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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Part 6 수련 (4)
* * *
“안녕하세요오∼”
할머니한테 꾸벅 인사를 하자 할머니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사탕이 먹고 싶어서 손가락을 빨며 사탕을 바라보며 할머니한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역시 할머니는 웃으며 쌈지돈을 꺼내 커다란 눈깔사탕을 사서 내 입에 물려 주셨다.
“우히이― 할머니 최고! 최고 최고!”
내 말을 들은 할머니가 생긋 웃으셨다. 하지만 그 모습이 왠지 슬퍼 보였다.
“할머니, 근데 왜 웃으면서 울어?”
할머니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더니, 작게 말씀하셨다.
“날 원망하려무나. 날 평생 원망하렴.”
투둑―
순간 주변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갑작스레 온몸이 가려워지면서 뭔가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려운 느낌에 온몸을 벅벅 긁는데, 손톱과 손가락에 끈적한 액체가 엉겨 붙었다. 그리고 순간 눈앞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여드름, 온몸에 뒤덮인 여드름이었다. 여드름이 후두둑 터지면서 내 몸 전체로 피고름이 줄줄 흘러내렸다.
“으,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한약방이었다. 아, 맞다. 나 한 달간 여기 있기로 했었지.
“내 얼굴, 내 얼굴! 아휴우―”
나는 핸드폰에 얼굴을 비춰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내 얼굴은 멀쩡했다. 깨면서 꿈은 금세 다 까먹어 버렸지만 마지막 이미지만은 뇌리에 남았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이 비슷한 꿈을 꾼다던데, 나도 비슷한 건가.
“으으.”
다시 잠들면 또 악몽을 꿀까 봐 걱정이 된 나는 핸드폰으로 웹툰이나 볼까 하고 인터넷을 연결했다. 아, 핸드폰은 엄마가 얻었다면서 기기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유심칩만 꺼내서 쓰고 있다. 옆집 노총각 아저씨가 핸드폰을 바꾼다면서 전에 쓰던 기계를 주었다는데, 이것도 나온 지 한 달이 안 된 기종이었다. 아마도 환심 사기 작전인 것 같다.
“그래도 그 아저씨는 안 돼.”
엄마가 없을 때, 그 아저씨 집에서 일본인 여성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여성은 무슨 괴로운 일이 있는지 숨을 헐떡거리면서 싫다고(이야, 야다), 그만하라고(야메떼), 아프다고(이따이), 살려 달라고(다스께떼 구다사이) 애원하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흘려서 날 가슴 아프게 했었다. 잔인한 사람.
“암, 안 되고말고.”
그러다 보니 순간 현태 할아버지한테도 생각이 미쳤다.
‘아빠라고 불러보지 않으련?’
“큭, 미친.”
127살이나 드신, 거의 증조할아버지뻘인 할아버지께 하기에는 엄청나게 불경스럽고, 예의를 밥 말아 먹었다고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다. 그만큼 어이가 없어서였다. 해외토픽에 나갈 일 있는가. 현태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랑 태어난 세기가 다르다고! 조선시대 사람이란 말이야! 진짜로 조선시대 사람!
“으, 골치 아파.”
아까 일을 생각하자 두통이 오는 것 같다.
엄마는 한참 영희랑 수다를 떨고 한약방을 휘저으며 청소를 해 준다고 법석을 떨고, 밥을 차려 주겠다며 장을 봐서 할아버지분들께 요리를 대접하는 등 한참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셨다.
“음, 그러고 보니 박금자 할머니는 왜 계속 안 보였지?”
그 혼혈이라는 이능자들과 싸우고 나서도 할아버지들은 좋아하시면서 엄마가 해 주는 안마도 받고, 식사도 하시고 그랬는데, 박금자 할머니만 계속 보이질 않았던 것 같다. 이능자들과 싸우기 전에도 그랬는데 말이다.
“으음.”
현태 할아버지가 자꾸 나한테 슬금슬금 친한 척을 해 대서 난감하기도 하고, 박금자 할머니가 구해 주길 바랐는데 보이질 않아서 많이 아쉬웠다. 현태 할아버지랑 박금자 할머니랑 차라리 잘되면 안심이겠는데 말이다.
“꽉 쥐여 살겠지.”
상상을 하자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파앗.
‘……날 평생 원망하렴.’
순간 갑자기 방금 꿈 내용의 일부가 플래시처럼 파악하고 떠오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지는 흐릿해서 잘 기억이 안 나고 희미하게 목소리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 하지만 생각하려 하자 오히려 잡히지 않고, 금세 사라져 버렸다.
