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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Part 4 사건 (3)
‘응? 뭐? 너, 질투해? 푸하하…….’
아까 레스토랑에서 영희가 억지로 웃음을 터뜨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 살짝 팔꿈치를 잡던 영희의 손길. 그때 영희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되지?”
영희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떤 얼굴로 영희를 봐야 되지? 미안하다고 싹싹 빌까?
“아아, 젠장, 내가 다 망쳤어.”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털썩 쓰러졌다. 당장이라도 영희한테 뛰어가 사과를 해야겠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만화나 책에서 이런 장면을 보면 그렇게 답답하기 짝이 없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나도 결국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영희 얼굴을 마주치는 게 두려운 것이다. 영희가 날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 두려움에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악화될 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웅―
내가 한참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영희인가?!
나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한 속도로 책상 위의 핸드폰을 낚아채어 메시지함을 열어 보았다. 영희였다. 문자 내용은…….
[……안녕.]
쿵.
순간 현기증이 나며 눈앞이 노래졌다.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방 안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불길한 기분과 상상으로 뒤범벅되어 어지러웠고, 눈앞이 눈물로 일그러져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허억, 헉― 헉―”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계속 뛰었다. 소매로 계속 눈가를 훔치며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영희는 강한 애니까, 설마 그 정도로, 아니, 영희는…….
‘니가 뭘 알아! 어차피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은 없어!’
자살바위에서 영희가 울면서 소리쳤던 말이 떠올랐다.
‘아냐, 제발 생각하지 말자. 제발, 제발.’
쿠당탕탕―
오늘 아르바이트를 자처하는 사내 녀석이 주말이라고 오질 않아 손수 마당을 쓸고 있던 운상은 마당으로 굴러 들어온 괴물체를 험악한 인상으로 노려보았다. 그 괴물체의 정체는 운상의 한약방에 아르바이트생을 자처함과 동시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남자 친구 행세를 하는 떨거지 놈이었다. 이름이 철수라고 했던가? 운상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바닥에 넘어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늘 영희랑 그, 약속이 있지 않았나?”
운상이 말을 건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녀석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다. 영희가 어제 잔뜩 들떠서 운상에게 이게 어울리냐, 저게 어울리냐 하면서 귀찮게 했던 게 생각나서 궁금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옷을 고르다가 늦었다면서 부리나케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운상은 이만저만 못마땅했던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이날에 그렇게 밝은 영희는 오랜만이었지.’
일 년에 한 번인‘오늘’이 다가올수록 급격하게 우울해지는 영희였기에 운상은 조금은 철수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작년만 해도 한 달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던 터라 올해도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못마땅해도 쫓아내지 않고 모른 척을 하고 있던 건데, 어째서 하필‘오늘’ 이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건가. 운상의 뇌리에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 할아버지, 으흐흑, 흐흑―”
덥썩―
갑작스럽게 철수가 운상의 다리를 덥썩 붙잡으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130년 인생, 이런저런 경험을 다 겪었지만 갑자기 다리를 붙잡으며 울기 시작하는 손녀의 자칭 남자 친구를 달래 본 경험은 없었던 운상은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영희와 철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냐.”
운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욱 싸늘했고, 다급했다.
“그, 그게, 흐흑…….”
훌쩍거리느라 제대로 말을 못 잇는 철수를 보자 운상은 순간 짜증이 일었다.
짜악―
철수의 따귀를 올려붙인 운상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철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영희한테 무슨 일 있는 거냐?”
운상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철수는 정신을 차렸는지 얼얼한 얼굴을 붙잡곤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안녕, 안녕이라니? 이게 무슨?
“찾아야 돼요. 영희…… 죽, 죽, 죽을 셈인지도 몰라요! 제발 도와주세요!”
철수가 운상에게 소리쳤다. 운상은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서더니 철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유는 나중에 듣겠다. 영희를 얼른 찾아라. 당장! 나도 뒤따라가겠다.”
그 말에 철수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문을 뛰쳐나갔다.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 운상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콰직―
대나무로 된 싸리비의 대가 수수깡처럼 부서져 반으로 꺾여 버렸다.
“허어, 영희야…….”
