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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Part 2 자살 여행 (2)
“놀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자살하기에 적당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지.”
사진으로 본 자살바위는 과연 사진으로만 봐도 모골이 송연했다. 좀 구경을 해 추억을 많이 남기고 진짜로 죽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안내서 하나를 손에 쥐고 태종대를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태종대 구경하는 법]
커다란 안내판으로 태종대 지도와 함께 구경하는 루트가 나와 있었다. 이걸 보고 있는 이곳이 현 위치이니까 여기가 유람선 안내소인 것이다.
“유람선…….”
내가 배를 타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은 안 나고, 마지막으로 유람선을 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유람선을 타면 자살바위도 보인다고 하니 잘된 셈이다.
끼익―
마침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서 있었다. 버스는 공짜라고 한다. 간이 건물에서 기다리다가 사람이 좀 차면 선착장으로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더 안 기다리고 출발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를 비롯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몇 분과 불륜으로 보이는―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썩었나?―중년 남녀 한 쌍과 그 밖에 젊은 남녀들이 쌍쌍으로 버스에 탑승했다.
나는 역시나 뒷자리로 향했다. 그때, 나 말고도 뒷자리로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간이 건물에서는 못 본 사람이었다. 흰색 원피스에 밀짚으로 만들고 리본으로 장식한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였는데, 굉장한 미인이었다.
‘미영이만큼 예쁘다.’
저 여자도 내숭 백 단이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향했다. 그 여자도 반대쪽 창가석에 앉았는데, 아무리 시선을 안 주려고 해도 너무 미인이라서 자꾸 힐끔힐끔 시선이 갔다.
덜컹―
쿵―
“아얏!”
버스가 뭐에 걸렸는지 덜컹하고 울렸다. 나는 가방을 붙들다가 미처 보호하지 못한 머리통을 붙잡고 고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아파 죽겠네.
“풋, 푸후훗―”
그 모습을 본 그 밀짚모자 여자가 웃음을 흘렸다. 아파 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웃는 거야? 역시 예쁜 여자들은 안 되겠다.
“으으, 아파.”
그나저나 혹 나겠네, 이거. 어차피 죽을 거긴 하지만 아픈 건 싫다.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날 힐끔힐끔거리며 킥킥대는 여자를 살짝 흘겨보고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끼익―
마침내 버스가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했고, 나는 가방을 챙겨 그 여자보다 먼저 버스를 빠져나왔다.
“아무튼 이상한 여자로군.”
그때였다.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저씨, 이거 놓고 내렸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그 밀짚모자 여자였다. 돌아보니 그 여자가 내 지갑을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뒷주머니가 허전하다.
“내 지갑!”
“예, 누가 내 거래요? 아저씨?”
상당히 불량한 말투. 목소리는 참 예쁘고 듣기 좋았는데 말투가 몹시 불량하고 껄렁했다. 게다가 아저씨라니!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면서!
“아, 아저씨 아닌데요. 저, 스무 살밖에…… 그리고 나보다 나이 훨씬 많아 보이는데요!”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반격이었지만 죽는 마당에 뭐가 무서운가. 게다가 아저씨라는 말은 몹시 모욕적이었다. 이 여드름을 보라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대로 보여 주는 핫 아이템이 내 얼굴에 수천 개나 박혀 있는데 아저씨라니. 아, 말하고 보니 비참하군.
“음, 그래? 그럼 반말하지 뭐. 아무튼 지갑 찾아 줬으니까 보상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네?”
나의 반문에 그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보상해 달라고, 보상.”
뭐, 이런 뻔뻔한 여자가 다 있나. 지갑 찾아 준 건 참 고맙지만 자기 입으로 보상을 해 달라니. 하지만 그 여자의 예쁜 얼굴과 당당한 태도에서 나오는 기이한 박력에 난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벙한 표정으로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어, 어떻게 보상하면 되는데요.”
“오, 통이 크구나! 그럼 나 유람선비 내줘.”
“아, 뭐…… 알겠어요.”
아주 기회주의자가 따로 없구나. 나는 지갑을 열어 대인으로 표를 두 장 샀다. 한 장당 만 이천 원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실제론 만 원만 받았다. 표를 건네주니 고마운 기색은커녕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드는 이상한 여자, 그런데 밉지가 않다.
