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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Part 5 인생역전 (4)


“그래도 철수는…… 나를 좋아해.”
죽으려는 날 끌어안고 보호해 줬다.
무척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또 그 일 때문에 철수가 저렇게 힘들고 괴로워하고 있지만, 나는 그때 그 순간만은 무척 행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절하기 직전에 철수가 말해 줬다.
‘좋아해…….’
“아, 몰라 몰라.”
나는 거울로 비치는 내 얼굴이 너무 빨개서 고개를 돌리곤 그대로 화장실을 나섰다. 세수까진 했지만 샤워를 하기엔 마음이 급했다. 철수가 보고 싶다.
‘할아버진 나한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할아버지가 알겠다고 했다면, 그건 이루어진다. 할아버지는 안 되는 걸 한 번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어제 난리쳤던 것도 있어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철수의 모습을 상상하며 난 한약방 쪽으로 향했다.
“후우―”
한약방 앞에 멈춰 선 나는 얼굴을 비치기 전 얼굴 점검을 시작했다. 비비크림에 입술만 연하게 칠했지만 아직 어리고, 게다가 나는 예쁘니까!
“어라?”
핸드폰을 들어 내 얼굴을 점검하던 나는 문득 시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23일? 수요일?”
어제는 20일, 일요일…… 이었는데…….
“사흘이나 잔…… 거야?”
어쩐지 오늘따라 피부가 조금 좋아 보였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난 혹시나 철수가 안에 없을까 싶어 빼꼼 한약방 문을 열어 보았다. 한약방 내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철수야! 철수야!”
철수는 어디에 있지? 철수야!
그때, 아래쪽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태 할아버지였다.
“끌끌, 딸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흐흐, 할애비들 널브러진 건 안 보이냐? 지 남자 친구만 찾는다 이거지?”
바닥에 널브러진 현태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지쳐 보였다. 마치 녹초가 된 것처럼. 그 주변의 다른 할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금자 할머니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는…… 아……!
“할아버…… 앗, 철수야!”
할아버지는 철수 앞에 서서 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등지고 있어 철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담요를 덮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철수였다.
“끌끌, 현태야, 니 놈 말이 맞다. 할애비가 여기 서 있는데도 부르다 말고 자기 남자 친구 이름부터 부르는 걸 보니.”
“헤헤…….”
할아버지는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농담을 하며 웃어 보였다.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살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철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급해서 그대로 할아버지를 지나쳐 곧장 철수에게로 향했다. 사실 반 정도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철수야!”
내 목소리에 깨어났는지 철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얼굴이…….
“너, 너…….”
철수가 히죽 웃으며 눈을 떴다. 철수와 눈이 마주쳤다. 난 물었다.
“너 저, 정말 철수야?”

“철수야!”
영희…… 영희의 목소리…….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멀리서 울리듯 들려오는 영희의 목소리에 난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살아 있는 건가…… 손가락,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 감각이 느껴졌다. 난 살아 있다. 그리고…… 나았어…….
“너, 너…….”
아, 영희다…… 난 히죽 웃었다.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영희의 얼굴이 이상하게 잔뜩 놀란 모습이었다.
“너 저, 정말 철수야?”
응? 무슨 소리를…….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잊으려도 악몽이 돼서 돌아오는 내 얼굴을 보고 무슨 당치도 않는 농담을? 그보다 나는 영희를 기쁘게 해 줄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철수야, 너, 몸이…… 몸이…….”
“나았어!”
말과 함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나았다, 나았어!
“다, 다행이야…….”
영희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나와 영희는 할아버지들이 있는 것도 잊고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런데 좀 뭔가 허전한데…….
“으잉?”
“왜 그래…… 끼아아악!”
왜 나 알몸인 거야!
나는 깜짝 놀라 담요를 움켜쥐며 덜렁거리는 녀석을 1순위로 가리고 바로 가슴께까지 담요를 끌어 올렸다. 허억, 허억, 나, 나 방금 깨어난 환자인데. 너무 흥분했어…… 허억…….
“아하하하하…….”
“하하…….”
