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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Part 7 습격 (2)


“민철아, 나 남자 친구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민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스무 살, 방학 기간 토익 공부를 위해 온 학원, 우연히 들게 된 스터디에서 만난 여신에겐 남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민철은 골키퍼 있는 골대라고 슛 안 들어가라는 법 있냐고 생각했다.
“골키퍼 있는 골대라고 슛 안 들어가라는 법 없지…… 중얼중얼…….”
“민철아, 혼잣말은 안 들리게 하든지, 생각으로만 해 줄래?”
“쯧쯧, 오빠도 고생이구나.”
민지는 민철의 쌍둥이 동생으로, 오르지 못할 나무를 꿈꾸는 자신의 오빠를 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제법 우스운 구성의 스터디 그룹은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스터디를 시작했다. 영희는 이 중에서 제일 아는 게 없어서 다른 인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터였다. 그렇게 벌금 내기 단어시험이라든가 하면서 후딱 시간이 흘러갔다.
“후우, 자자, 오늘의 벌금은 5천2백 원 모였습니다. 와아.”
“흐엉.”
다들 웃는데 영희만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영희는 5천2백 원의 금액 중 2천원을 지불한 대주주였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오늘의 대주주.”
태현이 킬킬대자, 영희는 째릿 하고 노려보다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만점인 거야.”
“저는 여덟 살까지 캐나다에서 살았거든요오. 언니.”
영희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이건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애와 똑같은 조건으로 벌금 단어시험이라니. 어차피 그걸 모아서 나중에 뭘 사 먹든지 한다고 했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던 세명 또한 지금까지 벌금을 내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너도 뭐 귀국자녀 같은 거야?”
“저는 노력파입니다.”
그게 더 재수 없어.
영희는 세명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 나는 토종 한국인이야.”
“나도 알아.”
2천2백 원을 지불하여, 영희보다도 더 큰 지분을 획득한 민철이 위로하듯 대답했다. 영희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민지 또 다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말이야, 우리 스터디 끝날 때 모인 이 돈으로 바다나 갈까? 흐흐흐?”
스터디도 이후 시작된 잡담 타임, 나이가 가장 많고 신망이 있어서 총무를 하고 있는 태현이 지금껏 모인 돈을 보여 주며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이 스터디는 다른 스터디에서도 상당히 부러워할 정도로 여성 구성원이 화려했기에 태현으로서도 꼭 이 계획을 진행시켜야겠다고 다짐했던 바가 있었다.
이미 학원 내에 여신으로 소문난 영희. 로리거유에 귀여운 성격, 인기로는 영희 못지않고 오히려 깊이로는 영희를 압도하는 마력의 소유자 아영. 이 둘의 빛에 좀 가려졌지만 지적인 이미지에 수수하면서도 예쁜 얼굴에 상냥한 성격으로, 너무 예쁜 얼굴에 울렁증이 있는 남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민지. 이미 다른 남성 스터디에서 돈을 잔뜩 내겠으니 제발 껴 달라는 제의가 쇄도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의외로 목석같은 세명까지 차도남으로 인기를 얻고, 영희바라기로 소문이 난 민철까지 애완남이라며 나이가 있는 누님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터라 잘하면 다른 여성 스터디 그룹의 참여까지 기대가 되는 상황이었다.
“돈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각자 개인 용돈만 가져오면 되는데? 어때?”
정확히는 다른 스터디 그룹이 가져올 돈이지만 태현은 자신이 있었다. 스물여섯에 취업 재수를 하는 태현은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이 어리고 탱탱한 아이들과 제발 놀러 가서 다른 거 안 바라니까 친구들한테 자랑이라도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심정이었다.
“으음…….”
영희는 그 말에 철수랑 같이 바다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음을 흘렸다. 할아버지 말로는 한 달쯤 걸린다고 했으니, 아마 철수도 일주일 후 정도면 돌아올 것이었다. 스터디가 끝나는 것도 그쯤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철수와 여름날의 추억을 만들 수도 있을 게 아닌가.
“저기 그럼 제 남자 친구도 같이 가도 돼요?”
영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태현이 눈빛을 빛냈다.
‘걸려들었다.’
