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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Part 5 인생역전 (5)


판타지 같은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초능력을 가진 노인네들이 집단으로 노망이 든 게 아닌 한, 말도 안 되는 얘기라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 노인들은 노망이 든 것 같지는 않다.
“후우, 제가 뭘 하면 되죠? 복잡한 얘기는 몰라요. 제가 해야 할 일, 제게 부탁하실 일이 무엇이에요?”
나는 더 이상 머리를 어지럽히는 소설 같은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영희가 문으로 태어났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보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그것만 듣고 싶었다. 영희는 사람으로 태어난 평범한 여자아이다. 그거면 된다. 그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후우, 그래. 어차피 차차 알게 될 터.”
할머니는 깊은 곳으로부터 숨을 내쉬고는 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말했지?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고.”
“네…….”
대답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믿기 어려운 얘기인데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할머니의 얘기는 그 비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적인 얘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차원은 초능계(超能界), 또는 이능계(異能界), 이인계(異人界), 비인계(非人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우리는 흔히 이능계라고 부른단다. 그리고 그 차원의 존재들을 이능자(異能者)라 부르지.”
“네…….”
여전히 자신 없는 내 대답에 영희네 할아버지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박금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그 이능자들은 다들 우리 세상의 사람보다 뛰어난 힘과 상상하기 어려운 능력을 지녔지. 하지만 차원 간의 벽이 있는 한 그자들은 모든 능력을 다 가져오지 못해.”
힘에 제약을 당한다는 얘기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세상이 그들에게 정복당하지 않은 것이지. 우리는 그렇게 차원의 벽을 넘어 이곳에 온 자들을 억제하고 통제한단다. 하지만 그 경계가 사라져 한 세상이 된다면 우린 그들을 막지 못해.”
“그렇게 강한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보다?”
그 말에 현태 할아버지가 슬쩍 끼어들며 예를 들어 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초경제대국과 경제약소국 간의 무역에서 무조건적으로 관세를 철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얘기란 것이지.”
상당히 알기 쉬운 비유였다.
“그들은 우리의 통제를 따르는 듯하면서도 뒤로는 계속해서 영희를 노리고 있지. 우리가 너에게 대가로 부탁할 것은 이것이다. 우리의 힘이 약해져서 그들을 통제할 능력이 많이 약해졌어. 머지않아 이능자들이 영희를 노리고 날뛰게 될 것이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할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할머니의 주름진 입이 열렸다.
“우리의 제자가 되어 이능자들을 저지하고 영희를 지켜라.”

“후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
이능자들을 저지하고 영희를 지켜라.
이게 내게 내려진 부탁.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무서운 능력을 가진 존재들로부터 영희를 지켜야 한다니. 사실 그들을 직접 목도한 상황이 아닌 지금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들의 능력을 살짝이나마 엿본 터, 스멀스멀 불안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난 누굴 지키기는커녕 내 한 몸 추스르는 일도 제대로 못 해 자살이나 하려고 했던 못난 놈이다. 스스로 목숨도 제대로 지키질 못해서 버리려는 나 같은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힘이 있는 걸까.
‘너는 우리의 신단을 흡수했어. 그리고 신단의 흡수를 인도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힘도 많은 부분 흡수했다. 너에겐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어. 넌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자신감 없는 소리로 내가 무슨 능력으로 그런 일을 하냐고 묻자 영희의 할아버지가 해 준 말이었다. 빈말은커녕 할 말도 잘 안 해 주는 분의 말이라 안 믿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보다도 나 자신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냥 얼굴만 깨끗해지고, 몸만 멀쩡해진 게 아니라, 날 아예 사이어인으로 개조까지 해 줬다는 얘기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나는 얼굴을 양손으로 덮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도대체 이게 뭐야.”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치료 전에 분명히 약속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게 정말 힘이 있을까? 무슨 스파이더맨도 아니고 하룻밤 사이에 처지가 확 뒤바뀌고 말았다.
“도대체 내가 누굴 지킨다는 거야. 잠재력? 무슨 잠재력? 하하하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 염력으로 문을 열어 주마. 이얍!”
하지만 문은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때였다.
끼익―
내게 잠재 능력이 정말 있었던 건가!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륵 열렸다.
“지, 진짜로?”
“철수야…….”
물론 착각이었다. 문이 열린 건 한약방으로 들어온 영희 때문이었다.
“어쩐지, 하하, 하…….”
내가 영희를 보며 헛웃음을 흘리자 영희는 씩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야, 무슨 말 했어? 할아버지들이랑?”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내 얼굴이 바뀐 것도 그렇고, 자기만 내쫓고 모두 모여서 한 말이 궁금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넌 몰라도 돼.”
“뭐? 인마? 얼굴 좀 멀쩡해졌다고 벌써부터 이러는 거야? 나 바람피우는 줄 알고 레스토랑 뛰쳐나갈 땐 언제고?”
그러면서 씩 웃는 영희. 마지막 말에 살짝 움찔하며 눈을 피하는 것이 말을 잘못했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영희한테 부담감과 열등감 같은 걸 느낄 때는 잘 몰랐는데, 영희는 퉁명스레 툭 내뱉고는 내 대답이 들릴 때까지 이렇게 신경을 쓰곤 했었던 것 같다. 내가 그것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그런 영희를 보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피식―
“왜! 왜! 왜 웃는데! 어라,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영희를 보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영희야.”
“응? 왜?”
나직한 내 목소리에 날 바라보는 영희, 난 그런 영희를 보며 대답했다.
“꼭 지켜 줄게.”
그 말에 살짝 눈이 커졌던 영희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맘대로 해.”
내게 힘이 있든 없든,
반드시.