그리고 순간 마당에서 운상의 신형이 푹 꺼지듯 사라졌다. 마당엔 허리가 동강난 싸리비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머릿속은 냉정해지고 있었다. 영희네 할아버지를 찾아갈 때까지만 해도 누구한테 의지해야 될지, 불안감만 커져서 말도 제대로 못했지만 영희네 할아버지께 따귀를 맞은 뒤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울면서 매달릴 게 아니라, 찾아야 했다. 영희를.
“젠장,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영희야.”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부디 보길 바라며 문자 메시지를 수십 통이나 보내보았지만 답장은 오질 않았다. 점점 초조함이 커지고, 나는 영희가 혹시 자살을 결심했다면―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어디를 선택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영희에 대해 난 너무 아는 게 없어!’
나는 영희의 남자 친구이면서도 영희에게 너무도 무지했다. 아니, 사실 남자 친구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자신이 없어서였던 것일까, 아니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영희에게 난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 언젠가 또 상처를 받게 될까 봐 깊게 다가가지 못했다. 영희의 겉만 알고 있었다. 영희가 나만큼이나 힘든 걸 알면서도 나 자신을 지키려고 가까이 다가가질 못한 것이다.
‘영희는 계속 내게 다가왔는데.’
포옹, 키스, 데이트……. 영희는 내게 계속 다가왔다. 잘난 거 하나 없는 내게 마음을 써 주었건만 나는 너무 행복하면 나중에 불행해졌을 때, 평소보다 훨씬 괴로울까 봐, 그래서 마음을 열지 못했다.
‘오늘도…….’
사실 그 남자를 보았을 때, 분노를 느꼈었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느꼈었다. 이제 영희와 함께하면서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말이다.
“영희야! 영희야―!!”
혹시 이 근처에 영희가 있을지도 몰라.
난 그런 생각으로 제발 듣기를 바라며 크게 소리치며 동네를 다 돌아다녔다. 아냐, 여기보단 아까 헤어졌었던 그 근처를 찾아보자.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아 타곤 홈플러스 쪽으로 향했다.
‘제발, 영희야…….’
홈플러스로 향하는 택시 안, 나는 불안감에 심하게 다리를 떨면서 어제 마당에서 현태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은 말이야…….’
탁―
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린 나는 또다시 영희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주변을 헤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 주변이라 내 흉측한 얼굴로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영희, 내겐 오직 영희 생각뿐이었다.
“영희야…….”
“철수야, 뭐 하는 거냐?”
영희를 부르고 있는데 눈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늙수그레한 할머니의 목소리,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래다, 요 녀석아. 운상이 녀석한테 몇 번이나 혼나지 않았나? 요 버릇없는 녀석.”
고개를 숙여 보니 박금자 할머니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희를 잃어버렸나?”
할머니의 말에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꿇어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제발, 제발 가르쳐 주세요. 혹시 영희가 갈 만한 곳을 아시나요? 아니, 오늘은 도대체 무슨 날이에요?”
“쯧쯧, 진정 좀 하려무나.”
“영희가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박금자 할머니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느릿느릿 대답하는 모습에 나는 울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내 버릇없는 태도에도 할머니는 부드럽게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걱정하지 마려무나. 눈물도 닦고. 그 얼굴로 영희를 만날 게냐?”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자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오늘은 말이다. 영희의…….”
태산빌딩 옥상.
주위 빌딩과 비교해 보아도 높은 태산빌딩의 옥상에서 긴 머리의 젊은 여자가 홀로 서서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7시를 넘은 시간이건만 길어진 해는 서쪽으로 뉘엿거리면서도 아직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엄마, 아빠…….”
여자는 작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꼬마 아이들이 동전을 넣으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자그마한 놀이기구와 소극장, 매점 등으로 꾸며진 옥상 위 놀이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폐쇄되었는지 놀이기구는 잔뜩 더러워진 채로 녹이 슬어 움직일 것 같지 않았고, 소극장도 허름하고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있었다. 매점으로 보이는 곳은 이미 쓸 만한 물건은 다 철수시키고 터와 뼈대만 남아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철수, 이 나쁜 새끼…….”
