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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Part 1 운수 좋은 날 (2)


내 입에서 풍선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황해서 삑사리가 난 것이다.
“너는 애가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빠르니? 나도 너 때문에 급하게 내고 나왔잖아.”
“무, 무슨 일로……?”
내 물음에 미영이는 내 혐오스러운 얼굴 앞에서도 그 후광이 비칠 것 같은 여신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촉촉하고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미영의 말을 기다렸다.
“너! 지금까지 과모임 한 번도 안 왔지?!”
“으응? 아, 그게…….”
나는 우물쭈물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미영이는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도 우리 과이고, 같은 학년인데 애들하고 친하게 좀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침 오늘 학기 마지막 날이라 종강파티할 거거든.”
아,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 주다니. 역시 미영이는 사랑스럽다. 나의 여신이다.
하지만…….
“아, 아니, 난 괜찮은……데…… 그게 못 갈 거 같…….”
더듬거리며 간신히 거절을 하려는데, 미영의 뒤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개미핥기녀가 다가왔다.
“미영아! 뭐해! 빨리 가자!”
개미핥기녀, 진희는 미영이를 낚아채 복도 저편으로 질질 끌고 갔다. 나름 구출해 준다는 건가, 저건.
“아앗, 이거 좀 놔 봐∼ 철수랑 할 말 있단 말이야∼”
“무슨 할 말∼ 시끄럽고 빨리 가자∼”
질질 끌려가는 미영이의 모습에 나는 살짝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걸로 된 거다. 저 얄미운 개미핥기도 도움이 되는구나.
“야! 김철수! 이따 전화할 테니까 꼭 와! 진짜 와야 돼! 전화 꼭 받아!”
복도 저편으로 미영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기쁘다.
나는 핸드폰을 슬쩍 꺼내 패턴을 입력했다. 전화번호부에는 다 해서 10개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엄마와 중, 고등학교 친구 세 명, 식당 다섯 군데, 그리고 여신이라 저장된 미영이 번호.
‘히―’
학기 초에 받은 비상 연락망을 보고 저장한 번호로,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는 번호다. 미영이는 과대라서 휴강이나 기타 업무로 몇 번 내게 전화를 걸려 오긴 했지만, 가슴이 떨려서 조마조마하다가 끊어져서 받아 보지 못했다.
‘전화를 한다고?’
내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미영이한테 전화가 걸려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설레다니. 미영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이번에 과모임에 가 볼…… 아냐, 아냐, 내가 미쳤지…… 아니, 그래도…….
“으아, 모르겠다!”
나는 행복에 겨워서 나도 모르게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자취방으로 뛰어갔다. 오늘은 뭔가 운이 좋은 것 같다.

오후에 있던 교양 시험은 너무 들뜬 나머지 망쳐 버렸다.
미영이 생각으로만 가득해서 공부한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고, 정신 차리고 보면 시험지에‘미영미영미영…….’ 하며 끄적거리고 있었으니, 성적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히히히―”
그런데도 뭐가 좋다고 이렇게 실실대는가. 하지만 지금 난 시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다. 아웃 오브 안중이랄까. 내 관심은 오직 휴대폰에 쏠려 있었다. 전화가 오면, 그래, 못 이기는 척 알았다고 하고 갈까?
‘애들 많이 오려나…….’
순간 왈칵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냐 아냐, 생각하지 말자. 간다고 결정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때 전화벨이 울려왔다.
―그대 때문에 가슴이∼♬ 내 심장이∼♪ 두근두…….
[여신 님]
액정에 뜬 이름을 본 순간 나는 벌벌 떨며 고민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내 심장이∼ 외치는 말∼♪
끊어질 것 같다. 안 돼, 끊어지면 안 되는데…… 꼭 받으라고 그랬는데…… 안 받으면 날 미워할지도…….
‘그, 그건 안 돼!’
나는 눈을 딱 감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 나는 온 힘을 엄지손가락에 집중시켜 쭉 밀어냈다.
“여, 여보세요!”
덜덜 떨리는 내 목소리는 역시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신의 목소리.
―어! 받았다! 안녕?
미영이 목소리. 아, 코피 나올 것 같아.
“아, 안녕.”
―너 처음으로 내 전화 받았어, 알지?
“으응, 미, 미안.”