* * *

서울, 강남구 논현동.
원더풀 테크 논현 지부.
이곳은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 원더풀 테크의 논현 지부로, 젊은 층의 회원들이 주로 모여 있다. 원더풀 테크는 대한민국의 광역시 전체에 지부가 있고, 교대에 본사가 있는 상당한 규모의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이다. 이곳은 젊은 층의 회원들이 간부들의 세미나를 듣거나 1:1 상담을 통해 새로운 회원을 유치하는 곳으로, 흔히 말하는 다단계 회사의 지부이다.
지잉―
새로운 고객들에게 네트워크 마케팅에 대한 설명을 하던 다이아 클래스 이상 직급의 회원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눈살을 찌푸리며 동작을 멈췄다.
“이건…….”
다이아 클래스, 김유림은 설명을 하던 도중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 너머 어느 곳을 응시했다. 170센티는 될 법한 큰 키에, 긴 생머리, 새하얀 피부의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그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낮게 읊조렸다.
“노괴들의 힘이…….”
그녀의 앞에 앉아서 설명을 듣고 있던 실버 클래스 회원 강석환과 그의 소개로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온‘고객’ 김민철은 갑작스러운 여자의 이상행동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딱 보니 다단계 같아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한편으로는 눈앞의 여자가 너무 예뻐서 힐끔거리며 훔쳐보기를 반복하던 김민철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눈앞의 여자가 이상한 행동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무, 무슨 일이세요, 김유림 다이아님?”
옆에서 이 일 이후로 이젠 원수가 될 친구, 강석환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테이블도 비슷했다. 1:1 상담을 받던 고객과 그의 스폰서(소개자)들은 다이아 클래스, 혹은 프라임 다이아 클래스들의 행동을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징조가 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다이아 직급 이상의 간부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네트워크 마케팅에 대한 설명을 일제히 멈춘 것이었다.
“석환아, 오늘은 친구분 데리고 일찍 퇴근해. 알겠지?”
“아, 하지만 저는 이쪽 라인도 아니고, 제 스폰서님께 말씀을 드려야…….”
우물쭈물거리는 강석환이라는 사내를 보며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유림은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박두식 다이아님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친구분, 일부러 서울에 온 건데, 서울 구경도 좀 시켜 드리고, 영화라도 보고 그래. 알겠지?”
“아,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강석환은 인사를 하고는 친구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다른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지부 안에는 다이아 클래스 이상의 간부들만 남게 되었다.
“박두식 다이아, 느꼈습니까?”
“네, 약해졌군요.”
“갑자기 무슨 일이…….”
김유림 다이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로 자신의 라인의 다이아 클래스인 성정미 다이아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서 교대 본사에 마승철 원더풀님께 연락해!”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로 서둘러 달려가는 그녀를 보며 김유림 다이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후후, 이런 이런…… 일이 재미있게 됐군요.”
그녀의 피처럼 새빨간 입술이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며 웃음을 흘렸다.



