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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렇다. 적린괴우의 단단한 비늘도 기검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아니, 검투사가 작살창을 쓰니, 기창사라 할 수 있었다.
순간, 두 여자의 시선이 몰려오자 마루는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진정을 했다. 다행히 두 여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진동하는 가운데 말을 스쳐 저돌적으로 달려 나가던 적린괴우가 서서히 멈추며 돌아섰다.
적린괴우는 자신의 몸에 이물질을 박아 넣은 검투사에 대한 적개심으로 더욱 성이 났는지 콧김을 세차게 뿜어대었다.
“여기서 보니까 적린괴우가 그다지 무섭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경검사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제압할 수 없는 괴수야.”
달리 말하면 오로지 기검사만이 적린괴우를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연화란은 과자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도 잘도 말했다.
연화란의 말이 아니더라도 마루의 시선은 연신 가벼우면서 짧은 움직임으로 몸을 피하는 말과 검투사의 몸놀림을 쫓고 있었다.
마루가 보기에는 들이받을 것 같은데도 아슬아슬 하게 피한 말과 그 말을 이끄는 검투사는 참으로 대단했다.
“그러나 적린괴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해. 지배인은 그게 무엇인지 알겠어?”
연화란의 질문에 마루는 금방 대답할 수 있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전까지는 직진밖에 못한다는 점이겠죠?”
“맞아. 그게 바로 적린괴우가 상위의 괴수임에도 기검사에게는 허망하게 당하는 이유야.”
그때, 명화는 마루가 손수 만든 연양갱을 집어 들었다.
그사이 검투사는 2개의 작살창을 적린괴우의 옆구리에 박았다.
하얀 백마는 검투사를 태우고 적린괴우를 희롱하듯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옆으로 걷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검투사들은 말을 자기 마누라보다 더 아낀다고 하더라고. 집에 불이 나면 마누라보다 말을 먼저 구한다고 하니까 말 다 한 거지. 실제로 말과 한 몸이 된 저 모습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해.”
마루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남편이 자기가 아니라 말을 먼저 구한다면 이 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닌 게 아니라, 검투사는 고삐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의 행동을 통제하며 움직였다.
‘저렇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야 되나?’
이제 검투사는 말과 함께 적린괴우의 옆구리에 바짝 붙어 달렸다.
관중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위험한 행동이었다.
만약 저 커다랗고 육중한 적린괴우가 조금이라도 몸을 틀게 되면 말은 물론이고, 검투사는 그대로 나가떨어지리라.
그러나 적린괴우가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전까지는 직전밖에 못한다는 단점을 알 리가 없는 관중들은 그 위험한 행동에 더욱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적린괴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괴수다.
뿔 공격과 날카로운 이빨을 피하는 말의 몸놀림과 혼연일체가 되어 작살창을 박아 넣는 검투사의 모습은 너무도 절묘하고 신기에 가까워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최고다!”
“검투사 만세!”
그러는 사이 적린괴우는 옆구리에 여러 개의 작살창을 허용했다.


제4장 또 하나의 신분



크어어엉!
작살창을 맞은 적린괴우는 더욱 큰 괴성을 지르며 말을 공격하려 콧김을 뿜으면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에 비해 말은 너무도 빨랐다.
팍!
또 하나의 작살창이 적린괴우의 몸에 박혔다.
크어엉!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적린괴우가 연신 괴성을 터뜨렸다.
던지는 게 아닌, 적린괴우의 단단한 비늘에 직접 손으로 작살창을 꽂으려면 그만큼 검투사의 실력이 뛰어나야 했다.
또 목숨을 걸고 적린괴우의 곁에 다가가야만 하니 용기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실력이 좋고 담력이 대단하더라도 적린괴우의 뿔과 이빨에 단 한 번이라도 공격을 받는다면 말이나 사람이나 끝장이다.
“다섯 개의 작살창을 사용하여 적린괴우의 목숨을 끊어야 하는데, 그래도 적린괴우가 죽지 않으면 검투사는 말에서 내려 여섯 번째의 작살창을 들고 단신으로 싸워야 해.”
명화는 다섯 개째의 연양갱을 집어 들었다.
다섯 번째의 작살창이 적린괴우의 옆구리를 파고들자 장내는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와아!”
다섯 개의 작살창을 맞고도 적린괴우는 말과 인간을 못 잡아서 분한지 콧김을 내쉬며 씩씩거렸다.
이윽고 검투사가 말에서 내렸다.
검투사는 작살창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장난감처럼 회전시키면서 적린괴우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검투사는 자신만만했다.
검투사가 오른손에 작살창을 들고 왼손으로는 적린괴우를 현혹시키는 빨간 천을 흔들었다.
그때까지 지쳐서 가만히 있던 적린괴우가 검투사의 도발에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조용하던 장내에 여자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끼악!”
하지만 비명과는 달리 검투사는 유연하고 멋진 모습으로 적린괴우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적린괴우의 목에 작살창을 박았다.
검투사를 스쳐 달리는 적린괴우의 목에는 어느새 중간의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이 들어간 작살창이 보였다.
적린괴우는 결국 그토록 적대하던 말과 인간을 짓이기지 못한 채 쓰러졌다.
“와아! 검투사 만세!”
“만세!”
관중들이 원하는 대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검투사는 한 팔은 뒤로, 한 팔은 옆으로 벌린 채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응원에 대한 답례를 했다.
그런 검투사의 위로 형형색색의 꽃과 붉은 손수건들이 쏟아졌다.
“어때! 볼만해?”
“처음엔 다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되더군요.”
“솔직해서 좋네. 그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야. 이곳은 내면에 숨겨 놓았던 악의 본능을 확인하는 장소나 마찬가지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검투사가 되고 적린괴우가 되어 체험을 하는 거야. 경기가 끝나면 누구 할 것 없이 절정을 느낀 사람들처럼 마구 떨면서 희열을 느끼지. 봐, 저 사람들을!”
위대한 가문의 유일한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나른한 관능미를 소유하여 퇴폐적으로 보이는 연화란.
그래서인지 첫인상은 왠지 천박해 보였다.
그러다 또 이렇게 진지하다 못해 적나라하게 사람의 본성과 치부를 들추기도 한다.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다. 뭐가 있어 보이긴 한데 말이다.’
그러는 중에도 관중은 미친 듯이 열광했다.
‘명화는? 이 여자도 희열을 느꼈을까?’
마루가 고개를 돌리니 명화가 깜짝 놀란다.
“어머!”
“이봐, 처녀 애 떨어지게 만들 셈이야? 호호호.”
마루는 연화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입을 열어 호들갑을 떨고 싶지가 않아 그저 웃고 말았다.
명화는 어느새 여섯 개의 연양갱을 먹었다.
나머지 경기도 보고 가라는 연화란의 점잖은 협박이 있었지만, 다행히 명화의 만류로 나올 수가 있었다.
솔직히 마루는 경기도 그렇지만 은은하게 과일 향기를 풍기는 명화와 조금 더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남조문웅과 제과점이 걱정되어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제과점에 돌아와 보니 남조문웅은 언제 몸살이 났나 싶을 정도로 아주 쌩쌩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명화가 보낸 법의가 치료를 잘해서 그랬다는데, 마루는 다행이다 싶었다.

