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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법사 1권(14화)
제5장 북어랑 공갈은 쳐야 제 맛(4)


“흐음.”
그도 그렇다. 자신이 있던 대륙보다 이곳의 사람들은 자존심과 명분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그래서 행동을 조절하기도 훨씬 더 쉽다.
“그럼 그곳으로 가세. 은유 소저, 오시었소?”
휘령과 연랑의 고개가 재빨리 돌아간다. 이내 그 둘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린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기운도 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니. 은유는 그들 옆의 나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 언니……!”
연랑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은유는 연랑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다 들었어. 다 들어 버렸어.”
나무에 기대고 있던 그녀의 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내 쪼그려 앉은 그녀.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이 반짝인다.
“알고 있었어.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구. 우리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왜 나만 살아남았는지 말이야.”
“…….”
모두는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스윽 닦아 내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냥 살아가려 했는데, 나는 운이 참 좋은 거 같아. 그렇지?”
그녀는 애써 웃었다. 휘령과 연랑은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다만 틸러는 조심스레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
틸러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은유는 놀란 듯 바짝 긴장했지만, 이내 따듯한 그의 품에서 긴장이 풀린 듯 그를 껴안았다. 따스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 안자 그제야 억지로 참아 왔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
‘반 정도…랄까.’
이 상황에서도 작업 성취도를 계산하는 틸러와 그런 그의 품 안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은유의 울음소리가 한밤의 마을을 울리고 있었다.
다음 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숙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녕감에서 꼬박 이틀을 걸어가면 도착한다는 휘령의 말에 틸러는 벌써부터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도대체 자신에게 이득 되는 일 아니면 하지 않는 틸러가 은유의 원수를 갚아 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착한 척’을 위해서라면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텐데, 굳이 살문을 찾아가고 화산을 끌어내리려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틸러는 지금 무림맹의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팔대문파를 모두 끌어내리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시민들에게, 또 사파에게까지 그들의 추잡한 뒷모습을 낱낱이 까발려 끌어내린 후, 자신이 문파를 일으켜 단숨에 무림맹의 강력한 지도자로 떠오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시민들은 그를 믿을 테고, 팔대정파들은 그를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쿠후후후!”
틸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쉬운 계획이다.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정파의 추잡한 모습 몇 가지쯤이야 충분히 발견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의 말과 몇 가지 능력의 발현만으로도 만인의 앞에서 산산이 조각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여인들은 부가 보상 같은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것들은 항상 산재하고 있었다. 휘령의 힘이 강하다지만 정파의 무인들이 단신에 덤벼든다면, 또 그것이 검법이 아닌 봉술이나 권법 같은 것이라면 틸러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1클래스 마법 정도야 그들에게 ‘기적’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직접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기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적어도 은유와 연랑을 일류고수 이상으로는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자신은 무공의 수련이라든가 무공의 성취, 내공의 성취를 높이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
그렇다면 궁여지책으로 세울 만한 방법으로는 듬직한 호위를 하나 더 구하는 것이다. 하나가 아니라면 하나의 단체를 구해도 되고. 가만, 단체?
“살문을……?”
항상 음지에서 활동하며 정파와 사파 모두에게 멸시받던 그들이라면, 양지로 끌어올려 주고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는 것으로, 그리고 몇 가지 마법과 기적으로 현혹시킨다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될지는 모르지만 해 보자. 살문이라면 암기와 독들을 주로 사용할 테니 독은 해독 마법으로, 암기는 황금잔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겠는가.
틸러는 감숙으로 향하는 이틀 동안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획들을 짜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감숙의 경계선에 도착했을 때, 틸러는 머릿속에 완벽한 계획을 짜 맞추어 가고 있었다. 살문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고, 화산을 완전히 나락으로 밀쳐 버릴 계획을. 살문의 무인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려면 그들의 우두머리를 인질로 잡아야 한다. 그들은 문주의 명령이 아니면 어떤 것이라도 듣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문주를 인질로 잡을 계획만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저 멀리에 산맥이 보이오?”
“저 안개에 가려 약간 사이한 느낌을 주는 산맥 말인가?”
틸러는 휘령의 손가락 끝에 걸린 높은 산맥을 바라보았다. 산 중턱부터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걸쳐져 있어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그렇소. 저 산은 사람들에게 그저 평범한 산맥이라고 알려져 있을 테지. 하지만 실세는 그렇지 않소.”
휘령은 걷기 시작한 틸러의 뒤를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 산맥은 작은 분지라오.”
“분지요?”
