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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Part 4 사건 (1)
그 뒤로 며칠이 지났다.
이 한약방은 무슨 수익으로 운영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장사가 안 됐다. 이러다간 내 알바비보다 할아버지가 버는 수익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손님이라곤 그 살아 있는 귀신에 가까운 평균 연령 130세 장수 군단뿐이니 말이다. 지금껏 장수 군단 외 손님이 온 건 첫날에 아줌마와 함께 온 아이뿐이었으니, 내가 이 한약방에서 아주 보기 드문 일을 첫날에 겪은 것이다. 게다가 장수 군단 분들이 매일 오긴 하지만 돈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무슨 마실이라도 나왔다가 온 김에 침이나 맞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 시간당 얼마를 받는다는 거지?’
게다가 나는 이게 생애 첫 알바고 거의 영희의 강요로 시작한 알바라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안 가르쳐 주고, 시간당 얼마를 받는지도 모르고, 몇 시간을 일해야 되는지도 몰라서 아침 여덟 시까지 와서 그냥 다섯 시쯤 되면, 저녁을 먹기 전에 퇴근하고 있다.
“끙, 장수 군단한테 재롱떠는 게 내 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며칠 동안 내가 여기서 한 일은 와서 마당 청소, 한약방 청소, 그리고 영희의 요청 등으로 지붕을 고치거나 형광등을 갈고, 마당에 잡초를 뽑고, 화단에 물을 준다. 그러다가 장수 군단이 도착하면 끌려가서 최장수 할머니의 엉덩이 토닥토닥을 당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영희네 집으로 들어가 영희가 차려 주는 점심을 할아버지와 같이 셋이서 먹고, 또 오후엔 오전과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불편하기 짝이 없지.’
첫날의 충격적인 점심식사 이후로 나는 영희에게 거의 사정하다시피 했고, 다행히 나의 리퀘스트는 받아들여져 첫날처럼 영희가 날 골리지는 않지만 가끔 장난기가 발동하면 음식을 떠먹여 주곤 한다. 그럴 때면 차가워지는 할아버지의 눈초리에 나는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으, 생각만 했는데 골치가 아파.”
오늘도 점심을 먹을 생각을 하니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다.
“뭔가 잘못됐어.”
할아버지의 냉대는 아직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 사실 첫날의 나무 상자 사건은 내 자격지심 때문이고, 크게 내게 타박을 주거나 하는 건 아니라 서운한 감정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대로 있다간 점수를 따기는커녕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영희는 넌 뭘 한 거냐며 귀에다 대고 입을 열어 재잘거릴 게 분명하고 말이다. 나는 결국 영희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영희 이 계집애는 어디 있는 거야?”
오늘따라 영희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게 이상했다. 나는 마당 청소를 하다 말고 핸드폰을 꺼내 영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전화기까지 꺼 놓고 뭘 하는 거지.”
오싹―
그런데 그때 괜히 불길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등골을 오싹하게 한 느낌은 금세 사라졌지만 기이한 불안감이 솟는 것이었다. 평소의 밝은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영희는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감정이 불안정한 아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진가.’
하지만 영희를 만나서 나는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희도 날 만나서 안정이 되었다면 좋을 것 같다. 영희의 휘몰아치는 페이스에 휘말려 질질 끌려 다니고 있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소극적인 나를 이끌어 주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하지만 정작 길을 잃고 배회하는 영희에게 나는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해 주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서로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만 의지하고 있었구나.’
결국 나란 놈은 도움만 잔뜩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연락이 안 되는 영희가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가,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영, 영희야?”
한 번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자 이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마음 전체를 뒤덮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영희를 부르다 약방 너머 집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혼자서 집에 들어가 본 적은 없는데……
‘그, 그래도 혹시 영희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섬뜩―
순간 머릿속에 영희가 목을 매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두려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섬뜩한 상상에 나는 순간 이성을 잃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몇 번이나 여기서 점심을 먹었으니 영희의 방이 어딘지 정도는 알고 있다.
순식간에 마루로 뛰어오른 나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거실로 뛰어들어 바로 영희의 방으로 향했다.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방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문 안 닫아! 죽고 싶냐!”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가 상상했던 불길한 전개는 없었다. 영희는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방에 있었다. 영희가 뭘 하고 있었냐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휘익―!
퍽!
“끄억―!”
나는 날아드는 에프킬라에 얼굴을 얻어맞고 신음을 흘리며 문을 닫았다.
“미, 미안!”
다행이다. 다행이야.
얻어맞은 부위가 욱신거리긴 하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아니, 왜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저렇게 밝은 영희가 갑자기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렇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영희의 집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까 느꼈던 섬뜩한 기분이 찌꺼기처럼 남아 쉽사리 사라지질 않았다. 아, 괜히 재수 없는 생각하지 말자.
“운상이 사위 총각! 나 왔어!”
