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3화
Part 7 습격 (3)
“마승철 원더풀님이 어솔리티 상부에 이미 발안을 했거든∼?”
순간 형철의 눈동자가 부릅떠지며 그녀를 응시했다. 마승철 원더풀, 어솔리티 내에서도 입지가 넓은 인물이다. 어솔리티 내에서 안을 제시할 수 있는 발안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세나투스(Senatus, 원로원) 또는 원로원이라 부르는데, 마승철은 원로원의 원로 신분을 갖고 있었다.
“그, 그게 저, 정말입니까?”
형철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말까지 벌벌 떨리며 흘러나오자 김미옥의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노괴에 대한 일은 어솔리티 내부에서도 최우선 안건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하거든∼ 그런데 말이야, 너도 이번 일을 겪어서 알겠지만 노괴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어서 말이야. 여기서 공을 세우면…… 알겠어?”
그 말에 형철의 얼굴에 고뇌가 어렸다. 조직원 100명의 희생으로 어솔리티 진입……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으나 어솔리티에 진입한 이후는 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진입 후에 일은 고민하지 마. 그것도 다 준비해 둘 테니까 말이야.”
그 말에 형철의 떨리는 눈동자가 한순간에 멈춰 섰다.
“이 일을 하고 싶어 할 다른 하부들은 많이 있어. 다만 권 사장의 실력을 내가 인정하는데다가 말이야…… 영수가 말이야, 어젯밤에, 아흥, 어찌나, 오호호홋!”
달뜬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김미옥 원더풀. 평소라면 인상이라도 찡그리며 속으로 구역질을 해 댔을 형철이었으나, 지금의 그에겐 그런 모습이나 목소리가 전혀 닿고 있지 않았다.
‘어솔리티…… 진입……!’
형철의 눈동자가 야망에 가득 차 싸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안 된다.”
“왜, 왜요!”
“안 된다면 안 돼!”
“그러니까 왜욧!”
“시끄러워!”
운상의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마치 고양이 같은 앙칼진 목소리로 되묻는 영희. 그리고 그 둘을 구석에 꿇어앉아 훔쳐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세명과 아영. 현재 집 안 풍경은 이러했다.
“오빠, 오빠, 우리 큰일 난 거지?”
“오빠가 아닙니다. 동갑입니다. 후우.”
세명 옆에서 함께 눈치를 보고 있던 아영의 말에 세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명은 속으로‘내가 경솔했다, 경솔했어.’를 연발하고 쉴 새 없이 한숨만 뱉어 내고 있었다.
“왜 바다에 가면 안 되지? 우리도 가는데……. 수장님 혹시 그랜드도터 콤플렉스 아냐?”
그랜드도터 콤플렉스. 아마도 시스터 콤플렉스나 파더 콤플렉스처럼 그랜드도터(Granddaughter, 손녀)를 응용한 모양이다.
“괜히 엉뚱한 신조어 만들어 내지 마시지요.”
아영의 엉뚱한 말에 세명은‘걱정하는 건 나뿐인가.’ 하고 중얼거리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속 편한 아영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걱정이 태산 같은 세명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거나 말거나 영희와 할아버지의 언쟁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왜 친구들이랑 바다도 못 가냐고요!”
“허, 할애비 앞에서 나이 타령을 하는 게냐?”
확실히 130살이나 먹은 할아버지 앞에서 나이 타령을 하는 건 조금 웃기긴 하다. 영희는 순간적으로 수긍해 버리고 당황해하면서도 반격에 들어갔다.
“그, 그래도 민증 나왔어요! 이, 이 나라의 법이 인정하는데?”
“그래도 안 된다.”
옹고집. 말이 안 통한다.
영희는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솔직히 영희가 떼쟁이 어린애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사고 친 것도 있는데다가 고작 근처 학원 가는 데 경호원을 붙일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가고 싶어.’
철수가 깨어나면 다른 연인들처럼 바다도 좀 가 보고, 같은 스터디 일원들한테 철수를 소개도 시켜 주고 싶다. 철수를 본 여자아이들이 던지는 부럽다는 시선도 한번 받아 보고 싶기도 하고, 평범한 애들처럼 놀기도 하며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생전 안 써 본 떼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영희를 보는 운상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철수 때문…… 아니, 덕분인가.’