연랑이 되물었다. 분지라 함은 산에 둘러싸인 가운데의 평야 같은 것인데, 감숙에 그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을 터였다.
“저 안개는 사실 최면향이 섞인 것. 산에 들어온 자들은 방향 감각이 이상해지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 힘들어지오. 그래서 저 산을 귀산(鬼山)이라 부르지만, 오히려 살문에게는 그것이 도움이 되고 있소.”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 감각이 이상해진 사람은 계속 같은 곳을 돌고 돌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자주 쓰는 방향으로 은연중에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 있어 생기는 현상인데, 방향 감각이 이상해진 상태라면 십중팔구는 그리되고 말 터였다.
“하지만 방법이 있소.”
휘령은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그는 그것을 몇 번 뒤섞듯 흔들고는 말했다.
“이것은 청란향(淸蘭香)이란 것이오. 향이 강해서 후각을 마비시키고 일시적으로 코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킨다오. 한 번 사용하면 이틀은 가지만, 이틀이 지나면 저 산에서 도망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을 테니 조심하시오.”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내로 결정을 봐야 한다는 말인가. 조금 급박할지 모르지만, 계획대로라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갑시다.”
청란향은 말 그대로 개운하고 맑은 향이었지만, 향을 맡고 나니 마치 코가 통째로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코로 숨을 쉴 수는 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다. 틸러뿐 아니라 연랑과 은유도 상당히 신기한 듯 자신의 코를 연신 만지며 산으로 들어섰다.
산세가 험하지는 않았지만 두 시진쯤 오르자 한 치 앞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하지만 휘령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수십 번도 더 올라 봤던 길이다. 몇 년이 지났다고 해도 잊을 리가 없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이 내리막으로 변했고 아까보다 더 험했다. 휘령의 옷자락을 틸러가 잡고, 틸러의 옷자락을 은유가, 은유의 옷자락을 연랑이 잡고 있었기에 움직임이 꽤 불편했지만, 휘령의 길 안내는 정확했다.
다시 두 시진 정도 지나자 눈앞이 밝아져 왔다.
“이런… 곳이?”
빽빽한 숲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살문은 그들의 거주지를 들키더라도 절대 문파가 있으리라 생각지 못하도록 건물 대신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놓았다. 나무들은 수련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는 데다 지형적인 이점도 안고 있으니 매우 적절한 선택이라 하겠다.
“살문의 문주는 금수철인공(金手鐵人鞏)을 극성으로 수련한 최고의 암살자요.”
휘령은 다시 이곳을 보게 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금수철인공? 틸러는 왠지 일이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수철인공?”
“그렇소. 어렸을 때부터 몸속에 쇠를 쌓아 두는 것으로, 수련하게 되면 몸 어디에서건 자유로이 쇠를 뽑아낼 수 있소.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그렇다면 온몸에 쇠가 가득하단 말인가?”
휘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웃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몸속에 쇳덩어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일단 문주 녀석을 인질로 잡을 계획은 그것으로 해결되어 버렸다.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닌가.
“은유 소저, 단도들은 이곳에 다 버리고 가시구려. 사일검만 들고 가시오.”
그러고 보니 사일검만큼은 황금잔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사일검은 쇠로 만든 것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검. 그러니 황금잔의 자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은유는 갑작스런 틸러의 주문에 의문을 품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단도를 휙 던져 버렸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말에도 콧방귀를 뀌고 말았을 그녀였기에 장족의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조심스레 숲의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 한둘이 지나다니기에도 벅찰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다.
“이 숲은 수목사괴진(囚木四乖臻)으로 구성되어 있소.”
수목사괴진. 나무 안에 사람을 가두는 진으로, 나무를 심고 잘 키우기만 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살문 특유의 진법 중 하나다. 마치 미로처럼 심어져 있는 나무들 때문에 멋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간 이 진의 가장자리만을 빙글빙글 돌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살문의 문주가 거주하는 곳은 이 숲의 정중앙.
“조심하시오, 이미 그들은 우리가 들어온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니.”
“걱정 말게. 그보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곧바로 나에게 일러주는 것 잊지 말게.”
틸러는 단단히 일러두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온몸에 마력을 고루 분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처럼 황금잔에 필요 이상의 마력이 주입되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정신을 잃어버릴 수 있고, 그러면 끝이 아닌가.
타탓!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숲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춤을 추듯 흔들리고 사방에서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이 또한 수목사괴진의 무서운 점 중 하나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방향 감각뿐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자들의 기척도 숨겨 주었다.