“후우, 됐다. 그냥 자자. 제발 악몽은 꾸지 말아라.”
난 다시 잠들었고, 다행히 이번에는 꿈도 꾸지 않고 다시 깨어날 때까지 푹 잠들 수 있었다.
새벽.
네 시에 두들겨 깨워진 나는 반쯤 혼을 침대에 두고 나온 상태로, 혼몽하기 그지없었다. 무자비하게 날 침대에서 끌어내려, 정말 표현이 아니라 손수 날 두들겨 깨워 주신 할아버지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딸꾹.
“읍.”
난 나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 숨을 참으며 평소보다도 박력이 넘치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인이라 함은 부지런한 생활이 기초가 된다. 그 어떤 재능이라도, 아무리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자라도 부지런한 생활 속에서 길러지는 노력만 한 재능이 없고, 그 노력 없이는 잠재력이 바다와 같다 한들 고작 술잔만큼도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찍 일어나라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탄을 하며 내일부터는 세 시 반에 알람이라도 맞춰 놓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럼 일단 기본부터 시작하겠다.”
“네?”
기본?
물론 기본이 중요하다는 건 어느 책을 봐도 쓰여 있고,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항상 어디선가 듣는 말이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다. 그 기본대로 하면 몇 년이 걸려야 영희를 지킬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미 당장 어제 이능자가 쳐들어왔었는데 말이다.
“되묻다니, 뭔가 불만이라도 있느냐?”
“아, 아닙니다!”
하지만 차마 할아버지한테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말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할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날 째려보다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마보를 취해라!”
마보, 무협지에서 많이 나오는 말타기 자세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내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자 할아버지가 손으로 내 무릎과 배를 치며 자세를 교정시켜 주었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무릎은 발보다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하고 허리는 꼿꼿이 세우며 시선은 자신의 주먹 끝을 바라보는 자세.
상상만 해도 금세 땀이 나는 자세가 아닌가?
“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버텨라.”
앞으로의 지옥을 암시하는 말.
그런데 말이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한 게 말이다.
“어라?”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처음 하는 것이라 취한 자세가 어설프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자세를 잡아 준 후, 마치 투명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힘든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 신단을 먹고 몸이 변하면서 생긴 변화일까 싶었지만, 괜히 안 힘든 척을 해서 할아버지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흐읍!”
나는 억지춘향으로 힘든 시늉을 하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힘들지도 않고 편한 터라 자세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는데, 그런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내 다리를 툭툭 치고 손을 아래로 슬쩍슬쩍 당겨 보고, 허벅지를 만져 보셨다.
“이 녀석이!”
퍽!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이, 이놈이! 스승을 속여! 하나도 안 힘들면서 힘든 척을 해 대?!”
헐, 들켰구나.
“그, 그게 하, 할아버지가, 아, 아니, 스, 스승님이! 안 좋아하실까 봐,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할아버지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환골탈태한 걸 깜빡했구먼. 육체적인 건 이미 초인(超人)에 이르렀을 것을…… 어리석도다, 어리석어.”
할아버지는 고개를 내젓고는 내게 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엉뚱한 시늉을 하면 실전 비무를 통해 널 혹독하게 수련시켜 주마.”
그러더니 손을 내미는데, 눈에 보이는 시퍼런 기온이 마치 회오리처럼 회전하며 작은 구를 만들고 있었다.
“헙, 나 삐이― 환!”
내 외침에 인상을 찡그린 할아버지는 금세 손을 털어 버리며 다시 엄포를 놓았다.
“알겠냐.”
“네, 넵! 그, 그런데 방금 그것도 배, 배울 수 있는 겁니까?”
나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긴 한데…….”
우오오오, 나는 왠지 수련이 재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만화 속 기술을 실제로 사용하는 건 남자의 이룰 수 없는, 그렇지만 엄청나게 갈망하는 로망이 아닌가.
“……왠지 수련이 좋아질 것 같다.”
라고 이때의 나는 생각했다. 서툰 생각이었지만.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가장 적응하기 힘들고 지루하며 괴롭게 이어졌을 체력 훈련을 손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운상 할아버지가 인정했다만 그건 진짜인 거니 말이다. 난 금방이라도 엄청나게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졌다.
“아, 오셨어요?”
할아버지는 내게 체력 훈련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셨는지 잠시 다녀온다며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셨다. 내 훈련 계획을 다시 생각해 오신 게 아닌가 싶었다.