마침 마당으로 나가니 장수 군단 최고령을 자랑하는 박금자 할머니(137세)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며칠간 계속 얼굴을 보고 예뻐해 주셔서 많이 친해진 터라 나는 반갑게 할머니를 맞았다. 그리고 그러면서 내가 느꼈던 불안한 기분을 잊고 말았다.
“후우, 드디어 내일이 주말인가. 흐흐흐.”
드디어 고대하던 주말이다. 아르바이트를 애매하게 토요일 날 시작해서 어물어물하다가 지난주 토요일과 일요일은 그냥 일을 했지만―일했다고 하기는 민망하지만 출근은 했다.―이번 주는 쉬어야겠다, 아니, 쉬고 말겠다! 집에서 하루 종일 드러누워 방바닥과 하나가 되겠어!
‘후우, 나도 숨 좀 돌리자고.’
알바를 시작하고 꿈에 할아버지가 시퍼런 안광을 뿜으며 가끔 나타나서 자다 말고 벌떡 기립한 게 몇 번인지, 하아. 압박감이 심해서 꿈까지 꾸는 것이다. 이렇게 눈치 보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인 지경이다. 힘든 일을 시켜 줘도 좋으니 눈치만 안 줬으면 좋겠다. 에휴.
‘그렇다고 내가 살갑게 다가가서 아양을 떨 성격도 아니니 원.’
애당초 사람 대하는 게 서투른 나다. 박금자 할머니나 영희처럼 먼저 다가와서 편하게 대해 주면 모를까 저렇게 냉대하는데 웃으면서 사바사바할 정도로 넉살이 좋질 못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영희 성격이 참 좋은 것 같다. 날 처음 보면서 이렇게 편하다 못해 친해도 못할 것 같은 소리를 서슴없이 툭툭 뱉어 댔으니 말이다.
“끙, 그나저나 영희는 지금 뭐 하려나.”
아앗, 그, 그게 꼭 영희가 보고 싶어서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냥 요즘 안 보여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뭐, 그렇다는 거지, 그게……. 쩝, 아니 생각해 보면 영희는 나랑 그, 사, 사, 사, 사귀…… 험험, 그런 사이이고 내가 신경 쓰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닌 건데, 아니 이상한 일이 아닌 게 아닌 건가, 아니 이상한 일이 아닌 게 아니라 그게 또 아닌 거…… 크윽…… 나는 여, 영희를…….
“크으, 왜 내 자신에게 또 압박을 당하고 있는 거야.”
나는 제멋대로 뻗쳐 가는 생각을 고개를 털어 날려 버리고, 턱을 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파란 하늘에 뜬 하연 구름을 보고 있자니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싶다.
“으, 월급 안 준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네, 이거.”
어째 약방 안보다 마당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무슨 돌쇠도 아니고 나는 왜 맨날 마당만 쓰는 건지 원. 나는 어깨에 싸리비를 걸치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둥근 구름이 영희를 닮았다.
“야! 일하러 와서 노냐?”
“어? 여, 영희야!”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까 괜한 생각을 해서 그런가, 아니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저 얼굴은 며칠이라도 안 봤다가 보면 적응하기가 상당히 힘든 얼굴인 것이다. 내 얼굴도 그렇긴 하지만 나와는 완전 반대의 이유이다.
“왜 말 더듬어, 또? 오랜만에 보니까 아주 예뻐 죽겠냐?”
띵똥!
하지만 저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여전한 모습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던 심장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60에서 90의 안전 범위를 유지하는 거야, 내 심장아.
“공주병도 병이에요, 아가씨야?”
“헤헹! 공주병은 예쁜‘척’하는 애들보고 하는 말이잖아. 나는‘척’이 아니라 척 보면 예쁜 걸 아는데 내가 왜 공주병이냐!”
“그래, 너 잘났다. 퉤.”
여전히 뻔뻔하게 잘도 내뱉는구나. 나는 반가운 마음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분 나쁘게 웃지 마. 입 주변의 여드름이 찌그러졌어. 푸하하하, 오랜만에 보니까 적응 안 된다, 푸하하하!”
“너 이토 준지 만화 중에 글리세이드라는 만화 꼭 봐라. 복수해 줄 테니까.”
“뭐야, 그건. 흠, 그런데 너, 혹시…… 이번 주말에 무슨 일 있어?”
“어, 없는데?”
이 계집애가 나한테 무슨 일을 시켜 먹으려고.
혹시 출근하라고 할까 봐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영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야, 데이트할래?”
응?
아나, 귓밥을 파고 왔어야 되는 건데. 헛소리가 들리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잔뜩 후벼 파서 왕건이를 하나씩 꺼내서 방생시킨 뒤, 다시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눈빛을 보냈다.
“으, 여자한테 이런 말을 두 번이나 하게 하다니. 데이트하자고!”
아하하하, 귓밥이 제대로 안 파졌…….
“뭐! 정말로?!”