여자, 영희는 주변을 둘러보다 입술을 깨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꺼져 있는 핸드폰을 켤까 말까 고민하던 영희는 이내 팔을 늘어뜨리곤 핸드폰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영희의 얼굴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이 바보야. 왜, 왜…… 이 등신…….”
영희는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
철수가 화장실을 갔을 때였다. 아까부터 자꾸 이쪽을 힐끔거리던 느끼하게 생긴 녀석이 철수가 없어지자마자 철수 자리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걸쳤다.
“자리 있거든요?”
당장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나는 고상한 여자니까 좋게 말하기로 했다.
“그 여드름 난 남자 말이에요?”
울컥―
순간 나는 화가 치밀었다. 네가 뭔데 내 남자 친구를…….
“네. 그 여드름 난 남자가 내 남자 친구거든요? 임자 있으니까 얼른 자리로 돌아가세요. 네?”
“안 어울리는데…… 그 남자 돈 많은가 봐요? 당신 같은 여자가 매달릴 정도면?”
“후우, 좋은 말로 할 때 가세요? 저 드라마 많이 봐서 물 끼얹는 거 멋있게 재연할 수 있거든요?”
“얼굴은 예쁜데 성격이 고약하시네요.”
느끼한 자식은 얼굴처럼 느끼한 말투로 능글능글거리며 날 약올려 댔다. 나는 더 이상 못 참겠어서 컵을 움켜잡았다.
덥썩―
낌새를 눈치챘는지 사내 녀석이 컵을 움켜쥔 내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여자가 성질이 급해요? 진짜 끼얹으려고요?”
“내가 말했지? 빨리 꺼져, 이 느끼하게 생긴 자식아!”
“네? 푸하하, 되게 담백하시네요. 내숭도 없고.”
그래, 나 내숭 같은 거 떨 줄 모른다. 어쩌라고.
“그게 너랑 상관있어?”
“남자들은 그렇게 내숭 안 떠는 여자 싫어해요. 오히려 무서워한다고요. 몰랐어요?”
뭐, 무서워한다고?
순간 내가 말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이딴 자식 말에 휘둘리면 안 돼.
부들부들―
난 컵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여자 힘으로 단단히 움켜쥔 남자의 손을 뿌리치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손목이 얼얼해져 왔다.
“이것 좀 놔!”
“안 뿌린다고 하면 놓아 드릴게요.”
“알았으니까!”
“그리고 존댓말도 해 주세요. 우리 친구는 아니잖아요.”
“알겠다구요!”
난 그 말을 하며 컵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남자도 내 손목을 놓았다. 느끼한 남자가 잡은 손목이 뻘겋게 변해 있었다.
“후우, 이제 가 주실래요? 더 이상 얼굴 보고 있기 짜증 나네요.”
“그 여드름쟁이 얼굴보다는 제 얼굴이 나을 텐데요?”
느끼한 자식, 한껏 비웃어 주마.
“네? 푸하하? 뭐라구요?”
내 비웃음에 남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렇게 길게 대화도 했는데, 전화번호 좀 줄래요?”
“미친 소리는 그만하시죠? 빨리 안 가면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예요?”
나는 씩 웃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누르고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남자가 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 능글거렸어도 경찰은 무서운 모양이지? 그렇게 내가 남자를 쫓아내고 있는데 순간 화장실 쪽에서 철수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야, 박영희!”
뭐야, 뭐야?
난 고개를 들어 철수 쪽을 바라보았다. 철수는 뭔가 화가 났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왜 갑자기…… 설마, 지금 오해하는 거야?
“뭐하냐, 너?”
철수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철수의 화난 모습에 깜짝 놀라면서도 조금 기뻤다. 이렇게 화를 낸다는 건 역시 철수가 나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소리나 쳐 대다니, 나는 소리 지를 줄 모르는 줄 알아?
‘남자들은 그렇게 내숭 안 떠는 여자 싫어해요.’
그렇게 맞받아쳐 소리를 치려는 순간 왜 이 느끼한 남자의 말이 떠올랐는지. 나는 처음 생각과 다르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괜히 내숭을 떨려니 저 느끼한 남자 눈치가 살짝 보였다. 철수는 화가 난 얼굴로 그 느끼한 남자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곤 내게 말했다.
“잘해 봐라.”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