주륵―
발랄한 미영이의 목소리에 나는 진짜로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입을 타고 옷과 바닥에 줄줄 흐르는 걸 그냥 놔두며 전화에 닿아 있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튼! 오늘 올 거지?
“그, 그게…….”
나는 솔직히 거절하려 했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두려운데 술자리에서 같이 어울려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거다, 그건.
―대답하지 마!
하지만 미영은 나의 말을 막아 버렸다.
―안 온다고 할 생각 말고, 오늘 아약스로 8시까지 꼭 오도록 해! 안 오면 나 진짜 삐칠 거니까. 그럼 끊을게!
미영은 내게 말할 기회를 안 주려는지 자기 할 말만 쏙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목소리마저 귀여워, 나는 줄줄 새던 코피가 폭포수 수준으로 나오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삐친다니, 그런 귀여운 말을…….
휘청―
“허억―”
코피를 너무 흘렸는지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옷에 묻은 피와 바닥의 피를 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휴지로 코를 틀어막으며 바닥과 옷의 피를 훔쳐 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힘든 와중에 피까지 흘려 버리다니.
“으윽, 행복해.”
행복하다.
하지만 종강파티는 어쩌지. 미영이가 꼭 오라고 그랬는데.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안 오면 삐친다고 그랬는데…….
나는 한참 걱정을 하고 고민을 하다가 대학에 들어오며 내가 붙여 둔 좌우명을 쳐다보았다.
[생각이 길면 용기가 사라진다]
생각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너무 고민하면 오히려 걱정만 많아져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80%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고, 10%는 일어나도 내가 능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며, 10%는 일어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어떤 일도 일어나기 전에 미리 걱정하며 한숨 쉴 필요가 없다는 거다.
“좋았어, 가자.”
나는 전의를 불태우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 캔 두 잇∼∼∼!!!!!”

7시 2분.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나는 인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내 인생의 향후 30년 정도를 이 일이 결정지을지도 모른다. 3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30일 정도는 확실히 결정지을 게 분명했다. 나는 마치 폭탄의 빨간 선과 파란 선 중 무엇을 제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폭탄제거반처럼 식은땀까지 흘리며 눈앞의 선택지를 노려보았다.
“으윽, 폴로티냐, 셔츠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들었으면 거품을 물고 내 뒤통수를 후려쳤을 고민이었으나 내겐 심각한 문제였다.
이미 새까만 블랙진을 걸친 상태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폴로티도 마찬가지로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셔츠는 청색의 셔츠로, 내가 예전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미쳤다고 사고는 한 번도 입고 나가 보지 못한 것이다. 밝은 색 옷을 입었다가 괜히 눈에 띄어서 얼굴을 보이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 입지 못한 것이다.
‘지난번에 어떤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니 지나가는 사람이 뭘 입든 대부분의 사람은 거의 기억을 못 한다던데.’
하지만 지식과 실제는 다른 것이다. 항상 시선이 느껴지는데 어쩌란 말인가. 지식이냐 실제냐, 또 검은색을 입고 가면 어둠의 자식 취급 받아 우울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거, 아님 이거?
아냐, 이거? 아니…… 이거다!
아냐…… 어쩌지, 이거?
…….
…….
지루한 선택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좋았어. 셔츠야, 너만 믿는다.”
내가 선택한 것은 청색 셔츠였다.
나라고 검은색 옷이 좋아서 입는 건 아니다. 오히려 빅뱅처럼 컬러풀한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있는 나다. 나라고 검은색으로 온통 도배한 옷차림으로 무슨 까마귀 새끼처럼 나다니고 싶겠는가. 다만 얼굴 때문에, 얼굴 때문에 그런 것뿐이다.
그렇게 나는 셔츠를 걸치곤 사은품으로 함께 왔지만 한 번도 발라 본 적 없는 비비크림―혹여나 발랐다가 여드름이 더 심해질까 봐 발라 보지 못했다―까지 찍어 바르고, 향수―이것 또한 사은품―까지 뿌리곤 은색의 메탈 시계―이것까지도 사은품―를 손목에 휘감았다.