나는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내 무시무시한 기세에 영희가 놀랐는지 찔끔 물러서며 약간 겁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내가 뭐 하면 안 될 얘기했냐? 데이트에 트라우마 있어?”
“아니! 그, 그럴 리가! 왜냐면 나는 데, 데이트란 것은 책이랑 영화, 드라마 등 미디어를 통해서밖에 접해 본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뿐이라서, 그러니까…….”
“으악! 남자답게 똑바로 말하란 말이야! 할 거야, 말 거야!”
“하, 할게! 하게 해 줘! 하고 말겠어!”
기념할 만한 첫 데이트! 살다 보니 내게도 이런 일이?
아니, 영희랑은 사귀는 사이니까 당연한 거긴 한데, 그, 그래도 너무 기쁘다!
“그럼 내일 상당공원에서 봐∼ 11시까지!”
“으응!”
영희는 손을 흔들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것을 입을 헤 벌린 모습으로 계속 지켜보았다.
“내, 내 인생에도 봄날이 왔구나!”
봄날이 온 건 일주일도 넘었지만 초봄은 아직 춥다. 이제 내게 온 것은 완연한 봄인 것이다. 아, 따뜻하구나, 따뜻해. 이런 게 행복인 건가요. 안 죽길 잘했어!
“에잉, 호랑말코 같은 자식이 입이 떡 벌어져서 신이 났구나!”
“앗, 그, 아, 안녕하세요.”
운상 할아버지 다음으로 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현태 할아버지다. 125세를 자랑하는 고령으로, 박금자 할머니는 띠동갑이라며 아주 꼬마 취급을 하신다. 사실 나한테 적용을 시켜 보면 8살짜리 정도겠지만, 이미 나이가 세 자리를 넘어간 시점에서 내게는 살아 있는 귀신이나 마찬가지니 실감은 나질 않는다.
“흥, 뭐가 그렇게 신이 났냐? 얘기 좀 해 봐라.”
영희네 할아버지와는 달리 이 할아버지는 심통을 부리면서도 나랑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지 않아 하시는 것 같다. 박금자 할머니가 꼬마 취급을 해서 앙탈―나이 지긋한 분께 이런 표현하면 안 되겠지만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을 부리실 때면 127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깜찍(이라 쓰고‘끔찍’이라 읽는다.)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일까 이 할아버지께는 크게 거리감이 없었다.
“아, 그, 그게.”
또 말하려니 쑥스럽네.
“내, 내일, 여, 영희랑 데, 데, 데이트를 하게 됐어요.”
“엥? 내일? 내일 말이냐?”
현태 할아버지는 이상하게 놀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놀란다면 나랑 데이트라는 시점에서 놀라야 되는 거 아냐? 왜 날짜에 놀라는 거지?
“내일이 왜요, 무슨 일이라도…….”
“내일은 말이야……!”
내일이 무슨 날이길래?
“……커흠, 아무것도 아니다. 영희 녀석, 올해는 괜찮은 건가…….”
아무것도 아니다 이후 말을 작게 말해서 제대로 듣질 못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괜히 찝찝하게 이 영감이. 뉘앙스만 잔뜩 풍기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지만 어차피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긴 힘들 것 같다.
“아무튼 재밌게 놀아라. 낯짝 잘났다고 영희 울리고 딴 여자 꼬시고 그러면 내가 가만 안 둔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제가 그럴 낯짝이 되나요. 할아버지가 눈이 조금만 좋으셨다면 절 보고 기겁을 하셨을 텐데, 하하하핫.”
서글픈 얘기지만 만성이 돼서 괜찮다. 지금 기분도 좋고 말이다.
“뭐야? 내가 눈이 나쁘다는 거냐? 내가 이래 뵈도 대낮에 인공위성이 보이는 사람이야!”
“하하, 아무렴요.”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넉살로 받아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기실로 콜라라도?”
“콜! 뻘건 걸로!”
장수 군단의 막둥이, 유행에 민감한 조현태 할아버지(125세)는 그렇게 짧게 외치곤 한약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는 뒤따라 들어가며 방금 현태 할아버지가 풍겼던 뉘앙스를 떠올려 보았다.
‘영, 찝찝한데. 저 할아버지 괜히 심술부리는 거겠지?’
생각해 보니 저 할아버지, 엊그제 내가 점수를 어찌 따야 되나 중얼거리며 고민하는데 슬쩍 나타나더니 영희네 할아버지가 콜라를 좋아한다고 조언을 해 준 적이 있었다. 해서 편의점까지 날아가서 사 왔더니 영희네 할아버지는 탄산 안 먹는다고 거절하시고, 안 먹을 거면 나 줘요, 성님! 하며 저 할아버지가 홀랑 집어삼킨 기억이 떠올랐다.
“또 개수작이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콜라 내놔, 이눔아.”
‘아무렴.’
역시 할아버지의 개수작이구나.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