‘에휴―’
그래도 내숭 떠는 것보다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게 마음은 편했다. 솔직한 게 차라리 낫다. 괜히 숨기는 것보다는.
“그런데 너 여드름 장난 아니구나? 으으, 좀 씻어라, 씻어.”
아니, 취소. 이건 솔직한 걸 넘어서 무례한 거다.
“후우, 피부 깨끗해서 좋겠수다.”
“훗, 당연하지. 얼마나 쳐 바르는데.”
“저도 쳐 바르는 건 만만치 않은데요.”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바로 유전자의 차이란 거야.”
아주 잘나셨군, 잘나셨어. 나는 배알이 꼴려서 서둘러 승선증을 내주고, 그럼 이만 하고는 그녀와 떨어진 곳으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야, 어디 가!”
“왜요! 보상은 끝났잖아요!”
내 말에 그녀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여기서 아는 사람 너밖에 없단 말이야.”
“알긴 뭘 알아요! 딴 데 끼면 되잖아요!”
내가 소리치자 그녀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 다 쌍쌍이잖아! 어딜 껴! 너도 혼자 왔고 나도 혼자 왔는데 좀 같이 다니면 안 되냐?”
“내 얼굴 보고도 그래요? 나랑 같이 다니면 안 창피해요?”
그 말에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왜 창피하냐? 오히려 내가 부각되어서 좋지. 미녀와 야수 콘셉트라는 거야. 모르냐? 예쁜 애들은 일부러 못생긴 애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
무뢰한도 이런 무뢰한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녀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 약간, 아주 약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말이야. 저기 아줌마랑 아저씨, 네가 보기에도 불륜 같지?”
그녀가 중년 남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조금.”
그녀의 손가락질을 눈치 챘는지 중년 남녀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상당히 매서워 우리는 딴청을 피우며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 진짜 대책 없는 여자 같다. 그때 그녀가 딴청을 피우며 속삭였다.
“불륜이 분명해. 이건 백 프로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
잠시 후, 유람선에 탑승한 나와 그녀는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둘 다 창가 쪽에 앉겠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마주 보는 자리로 옮긴 것이었다.
출렁― 출렁―
배가 물 위에 떠 출렁거리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그렇게 창밖을 보다가 그녀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고, 진짜 티브이에서나 볼 법한 미인이었다. 입만 안 열면 진짜 세상 남자 누구라도 홀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외모였다.
‘이런 여자가 왜 나한테 말을 걸었을까.’
동정인가? 아니면 정말 미녀와 야수 효과를 노린 걸까?
사실은 나를 괜찮게 봐 준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후보로 올리지 않았다. 너무 희박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없는 거나 다름없는. 그래도 그녀가 말한 대로 두 번째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왜 자꾸 훔쳐보냐? 보려면 제대로 봐라. 본다고 안 닳는다.”
그녀는 툭 내뱉으며 씩 웃었다.
“왜, 은밀한 곳도 보고 싶어? 음흉한 놈.”
아, 저 입. 진짜.
“누가 보고 싶대요!”
“뭐, 인마? 웬만한 남자들 다 나 한 번 보면 뻑 가서 꽃 바치고, 또 선물을 얼마나 바치는 줄 알아? 나 한번 벗겨 보려고 목매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 제발 입 좀 닫으면 안 돼요? 사람들 다 보잖아요!”
저 여자는 껍데기만 여자고 속은 여자가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창피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창피해져 본 게 얼마만인가.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창밖으로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하네.
“왜? 내가 웃기냐?”
“말시키지 마요. 창피해 죽겠네.”
“흥, 아까는 지 때문에 창피해할까 봐 걱정이더니.”
난 그 말에 왠지 가슴이 찡했다. 혹시 이 사람, 내가 신경 쓸까 봐 일부러?
“쯧쯧, 근데 얼굴 좀 돌려라. 내가 비위는 좋은데 넌 못 참겠다. 너 진짜 여드름 장난 아니다.”
푹―
아, 저 여자, 진짜. 아,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저 여자는 무신경하고 생각나는 걸 그대로 막 뱉는 대책 없는 성격일 뿐이다. 그런 배려가 있을 리 없다. 괜히 감동받을 뻔했네.
“알았으니까 누나도 입 닫아요.”
“싫은데?”
“쳇.”
“야, 그러지 말고 바람이나 쐬러 갑판으로 올라가자.”
―지금 여러분께서 보고 계신 곳은 병풍바위로 바위가 병풍처럼…….
