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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Part 5 인생역전 (2)
“수장님, 1장로님, 그리고 다른 장로님들. 지금껏 저희는 영희, 아니‘문’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영희의 감정이나 외로움 등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전의 일 또한.”
모두들 말은 안 했지만 조현태 할아버지, 7장로의 말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영희의 말을 들어 본 결과, 아주 최근에 태종대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모두 부덕한 제 잘못입니다.”
운상의 입이 열리자 모든 장로들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금자 할머니, 1장로가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운상의 어깨를 살짝 감쌌다.
“수장,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자책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후우, 맞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상의 다른 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김도완 할아버지, 2장로가 입을 열었다.
“수장,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운상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가 보기엔 그 철수라는 아이가 영희와 감정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 무슨!”
운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2장로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1장로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어제도 밤새도록 철수를 간호한 것 같더군요. 이미 서로 좋아하고 있는 사이지요.”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님! 우, 우리 영희가 그런!”
“공석입니다. 1장로라 하시지요, 수장.”
“험험, 실례하였소.”
미소를 머금은 채 지적하는 1장로를 보곤 운상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에 1장로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미 두 번이나 있는 영희의 자살 시도에서 철수란 아이는 영희를 무사히 지켜 내었습니다. 우리와 같은‘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그 아이가 혼자서 두 번이나 영희를 지켜 낸 것입니다.”
“하, 하지만! 두 번째는 그 녀석 때문에!”
운상이 버럭 화를 내며 1장로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1장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영희가 철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나름 영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의 감정이나 기타 등등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수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우, 그렇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1장로의 말에 운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1장로가 운상에게 물었다.
“수장이시여, 지금 철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 말에 운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침술로 목숨만은 구했으나 떨어지는 충격으로 척추를 다쳐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지금 상태라면 평생 자리에 누워 살아야 할 것입니까.”
그 말에 1장로가 운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방법이 없습니까, 그 아이에게.”
“그게…….”
운상은 1장로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방법이 없습니까?”
“하지만 그건…….”
운상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별안간 밖에서 철수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소리를 들은 운상이 도망칠 구실이 생겼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깨, 깨어난 모양이군! 누님! 아니, 1장로! 잠시 다녀오겠소이다.”
그러곤 운상은 서둘러서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은 1장로는 주변의 다른 장로들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지요.”
“후우, 누님, 누님 말씀이 맞는 건 알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조현태!”
1장로, 박금자 할머니의 호통에 찔끔한 7장로, 조현태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맨날 나한테만 그래, 누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장로들이 고소를 지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나온 영희는 한약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비명 소리를 들은 영희는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꾹 누르며 할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마침 집 안쪽에서 운상이 뭔가에 쫓기듯 서둘러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철수가, 철수가 이상해요!”
“그래, 가 보자꾸나.”
운상은 서둘러 흰색 고무신을 꺾어 신고 빠른 걸음으로 영희와 함께 한약방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철수가 꼼짝도 못 하는 모양새로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처, 철수야!”
그 모습을 본 영희가 참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달려갔다.
“영희야…….”
영희의 얼굴을 본 철수가 비명을 그치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영희를 바라보았다.
“나, 나, 몸이 안 움직여져. 이상하게, 목 아래로, 흐흑, 감각이…… 없어.”
눈물을 참으려고 울걱울걱하면서 떠듬떠듬 말을 잇는 철수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그 말에 영희는 쿵 하고 머리를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망연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운상을 바라보았다.
“하, 할아버지…….”
운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영희의 시선을 피하며 철수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 할아버지? 저, 저, 왜, 이렇게 된 거예요? 나, 나을 수 있는 거죠? 네?”
철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운상은 그런 철수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 나을 수 없다. 넌 척추신경을 다쳤다. 목 아래로 감각이 없을 것이다. 평생 목 아래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운상의 말은 단호하고 냉정해서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철수의 표정이 아연해지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는지 아랫입술을 깨무는 철수의 입가에 핏기가 어렸다.
“하, 할아버지, 무, 무슨 소리예요? 네? 할아버지…….”
영희가 창백한 안색으로 운상을 잡아 흔들며 물었다. 운상은 그런 영희의 손을 붙잡아 치우며 차갑게 말했다.
“너는 나가 있거라.”
“할아버지!”
“나가 있으래도! 지금 이 상황이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느냐!”
그 말에 영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운상의 얼굴에는 영희에 대한 원망이 맺혀 있었다. 자살을 하려 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다. 영희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차마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한약방을 뛰쳐나갔다.
“후우, 영희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상은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철수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할아버지…… 정말로 전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요?”
“…….”
운상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에 철수는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렇군요.”
철수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안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말없이 먼 곳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철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영희는 무사해서. 영희는 다친 곳이 없었나요?”
“……그래. 다행히 영희는 무사했다. 네가 본 것처럼.”
그 말에 철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영희가 무사해서.”
철수의 말은 특별히 비꼰다든가, 뒤틀린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산뜻했다. 그 모습을 보는 운상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후우, 죄송해요, 할아버지. 피곤해서 조금 자고 싶어요.”
