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3화

Part 4 사건 (4)


철수의 표정을 본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수가, 철수가 날 버리고 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응? 뭐? 너 질투해? 푸하하.”
난 불안한 마음에 내숭도 다 집어치우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철수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제발 화 풀고 앉으면 안 돼? 철수야, 제발…… 그런 거 아니니까…….
“놔!”
철수가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꺄악!”
뿌리치는 힘에 내 무릎이 테이블을 때렸고, 잔에서 물이 쏟아지며 내 치맛자락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철수는 그대로 가 버렸다. 날 두고 정말 가 버리는 거야? 철수야. 제발 나 혼자 두지 마, 응?
“아…….”
하지만 철수는 그대로 가 버렸다.
내 앞에 있던 남자도 어느새 슬그머니 도망쳐 버렸다. 당장이라도 철수의 뒤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나가기 직전 보았던 철수의 표정이 어른거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가지 말란 말이야. 오늘은…… 내…… 생일이란 말이야.”
……그리고 부모님이 날 데리고 동반자살하려 했던‘그날’이야.

아까 있던 일을 떠올린 영희는 눈물을 닦아 내며 옥상 난간에 섰다. 쓸쓸한 표정을 지은 영희는 빌딩 아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날만 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살짝 입술을 깨문 영희는 뒤돌아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 하지만 영희는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영희가 부모님과 마지막 순간에 함께했던 그 장소였다.
“엄마, 아빠…….”
영희의 눈앞에 부모님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빌딩을 타고 오르는 바람 소리가 환청처럼 영희의 귓가에서 앵앵거렸다.
휘이잉―
“영희야, 함께 가자.”
“우리 가족 셋이 같이 가는 거야. 응? 영희야?”
영희는 눈앞의 난간으로 다가갔다. 영희는 난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난간 위로 올라섰다. 영희는 이 난간 위에 예전에도 한 번 선 적이 있었다.
“나도 갈게요, 엄마, 아빠…….”
영희가 자신의 왼쪽과 오른쪽을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았다. 영희는 마치 양쪽에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듯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계속해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영희의 몸을 아래부터 위로 쓸어 올렸다. 영희는 요동치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려 대자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영희가 난간 위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영희는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때, 옥상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쾅―!
“영희야!”
휘이이이이잉―!!
뒤에서 들려온 큰 소리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영희의 몸이 강풍에 휘청거렸다.

박금자 할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태산빌딩을 찾아냈다. 태산빌딩은 상당한 고층빌딩이었는데, 빌딩주가 부도가 나면서 좀 복잡하게 얽혀서 오랜 시간 법정 싸움을 벌이느라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갈 수도 없고, 빈 채로 덩그러니 서 있는 유령건물 같은 곳이었다.
‘후우,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안 되는군.’
건물 내는 몹시 컴컴했고, 혹시나 해서 가 본 엘리베이터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곤 바로 계단으로 향해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젠장.”
20층이 넘는 건물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쿵쿵 쳐 댔다.
“생일이라고?”
그리고 부모님이 동반자살한 기일?
몰랐다. 영희에겐 정말 중요하고 괴로운 날일 텐데 남자 친구라면서 아무것도 몰랐다. 생일도 모르고, 심지어 소리까지 지르고 가슴만 찢어 놓았다. 숨이 턱턱 막혀 오고 가슴이 답답했지만 계단보다도 자책감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제발, 죽으면 안 돼. 영희야, 제발!’
나는 숨이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힘들다고 발을 멈췄다간 영희가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옥상에 도착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온몸의 공기를 짜내 외쳤다.
“영희야!”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지려는 영희의 모습이었다.

내가 홀린 듯 발을 떼었을 때였다.
“영희야!”
환청인지 모를 철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철수가 있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내게로 달려오는 철수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난 강풍에 휘말려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철수야, 미안해.’
시야가 변하며 철수의 얼굴이 아래로 멀어지고 하늘만 가득 보였다. 난간에 아직 닿아 있는 발에 실린 체중이 가벼워지며 부유감이 느껴졌다. 하늘은 왜 이리 파란 건지. 이렇게 떠나 버리면 철수가 슬퍼해 줄까? 철수야, 철수야…….
“살려 줘! 철수야!”
나는 소리쳤다.
자살하고 있는 주제에, 이 상황에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건 참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수를 보자 살고 싶어졌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철수야!
그리고 하늘로 가득 찼던 내 시야에 철수가 나타났다.
“영희야!”
하지만 난 이미 떨어지고 있었다. 철수는 내 위로 올라와 날 꼭 끌어안았다. 이 상황에서 나는 우습게도 철수가 날 끌어안은 게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철수의 품은 생각보다 넓고 믿음직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철수와 나는 추락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악!”
내 입에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물이 나오며 정신이 들었다. 나 때문에 철수까지 떨어지고 있다. 내가 철수를 죽이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철수야!”
“시끄러워! 이 바보야! 으아아아악!”
철수는 눈을 질끈 감고 나를 품에 더 꽉 안으며 비명을 질러 댔다. 이렇게 급박하고 끔찍한 상황인데 나는 이상하게 기뻤다. 철수가 날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지금 당장 죽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철수와 나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울리고, 우린 떨어졌다.
쿵―
둔중한 충격과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철수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좋아해.”
나도, 나도 좋아해. 철수야.

