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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마루가 마차에서 내리자 화려하게 성장한 몇몇 귀부인들과 아가씨들이 들어가다 말고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마부의 시중을 받으며 내리는 마루의 모습은 전형적인 귀족가의 복식인데다 보기 드물게 환하고 단정한 용모라 여인들의 눈길을 끈 것이다.
현재 금미달의 머리 유행은 꼬불꼬불한 권발(卷髮)이다.
나파에서 넘어온 머리 모양으로, 남자 귀족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부러 꼬불꼬불하게 만든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다닌다.
그에 반해 마루는 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려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게 뒷머리 중간에서 묶어 버려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이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여타의 남자들과 확연히 비교되며 쉽게 눈에 띈 것이다.
여하튼 잘 치장된 고급스러운 마차에서 내린 마루는 기품있는 행동과 용모만으로도 지체 높은 귀족가의 자제로 보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회원들만 출입하는 이곳 출입구는 검은색의 흉갑을 착용한 기사들과 경갑의 중무장한 많은 수의 병사들이 출입구 양쪽에 서서 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하고 있었다.
금미달은 대낮에도 암살과 습격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경호를 위해서 실력있는 기사와 사병들을 대동하고 다녀 출입구의 경비병들은 사실상의 전시용에 불과했다.
마루는 출입구로 다가가 예복을 입은 경기장 직원에게 금장의 회원권을 내보였다.
“이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직원은 당연한 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정중하게 맞이했다.
“나리, 하인을 붙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네. 방향만 알려 주게. 이리 들어가면 되는 건가?”
직원이 몸을 틀더니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나리, 이쪽입니다.”
“고맙네.”
“나리,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자네도 수고하게.”
귀족이 아니네, 심부름을 왔네 하는 둥의 말을 하면 직원하고 한동안 실랑이를 하거나 돈을 건네야 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귀족 행세를 하는 게 귀찮음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루가 대놓고 나 귀족이야라고는 할 수 없다. 귀족 사칭죄는 극형이기에.
그저 상대가 귀족으로 여기게끔 말과 행동을 하면 된다. 이건 상대의 일방적인 오해지 마루는 함부로 하대한 것 말고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빨간 양탄자가 깔린 대합실과 계단에는 검투사 경기장을 상징하는 검과 방패를 든 근육질 검투사의 부조와 동상이 갖은 자세를 취한 채 세워져 있었다.
마루는 난생처음 와 본 경기장 내부의 화려한 모습에 감탄했다.
‘멋지긴 하군.’
계단을 오르자 금색의 문들이 보였다.
검투사의 부조가 붙어 있는 문에는 빨간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귀족을 수행해 온 기사들이 각기 가문의 문양이 은으로 상감이 되어 있는 화려하고 멋진 흉갑을 걸친 채 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기사와 시종들은 분주하게 복도를 오갔다.
마루를 본 기사들과 시종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좌우로 갈라져 길을 만들어 주었다.
마루를 귀족으로 여기고 대하는 행동들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곳은 절대로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사들이 우글거리는군.’
가문의 상징을 은으로 마감한 흉갑을 착용한 절도있는 기사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마루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걸었다.
동쪽에는 황전준평이란 이름이 붙은 귀빈실이 있었다.
황전준평은 역대의 유명한 검투사의 이름이다.
황금색 문 앞에는 기사와 시종이 마치 정물인 양 서 있었다. 황금색의 문에 적혀 있는 표시와 회원권의 표시가 일치하자 마루는 문으로 다가갔다.
기사들은 낯선 얼굴이 다가오자 황전준평의 담당 시종을 쳐다보았다. 시종은 기사들의 눈짓을 받자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모르겠다는 뜻이다.
마루가 문 앞에 서서 회원권을 내보이며 시종에게 물었다.
“이보게, 이게 여기가 맞는가? 내가 이곳에 처음이라서 한참을 찾았거든.”
일부러 그러는지 기사들이 경계하며 검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 봐야 고작 평검사들이고, 더 쳐준다 해도 경검사다.
평검사는 진기를 모르는 검사다. 그래도 몸을 단련하고 검법을 익혀 기교가 보통 사람들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
경검사는 기공을 익혀 진기를 몸에 담고, 그로 인해 신체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경검사부터는 기사가 될 수가 있다.
기검사는 외물에 진기를 담아 이를 외부로 표출할 수 있는 경지다.
또한 진기를 이용하여 몸을 빠르게, 그리고 오랫동안 체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진기로 검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요, 진기를 유형화하여 외부로 구사할 수가 있다.
실전이라면 경검사 수십 명이 덤벼도 기검사 한 명을 당할 수가 없다. 병기의 이점, 즉 술법검이나 진철(眞鐵)로 만든 병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만큼 기검사와 경검사의 차이는 크다 할 수 있다.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대선 왕국은 전통적으로 검사보다 학자적인 특색이 강한 술법사들을 우대했다. 그래서 나파 강점 전만 하여도 귀족들이 기검사 급의 검사들을 기사로 데리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에 비해 나파는 오랜 내전의 영향으로 술법사는 물론이고, 검사들이 대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성되었다.
일례로 대선 왕국이 보유한 기검사가 근위기사들을 합쳐 500여 명이라면 나파 제국은 10배 더 많은 5,000명이나 되었다.