철수가 부드럽게 양해를 구하자 운상이 고개를 끄덕이곤 한약방을 나섰다. 한약방을 나서기 직전, 운상의 눈에 묘한 결심이 어렸다.
끼익― 쿵
할아버지가 나가고 나는 눈을 감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처음엔 화도 나고 이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괴롭게만 살아왔는데 이런 꼴이 되다니, 이제야 조금 행복해졌는데, 그 행복을 내 발로 짓이기고 결국 이 꼴이 됐다고 생각하니 꼴좋다고 생각했다.
“후우, 전신마비인가.”
내 입가에 고소가 어렸다.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내 몸 상태를 얘기해 줬을 때, 날 보며 영희가 펑펑 울음을 터뜨렸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됐지만 왠지 지금까지 날 둘러싼 속박에서 풀려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젠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되고…….”
날 혐오스럽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학과의 동기들이 떠올랐다. 수군거리던 목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미영……. 그런 괴로운 곳에서 이젠 영영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엄마의 기대 때문에 괴로움 속에서도 계속해 왔던 그 괴로운 일들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엄마…….”
엄마의 기대 또한 부담스러웠다.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부담감, 남편 없이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 불쌍한 우리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엄마의 기대는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을 사귀고 대학을 다니는 평범한 것이었지만 내겐 너무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난 자살하려 했었지.’
사실 영희와 만나게 되었던 자살 여행도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를 위해서라고, 엄마의 인생을 되돌려 주겠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했지만 결국은 내가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날 괴롭히고 압박하는 이 현실에서.
“엄마…….”
전신마비가 된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엄마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자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도피처가 생기자 불효지만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흐흐, 흐, 흑, 그러니까 괜찮아.”
눈가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정말 마음이 편하고 괜찮은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괜찮아.”
괜찮아.
“할아버지, 제발…….”
영희는 운상의 짧은 팔다리를 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들은 운상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운상의 표정이 상당히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애써 단호한 척 보이려 했지만 영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팔다리를 흔들어 대자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주변을 보니 소주병이 나뒹굴고, 영희의 몸에서 술 냄새가 훅 풍겨 왔다.
“후우, 영희야, 나라도 전신마비를 간단히 고칠 수는…….”
“있잖아! 응? 나 알아. 할아버지들 나한테는 얘기 안 해 주지만 다들 이상한 힘 같은 거 있잖아? 응? 나 모르는 거 아니란 말이야. 제발 철수 좀 고쳐 줘. 철수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저렇게…….”
영희는 철수의 모습을 보고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평소에 쓰던 존댓말도 급해지자 반말로 바뀌어 사정없이 애원의 말을 토해 내고 있는 것이다. 머리는 산발에 눈엔 핏발이 섰고, 눈가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 부어올라 있다. 게다가 손톱을 물어뜯었는지 손톱 끝이 침에 불어 터지고 이에 잘근잘근 씹어져 너덜거렸고 심지어 핏기까지 아렸다. 그런 얼굴, 그런 손으로 운상의 팔다리를 흔들며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제발, 내가 잘할게. 응? 앞으로는 자살 시도 같은 것도 안 하고, 할아버지가 하라는 거 다 할게? 철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영희는 말하다가 완전히 패닉에 빠져서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주저앉았다. 핏기가 어린 손톱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걸 운상이 붙잡으며 영희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들어가서 자라.”
“싫어!”
영희는 순간 벌떡 일어나더니 싱크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식칼을 손에 쥐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철수 고쳐 줘. 아님 할아버지 앞에서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영희의 핏발 선 눈과 부들거리는 손을 보자 운상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순간적으로 운상은 영희 쪽으로 손가락을 퉁겼다.
파앙―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보이지 않는 기이한 힘이 식칼과 손잡이를 연결하는 부분을 끊어 내고, 그 여파로 식칼이 뒤로 날아갔다.
슈욱― 퐁
부러져 날아가던 식칼은 천천히 공중에서 속도와 궤도를 바꾸더니 그대로 안전하게 싱크대 안쪽으로, 대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털썩―
떨그렁―
영희는 몸에 긴장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서 손잡이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영희를 실망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영희에게 다가갔다.
“아…… 아…….”
다시 손톱을 입에 가져가는 영희, 이번에는 운상도 막지 못했다. 손톱뿐만 아니라 손톱 안쪽 살까지 씹혀 영희의 입과 엄지손가락에 선홍색 핏물이 가느다란 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만 좀 해……!”
운상이 영희의 손을 확 잡아챘다. 손을 잡아챈 운상과 눈이 마주친 영희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제발 철수…… 고쳐 줘……. 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얼굴을 흠뻑 적시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영희의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보는 사람까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운상은 슬쩍 눈을 돌리며 작게 대답했다.
“……알겠다.”
그 말을 들은 영희가 순간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운상은 영희의 뒤쪽, 영희의 목에 살짝 손을 올리고 있는 박금자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하시오, 1장로.”
“그러겠습니다, 수장.”
씩 웃음 짓는 1장로. 그 모습에 운상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못난 손녀를 위해서요.”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