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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Part 6 수련 (5)
목소리를 들었다.
늙수그레한 그 목소리는 어딘가 낯익고 푸근했는데, 왠지 두렵게 느껴졌다.
‘……날 평생 원망하렴.’
어째서 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원망해야 되는 걸까.
원망보다는 애처로웠다. 어째서 그리도 자신을 원망하라고 말하며 슬퍼하는 것일까. 묻고 싶었다. 어째서 내가 당신을 원망해야 합니까. 왜 당신을 원망해야 됩니까. 아무리 물어보려 해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사라지고 내 몸이 우툴두툴 부풀어 올랐다.
“허억.”
깨어나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절어 있었다. 누운 채로 번쩍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한약방의 내 침상도 아니었고, 영희네 집 안도 아니었다. 모르는 장소, 게다가 나는 이상한 약물 같은 것에 푹 담겨져 있었다.
“이게 뭐지?”
약물이 가득 담긴 욕조 속에 목만 남기고 푹 잠겨 있는 형상, 그게 나의 모습이었다. 욕조 주변은 그냥 맨땅으로, 천장 쪽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 빼고는 딱 동굴 속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아직도 꿈속인가.”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또 꿈 내용은 잊어버렸다. 왠지 슬프고, 안타깝고, 마지막에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깨어났다는 기억만 떠올랐고 내용은 잊어버렸다.
“깨어났구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꿈 내용이 기억날 것 같은 기분이…….
“……박금자 할머니.”
박금자 할머니였다.
나는 박금자 할머니를 보자, 순간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미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기억? 추억?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의 편린 정도로 해 두면 될까.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나요?”
“……할미한테 작업 거는 게냐? 우린 나이 차가 좀…….”
할머니는 내 말에 잠시 대답하지 않으시더니 씨익 웃으며 대답하셨다.
“쿨럭, 할머니가 현태 할아버지랑 친하다는 걸 잊었네요.”
나는 헛기침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할머니를 보자 순간 어릴 때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히 만난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물론 닮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실 할머니들은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내가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릴 때 만난 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 아닐 수 있고, 할머니도 기억을 못 할 만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것일 수도 있다.
“흐흐, 아니에요. 근데 여긴 어디예요?”
내 말에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하셨다.
“여긴 시간과 정신의 방이란다.”
“……네? 드래X볼이요?”
할머니의 탈을 쓴 현태 할아버지인가? 나는 당황스러워서 되물었다.
“히힛, 이게 설명하기 편할 것 같아 말했더니 날 무슨 현태 녀석 보듯 보는구나.”
역시 연륜은 따라가지 못하겠군.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할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 너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아주 긴 꿈을.”
“꿈이요? 그, 잘 때 꾸는 그 꿈이요?”
그 말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단다. 그래서 너에게 어떤 대법을 실행하기로 했단다.”
“대법이요?”
대법이라니, 이 한약 냄새나는 욕조랑 관련이 있는 건가. 나는 뭘 묻고 싶어도 아는 사항이 없으니 잠자코 할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넌 이제 꿈속에서 수련을 하게 될 게다. 한 달 뒤에 널 깨울 것이나, 그전에 깨어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네?”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는 건 죽는다는 소리인가? 아니, 애당초 사람이 한 달 동안 잠만 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폭탄인지 장풍인지를 피하다가 기절하고 깨어나 보니 이번엔 시간과 정신의 방 스페셜 수련 코스다! 이러면 내가 어떻게 상황 파악을 해야 되는 것인가.
“저, 저기, 그렇게 위험한 것보다는 단계를 밟아서 차근차근하는 게 조, 좋지 않을까요? 네?”
당황해서인지 말이 더듬더듬 흘러나갔다. 그 말에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살짝 붙잡으며 말씀하셨다.
“강해지고 싶다고 그랬지? 영희를 지키고 싶지 않느냐?”
강해지고 싶다. 지키고 싶다. 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자 무서워졌다.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영희를 지키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엊그제 보았던 그 이능자들에 대한 것도, 그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 라고 막연히 남의 일로 떠밀어 버렸었다.
영희를 지킬 거라고, 강해질 거라고 다짐하긴 했으나 그건 만화 속에서 주인공이 금방 강해지듯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었다. 직접 현실을 마주한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 낙관해 버렸던 것이었다.
“강……해질 수 있어요? 이걸 하면…… 지킬 수 있어요?”
그 말에 할머니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넌 할 수 있단다. 이 할미가 보장하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날 평생 원망하렴.”
두근.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자 순간 심장 속이 요동쳤다. 뭔가 아련한 느낌, 역시 난 할머니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할머니, 하겠어요. 강해지고 싶어요.”
그 말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럼 시작하자꾸나.”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 정말 저랑 만난 적 없으세요?”
“음?”
할머니는 내 물음에 씩 웃으시더니 내 정수리에 손을 올리며 작게 말씀하셨다.
“우린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단다.”
그리고 난 그대로 깊숙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Part 7 습격 (1)
“……자동사는 명사를 취할 수가 없다! ……뒤에 목적어, 즉 명사를 넣고 싶으면 이걸 넣어 주면 된다. 전치사+명사. 중간에 뭘 껴 줘요? 전치사를 넣어 주면 된다…… It is important that new staff attend all meetings, workshops or presentations as early as possible. 이 예문에서…….”
