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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Part 7 습격 (4)


“어, 어머.”
아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심지어 세명조차 슬쩍 눈을 피했다. 철수의 얼굴은 여자처럼 생겨서 구분을 할 수가 없다거나 한 외모는 아니었다. 곱상하게 생겼으나 남녀를 혼동할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이 얇고 곱상한 외모에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어떤 마력에 가까웠다.
“이, 이 사람, 보, 보통 사람입니까?”
세명이 철수의 얼굴을 피하며 묻자 영희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당연하지. 철수가 왜, 이상해 보여?”
“그, 그게 아니라…… 기운이…….”
설명을 하려던 세명의 입이 영희의 고리눈을 보자 그대로 닫혀 버렸다. 세명 또한 설명을 하려 해도 정확한 걸 알 수가 없었기에 말을 잇는 걸 포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영은 세명의 짧은 말을 듣고 무언가 짐작했는지 간신히 인상을 찡그리며 철수의 얼굴에서 눈을 뗀 뒤, 영희에게 물었다.
“언니, 내 눈 좀 봐요.”
“응?”
그 말에 아영과 눈을 마주친 영희의 눈동자는 맑기 그지없었다. 철수를 바라볼 때도 평온했다. 아영과 세명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영희가 못 듣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당신도 느꼈습니까?
―반은 홀렸었어요.
저 정도면 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도화살……? 아니, 홍염살? ……잘 모르겠군. 방금 저까지도 정신이 흔들렸습니다.
―이성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끼치다니,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래도 영희 님한테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러게요. 하지만 좀 복잡해지겠어요.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영희는 철수의 곁에서 그의 귀에다 일어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아침이야, 일어나 철수야. 학교 가야지.”
하지만 철수는 반응하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철수는 지금 그냥 잠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철수야, 일어나. 니 여자 친구가 왔다고. 응?”
여전히 대답 없는 철수. 이에 영희의 부족한 인내심이 바닥나 버렸다.
“야! 김철수, 일어나라고!”
소리를 빽 지르는 영희. 하지만 철수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고, 영희는 흔들어서라도 깨울 작정인지 팔을 걷어붙였다.
“그만. 대법 중에 그렇게 과격한 행동은…….”
“아니∼요오. 어차피 몸은 그냥 자고 있는 거라서 괜찮아요. 어차피 스스로 깨어나기 전에는 안 일어날 텐데요, 뭘. 저 약물도 그냥 한 달간의 영양분 보급과 관절이나 근육이 굳지 않게끔 해 주는 역할일 뿐이고, 대법은 꿈속에서 이뤄져서 외부의 어떤 자극도 무방해요. 팔다리가 잘려도 안 깨어날 거예요, 아마.”
웃는 얼굴로 오싹한 소리를 해 대는 아영, 그 모습을 보면서 영희와 세명이 약간 질린 눈으로 속삭였다.
“쟤, 은근 이상해. 그치?”
“은근이 아니라 대놓고 이상한 것 같습니다. 조심하시지요, 영희 님.”
다 들으라는 듯 속삭이는 둘을 보며 아영은 팔짱을 껴 그 커다란 가슴을 팔 위에 턱 올려놓으며 목 관절을 풀더니, 누가 봐도 귀여운 표정으로 어깨를 흔들며 앙탈을 부렸다.
“으잉, 그러지 말아요오∼”
못 볼 걸 봤다는 듯 영희의 얼굴은 구겨지고, 세명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지만 워낙 프로텍트가 강한 둘이라 큰 반응은 없었다.
“쳇, 얼른 철수 오빠나 옮겨요.”
반응이 시원찮으니 아영도 아양 부리는 일을 때려치우고 철수를 옮기기로 했다. 그러했다, 셋이 여기에 방문한 이유는 1차적으로는 철수를 깨우고, 깨우지 못한다면…….
“납치, 납치∼”
아영의 신이 난 목소리에 세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느님, 맙소사.”
그렇게 셋은 철수를,
납치했다.

여름, 그리고 바다.
이건 남자의 로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 이름은 강태현, 27세, 취업 준비생. 취업이 언제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 인생의 황금기가 끝나 가고 있다는 것은 절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꺼지기 직전의 촛불은 그 어떤 순간보다 밝다고 했던가. 최근 들어 내 주변에 이리도 꽃다운 아가씨들이 모이다니, 그로 인해 과자 부스러기에 모이는 개미들처럼 단걸 바라고 모이는 여러 무리들로 인해 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여름의 추억 대작전.