“방금 체력 훈련으로 보아, 너에게 일반적인 훈련 방식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 너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간단한 시험을 볼 생각이다.”
에, 시험?
솔직히 시험이라는 단어는 듣기도 싫은 단어 중 하나지만, 지금처럼 자신감이 붙어 있고 과시욕 때문에 몸이 근질거릴 때는 그렇게 달가울 수가 없는 단어이기도 했다. 100점 맞아서 자랑을 하고 싶은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할까.
“어떤 시험입니까? 어떤 시험이에요?”
내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연속해서 묻자 할아버지는 좀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하셨다.
“……죽지 마라.”
음?
“뭐, 뭐라고 하신 건지…….”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슈아악.
그때, 순간 등줄기가 섬뜩해지면서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위태로울 거라고 온몸의 신경들이 날뛰는 감각을 느꼈다. 난 나도 모르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누가 보면 갑자기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난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다.
콰앙!
“허허헉!”
내가 있던 자리가 폭발했다.
“다시 한 번 말해 주마. 죽지 마라, 라는 시험이다.”
못마땅했던 기분이 풀리셨는지 운상 할아버지가 푸근한 웃음을 지으셨다. 으아악, 이 상황에 그런 웃음은 안 어울린단 말이야! 내 얼굴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한 세 시간 정도가 지났나.
아니, 사실 몇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느낌상으론 사흘은 흐른 것 같은데 왜 이제야 해가 막 떠오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허억, 허억…….”
죽을 것 같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땀과 바닥을 구르며 입에까지 들어온 흙이 으적으적 씹혀 댔다.
“퉤, 어디야, 이번에는.”
난 입에 들어간 흙을 뱉어 내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히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으리라. 주변은 일견 지옥의 한 장면이었다. 마치 전쟁 영화에서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땅거죽이 뒤집어져 생긴 구덩이들이 온갖 곳에 생겨 마치 폭격이라도 얻어맞은 듯했고, 공터 외곽에 서 있던 굵은 나무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뭇조각을 여기저기 흘려 놓은 채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슈욱.
“젠장, 또!”
난 뒤쪽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앞으로 뛰어나가며 몸을 굴렸다.
콰앙―!
“으아아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비명인지 악을 쓰는 건지 모를 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살갗에 온통 달라붙은 흙이라든가, 심지어 바닥을 굴러다니다 보니 나뭇조각에 긁히거나 찔려 피가 흐르는 부분도 있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폭탄에 집중되어 있었다.
“젠장, 언제 끝나는 거야!”
슈욱.
“으아아아!”
섬뜩한 기운에 또다시 몸을 날리는 나. 하지만 이번엔 한 방향이 아니라 여덟 방향 이상 되는 곳에서 날아온 대폭격이었다.
슈아아아아.
“죽일 셈이야아!!”
콰과과광!
눈앞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으으으, 이게 무슨…… 시험이야.”
털썩.
기절한 철수의 곁에 운상과 1장로, 박금자가 다가왔다.
“수장이시여, 그만하시지요. 기절했습니다.”
1장로의 말에 쓰러진 철수의 숨통을 끊어 버리려고 손끝의 회오리치는 새파란 기의 구슬을 막 집어 던지려고 하던 운상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기운을 흩어 냈다.
“과하셨습니다.”
“험험, 이건 어디까지나 수련이었소. 딱히 내 손녀딸을 훔쳐 간 도둑놈의 목숨을 끊어 버리려고 그런 건…… 험험.”
1장로의 말에 운상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은 1장로, 박금자 할머니는 기절한 철수를 바로 눕히며 몸을 살펴보았다.
“여덟 군데서 날아오는 마지막 공격에 기절하긴 했지만, 상처는 입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공격도 피해 낸 것이다. 물론 여파에 휩쓸려 기절하긴 했으나 놀라운 일이었다. 운상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작게‘과연…….’ 하고 중얼거리며 기대감에 찬 얼굴을 보였다. 1장로는 그런 운상에게 말했다.
“아직 정신적인 면이 부족하지만, 체력적인 면이나 운동 능력, 특히 감각적인 부분은 이미 초인의 단계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암경(暗勁)을 이 정도까지 감지하다니.”
“그렇군.”
그러자 1장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장께 일전의 일은 보고드린 것으로 압니다.”
“알고 있소.”
그 말에 운상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일전의 일, 혼혈들의 습격에 대한 일이었다.
“후우, 좋소. 수련에 대한 것을 1장로에게 맡기겠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