단순하게 수치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대선 왕국과 나파 제국의 전력의 차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지금 마루는 검이 없다.
하지만 진기를 운용하는 데 있어 이들과는 격이 다르다. 이들이 먼저 움직인다 하여도 얼마든지 피하고 나아가 공격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만약의 상황이 벌어진다 하여도 이들 기사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금장 회원권을 받은 시종은 어깨너머로 보이는 기사에게 마루도 겨우 알아차릴 정도의 미약한 고갯짓을 하였다.
그제야 기사들은 움켜쥐었던 검의 손잡이에서 힘을 풀었다.
“그렇습니다. 여기가 맞습니다. 나리, 이쪽으로 드시지요.”
시종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마루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마루가 뒤를 돌아보니 기사들이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마루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저항군의 암살이 쉴 새 없이 이루어지는 상황.
나파의 귀족들과 친나파인들이 거의 매일이다시피 암살을 당하자 수도 금미달의 치안은 매우 불안해졌다.
이러한 이유로 귀족들을 지키는 기사들은 자신의 주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낯선 인물은 일단은 경계하고 보는 게 당연했다.
마루는 이들에게 아주 낯선 인물이었다.

귀족들의 사교 장소답게 귀빈실의 내부는 매우 호화로웠다.
금장식과 은장식으로 꾸민 실내의 전면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 앞으로 경기장을 관람할 수 있게 배치한 의자는 귀족들의 서재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청목 소재였다.
그 뒤로는 서로 마주 보며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의자와 낮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의자에는 두 명의 여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 오른편에는 요리를 준비하는 요리사와 담당 직원이 서서 들어오는 마루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루는 직원에게 가지고 왔던 상자를 넘겼다.
“어머, 못 보던 청년이네? 어느 댁에 자제분이시나?”
두 여자 중 30대로 보이는 여인의 호기심 어린 말이었다. 그 여자는 아름다웠고 기품이 있었으며 또한 매우 요염했다.
그 이유가 아마도 빨갛게 칠해져 있는 입술과 그 입술 옆에 붙은 점 때문인 것 같다고 마루는 속으로 생각했다.
“남조문웅 님에게 자제분이 있었나?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는 분이라 가족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장성한 아드님을 숨겨 놓고 있었네.”
직원에게 과자 상자를 건네는 것을 보았음인지 나이 든 여자는 수다스럽게 말했다.
사교계에서 수다스럽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해 그만큼 듣고 보는 것이 많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보아 무척 자신만만해 보이는 이 여자는 수다스러운 만큼 발이 넓고, 입김이 만만치 않다는 걸 마루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런 여자에게 찍히면 금미달의 사교계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 것이다. 한마디로 매장당하는 것이다.
마루는 두 여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남조문웅 님이 운영하는 한가람 제과점의 지배인 마루라고 합니다. 오늘 남조문웅 님이 몸살이 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제가 대신 왔습니다.”
그 말에 나이 든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웃음을 짓고는 마루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입술 옆에 붙어 있는 점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 말이 없던 젊은 여자의 입이 열렸다.
“명화라고 합니다.”
“마루입니다.”
‘명화?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군. 흔한 이름이어서 그런가?’
그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입가에 점이 있는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명화 아가씨는 내무대신인 신정 후작님의 외동딸이지요.”
‘내무대신이라면…… 신정영효?’
신정영효는 나파군이 대선을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왕도로 진군하자 제일 먼저 국왕에게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주청한 인물이었다.
당시엔 이미 대항할 전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왕실을 보존하고 당장의 희생과 피해를 막기 위해선 불가피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신정영효는 대선 국민들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그가 그 누구보다 앞서서 대선의 수탈과 폭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매국노이자 친나파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정명화? 그렇다면 이 여자는 신정명화와 붙어 다니며 기이한 소문을 양상하고 있는 연화란 백작?’
연화란은 끝내 항복을 하지 않고 나파 제국군을 맞이하여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은 연남건 공작의 유일한 혈육이다.
연남건 공작의 가문은 대선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호국 가문으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 왔다.
이러한 호국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 척살 대상 1순위이며 매국노의 수장인 신정영효의 딸과 어울리는 것을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루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루의 상념을 깨듯 명화가 말했다.
“남조문웅 님이 거동을 못하실 정도로 몸이 안 좋으시다니 걱정이 되는군요.”
“호호호, 몸살에 걸려 고생하다가 살이 쭉 빠져서 좋아 죽던 어느 백작 부인이 기억나는군. 명화, 그렇게 걱정이 되면 법의라도 보내지그래.”
법의는 병 치료만을 전문으로 하는 술법사다.
술법만으로는 부족한 외과적인 수술도 병행했으며, 실제로 그들이 집도하는 외과수술은 놀라울 정도로 치료 효과를 발휘하였다.
술법과 신전에서 나오는 성약만을 의지하던 기존의 치료에서 근본적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새롭고도 획기적인 치료법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법의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났다.
연화란의 음성은 뭔가를 자극하는 끈적끈적하고 퇴폐적이었다. 달리 말하면 천박하고 음탕했다.
‘이제 연가도 당대에서 끝나는 건가?’
연가가 망하든 말든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루는 문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가문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