챠라랑! 스팟!
무언가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휘령이 번개 같은 속도로 파마적룡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곤 힘차게 허공을 가르자 대여섯 개의 표창이 나무통으로 흩뿌려졌다.
“왔소.”
“휘령, 힘주시게!”
틸러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마력을 운용하며 품속에서 마법서를 꺼내 들었다.
채채챙!
이내 사방에서 수십 개의 암기들이 날아와 황금잔에 달라붙었다. 그뿐 아니라 나무 위에 있던 검은 복면의 살수들도 우르르 나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품속에 검을 품고 있었던 것이 화근인 듯하다. 그들은 마치 고양이처럼 자세를 잡고 땅에 착지했다.
“…….”
휘령과 은유, 연랑은 틸러를 감싸 안은 채로 자세를 잡았다. 이내 살수들이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자, 눈을 현혹시키는 현란한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휘령 혼자 여덟 명쯤 되는 살수들을 막아 가고 있었다. 은유와 연랑은 각자 하나씩의 살수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때, 틸러의 외침이 들려왔다.
“뒤로 피하시게!”
휘령은 그의 외침을 듣자마자 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이내 검에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휘령은 반월을 그리며 횡으로 검을 길게 베어 살수들을 떼어 내고는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이내 살수들의 앞에 흙의 벽이 솟아올랐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으읏!”
철퍽! 철퍽!
살수들이 벽을 부숴 버리겠다는 듯 달려들자 순식간에 벽 아래의 땅이 구덩이로 변했다. 벽을 향해 힘차게 달려들던 살수들은 채 도약을 하기도 전에 벽에 부딪쳐 땅속으로 추락했고, 이내 벽이 스르르 흘러내리면서 살수들을 가둬 버렸다. 그야말로 가관이다. 그래도 숨은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차오르는 흙 사이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은유뿐 아니라 연랑마저도 그런 그들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죽이지는 않겠네.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네.”
틸러는 조용히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휘령은 살수들을 그답지 않게 측은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다가 틸러의 앞으로 나섰다.
이미 살문은 그들의 첫 싸움을 본 것이 분명했다. 숲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고 있는데도 막아서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살기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한 명의 살기가 아니라 수백 명의 살기다. 마력이라든가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매우 약한 틸러조차도 몸이 저릿저릿해져 왔다.
“…….”
한참을 걷던 휘령의 몸이 뚝 멈추어 섰다. 드디어 도착한 살문의 가장 깊숙한 곳. 틸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내 틸러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어렸다. 이렇게 간소한 곳이었던가.
문주가 있는 곳이라 하여 무언가 거창한 것을 기대했던 것이 실수였다. 이들은 살문. 언제든 흔적을 거두고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문주가 앉을 수 있는 승룡좌(昇龍坐)만이 작은 공터에 놓여 있었다.
“온 건가요?”
‘음? 여자?’
숲을 고요히 울리는 목소리. 그것은 놀랍게도 여성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듯하지만 한없이 차갑다. 한마디 한마디가 귀를 찢어 놓을 듯 파고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놀랍게도 휘령이 높임말을 쓰기 시작했다. 틸러에게도 반 경어만을 사용하던 그가.
이내 숲에서 그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렇군요. 다시 찾아오다니, 죽을 생각인가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투. 애써 발랄하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살의가 짙지 않은가. 하지만 휘령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이자가 떨고 있다. 공포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반가워요.”
부스럭!
촤촤촤!
이내 그들이 서 있는 건너편의 나무가 크게 흔들리더니 암기들이 빗줄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위험하다! 하지만 그 암기들은 그들을 노릴 생각이 없었던 듯 발 앞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재미있네요.”
또다시 짤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숲의 나뭇잎들 사이에서 수백의 안광이 번뜩였다. 천살성(天殺性)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심법인 흑혈심법(黑血心法)을 수련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붉은 안광. 수백의 살수가 저 위에서 그들에게 암기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틸러라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마력을 무리해서 사용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너무 사용하지 않으면 벌집이 되어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가녀린 몸집의 여인이 풀썩 뛰어내렸다. 승룡좌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녀. 검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리고 눈 아래에는 검은 복면을 하고 있다. 눈만 드러나 있음에도 차가운 눈빛과 약간 처진 눈매가 묘한 불균형을 이루며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천존이란 자가 당신인가요?”
틸러는 그녀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한두 번 죽여 본 여인이 아니다. 갈무리하고 있음에도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녀가 하늘만치 커 보였다. 틸러는 애써 호흡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