저주받은 나의 네이밍 센스로 어렵게 지은 이 프로젝트는 아주 간단하다. 나와 같은 스터디를 하는 영희와 아영, 민지라는 여자애들과 민철, 세명이라는 사내놈 둘을 미끼로 모여드는 여자애들과 사내놈들을 이용하여 여름의 추억을 만들자는 계획이다.
의외로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나는 영희나 아영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영희는 그 철수라는 사람한테 푹 빠진 것 같고, 아영이는 애교가 많고 시시덕거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항상 일정 거리 이상은 접근하지도, 접근하게 하지도 않는다. 내가 노리는 건 민철과 세명에게 꼬이는 다른 여자애들. 그 외 사내놈들은 그저 은행일 뿐이다.
“허어, 그런데 말이지.”
신호를 기다리며 뒤를 돌아본 내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영희가 앉아 있고, 그런 영희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는 마스크를 쓴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사내의 이름은 철수. 영희의 남자 친구라고 한다.
‘혼수상태도 아니고, 무슨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병이라도 걸린 거야?’
슬쩍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곧 깨어날 거라고 하는 이 불편한 진실.
여하튼 목적했던 아영과 영희, 민지가 합류했고, 그 밖의 여자애들도 다른 렌트카에 다른 사내놈들과 함께 타 있으니 일단 철수란 사람만 제외하면 이 계획은 잘 굴러가고 있다. 철수란 사람이 깨어만 있다면 좋았을 것을,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래, 저 철수라는 사람도 문제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엄청나게, 어마어마하게 큰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운전하는 내내 날 괴롭히고 있는 터. 타이밍을 놓쳐서 물어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꼭 물어봐야겠다.
“저, 저기, 저 할아버님은 누구신지 여쭤 봐도 되니?”
“허허, 나 말이냐?”
하와이안 셔츠에 둥근 페도라를 쓰고 선글라스에 꽃무늬가 그려진 반바지에 쪼리까지 신은 완전한 여행객 패션을 한 자그마한 할아버지 한 분이 차 한가운데 떡하니 앉아 있는 광경이 신경 쓰이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나는 세명이네 할아버지다.”
“아니야!”
대답과 동시에 세명의 입에서 거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사, 사부님, 제, 제발.”
“허허, 할아버지래도. 그보다 난 저쪽 차에 타고 싶은데 말이야. 영희랑 아영이는 맨날 봐서 싫어. 특히 아영이는 금자 누나를 닮아서 왠지 무섭고. 쯧쯧, 그래도 민지라는 아가씨가 예뻐서 좋구먼.”
“아이, 할아버지, 되게 재밌으세요―”
“후후, 사부님한테 이를 거예요오.”
“허, 허헐! 아, 아영아, 그것만은!”
“근데 할아버지, 정말 127세 맞으세요?”
“그럼!”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저 할아버지는 일행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민지와 민철에게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 내가 부적응자인 건가, 아니면 이 차 안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 그럼 그 철수라는 분은 어, 언제 깨어나시니?”
“곧이요.”
영희의 즉답.
‘그, 그래, 곧 깨어나겠지.’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주입했다. 그래, 저 할아버지가 겉돌아서 불편한 분위기가 아닌 게 어디야. 배, 백이십칠 세…… 믿기 어렵긴 하지만 나랑 딱 100살이 차이 나는 저 할아버지가 내 경쟁 상대는 되지 않을 테니 분위기만 망치지 않는다면 나, 나쁠 것도 없지.
그리고 저 철수라는 사람. 그, 그래, 저 사람은 펜션 구석에 잘 숨겨 놓는 거야. 그리고 계획을 진행시키면 되는 거야. 세명이랑 아영이랑 저 할아버지도 영희랑 한통속인 것 같으니, 조력자가 네 명이나 있으니 괜찮다. 할 수 있다. 민지와 민철도 어느새 저 무리의 페이스에 휩쓸려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것 같다.
‘그, 그래, 어떻게든 될 거야. 그, 그보다 나에겐 원대한 꿈이 있으니까!’
그래.
이것은 남자의 로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두 대의 렌트카를 한참 몰아 도착한 곳은 해운대 근처의 개인 해변.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콩나물시루나, 사람 몸에서 우러난 육수 국물로 뿌연‘바닷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 우와아아악!”
태현은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언뜻 들으면 기쁨의 탄성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태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몸에서는 실망감의 오오라가 뭉게뭉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비키니 누님들은!’