영희가 철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다. 사실 그때는 노인들의 힘이 강력했기에 이능자들이 감히 영희의 정체를 짐작도 하지 못했고, 세력권에 근접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이런 제재를 가할 일조차 없었으나, 그때는 정작 중요한 영희의 마음을 신경 쓰지 못했었다. 영희와 노인들은 너무도 오랜 세월의 차이가 있었기에 감정적 교류를 맺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태종대 자살바위 위에서 정말로 영희를 잃을 뻔했다.
그 뒤로 남자 친구라고 나타난 어설픈 녀석이 영희를 또 한 번 구해 냈다. 게다가 지금은 영희를 지키기 위해 괴로운 수련까지 하고 있는 철수라는 어설픈 녀석. 그 녀석 때문에 그 어른스럽던 영희가 이렇게 제 나이대의 평범한 떼쟁이 여자아이가 된 것이 운상으로선 조금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
그래도 안 된다. 영희를 잃을 순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불안한 시기에 영희가 납치라도 당했다간…….
‘영희는 죽겠지.’
아무리 운상이 수장이라 한들 조직의 장일 뿐, 조직의 지배자는 아니었다. 영희에 대한 것은 조직에서도 최상위 인물들만 알고 있으며, 이미 영희와 같은‘문’으로 태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행동지침도 내려오고 있다.
빼앗기지 않도록 숨기고 지킨다.
그리고,
빼앗길 위험이 생긴다면 죽인다.
이것은 조직 내에서도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영희 한 명을 위해 이 세상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영희가 죽으면 문의 역할은 다른 아이에게로 넘어간다. 문을 빼앗길 바에야, 문을 옮기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니까 안 된다. 영희야.’
운상은 눈을 질끈 감으며 영희의 애처로운 눈길을 무시하고 안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하, 할아버지!”
쿵.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영희는 무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문 안으로 따라 들어갈 수 없어 망연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양보하기 어려운 두 조손의 모습을 보며 세명과 아영의 얼굴에도 안타까운 기색이 어렸다.
다음 날, 학원.
풀이 죽은 영희는 한숨을 내쉬며 못 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스터디 그룹 일원들을 찾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조금 일찍 와서 아직 다들 모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아, 바다…….”
영희의 한숨이 바다까지 닿을 듯 길게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아영이 영희를 뒤에서 슬쩍 안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가고 싶어요?”
뭉클.
로리거유의 명성에 걸맞은 거대한 부드러움이 등을 침식하기 시작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솔깃한 아영의 말에 영희는 발작하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방법이 있어?”
그 말에 아영이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그거야…….”
“이, 있구나!”
슬쩍 뜸을 들이는 아영, 그런 아영을 보며 영희가 벌떡 일어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아영이 괜히 어깨가 뻐근하다는 듯 어깨를 돌리면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니, 나 가슴 때문에 어깨가 결려요.”
그 말에 영희 일행 외에도 먼저 학원에 온 사람들―이라 말하고 사내들이라고 정정―의 눈길이 아영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명은 혀를 쯧쯧 차면서도 도대체 아영이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 둘의 대화에 청력을 집중했다.
“아, 그럼 그럼, 너처럼 가슴이 크고 예쁜 애는 어깨가 결리지. 암, 그렇고말고.”
영희는 그렇게 구박하던 아영의 어깨까지 주물러 주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아영이 좀 더 요구하면 가슴까지 주물러 줄 기세였다.
“자, 아영아, 이제 슬슬 방법을…….”
“흐흥, 그건 말이죠오…….”
꿀꺽.
다음 말을 기다리는 영희의 반응을 즐기는 아영,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들 몰래 가면 돼요.”
쿵.
뚜둑.
꽈아아악.
“꺄아아악, 아파요, 아팟! 제, 제발 놔주세요, 아, 안마로 가버렷!”
처음은 영희의 마음속에 바윗덩어리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 두 번째는 영희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 세 번째는 제어가 풀린 영희의 손아귀 힘이 날뛰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은 오징어처럼 몸을 꼬며 영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아영의 몸부림치는 소리였다.
‘개판이군.’