*
*
*

“왜 아무 말도 안 해?”
남조문웅의 말에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연화란이 몸을 일으키더니 과실주를 든 잔을 들었다.
“잘생겼더군요.”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연화란이 남조문웅의 유리잔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성실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과실주를 채운 연화란이 남조문웅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주 다정한 눈길이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요?”
남조문웅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나게 해 달라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그래서 물어보는데 왜 딴소리야?”
“당신이 하도 칭찬하기에 그냥 얼굴 한 번 본 거예요.”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굳이 연극까지 하면서 그럴 필요는 없었잖아.”
연화란이 단지 마루를 보려고 생각했다면 자신을 거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방법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도 굳이 자신을 제외하면서까지 마루를 경기장에 부른 까닭이 남조문웅은 매우 궁금했다.
연화란은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다시 남조문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남조문웅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잠자리에 들기 전인지라 그녀가 걸친 옷이라곤 얇은 침의가 전부였다. 그 얇은 천 사이로 연화란의 탄력 넘치는 살결이 느껴졌다.
“조경하는 요즘 어때요?”
뜬금없는 소리였으나 남조문웅은 순순히 대답했다. 남들에겐 가볍게 보일지라도 그를 대하는 연화란은 항상 진실했고, 감정에 충실했다.
“꽤 열성적이더군.”
“…….”
“도대체 왜 그러는데?”
“이제 슬슬 후임을 염두에 두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
남조문웅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연화란이 고개를 들었다.
정색한 남조문웅이 물었다.
“그러면 마루를 보려 한 것은 내 후임으로 적당한지 그걸 알아보려고 한 것인가?”
“그래요.”
“마루는 내가 저항군인지 몰라.”
“그러니까 이제 밝혀야지요. 그러는 편이 마루에게도 좋지 않을까요?”
“글쎄…….”
“왜 망설여요? 설마 이번의 거사가 부담되어서 그러나요?”
“…….”
“당신…… 불안해하는군요?”
남조문웅이 고개를 들고는 연화란의 시선을 받았다. 잠시 시선을 마주친 남조문웅이 자연스럽게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회피했다.
“당신답지 않아요.”
술잔을 내려놓은 남조문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그 아이를 끌어들인 것이 후회가 돼. 내가 아니었다면 남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물론 나파인의 노예로서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겠죠.”
“이거, 말에 가시가 박혔는데…….”
“마루를 생각하는 당신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에게 마루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
“조경하는 어때요?”
남조문웅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화란을 바라보는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는군.”
“조경하가 다소 독선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추진력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어요. 물론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요. 사려 깊은 명화가 뒤를 받치면 좀 더 안정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품성은 당신이 차츰 가르치면 되고요.”
“그렇게까지 조경하를 생각하는 진짜 이유가 뭐야?”
“당신은 모르겠지만, 조경하가 마루를 의식하고 있어요.”
“그놈은 마루를 본 적도 없잖아?”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에요. 그는 당신을 보다 잘 알기 위해, 그리고 신임을 받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요.”
“…….”
“딱히 하자가 없다면 조경하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조직과 마루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해요.”
남조문웅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