았어. 그럼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조심조심 두리번두리번 걸어가면서, 이번에는 잊지 않고 챙겨 온 스턴 건을 핸드백 속에서 꽉 쥐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길거리 행인에게 세 번, 지하철 승객에게 두 번이나 스턴 건을 들이댈 뻔했었다.
‘내 초능력을 이용해 먹으려고 날 꼬시기 위해 이상한 조직 같은데서 파견한 여자일까……? 아니야. 날 꼬시려면 남자를 보낼 텐데. 그것도 잘생긴 남자로……풋.’
그런 생각을 하자, 미카는 문득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가 떠올랐다. 잘생겼지만 바람둥이에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던 남자였다.
‘……어쩌면 이건 그 자식을 혼내 주라고 생긴 초능력이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새해 참배에서 그 자식한테 천벌이 내리길 기도했잖아. 이게 그거 아닌가?’
헤어진 남자 친구를 생각하자, 미카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열불 덕분에 어느새인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경계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래, 이런 초능력이 아무 이유 없이 생겼을 리가 없어. 나중에 그 자식을 찾아가서…….’
화가 난 미카의 걸음이 조심성을 잃고 점점 더 빨라졌다. 그 덕분에 미카의 뒤를 미행하고 있던 마코토가 깜짝 놀랐다는 사실을, 물론 미카가 알 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자식보다 다른 남자를 먼저 찌르고 말았어…… 다행히 뉴스에서 죽지 않았다고 했지만…….’
치한 혹은 강도로 보였던 남자를 공격한 이후, 미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뉴스에 중상이지만 죽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마음이 놓여 조금 울기도 했었다.
‘난 정당방위였어, 정당방위라구……! 뉴스에서도 그 남자는 전과가 있다고 했었잖아!’
그날 밤 겪었던 악몽 같은 일이 다시 머릿속에서 생생히 떠올라, 미카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 * *
“꺄아아아악!!”
치한 혹은 강도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들고, 스턴 건을 원룸 책상 위에 고이 모셔 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때 그 순간, 미카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밤거리 추위마저 잊어버렸다.
그것은 미카가 이십 년 남짓 살아오면서, 최초로 느낀 진짜 절망과 공포였다. 그 생소한 감정은 미카에게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앗아갔다.
결국 미카는,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을 감은 것은 물론이고 고개조차 돌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을 보려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미카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마치 뱀 앞에 놓인 개구리처럼.
그러나 그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미카는 자신의 손에 무언가가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치한 혹은 강도의 몸을 꿰뚫는 감촉도…….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미카는 눈을 살며시 떠서 자신의 손에 잡힌 물건을 바라봤다. 그 물건은 교과서나 박물관에서 봤음직한 옛 시대 병사들의 창이었다. 그리고 그 창의 끄트머리는 치한 혹은 강도의 몸에 박혀 있었다.
“……!!”
너무나 놀란 미카가 창을 놓고 뒷걸음질을 치자, 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치한 혹은 강도는, 몸에 구멍이 뚫린 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뒤 어떻게 해서 자신의 원룸에 돌아왔는지, 미카는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비명을 질렀는지, 아니면 말없이 도망쳤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미카가 간신히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 장면은, 원룸에 도착하여 이불 속에 숨는 것과 동시에 기절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 * *
미카는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을 떨쳐 버리듯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에는 입도 험하고 터프한 미카였지만, 실제로 사람을 찌른 뒤의 충격은 견디기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 다음은 당당하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념에 빠진 채 걷는 미카의 모습이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미카는 약속 장소인 고풍스럽고 조그마한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의 상호를 몇 번인가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미카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미카가 도착하기 직전에 카페 앞의 [CLOSED]라는 팻말을 살짝 치웠고 미카가 카페 안에 들어선 직후 카운터를 보고 있던 마야가 슬며시 그 팻말을 다시 세웠건만, 그런 사실을 물론 미카는 알 수 없었다.
“아, 사에지마 씨. 여기예요.”
미카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중년의 숙녀가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미카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숙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물론 미카는 카페 안을 은근슬쩍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님은 미카와 숙녀 이외에 한 테이블이 더 있었다. 젊은 남녀였다.
“그럼 우리, 뭐 좀 마시면서 이야기할까요?”
“……전 괜찮아요. 이 캔 커피면 충분해요.”
혹시 커피에 뭔가 약을 탈지도 모른다…… 미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까 지하철역에서 뽑은 캔 커피를 꺼내 들었다. 사실 그것은 미카 특유의 과대망상이었지만, 정황으로 보건데 그렇게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 * *
“캔 커피를 꺼냈어요.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데요?”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행동하세요, 현성 씨. 그렇게 목소리를 죽이며 몰래 이야기하면 더 수상해 보여요.”
“혹시 한국어를 알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어차피 이 거리에서는 그냥 떠들어도 잘 안 들려요.”
그냥 자연스럽게 카페 손님을 연기하면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번 작전의 목표물을 보자 현성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면…….”
“너무 가까이 있으면 저쪽이 이야기하기 불편할 거예요. 그리고 현성 씨는 료코 씨가 신호를 보낸 뒤에 자연스럽게 접근하면 돼요.”
“…….”
“걱정 말아요. 료코 씨가 신호를 보내면 내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설 테니까, 현성 씨도 그때 같이 일어나세요.”
“예…….”
아무래도 긴장을 너무 한 모양이군. 아직 어려……라고 생각한 혜은은 곧 현성의 긴장을 조금 풀어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기껏 일본까지 왔는데, 일이 끝나면 현성 씨가 좋아하는 만화책이나 사러 가요.”
“예?”
“만화책, 좋아하잖아요?”
“아…… 그래요. 그렇지만 전 일본어를 몰라서…….”
“만화를 좋아하면 일본어는 조금씩 하지 않나요?”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저한텐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요.”
“그건 꾸준히 공부하면 돼요. 괜히 어렵다고 처음부터 포기하지 말고.”
“전 혜은 씨처럼 머리가 좋질 않아요…… 공부해 보고 싶긴 한데…….”
현성의 관심사로 화제를 돌린 것이 적중했다. 물론 혜은은 다시 한 번 현성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