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9화

Part 3 아르바이트 (4)


“뭐 하고 있는 거야! 밥 안 먹을 거냐!”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빽 소리를 지르셨다. 나, 날 부른 건가?
“네, 넷! 가, 갑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 기쁜 마음과 함께 큰 소리로 대답하며 마루로 뛰어갔다. 이미 머릿속에서 삼각김밥이나 겸상의 불편함에 대한 생각 같은 건 훌쩍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그저 저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기색을 보여도 밥은 먹여 줄 생각을 했다는 게 어딘가.
‘의외로 그냥 표현을 잘 못 하는 할아버지일지도 몰라.’
나는 할아버지가 흥헤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루로 올라갔다.
“야, 철수! 밥상 가져가!”
“아, 응!”
집 안에서 영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크게 대답하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겉으로는 전통 한옥처럼 보였지만, 안쪽은 일반 가정집처럼 개조된 개량 한옥이었다. 안쪽을 보니 일반 가정집처럼 거실과 방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마루가 있다는 부분이 조금 다르다고 할까. 그 외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부엌 겸 거실로 문을 열자마자 앞에 싱크대가 보였는데, 거기서 영희가 앞치마를 한 채로 밥상 앞에 서 있었다.
“자, 오늘은 박영희 특제 김치찌개야.”
과연 부글부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는 제법 맛있어 보였다. 한입 크기로 썰려 있는 돼지고기도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말이다.
“나 아침에 김치찌개 먹고 왔는데.”
“굶고 싶어?”
“그럴 리가.”
나는 웃으며 밥상을 들어 마루로 날랐다.
그리고 불편하고 불편한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달그락 달그락―
우물우물―
꿀꺽―
아, 체할 것 같아.
지금 나는 아까 마루로 뛰어오기 전 했던 그 생각들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밥이 입에 들어와도 맛이 느껴지지 않고, 시원한 마루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도 식은땀이 흘렀다.
‘제, 제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지 말아 주세요.’
할아버지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아까부터 식사를 하시면서도 날 힐끔힐끔 보며 못마땅한 모습을 보이셨는데, 지금은 못마땅함의 수위를 넘어 가히 원수와 겸상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인 것이다.
“왜 그래, 맛이 없어, 철수야?”
그리고 이 상황을 초래한 데에는 나 자신의 문제보다는 이 악랄한 계집애, 영희의 공이 몹시 컸다.
“자, 이거 먹어 봐. 내가 특별히 만든 계란말이야. 자, 아앙∼”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영희야. 흑흑흑.
지금의 나를 누가 본다면 부러운 녀석이라고 노려볼 게 분명하다. 절세미녀임이 분명한 영희가 내 곁에 착 달라붙어 젓가락으로 입에 이것저것 먹을 것을 넣어 주고 있는 모습은,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닭살커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 내가 먹을게. 제발.”
“왜, 내가 먹여 주는 게 싫어? 싫구나? 내가 싫은 거야, 흑흑.”
이 가증스러운 계집애는 내가 할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리는 꼴이 재밌는지 아까부터 이 짓을 반복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 친구를 끔찍하게 챙기는 팔불출 여자 친구의 모습이지만 눈을 보면 안다. 영희는 이 불편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도깨비다, 이 계집애는 도깨비야. 흐흐흑.’
영희가 이럴수록 할아버지의 눈초리는 매서워지고, 내 등은 이미 푹 젖어서 옷 색깔이 다 변해 있는 상태였다. 이러다 탈수증상으로 쓰러지겠다. 물, 물이 어디 있지, 물…….
“저, 저기 물 좀…….”
“내가 싫다니, 나 그냥 죽어 버릴래. 흑흑.”
저, 저 가증스러운……!
번쩍―
할아버지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폭사됐다.
‘허, 허어헉. 저, 저건 살인자의 눈이야.’
나는 바들바들 떨며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아, 아앙∼”
“어이구, 잘한다. 아앙∼”
으흐흑, 행복하구나. 젠장. 너무 행복해서 그런가, 눈물이 날 것 같아.
‘나 잘 해낼 수 있을까?’