우린 서로 고개를 돌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태 할아버지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낮에 아주 쑈를 하네, 이것들이 노인네들 앞에서. 어이쿠, 힘 빠져.”
털썩.
현태 할아버지는 그 말을 하려고 몸을 일으켰다가 이내 털썩 뒤로 나자빠졌다. 할아버지, 입담은 여전하시군요.
나는 웃으면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나도 모르게 담요로 훔쳤다.
“아, 묻겠다!”
닦고 나서 정신이 들었다. 얼굴에 범벅일 여드름 걱정에 나는 놀라며 내가 얼굴을 닦은 담요를 바라보았다.
“멀쩡하네?”
“처, 철수야, 너…… 얼굴…….”
“응?”
나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는 영희를 보며 얼굴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매끈―
“어라?”
매끈―
“어랍쇼?”
뭔가 내 얼굴의 감각이 아니다, 이건.
나는 어딜 만져도 매끈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만지며 누가 얼굴에 뭘 씌워 놓기라도 한 건가 고민했다. 하지만 살갗으로 느껴지는 이 감각은 내, 내 얼굴…….
“거, 거울, 거울 줘, 거울!”
그 말에 영희는 허겁지겁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핸드폰을 받아 들고 액정에 얼굴을 비춰 본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허억, 맙소사…….”
여드름이, 여, 여드름이…….
“……사라졌어.”
여드름이 사라졌다.
내 얼굴을 뒤덮은 그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고름들이 가득 차 있던 거죽이 벗겨져 나간 것이다. 난 지금 내가 혹시 혼수상태에 빠져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몸도 낫고, 얼굴까지? 이건 내가 꿈에서도 바라던 그런 일이 아닌가.
“여, 영희야, 나 좀 꼬집어 봐.”
“으응…….”
영희도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내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순간 위기감에 영희의 손을 탁 낚아챘다.
“아, 아냐. 꿈이어도 좋아. 이 꿈에서 안 깨어날 테다. 꾸, 꿈이니까 이 얼굴로 삼처사첩, 아니, 하, 하렘이라도! 이 세상 여자는 다 내 거…….”
퍼억―
순간 둔중한 충격과 함께 영희의 반대쪽 손이 명치로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허억―”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명치를 얻어맞자 숨이 턱 막히면서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꿈이 아니구나. 꿈이 아니야. 아픈데 기쁘다니. 내게 이상한 기질이 있는 건가.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흐, 흥! 웃기지 마. 니, 니 어, 얼굴이, 깨끗해지긴 했지만…… 그, 그건 그냥 평범한 수준이니까 이, 멍청아!”
영희는 화가 잔뜩 났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그렇게 말하고는 한약방을 뛰쳐나갔다. 나는 차마 뒤따라가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아픈 명치를 매만지며 웃었다.
“그건 그렇지…….”
1층에 있는 사람이 보는 10층이랑, 20층에서 보는 10층은 똑같은 10층이지만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 어떠랴. 영희가 평범한 수준이라고 그랬다. 난 잘생겨지는 건 사실 바란 적도 없다. 오직 평범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평범하기만을.
“난 이제 평범해…….”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만 울어라.”
그렇게 숨죽이고 오열하고 있는 내 등 뒤로 영희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인이다. 내 인생을 180도 역전시켜 준 은인이다. 비록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지만, 이젠 야속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이 내 은인이었다.
“감사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어떻게 해야 이 감사함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한 분 한 분 절이라도 해야 할까? 어떻게 해도 이 은혜를 갚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그때였다.
“감사할 것 없다.”
“그래.”
“넌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아도 돼.”
“아무렴, 감사할 필요가 있나.”
할아버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대답했다. 할아버지들의 목소리는 저마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표정 또한 무표정해서 긴장감이 들었다. 영희네 할아버지야 그렇다고 쳐도 다른 할아버지들까지 말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신지…….”
난 왠지 불길한 뉘앙스가 섞여 있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말에 침대 뒤쪽에 계셨는지 볼 수 없었던 박금자 할머니가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오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넌 우리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박금자 할머니의 표정은 웃는 것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느낌이었다.