“어라? 나도, 조금…… 괜찮아 보이려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제법 괜찮아 보였다. 나는 인터넷까지 찾아가며 매만진 머리 모양이 괜찮아 보이는 것에 흡족했고, 셔츠가 헐렁하지 않고 딱 맞는 것에 만족했으며, 바지와 제법 괜찮게 어울리는 것에도 만족했고,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보이는 은색 메탈시계도 잘 어울리는 것에 뿌듯해졌으며, 비비크림을 바르자 내 피부가 평소보다 훨씬 괜찮아 보인다는 것에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이, 이 정도면 여드름 흉터가 남들보다 좀 더 있긴 하지만 혐오감까지는 주지 않는 일반인 정도는 되잖아!”
물론 백옥같이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혐오감까지는 안 줄 거 같았다. 이럴 수가, 화장품보다 사은품이 더 쓸모가 있다니! 앞으로도 화장품을 사서 사은품을 많이 받아야겠어!
“흐흐흐흐, 아까 샤워하면서 얼굴의 여드름을 다 짜 버려서 얼굴이 퉁퉁 붓긴 했었지만 얼음찜질로 붓기도 가라앉았고, 비비크림도 상당히 훌륭해. 그런데 몇 시지?”
핸드폰으로 7시 40분에 알람을 맞춰 놓았기 때문에 시계도 안 보고 열중하고 있던 나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알람이 안 울리니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돌려 벽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 2분.
“아, 뭐야. 아직도 7시 2분밖에 안 됐…… 어라?”
내가 시간을 달리는 소년이 아닌 이상 지금은 7시 2분이면 안 된다. 내가 아까 옷을 고르기 전 시간이 7시 2분이었으니, 3분이든 4분이든 시간이 흘렀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저 시계, 초침이 움직이고 있지 않다!
“세, 세상의 시간이 멈춘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도 알람은 안 울렸으니 7시 40분은 안 됐…….
“핸드폰이 꺼져 있잖아!”
오, 하느님. 그럼 지금은 몇 시입니까.
손목시계는 안 쓴 지 오래되었고, 시간도 안 맞춰 놓은 거라 소용이 없었다. 나는 핸드폰에 재빨리 배터리 잭을 연결하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게이지 바를 채우며 올라가는 파란색 선이 오늘따라 굼벵이 같은 게 내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켜, 켜졌다!”
[9시 13분]
“끼아아아아악!”
덜컹― 쾅!
나는 비명과 함께 집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늦었다. 늦었다. 1시간 13분이나 늦었다! 핸드폰을 보니 미영이에게 온 문자 메시지가 다섯 통이나 있었다.
[올 거지? ^^]
[일찍 와♬]
[좀 늦는 거니?]
[철수야, 오늘 못 와?]
[사정이 있나 보다. 괜한 부탁해서 미안해. 다음부터 이런 일 없도록 할게.]
마지막 문자에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영아, 날 기다렸구나. 나는 나쁜 놈이야. 미영이를 기다리게 하다니! 나는 가슴으로 울부짖으며 볼트 뺨치는 속도로 아약스로 날아갔다. 대기가 벽처럼 단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음속에 가까워지는 건가. 돌파하겠어. 돌파한다. 돌파하고 말겠…….
“미친 생각하지 말고 다리에 힘이나 줘!”
나는 현실도피를 하려는 상념을 꽉 붙잡으며 아약스로 뛰어갔다. 아약스는 학교 근처이고 내 방에서 10분 정도 거리라, 뛰니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콕콕 찍어 내며 숨을 골랐다.
“후욱, 후욱, 다, 다 왔다.”
막상 다 오고 보니 뛰어 들어가질 못하겠다. 어색하기도 하고, 애들도 다 와 있을 텐데 하는 두려움이 왈칵 밀려와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건물 입구에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때 건물 안쪽에서 또각거리는 계단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우리 학과 여자애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를 피해 숨어 버렸다. 건물 옆으로 가 벽에 짝 달라붙은 나는 도대체 왜 숨는 거냐고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나서지 못해 여자애들 얘기를 훔쳐 듣는 형색이 되고 말았다.
“야, 결국 안 왔지?”
“아, 그 여드름?”
“푸하하, 그게 여드름이냐, 종기지. 아니, 피부암 같은 거일 수도 있겠다. 아, 나 불 좀.”
담배를 피우는지 연기가 내가 있는 벽으로까지 흘러왔다. 또각거리는 소리 때문에 여자애들만 있는지 알았더니 사내 녀석들도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연기와 함께 흘러나오는 얘기를 들어 보니 내 얘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