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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찾으셨습니까?”
“그래, 앉아라.”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독서를 하는 게 남조문웅의 취미다.
창문 바로 앞에는 차탁이 있고, 그 위에는 뜨거운 홍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고 있었다.
마루가 앞쪽의 의자에 앉자 남조문웅이 잔에다 직접 끓인 홍차를 따라 주었다.
마루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자 남조문웅이 입을 열었다.
“상공부 차관인 궁본병무라는 자가 있다. 내무대신인 신정영효가 매국노의 수장이라면 이자는 바로 그 밑이라 할 수 있지.”
“예.”
“이자가 군수물자를 담당하는데, 아주 열성적으로 뇌물을 받아 챙긴다고 하더구나.”
“그자를 작업합니까?”
“그래야겠다.”
처음엔 도둑질을 시켰다.
도둑질도 저항군의 소행으로 여기게끔 행세했다. 하지만 저항군은 도둑질만 하고 가지 않는다.
그래서 매국하는 친나파인들은 없앴다.
그때부터는 강도가 되었다.
마루는 천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남조문웅은 저항군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게 미안해서 하는 일이라 하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을 마루는 느끼고 있었다.
나파인인 남조문웅이 친나파인들에게 왜 적대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루는 재물도 털고 국민들을 수탈하는 친나파인 관리와 귀족들을 제거하는 저항군으로 행세하는 게 재미가 있었다.
남조문웅의 지시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거기에 그럴듯한 이유가 붙는다면 작업에 임하는 자세가 아무래도 다른 법이다.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다.
남조문웅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찻잔을 내리기를 기다려 마루가 물었다.
“이번 작업은 어디에서 합니까?”
목표에 대한 정보는 사전에 남조문웅이 조사하여 알려 주었다. 어떻게 알아내고 조사하는지 모르겠지만, 남조문웅은 목표의 성격이나 취미, 그리고 은밀한 사생활까지 자세히 파악하여 가져왔다.
그 정보로 인해 마루의 작업은 한층 안전하고 성공적이었다.
이를테면 남조문웅은 정보를 담당하고 마루는 행동조인 것이다.
“자택입니까, 아니면 별장입니까?”
“아니, 이번에는 외부에서 작업한다.”
“외부에서요?”
‘금괴라도 옮기나?’
게다가 상공부 차관이라면 호위도 만만치 않을 게다. 요즘 들어 친나파인들에 대한 암살이 끊이질 않아 이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했을 텐데…….
‘과연 내가 그 호위를 뚫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마루는 혼자서는 좀 버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조문웅이 시킨 이상 반드시 실행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가겠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아니야. 궁본병무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달라. 아마도 습격에 대비하여 나름대로 단단히 방비를 했을 것이야.”
사실 지금까지 마루가 침입하여 제거했던 자들은 친나파인들 중 그다지 비중이 낮으면서 온갖 패악을 저지르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호위와 경계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술법사들의 실력도 변변치 않아 마루의 실력으로 침입하여 훔쳐 오기에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호위와 술법사가 있다면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격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장소는?”
“그놈이 자주 가는 별장이 있다. 그 별장으로 가는 길을 조사한 후에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루는 궁본병무에게서 탈취할 게 무어냐고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남조문웅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이거…….”
남조문웅이 배낭을 올려놓았다.
“네 몫을 조금 더 넣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 모아 두어라.”
“전에 받았던 몫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남조문웅은 항상 훔쳐 온 돈의 일 할을 마루 몫으로 주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 적지 않아 제과점 몇 개를 차릴 정도의 금액이 되었다.
“나중 일은 모르는 법이다. 그러니 여러 말 말고 받아 두어라.”
남조문웅이 정색하고 말하니 마루는 더 이상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면 받아 두겠습니다.”