Part 6 수련 (1)


―철수야! 너는, 엄마가,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나는 대답을 이을 수가 없었다. 영희에게 들어 보니 내가 집에 안 간 지 사흘이나 되었다고 한다. 핸드폰은 영희를 구하는 과정에서 부서져서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터, 엄마는 이곳 한약방의 연락처도 몰라 전전긍긍하셨던 모양이다.
―도대체 너란 애는, 엄마 생각을 눈곱만큼이라도 하긴 하니? 응? 엄마가 실종 신고하고, 너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너 알바하는 데는 또 어디니? 경찰서에 물어봐도 알 수가 없고, 온 동네에 있는 한약방은 다 찾아다녔는데!
엄마가 많이 걱정하셨던 모양이다. 외박도 처음이지만, 엄마가 이렇게 울먹이면서 날 대놓고 책망하는 건 처음 들어 보았다. 항상 내게 미안해하셨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할까. 혼나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나 혹시 성격 이상한 건가.
“죄송해요, 엄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영희를 구하다가 반신불수가 돼서 한약방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상한 약 같은 걸 흡수한 덕분에 다 낫고 심지어 얼굴도 멀쩡해졌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냐.”
―응?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니?
엄마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으신 모양이다. 속에서 울음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끅끅거리시며 되묻는 엄마께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 그게…….”
뭐라고 말해야, 뭐라고…… 으으…… 아!
“그, 그게 한약방에서 할아버지가 얼굴을 고, 고쳐 준다고, 그 치, 침을 놔줬거든요! 그 치료 때문에 막, 하, 한약도 먹고 얼굴에, 그 이상한 약수건 같은 것도 씌우고 그랬거든요. 약을 먹으니까 몸이 나른하고 졸려서 계속 잠만 잤더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아, 망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그래, 얼굴에 침을 놓고 한약 먹는다고 그게 낫겠냐. 한약 먹고 사흘이나 잠을 자면 그건 보약이 아니라 수면제다. 엄마가 믿을 리가…….
―좀 좋아졌니? 돈 같은 건 괜찮아? 사장님이 직접 해 주신 거야? 한약이 되게 좋은 건가 보다. 사흘이나 푹 잘 정도면. 얼굴은 좀 좋아진 거 같아?
어…… 믿네.
“아, 네! 그게 좀 좋아진 거 같기도 하고. 하하, 하…….”
평생을 피부과 다니고, 비싼 화장품을 쳐 발라도 안 나았던 피부가 단번에 나았다고 그러면 우리 엄마라도 안 믿을 게 뻔하다. 그래도 차도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면…….
―저, 정말이니! 너, 너 오늘 집에 언제 오니? 엄마한테 얼굴 좀 보여 줘!
엄마도 내 얼굴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신 분이다. 다 당신 탓인 것 같아 가슴 아파 하시고, 내 축 처진 어깨에 친구도 없이 집에서 한량처럼 지내는 걸 보면서 말은 안 해도 뒤에서 눈물짓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집에는 못 가. 이 얼굴(?)로는.
“그, 그게 아직 치료가 안 끝나서 못 가요.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기가 고장 나서, 여기 가게 전화로 한다는 게 깜빡해서…….”
―아냐 아냐, 괜찮아. 얼굴 고치는 데는 뭐든 괜찮아. 사장님이 널 되게 좋게 보셨나 보다. 일부러 약도 쓰고 침도 놓아주시고 했다는 거 보면!
엄마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날 좋게 봤다?
싸아아―
그 생각을 하자 할아버지의 싸늘한 시선과 목소리가 생각나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으으, 괜한 생각을 했구나.
“으응, 내가 여, 열심히 하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오늘은 못 가요.”
―응, 알겠어.
휴우.
잘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가 거기로 갈게! 거기 어디니!
다소 곤란한 일이 벌어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