태현만 아니라, 얘기뿐이고 한 번도 모습을 보여지 않는 그 먼 곳에 갔다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다들 궁금하던 차였다. 민철은 울상을 지음과 동시에 전의를 불태웠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고, 다들 흥미 있어 하는 모습에 태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오케이, 솔직히 우리 스터디가 아니라서 좀 그렇긴 하지만, 뭐 영희 남자 친구분이라니까 그렇게 하자. 그 대신 나도 내 친구들 데려와도 되냐? 너희들도 괜찮고, 응?”
“뭐, 괜찮을 거 같은데요.”
“나는 영희 님이 가신다면 상관없다.”
“나도 언니가 가면 상관 없어요오.”
민철은 두말할 것 없었고, 민지도 찬성이었다. 그리하여 여름 피서 계획이 결정되었다. 철수의 참가 또한 영희에 의해 결정.

* * *

형철용역.
권형철이 사장으로 있는 용역업체로, 흔히 말하는 용역 깡패이다. 하는 일은 철거민들을 몰아세우거나, 돈을 받아 주기도 하고, 솔직히 돈만 주면 안 하는 일이 없는 이 시대의 용병이라 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최근까지도 형철이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인원이 좀 많아지고 체계가 잡히면서 형철용역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번듯한 지하1층, 지상3층의 건물까지 구입하여 세력을 키워 나가는 용역회사였다.
“어이쿠,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그런 형철용역 사무실에 손님이 방문했다. 중년의 나이에 울긋불긋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있는 히스테릭해 보이는 그냥 그런 아줌마였는데, 형철용역의 1인자인 권형철이 연락을 받자마자 사장실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는 것이었다.
“음, 권 사장, 오랜만이야.”
“아무렴요. 김미옥 원더풀님은 더 예뻐지셨습니다.”
그녀는 원더풀 테크 대전 지부의 지부장 김미옥 원더풀이었다. 일전의 일로 형철용역을 방문한 것이었다. 과거의 몇 번의 거래도 그렇고 최근에 있던 거래로 형철용역의 사정도 많이 좋아져서 단숨에 VIP고객이 된 그녀를 대하는 형철의 행동은 무척이나 깍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서 그녀에게 보내는 눈빛은 몹시 난처한 것이었으니, 과연 복잡한 사정에 처한 것이 분명했다.
‘크으, 이 마녀 같은 년이 또 그 얘기 때문에 또 왔구나.’
이미 두 차례나 전화로 그 비서라는 사람한테 연락을 받았던 터였다.
‘노괴들한테 튀기 놈들 다섯 보낸 것만으로도 조직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꿈을 며칠 밤째 꾸는지 아냔 말이야, 이년아.’
노괴들. 이 세계에서 작은 조직이 살아남으려면 건드려선 안 되는 조직이 있다. 물론 같은 이능자들 무리 안에서도 작은 조직이 큰 조직을 건드렸다간 회사 운영하기가 참 난감해지기도 하고 앞일이 걱정되는 터이나, 절대적으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상대가 바로 노괴들이다.
노괴들은 타협이라는 게 없다. 애당초 이능자 세력이 아니기에 동병상련의 정 같은 건 당연히 없고, 애당초 노괴들의 세력권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문답무용으로 척살당해 버리는 터라 이능자들 사이에선 그들에 대한 터치는 절대불가,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일전에 얘기했던 것 때문에 직접 찾아왔어.”
사장실의 응접용 테이블 앞 소파에 걸터앉은 김미옥 원더풀은 범강장달이 같은 사내가 들고 온 아기자기한 찻잔을 받아 들고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얘기를 꺼내 왔다. 그 말을 들은 형철은 살짝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 일 말씀이시군요.”
“영수 편으로 두 번 정도 얘기가 오간 걸로 아는데 진전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영수라는 말에 형철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권영수, 김미옥 원더풀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그는 사실 권형철의 동생이었다. 하프들을 끌어모아 사업체를 차린 형철과는 달리 순혈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지라 갈라서게 된 친동생이었다.
“후우, 영수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형철이 한숨을 내쉬며 물어왔다. 아무리 갈라서게 된 상태라지만 친동생이었다. 더군다나 저 나이 먹도록 남자 하나 못 잡고 권력으로 어린 남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여 잡아먹는 귀신같은 여자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 어찌 걱정이 안 될까.
“으흥, 아주 잘 지내고 있지. 아무렴.”