여객선 저편으로 정말 병풍 같은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는데, 배의 아저씨들이 저기서 참돔이나 부시리가 잘 잡힌다며 입맛을 다시는 게 보였다. 잘 보니 선착장이랑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 참돔 먹고 싶다……. 야, 지갑 보상으로 참돔을 사 줄 생각은…….”
“그럴 돈 없어요.”
“구두쇠 같으니.”
나는 아저씨들이 하는 얘길 듣고 헛소리를 하려는 그녀의 입을 막으며 바다 내음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
크게 숨을 내뱉는 날 보며 그녀가 물었다.
“야,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아, 저는 김철수요.”
“흔한 김 씨, 이 씨, 박 씨 중에서도 제일 흔한 김씨에, 이름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 철수냐?”
내 콤플렉스를 건드리다니, 으으.
“누나는 이름이 뭔데요?”
“모, 몰라도 돼.”
그녀는 웃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답지 않게 대답을 회피했다. 뭐지, 무슨 웃기는 이름이길래?
“아, 뭔데요! 나도 얘기해 줬잖아요. 치사하게 그럴 거예요? 같이 다니면서 이름도 모르는 건 이상하잖아요.”
나는 궁금해져서 그녀를 졸라 댔다. 이렇게 된 이상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씨, 알았어! 그게 내 이름은…… 박영희다. 박영희, 됐냐?”
영희?
“흔한 김 씨, 이 씨, 박 씨 중에 박 씨에, 이름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 영희?”
“그, 그래.”
얼굴이 붉어진 그녀의 모습은 아찔할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난 고개를 슬쩍 돌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면서 날 놀린 거예요?”
“흥, 나도 맨날 놀림을 받았으니, 놀릴 상대가 생겨서 좋아서 그랬다, 왜.”
“아주 웃기시네요.”
“쳇, 그래도 이상한 이름은 아니잖아.”
“누가 뭐래요?”
“쳇쳇쳇.”
영희 누나의 모습에 내 입가에 슬쩍 웃음이 떠올랐다.
배는 흐르고 흘러 다음 코스인 전망대와 자살바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멀리서 본 자살바위는 정말 떨어지면 백 프로 죽겠구나 싶은 모습이었다. 내 여행의 종착지. 저곳에서 난 이 혐오스러웠던 인생을 마치고, 엄마에게 인생을 돌려줄 것이다.
“야, 저게 자살바위래. 알아?”
“아, 네.”
“저게 말이지. 전에 한국전쟁 시기에 부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피난했던 피난민들이 결국 가족을 못 만나 저기서 많이 자살을 했대. 그 뒤로도 계속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해서 아예 고유명칭이 자살바위가 되어 버렸대.”
“아, 네.”
잘 알고 있네.
난 멀어지는 자살바위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영희 누나 덕분에 약간 들떴던 마음이 자살바위를 보곤 가라앉았다.
“나, 좀 속이 울렁거려서 안에 들어가 있을게요.”
“응? 아, 그래? 사내 녀석이 뱃멀미나 하고. 토하고 싶으면 말해. 내가 등 두드려 줄게.”
“괜찮아요. 누나는 더 구경하세요. 괜찮아지면 나올게요.”
“아, 그래.”
나는 그러곤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가방을 베개 삼아 얼굴을 파묻었다. 그사이 배는 거북바위와 태종바위, 신선바위, 망부석을 지나 영도등대에 멈춰 섰다. 여기서 사람들을 또 한 번 태워 가는 모양이었다.
“야, 멀미 심하냐? 잠까지 자고.”
어느새 배 안으로 들어온 누나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내 가라앉은 기분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괜히 분위기 망쳐 놓지 않을 생각으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괜찮아요. 아우, 배 너무 오랜만에 탔나 봐요. 그런데 여기서 내리는 사람들도 있네요?”
“아, 몰라서 그래. 쯧쯧, 다 돌고 와서 여기서 또 내려주는데. 그때 내리면 되는데.”
“아, 그래요?”
“그래. 그리고 우리 내리자.”
그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왜요?”
“너 멀미한다며.”
그러곤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사실 난 멀미는커녕 멀쩡하기만 했고, 나 때문에 누나도 내리게 되는 게 미안했지만, 손으로 전해지는 누나의 온기에 못 이기는 척 그대로 유람선에서 내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