“늦었군.”
한발 늦게 도착한 운상은 태산빌딩 바로 옆의 빌딩에 떨어진 철수와 영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둘을 멀리서 보고 장력을 발사하여 간신히 땅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옆 빌딩으로 떨어뜨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태산빌딩 옥상과 옆의 빌딩 옥상의 층수 차이는 6층이었다.
“영희를, 네놈이 살렸구나.”
운상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철수는 영희를 품에 안고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영희는 충격으로 기절하였으나 운상의 장력과 철수의 보호로 기절만 했을 뿐 멀쩡했다.
“쿨럭―”
푸아악―
하지만 철수의 상황은 심각했다. 내장이 상했는지 간헐적인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냈는데 피에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운상은 인상을 찌푸리며 철수에게 다가가 영희를 옆으로 눕히고는 요대에서 금침을 꺼내 손에 들었다.
“네놈이 죽으면 영희가 슬퍼한다.”
운상의 손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금침이 철수의 몸에 빼곡히 박혀 들었다. 운상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철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죽게 하지 않겠다.”



Part 5 인생역전 (1)


“으윽―”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이 온몸이 무거웠고,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코끝으로 진한 한약 냄새가 느껴졌다. 한약방인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으윽―”
이상하게 온몸이 무겁고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보니 내 배 위에 영희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 영희도 나도 살아 있구나. 나는 고개를 다시 뒤로 떨구며 영희를 끌어안고 떨어질 때를 떠올렸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나랑 영희를 떠밀었어.’
바람 같기도 하고, 열기 같기도 한 이상한 기운이 떠밀었던 덕분에 나랑 영희는 떨어지면 곤죽이 될 게 뻔한 30층 아래의 도로가 아니라 옆 건물 옥상으로 떨어졌다. 떨어졌을 때 온몸이 찌그러지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살아남은 것 같다.
‘목말라.’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목이 쩍쩍 갈라지는 것처럼 완전히 입안이 말라 버린 걸 보아 제법 누워 있던 것 같다. 엄마가 걱정하겠어. 나는 영희를 깨지 않게 치우려고 자유로운 왼쪽 손을 들어 올렸…… 어라?
“내 왼쪽 손이 어디 갔지?”
왼쪽 손이 느껴지질 않았다. 서, 설마, 내 왼쪽 손이 잘렸다던가……!
두려움에 고개를 힘겹게 들어 보니 왼쪽 손은 다행히도 내 왼쪽에 잘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왼쪽 손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 손도, 왼쪽 다리, 오른쪽 발도, 아니 목 아래로 몸 전체가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목만 남은 것처럼.
“허억, 허억, 이, 이게 뭐지.”
깨어났을 때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고 느꼈던 것은 사실 몸 전체의 감각이 느껴지질 않아서였던 것 같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여, 영희야.”
나는 온몸을 까딱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내 몸에 고개를 파묻고 잠들어 있는 영희를 불러 보았다.
“영희야…….”
하지만 깊이 잠든 듯 영희는 깨질 않았다. 순간 나는 두려움이 턱 끝까지 밀려와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 으악, 으으, 으아아아아악!”
“으음? 철수야! 무슨 일이야?!”
내 비명 소리에 깨어난 영희가 날 보고 놀라 소리쳤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나, 나, 몸이 안 움직여져.”
“뭐? 무, 무슨 소리야, 철수야. 응? 아파서 그런 거 아냐? 나, 나 때문에 다쳐서, 미안해, 미안해…….”
영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영희도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희가 불안해하는 걸 보자 오히려 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그렇게 높은 옥상 위에서 떨어졌잖아.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억지로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파? 조, 조금만 참아! 얼른 할아버지를 모셔 올게!”
영희는 내가 눈을 질끈 감자, 괴로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모시러 뛰어갔다.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로 손끝과 발끝을 움직여 보려고 힘을 주었다.
‘안 느껴져…….’
마치 팔을 몸 아래 깔고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감각도 느껴지질 않고, 목 아래로는 움직여지질 않았다. 공포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몸이 안 움직여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걱정이 아니라 몸이 안 움직이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순수한 공포였다. 막연하고 근원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공포심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져 나와 입으로 토해졌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평균 연령 130세, 장수 군단이 평소와 다른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가운데에 운상이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은 채 앉아 있었고, 바로 곁에 최고령자 박금자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노인들도 표정들이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운상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다른 노인들을 주욱 살핀 박금자 할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껏 우리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그 말에 노인들이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운상의 표정은 자책과 후회로 몹시 괴로워 보였다.
“운상, 아니 수장이여. 그동안 영희를 지키느라 고생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누님…….”
수장이라 불린 운상이 충혈된 눈으로 박금자 할머니를 바라보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모습을 끝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조현태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평소의 가볍고 장난기 짙은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모습이었다. 현태의 말에 박금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