강의실 내부는 여름을 맞아 토익 점수를 한껏 끌어 올리려는 학생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영희는 그 안에서 열심히 알아듣기도 어려운 꼬부랑 발음을 따라 적으며 강의실의 뜨거운 열기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으으, 어렵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별개. 애당초 어학과는 사이가 안 좋은 영희는 고전하고 있었다. 학원에 다닌 지 3주째,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따라 적고 듣는 동안만큼은 이해라도 되는 것 같아 다행인 터였다. 처음에는 뭔 소린지 알아듣질 못해서 복습을 어마어마하게 해야 간신히 수업 진도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 강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오늘의 강의는 여기서 끝. 네 시간의 긴 강의가 끝나고 영희는 녹초가 되어 책상에 쓰러졌다. 고개를 옆으로 누이고 창밖을 바라보니 쨍쨍한 햇빛과 새파란 하늘이 영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가씨, 스터디 갈 시간이십니다.”
“언니, 스터디 가야지.”
영희는 그새를 안 기다려 주고 재촉하는 두 남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큰 키에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 한 명과 영희보다 작고 여동생 같은 느낌의 귀여운 여자애가 영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으으, 세명아, 그 아가씨는 안 하면 안 되겠니? 우리 동갑이잖아, 응?”
“맞아. 세명 오빠! 언니가 싫다잖아!”
그러더니 여자애는 엎드려 있는 영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세명에게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뭉클.
영희의 머리 위로 작은 키와 어려 보이는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이 얹혀졌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영희는 이를 악물며 참을 인을 새기고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영아, 3초 안에 치우렴. 하나, 둘…….”
그 말에 아영이라 불린 거유 소녀는 히힛 하고 웃으며 가슴을 치우곤 세명의 옆으로 가 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명은 살짝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돌리더니 저벅저벅 강의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빨리 가시지요. 다른 일행들이 기다립니다.”
과연, 강의실 밖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영희와 세명, 아영을 기다리는 네 사람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아영이 영희의 머리 위에 가슴을 올려놓을 때 한 녀석은 자극이 강했는지 코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하아, 도대체가. 아으, 철수 보고 싶다.”
영희는 한숨을 내쉬며 철수의 빈자리를 통감했다.
철수가 사라진 지 3주가 지났다. 철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련을 떠났다는 걸 영희는 알고 있었다. 철수가 사라지고, 영희는 할아버지들께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아직도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긴 했으나, 들어 본 바 자신은 몹시 중요한 인물이고 그 때문에 초인적인 힘을 가진 할아버지들이 지키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초인적인 힘을 가진 어떤 조직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으음, 점점 일반인을 벗어나고 있구나. 나는.”
영희는 한탄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스터디 그룹의 일원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철수는 잘 있을까. 수련이라니…….’
처음에 얘기를 듣고는 솔직히 말도 안 된다는 감정이 앞섰지만, 영희 또한 할아버지들의 초인적인 힘이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지금껏 살면서 못 느꼈던 바가 아니었기에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철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련을 떠났다는 얘기는 기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철수가 오기 전까지 나도 뭔가 발전한 모습을 보여 줘야지.’
그리하여 영희는 토익 학원을 다니기로 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집에서 할아버지들께 호신술 같은 것도 배우고 있었지만, 그건 자신을 노리는 초인적인 힘을 가졌다는 사람들한테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아, 철수가 사라진 뒤로 변화가 있었는데 방금 본 그 세명이라는 남자와 아영이라는 여자애였다. 그 둘은 영희의 경호원으로, 영어 학원에 다니겠다고 하는 영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할아버지들이 붙여 준 경호원이었다.
“으앙, 언니 같이 가요!”
뭉클.
등 뒤로 느껴지는 풍만한 감각.
남자라면 코피라도 흘렸을 뿌듯한 감각이었겠지만 영희는 여자였다. 영희는 슬쩍 티셔츠를 앞으로 잡아당겨 셔츠 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후 인상을 찌푸렸다.
“좀 뒤에서 안지 말란 말이야! 이것아!”
영희는 신경질을 부리며 그대로 아영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흐잉, 너무해요. 아영이는 언니가 좋아서 그런 건데.”
“후우. 언니는 무슨, 너 나랑 동갑이잖아. 심지어 나보다 생일도 빠르잖아, 이년아.”
영희는 한숨을 내쉬며 복도 너머 창밖을 바라보았다.
“으아, 철수 보고 싶다.”
오늘의 스터디 장소는 천사다방이었다.
비록 커피는 비싸지만 요즘처럼 덥고 도서관 자리 맡기도 어려운 때에는 여기만 한 곳이 없었다. 영희는 제일 싼 아메리카노를 시키고는 담배를 피우는 강태현이라는 친구를 배려해 금연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으악, 왜 금연석으로 온 거야.”
같이 스터디를 하는 스물여섯 살, 태현이 비명을 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완전 곱슬 머리로, 실제로 머리카락을 뽑아 보면 꽤 긴데도 그냥 보면 짧아 보이는 재밌는 머리카락의 소유자인 태현은 하루에 담배를 두 갑이나 피워 대는 헤비 스모커였다.
“다 오빠를 위해서네요.”
“맞아, 담배 좀 끊어요. 진짜 담배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프다고요. 담배 피우는 남자는 여자한테 인기 없어요.”
영희와 아영이의 더블 콤보.
“맞아요. 담배 피는 남자는 싫어요.”
게다가 같은 스터디 그룹인 민지의 지원사격까지.
골수 애연가인 태현은 울상을 지으며 1시간 반이나 되는 스터디를 어떻게 버텨야 하나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보며 킬킬거린 민철이 은근슬쩍 얼굴을 붉히며 영희의 곁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