“그게 잘 모르겠는데…… 그냥, 호의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뜻이 아니면…… 어떤…….”
설마 도, 돈을…… 그, 그렇긴 그렇겠지. 이럴 땐 어떻게든 할부로……!
“넌 우리‘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잖니?”
싸아―
그 말과 함께 한약방 전체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에? 네? 돈은 하, 할부, 아니, 네? 부, 부탁이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럼 약속대로 넌 우리의‘부탁’을 들어줘야겠어.”

왠지 모를 으스스한 소리를 한 노인들은 집 뒤편에 있는 공터로 날 데려갔다. 옷이 없는 내게 할아버지는 의류함을 뒤졌는지 헐렁한 윗도리와 바지를 선사하셨다.
‘이런 곳도 있었나.’
난 집 뒤에 이런 공터가 있는지도 몰랐다. 집에는 밥 먹을 때 빼고는 특별히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애당초 집터가 이렇게 넓다니, 상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크윽.”
이상하게도 노인들은 다들 힘겨운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게 왠지 나와 관계가 없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눈치도 보이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보통 노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맞느냐?”
“솔직히 대답하면 된단다.”
다른 노인들과는 다르게 그나마 안색이 좋아 보이는 영희네 할아버지와 박금자 할머니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물론…….”
피부과도, 한약방도 안 가 본 게 아니다. 다만, 간 곳에서마다 모두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을 뿐이었고, 영영 낫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피부가 문제가 아니라 전신마비인 사람을 하룻밤 만에, 그것도 수술이 아니라 이상한 주술 같은 걸로 낫게 한 노인들의 정체가 평범한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래, 우린 보통 노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희는 보통 여자아이라고 생각하느냐?”
누가 뭐래도 영희는, 보통 여자아이다.
“네, 영희는 보통 여자아이예요.”
마음 약하고, 자길 두고 먼저 떠나 버린 부모님을 그리워해 자살 시도까지 해 대는 마음 약한 여자애다. 이런 신기한 힘을 가진 노인들과는 다르다.
“후우, 그래. 영희는 보통 여자아이다.”
영희의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바로 박금자 할머니가 그 말을 이었다.
“하지만 또한 보통 여자아이는 아니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희에겐‘힘’이 있다.”
“……힘…… 이요…….”
힘이라니…… 어떤…….
순간 영희의 할아버지가 뒷마당 구석의 커다란 바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슈욱―
뭔가 흐릿한 게 할아버지 손에서 빠져나가는 듯하더니 바위에 부딪쳤다.
푹―
그리고 그 흐릿한 것은 바위를 뚫었다. 바위를 말이다.
꿀꺽―
난 마른침을 삼키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영희에게도 이런 힘이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어. 도대체…….
“영희에게 이런 힘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뜸을 들이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빨리 듣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하는 걸 느꼈다. 저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힘이다. 저런 힘은 없다고 해도, 뭔가 특별한 힘이 있다면 나는 영희를 전과 똑같이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의식하려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때 박금자 할머니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을 이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구나. 수장께서는 설명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으시니 내가 설명하도록 하마.”
그리고 할머니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영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단다. 정확히는 영희의 그‘힘’을 지키기 위해서.”
영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영희는……‘문’이란다.”
“네?”
문? 문이라면 그 문?‘Moon’ 말고 문(門)?
“그래, 문이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문’ 말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되었다.
“영희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문’으로서 태어났단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문. 비눗방울 두 개가 겹쳐지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어느 순간 비눗방울 두 개의 경계가 이어지면서 합쳐지지. 영희는 차원과 차원을 합쳐지게 하는 통로로 태어났다.”
사람을 보고 통로니, 차원이니 너무 거대한 개념이라서 나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고 하기보단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영희는 그냥 어린 여자애잖아요…… 문이라니…….”
내 힘 빠진 목소리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문이란 드러나는 것이 아니지. 그저 문일 뿐. 특별한 능력도, 힘도 발휘하지 않는다. 열리지 않으면 그저 평생 닫힌 채로 평범하게 살아갈 뿐이지. 그리고…… 죽으면 그 문은 새로 태어나는 타인에게 넘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