김미옥 원더풀은 형철의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달뜬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어 댔다. 그 표정에 형철은 울컥해서 살짝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요.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죄송하지만 하프들을 백 명이나 모으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저희도 이제 막 조직이 커 나가는 시점인데 하프들을 백 명이나 잃게 되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지난번에 정찰조로만 보냈던 하프들 다섯이 죄다 격살당해 다른 하프 녀석들도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서 저희는 빠지겠습니다.”
지난번 보냈던 하프들이 죽은 것은 형철에게도 아쉬운 일이었다. 형철도 순혈로서 하프들을 그렇게 애정으로 보듬는 것은 아니었으나, 부하가 없어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물론 보상금을 많이 받았으니 괜찮았지만, 백 명은 역시 무리였다.
“아흥, 왜 그래에∼ 권 사장?”
김미옥 원더풀이 나이와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달뜬 모습으로 아양을 떨어 왔다. 색기가 올라오기는커녕 아침에 먹은 된장국이 올라올 지경이라 형철은 신경질이 이는 걸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꾹 눌러 담으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조직을 위해서입니다. VIP고객인 김미옥 원더풀님께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형철은 그 말을 하면서 동시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 이라는 신호였다.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덩치 큰 사내들이 서너 명 안으로 들어왔다.
“흐음……? 권 사장은 내가 그냥 아줌마로 보이나 봐? 이 애기들은 오늘 밤 내 잠자리 상대인가?”
그 말과 동시에 김미옥 원더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방에 들어온 장정들은 그 살기에 짓눌려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형철의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형철은 그 모습에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장정들을 물리곤 소파 뒤쪽으로 몸을 누였다.
“후우, 이렇게 협박을 하신다고 해도 못 하는 건 못 하는 겁니다, 김미옥 원더풀님.”
이건 솔직한 얘기였다. 조직이 요즘 사정이 좋긴 하나 하프를 100명이나 투입했다간 남아나는 게 없을 지경이다. 형철용역이 무슨 김미옥의 사설 부대도 아니고, 맡고 있는 다른 일들도 몇 십 가지인데 거기에 퍼진 애들을 다 불러들여 죽을 게 뻔한 사지로 밀어 넣으라니, 그건 돈이 좋아도 못 할 일이었다. 물론 액수만 맞는다면 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앞일을 생각하면 액수가 아무리 좋아도 고민되는 일인 것이다.
“후후, 내가 무조건 짓눌러서 일을 성사시키자고 여기 온 건 아니야. 나도 그렇게 경우 없는 여자는 아니거든.”
그 후 그녀는 살짝 혀를 날름 내밀어 입술을 핥더니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권 사장도 이제 하부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어?”
쿵.
순간 형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가 싶더니 강한 열망과 의심이 뒤섞인 눈으로 김미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
“하프들 데리고 계속 일해서 언제쯤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지금까지도 절대 안 된다고 뻣뻣한 태도를 보이던 형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민으로 휩싸였다. 그만큼 그녀의 제안은 매혹적이었다.
“후우,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어솔리티 진입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어솔리티(authority, 권세).
이능자들은 각기 자신의 사업체, 혹은 세력권을 가지고 세상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이 있다. 어솔리티는 이능자 세력의 꼭대기에 위치한 연합체로 상위에 속하는 이능자 세력이라면 어느 세력이든 이곳에 속하며, 속하길 바란다. 제국이라고도 부르는 이 세력에는 김미옥 원더풀이 속한 원더풀 테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그런 일로 거짓말이나 해서 널 꼬드길 인물로 보이는 모양이지?”
김미옥 원더풀이 히죽 웃으며 쥐라도 잡아먹은 듯한 새빨간 입술을 꿈틀거렸다.
“후우, 그건 아니지만, 믿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 어솔리티에 속하지 못하는 세력은 하부라고 불리며, 다른 이능자들의 지원을 받기도 어렵고 할 수 있는 일 또한 제한되어 있었다. 형철의 목표는 자신이 이끄는 조직이 이 어솔리티에 속하는 것으로서, 틈새시장을 공략하자는 생각에 이곳저곳에서 하프들을 긁어모아 이 정도까지 규모를 넓혔으나 아직까지도 어솔리티에 속하는 것은 요원한 목표였다.
그런 일을 단번에 진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그녀의 제안은 믿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