*
*
*

조금 길게 아침 수련을 마친 마루는 수욕을 하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상공부 차관인 궁본병무 백작을 털자는 말이 나온 지 한 달이 흘렀다. 하지만 남조문웅은 무슨 생각인지 이후로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원래 그의 성격상 남조문웅이 지시하면 주저없이 행동하는 터라 이제 와서 어떻게 됐느냐고 묻기도 뭐했다.
‘어쩌면 그만큼 궁본병무를 터는 게 힘들다는 뜻인지도 모르지.’
초조한 것은 아니나 시일이 점점 늦어지니 긴장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 수련은 다소 길게 가졌다.
솔직히 마루는 대선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나 조국을 위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을 키워 주고 가르쳐 준 남조문웅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수욕을 마친 마루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련이 길었는지 벌써 종업원 유선애가 나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 청소를 빼먹었다. 이런 실수는 처음이었다.
“지배인님, 잘 주무셨어요?”
“그래. 선애도 잘 잤어?”
“예.”
돌아보니 이미 그녀가 청소를 했는지 내부가 깨끗했다.
“선애가 청소한 모양이네?”
“예, 지배인님. 오늘 늦잠 잤지요?”
“후후, 요즘 들어 내가 게을러진 모양이구나.”
“차라리 잘되었어요. 그동안 지배인님이 청소까지 도맡아 하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불편했는 줄 아세요?”
“저런, 그랬어?”
“앞으로는 제가 청소할 터이니 지배인님은 좀 게으름도 피우시고 그러세요. 지배인님이 너무 열심히 일하시면 저희는 염치가 없어 얼굴을 들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러면 선애와 다른 직원들이 힘들지 않을까?”
“별로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힘들 리가 있나요.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요.”
“그러면 그렇게 하자. 대신 힘들면 언제라도 말하고.”
“예.”
유선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마루는 곧 그만의 작업실로 향했다.
오늘은 주인인 남조문웅이 검투사 경기장에 가는 날이라 귀빈실에 들고 갈 그만의 수제품인 특별 연양갱과 과자를 준비해야 했다.
그가 새로 개발해 낸 연양갱은 식물과 꽃잎에서 추출한 색소를 가지고 만들었다.
손이 더 가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일이었지만, 막상 연양갱이 무지갯빛으로 완성되자 기분이 흐뭇했다.
“색이 아주 잘 나왔군.”
화려한 색감의 무지갯빛 연양갱은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과자는 이번엔 먹을 사람을 위해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예쁘고 모양 좋은 것들로만 골라서 잘 포장했다.
마루는 유선애에게 시킬 수도 있는 일을 자신이 나서서 하면서도 무척 즐거웠다.
포장을 마치자 남조문웅이 내려왔다.
남조문웅이 총독부가 아닌 헌병대의 장교들과 어울리자 태호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나파 제국의 지휘관 중 한 명이 남조문웅의 형이라는 말이 귀족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마침 그 사령관의 성도 남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파의 고위층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모습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고, 또한 친나파 귀족들이 자주 찾는 모습에 소문은 거의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남조문웅은 학식과 인망이 두터웠으며, 인정도 넘쳐서 나파인과 대선인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다.
간혹 제과점에서 일하는 직공들과 연관있는 사람이 경비대나 헌병대에 연행될 때마다 찾아가 방면에 힘을 써 주기도 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말이 들리면 남조문웅은 손을 써서 그들이 풀려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파인에게나 대선인에게나 남조문웅은 언제나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남조문웅이 제과점 주인이라는 얼굴과 신분 외에도 또 다른 얼굴과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마루 역시 모르는 사실이었다.
“주인님, 오늘은 색다르게 만들어 봤습니다. 드셔 보시고 평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전에 말한, 색을 입힌 연양갱인가?”
“그렇습니다.”
“음, 색감이 아주 좋구나.”
마루가 건네주는 연양갱을 한입 베어 문 남조문웅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맛도 아주 좋다. 잘 나가겠다.”
“사실 색만 입혔다뿐이지 맛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야. 꽃잎에서 추출한 진액과 원래의 맛이 섞여져 한층 고소하고 입에 달라붙어.”
“그렇습니까? 전 그다지 차이를 못 느끼겠던데요?”
“만들면서 먹다 보니까 미각이 둔해진 게지.”
“그래도…….”
“아,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게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출발하자.”
“예?”
“너도 같이 가자고.”
“전 여길…….”
“네가 없다고 제과점이 문 닫지는 않으니까, 일은 갔다 와서 보고.”
“…….”
“뭐 해? 안 갈 거야?”
제과점 밖으로 발을 내민 남조문웅이 재촉하자 마루는 할 수 없이 마차에 올랐다.

*
*
*

귀빈실 앞에는 지난번에 왔을 때 본 기사들과 낯선 기사들이 뒤섞여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와 있는 모양이었다.
남조문웅을 알아본 기사들이 분주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남조문웅 님을 뵙습니다.”
“그래, 모두들 수고가 많네.”
남조문웅도 가입한 이곳 황전준평의 귀빈실 회원들은 다른 귀빈실의 회원들과는 좀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굳이 회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친나파 귀족과 권력의 연줄을 잡으려는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졌다.
그중에는 작위는 있지만 영지가 없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자리에 책임자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귀빈실에 그러한 사정을 지닌 인물들이 모였다는 것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명화는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연화란 백작도 미소를 지었지만, 그 대상은 아무래도 마루가 아닌 남조문웅 같았다.
“어서 오세요, 남조문웅 님.”
“어서 오십시오.”
귀빈실에는 명화와 연화란 외에도 다섯 명의 남자가 있었다. 네 명은 남조문웅과 비슷한 연배였고, 한 사람만이 30대 초반이었다.
남조문웅은 그중 네 명의 남자와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눴는데, 친밀한 사이인 듯 아주 오랫동안 눈을 마주쳤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는 사이라 해도 좀 지나치게 진지한 인사라고 마루는 생각했다.
“윤 백작, 와 줘서 고맙네.”
“자네가 부르는데 감히 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맛있는 연양갱을 안 줄 테니 만사 제쳐 두고 와야지. 하하하!”
남조문웅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윤정세가 호탕하게 웃었다. 비록 옷차림은 귀족들의 입는 평상복을 입었으나 체격이나 풍기는 분위기가 용병의 자유분방함을 닮아 있었다.
하나 용병의 신분으로는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니, 아마도 귀족이리라.
마루는 그렇게 판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