오후에도 할아버지의 냉대는 계속되었다.
오전에는 그나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라도 있어서 말상대도 하고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할 일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오후가 되니 할 일도 없고 눈치만 보는 신세가 된 것이다.
‘뭐라도 해야 되는데.’
나는 눈치를 보다가 할아버지가 한약방 뒤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 이럴 게 아니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워야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할아버지가 하는 일 중에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모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하게 되면 할아버지한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고 인정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엇.”
할아버지는 커다란 나무 상자 같은 걸 꺼내서 들고 오고 계셨는데, 체구가 워낙 작달막하신 할아버지셔서 나무 상자가 엄청 커 보였다. 나는 기회다 싶어 할아버지께 달려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나는 그 말과 함께 할아버지의 손에서 상자를 빼앗듯 들었다.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짐을 들어서 날라 주면 바로 말은 안 해도 고마운 마음이 생겨서…… 어엇?
쿵―
상자는 무거웠다.
체구가 자그맣고 백삼십이나 먹은 할아버지가 손쉽게 들고 오는 짐이라 가벼울 줄 알았는데, 상자는 상당히 무거웠고 가볍게 빼앗아 들려고 했던 나는 상자를 그대로 놓쳐 버렸다.
“뭐하는 게냐!”
할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내 앞을 가로막으며 상자를 빼앗으셨다.
“쓸데없는 짓을.”
푹―
할아버지의 못마땅한 중얼거림이 내 가슴에 푹 박혔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낯이 없었다. 그래도 난 도와 드리려고 한 건데. 죄송스러운 마음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이 불쑥 샘솟았다. 나라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렇게 화를 낼 건 또 뭐란 말인가.
“후우―”
그렇다고 할아버지께 항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나는 서운함을 속으로 삭이면서 바로 한약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잠시 후가 돼서야 한약방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한약방으로 들어가자 금세 또 어딜 나가셨는지 할아버지는 없고 손님이 와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꼬마아이를 데리고 온 아주머니였는데, 아주머니보다는 꼬마아이가 손님인 모양이었다.
“아, 어서 오세요!”
나는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으로 손님에게 다가갔다.
“저기, 애 침을 맞게 하려고 왔, 어머나!”
아주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서며 말하다가 날 보더니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지?
“왜 그러시는지…….”
“아, 아니에요.”
아줌마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눈만 꿈뻑거리고 있는데,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가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괴물이다! 괴물! 엄마, 괴물이야!”
괴물? 아…… 그렇지.
순간 잊고 있었다. 내 처지를 말이다. 여드름투성이의 괴물로밖에 안 보이는 내 외모가 노망난 노인네들이 잘생겼다고 치켜세우는 바람에 정말 괜찮은 줄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사실 난 여드름만 잔뜩 난 괴물인데 말이다.
“저, 저기, 애가 버릇이 없어서. 죄, 죄송해요. 다음에 올게요.”
“엄마, 괴물 맞지? 그렇지?”
천진한 말로 내 가슴에 칼을 꽂아 대는 어린아이의 입을 막으며 아줌마는 황급히 한약방을 빠져나갔다. 아, 내가 손님 하나를 쫓아내 버린 건가. 그때, 약제실 쪽에 난 다른 문으로 들어온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 나는 그 눈이 손님을 쫓아 버린 나를 향한 추궁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스윽―
나는 할아버지의 눈을 피하며 돌아섰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젠장.’

안 끝날 것 같은 하루가 끝나고, 나는 5시 40분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
털썩―
나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털썩 쓰러져 신음을 흘렸다.
“피곤해.”
아, 못해 먹겠다. 제대로 알려 주는 것도 없고, 시키는 것도 없고, 못마땅한 얼굴로 눈치만 주고, 뭐가 불만인 건지 얘기도 안 해 주지 않는가. 게다가 영희 이 자식도 장난만 잔뜩 쳐 대고 말이다. 끌어들였으면 제대로 도와 달란 말이야.
뭐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하루 종일 잔뜩 긴장해 있었더니 정신적인 피로도가 상당했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불만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긴장해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긴장이 풀리며 불만을 토해 내자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진이 쭉 빠지는 게, 이런 걸 한 달은커녕 한 주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둬 버릴까.’
내가 계속 있는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괜히 짐만 될 것 같기도 하다.
‘엄마, 괴물이야, 괴물…….’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아까 그 꼬마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결국 오후에 온 손님은 내가 쫓아 버린 그 아줌마와 함께 온 꼬마 손님밖에 없었다. 오늘 보니까 손님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영희도 나 때문에 처지가 곤란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할아버지도 날 싫어하는 것 같고 말이다. 내가 그만둬 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끼익―
내가 그만둬야 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있을 때, 문이 스르륵 열리며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들, 돈 많이 벌고 왔어?”
씨익 어색한 웃음을 짓는 엄마. 오늘 일이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엄마는 내 표정을 보더니 살짝 눈치를 보며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힘들지? 힘들면 그냥 집에서 쉬어도 돼.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학생이니까 집에서 공부를 해도 되고. 혹시 학비 같은 거 걱정돼서 알바하려고 하는 거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엄마 이래 봬도 능력 있는 아줌마다? 걱정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알았지?”
엄마는 내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걸 알았는지 애써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괜히 내가 엄마 눈치를 봐서 그만두고 싶어도 못 그만두는 게 아닐까 오히려 날 배려하는 것이다. 엄마는 날 먹여 살리려고 등골이 휘도록 일하는데 나는 고작 좀 불편하다고,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고 불만만 토해 놓고 자기합리화하면서 하루 만에 그만두려는 꼴이라니.
‘창피하다.’
아까 할아버지의 싸늘한 눈초리와 마주했을 때보다 더 큰, 나약한 자신에 대해 창피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후우―
나는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아냐! 재밌어! 처음 일해 보는데, 한약방이라서 그런지? 한약 냄새가 구수한 게. 아, 맞다. 그 할아버지 연세가 130살이시래. 신기하지?”
“어머, 정말? 우와, 그 나이에도 계속 일하고 계신 거야?”
“응, 게다가 거기 오는 손님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있잖아? 그분들 중에는 백삼십보다 더 나이 많은 할머니도 있다니까? 엄마도 언제 한번 침 맞으러 와. 그 한약방 다니면 오래 살 거 같아.”
“어머, 진짜 가야겠다.”
엄마는 내 밝은 모습에 환히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셨다. 그래, 엄마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다면, 내 걱정만 하는 엄마가 나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면, 나로 인해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면.
‘그래, 열심히 해 보자.’
내 안에서 어떤 결심 같은 게 생겨났다.
‘내쫓을 때까지는 내 발로는 안 나갈 거야.’
날 계속 못마땅하게 보는 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끝까지 버티겠다. 그리고 언젠가 못마땅한 시선도 꼭 바꾸고 말겠다. 나가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도망가지 않겠어. 내게 그런 오기가 샘솟았다.
“아들, 그럼 쉬어. 아들 파이팅!”
엄마는 웃으며 방문을 나서셨다. 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어 댔다.
우우우웅―
핸드폰을 보자 영희에게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철수! 오늘 진짜 고생했어! 할아버지가 좀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너 진짜 잘하고 있어. 내일도 파이팅!
“후우.”
그래, 김철수.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