세명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악, 진짜예요. 거짓…… 꺄아악, 말 아니란 말이에…… 아앙, 좀, 살살…… 요. 조금 있으면…… 아아…… 세명…… 오빠네…… 사, 사부님…… 끄응…… 혼자 집에 있는단…… 말이에요.”
그 말에 방관하던 세명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사부님. 세명에겐 듣기 싫은 단어 Best3 안에 드는 싫고도 싫은 단어. 그 사부님의 이름은 조현태. 127세로 장로회의 막내. 84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장가를 가 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숫총각이었다.
점잖은 성격의 세명과는 생리적으로 절대 맞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제관계였으니.
“도, 도대체 왜 사, 사, 사, 사부님 얘기를!”
세명이 평소답지 않게 이처럼 흥분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미 영희는 방금 그 말을 듣고 아영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어깨에서 손을 뗀 지 오래, 아영은 아픈 어깨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죠오, 조직에서 이번 일 때문에 장로회에 대한 청문회를 열 예정이래요. 그 철수 오빠? 그 오빠에 대한 결정이랑 그 여파로 생긴 지금의 상황 때문에 조직 상층부에서도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라서요.”
철수의 일로 인한 여파. 이능자들의 무리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서도 큰 이슈거리였기에 세명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조치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장로회 전체에 대한 청문회까지 열리다니. 세명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게, 아무리 장로회가 조직 명령 체계에 속해 있지 않고 독자적인 집단이라지만 이번 일은 너무 독단적으로 진행을 했다 이거죠오. 감찰에서도 못 건드리는 장로회니까 별일이야 있겠나 싶지만 좀 피곤해질 거 같대요.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감찰부에서 찾아왔더라고요, 제가 정보부 쪽이었잖아요. 이런 건 빠삭하죠. 아구, 어깨야.”
아직도 어깨가 저린지 어깨를 툭툭 때리는 아영의 모습, 그 모습을 영희와 세명이 재촉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영이 헤헤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장로님들 중에 막내인 조현태 장로님이 여기를 지키고, 다들 청문회장으로 갈 거 같대요.”
쿵.
영희와 세명이 동시에 생각했다.
‘나이스.’
‘마, 망했다.’
화사한 영희와 다 죽어 가는 세명의 대조가 우스운 모양새로 이어지는 가운데 문 너머로 스터디 그룹 일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키득거리던 영희가 슬쩍 세명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분명 지난번에 내가 가면 상관없다고 그랬지? 오오빠아?”
오싹.
세명은 털이 쭈뼛 서는 걸 느끼며 질린 눈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세명의 입에서 한숨이 짙어졌다.
“여기란 말이지?”
어두컴컴한 동굴, 칠흑 같은 동굴 속에 꿈틀거리는 물체 몇 개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언니. 그 철수 오빠, 대법 준비할 때 한 번 와 봤거든요.”
아영은 1장로인 박금자의 제자인지라 철수에게 시행할 대법을 준비할 때 여기에 왔었던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셋은 할아버지들의 눈을 피해 이 비동(秘洞)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대법 도중에 깨워도 되는 겁니까?”
두 여자의 등쌀에 졸지에 공범 신세가 되어 끌려온 세명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재앙 같은 두 여자들이 무슨 짓이라도 벌이기 전에 말려야 하기에 여기에 있다는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그였다.
“으음, 못 깨워요. 스스로 일어나기 전까진 못 깨울 거예요.”
아영의 말에 영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냐. 내가 부르면 깨어날 거야, 철수는.”
“후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셋은 동굴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동굴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 저편으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어? 빛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니요∼ 바로 저기예요.”
아영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빛의 저편을 가리키자 영희가 빛을 향해 뛰어갔다. 세명과 아영도 얘기로만 들었던 철수가 저곳에 있다는 생각에 영희를 따라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저, 저 사람이 언니의…….”
동굴 천장의 틈으로 새어 들어온 빛이 동굴 공터의 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몸을 누인 사내의 얼굴. 그 얼굴을 보자 아영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자, 잘생겼군요.”
세명 또한 사내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영희는 이미 철수의 곁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영아, 세명아, 내 남자 친구야. 김철수.”
영희의 말에 철수에게 다가온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둘 다 반응이 미지근한 게 탐탁지 않았던 영희는 어느새 잔뜩 길어져 얼굴을 가린 철수의 앞머리를 뒤로 넘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