솔직히 바다에 수영을 하러 가는가. 물이 좋아서 바다를 가겠는가. 비키니를 입고 몸매를 뽐내는 누님들과의 썸씽 생각에, 적어도 눈요기는 하겠다는 생각에 가는 게 해운대인데 개인 해변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태현은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은 표정으로 이 개인 해변의 주인이자 이번 여행의 물주인 영호를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우와, 여기가 다 너희 거야?”
“응, 아니, 내 거가 아니라 아버지 거.”
“어머♡”
영호란 녀석은 생긴 건 평범한 주제에 같이 온 여자애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개인 해변에 개인 별장까지 가진 집안이라니, 여자애들의 눈에는 이미 민철이나 세명은 보이지 않았다. 갑부의 오오라란 외모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건 계산 외다.’
태현은 중얼거리며 자신이 끌고 온 렌트카 쪽을 바라보았다. 신이 난 영희와 민지, 아영과 그 옆에서 킬킬거리고 있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자그마한 할아버지, 그리고 차 안쪽에 슬리핑 뷰티인지 잠만보인지 알 수 없는 마스크 사내. 요상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다.
“하아.”
여자애들을 다 영호에게 빼앗긴 다른 사내 녀석들은 이 조합을 보고도 침만 질질 흘리고 있다. 할아버지와 잠든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청초하고 노골적으로 예쁜 영희와 귀여우면서도 글래머러스한 모습으로 눈을 확 잡아끄는 아영, 둘에 비해 조금 처져 보일 수도 있지만 청순하면서도 은근 볼륨감 있는 외모에 눈웃음이 일품이며 둘에 비해 말 건네기 편할 것 같은 민지. 사내들의 눈에는 이 삼인방의 모습만 아른거리는 모양이었다.
‘쯧쯧,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봐 봤자 목만 아플 뿐이다.’
태현은 혀를 차며 영호에게 시선을 덜 주면서도 평범하고, 왠지 될 것 같은 여자애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마법사 탈퇴다.’
태현의 결심은 단호했다.

그렇게 차에서 일행들이 내리고, 잠든 철수의 몸은 세명과 아영, 할아버지에 의해 다른 일행들의 눈을 피해 빈방 구석으로 옮겨졌다. 영희는 철수가 얼른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얼굴이었으나, 강제로 깨우려고 하다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현태의 만류에 아쉬워하며 포기했다.
별장은 동이 두 개로 이뤄져 있진 않았지만, 꽤 넓고 방이 많아서 이인 일조 정도로 방을 잡으면 다들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철수와 할아버지를 포함해서 남자는 일곱 명, 여자는 영희, 아영, 민지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었다. 태현이 6:6이 되게끔 한 것이었는데, 현태의 난입으로 6:7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잠든 사람 덕분에 6:6이군.’
사실 할아버지한테 이런 걸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태현이었으나, 아까부터 철수 대신 내가 활동하겠다며, 그럼 6:6이지 않냐고 강하게 주장하는 현태로 인해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찌 되건 상관없어.’
비키니를 입은 여섯 명의 여자들을 보고야 말겠다. 태현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자, 그럼…… 바다로 고!”
우르릉 쿠르릉 쿠구궁.
쏴아아아아―
하늘에서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헐.”
갑작스럽게 내리기 시작한 폭우로 일행들은 바다에 나가기는커녕 펜션 안에 갇히게 되었다. 뉴스를 틀어 보니 갑작스럽게 내리기 시작한 게릴라성 폭우는 부산 지방에 내일 아침까지 내릴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으어어…….”
태현은 반쯤 좀비가 되어 물방울로 가득 찬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좌절하고 있었다. 꿈꾸던 빛나는 해변가 피서 계획이 이 게릴라성 폭우로 온통 망가져 버린 것이었다. 새까만 먹구름으로 날까지 어둑어둑 어둡기 그지없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어…….”
태현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번쩍―
쿠콰콰쾅!
“뭐, 뭐야! 불, 불!”
하지만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창밖이 백광으로 가득 차고, 거의 시간 차도 없이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아주 가까운 곳에 번개가 떨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펜션 전체가 정전되었다.
“헐.”
이게 몇 번째인가.
태현은 음산한 오라를 피우며, 종교인이 들으면 심장에 십자가를 꽂겠다고 달려들 정도로 신을 저주하는 어마어마한 신성모독을 중얼거리며 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으어어,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원망한다, 하늘아. 중얼중얼…….”
그런 태현을 제외하곤 다른 일행들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불이 꺼지자 남자들은 이 별장의 주인인 영호를 주축으로 양초를 찾아 1층 거실에 불을 피우고, 그곳으로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