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0화


“먼 길에 수고 많았네.”
남조문웅이 윤정세라는 사람 옆에 있는 30대 초반의 사내를 치하하였다. 어디 지방에라도 다녀온 듯했다.
“별말씀을......”
이목구비가 단정한 사내의 지나치게 짧은 말이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침 고개를 돌린 사내가 마루를 응시했다.
마루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했다. 하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내는 이미 얼굴을 돌린 뒤였다.
마루는 다소 멋쩍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금미달의 세도가들만이 온다는 검투사 경기장에 나 같은 촌놈이 오다니, 오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군.”
“윤 백작, 나중에 좋은 날을 받아 정식으로 초대하겠네.”
“그 좋은 날이 언제인가?”
“신전의 사제들이 돌아오는 날이지.”
“어이구, 그때까지 죄 많은 이 몸이 살아 있으려나.”
다른 중년인이 냉큼 말을 받았다.
“왕도 수비군만큼 편한 곳이 어디 있나? 별다른 일만 없다면 아마 벽에다 똥칠할 때까지 살 걸세.”
“문 백작, 차라리 저주를 하게.”
“하하하!”
마루만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면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윤정세와 문철진 일행은 대선의 귀족이자 국경 지역의 영지를 가진 백작들이었다.
그들은 제국에 항복을 했고, 제국은 이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작위를 유지하게 해 주었으며 군직을 주었다.
왕도 수비군의 병참 직이다.
병력에 대한 지휘권도 없으니 생색을 낼만한 적당한 자리였다. 가까운 곳에 두고 감시하기에도 용이했다.
문철진 백작의 말대로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나이 든 귀족의 군직으로는 세상 편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들은 평생을 변경에서 보낸 귀족들이다. 비록 몸은 편할지 모르겠지만, 마음마저 편할 리가 없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마루가 듣기에는 친한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처럼 허물없는 대화였다.
그때, 연화란이 나섰다.
“자, 신사분들.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에 앉아 말씀을 나누시지요. 곧 경기가 시작된답니다. 윤 백작님, 드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아이고, 연 백작님! 누구 죽일 일 있습니까? 안 그래도 나파의 개라는 소리를 들으며 날이면 날마다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사는데, 대선의 영원한 우상인 연화란 백작님을 시종 부리듯 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날부터 아무도 저를 볼 수 없을 겁니다.”
“하하하!”
“호호호!”
명화가 일어나 미리 준비된 요리를 능숙하게 선별하더니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후작의 고귀한 영애가 움직이는데 일개 제과점의 지배인의 엉덩이가 무거우면 안 되는 상황.
“명화 아가씨,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녀 옆에 서자 지난번처럼 기분 좋은 과일 향이 풍겨 왔다.
향기에 민감한 마루였지만, 명화에게서 풍기는 향수의 정체는 쉽게 판별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그러면 과실주 좀 부탁드려요.”
자신에게 말을 높이는 말투보다도 그윽하게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더 기분 좋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마루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러나 멀리해야 한다는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 그녀에게 관심이 갔다.
그녀가 권위적인 귀족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마루의 감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명화의 부드러운 미소와 따스한 친절이 마루의 감정을 흔들고 있었다.
“저 친구가 전에 말한 그 청년인가?”
“그렇다네. 마루야, 이리 와서 이분들에게 인사하여라.”
윤정세 백작의 말에 남조문웅이 마루를 불렀다.
“내 양아들일세. 마루야, 여기는 나와 교우하는 분들이다.”
마루는 표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다.
그 말은 예기치 않은 상황을 접했어도 심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침착함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데 지금의 이 상황은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양아들이라 소개한 남조문웅의 발언 때문이었다.
“인사드립니다. 마루라고 합니다.”
시선이 마루에게 몰렸다.
“참으로 듬직한 청년이로군.”
“잘생겼구먼.”
저마다 한마디씩 하였다. 명화와 연화란, 그리고 무표정한 30대의 사내만 빼고는 말이다.
이윽고 마루는 30대 사내와 인사를 나누었다.
“마루라고 합니다.”
“난 조경하라고 하네.”
고개를 든 마루는 자신을 쏘아보는 조경하의 시선과 마주쳤다.
왜 쏘아본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하여간 마루가 느끼기에 조경하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차례의 덕담 비슷한 말과 웃음이 오갔다.
마루는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겁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때, 명화가 마루를 경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이끌었다.
이상하게도 함께하기엔 적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음, 이 연양갱…… 으음, 정말 맛있군요. 여기에 오는 것은 마루 님이 직접 다 만든다면서요?”
“아, 네. 그렇습니다.”
“색이 참 고와요. 이건 어떻게 색을 입히나요?”
별로 말이 없을 것 같은 명화의 이어지는 질문에 마루는 당황하면서도 대답을 해 주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마루는 이 상황이 왜 어색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이들은 전부 귀족이질 않은가.’
자신하고는 천지 차이의 신분을 가진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은 이해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어색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리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파인과 나파에 항복하여 일신의 안전과 작위를 보전한 몰락귀족, 친나파인의 딸, 반대로 대조적인 호국 가문의 후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마루의 의문은 점점 깊어졌다.
의문이 더해지자 명화의 물음도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열광하던 경기가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화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만 가끔 생각이 났다는 듯 다가와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묻기는 했다.
그리고 명화가 말해 주면 그 나른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머리가 복잡한 마루를 향해 명화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신경 쓰이나요?”
“뭐가 말입니까?”
입이 근질거렸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섣불리 넘겨짚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그다지 조급한 성격도 아니고, 또한 자신이 이러한 일에 궁금증을 가질 만한 위치이거나 신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조문웅이 자신을 데려오고 양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인사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만은 궁금했다.
“마루 님은 식민지 치하의 나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니, 지금 사는 것에 만족하시나요?”
매국노를 부친으로 둔 후작가의 고매하신 따님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마루는 명화의 말에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의식했다.
다행히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요?”
명화는 여전히 보기 좋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마루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과일 향을 맡을 수 없었다.
“저는…… 지금의 상황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선인보다 나파인으로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명화의 말이 어쩐지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 물음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매국노를 부친으로 둔 그녀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제과점의 지배인 자리가 현재의 삶과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 생각하나요?”
도대체 이 여자는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리고 왜 신경을 긁는 것일까?
“저는 현재의 내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만 편안히 안주하시겠다, 그런 말로 이해해도 되나요?”
“저야말로……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마루가 정색을 하고 명화를 쳐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반문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쓸쓸하고 서글프다고 마루는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누가 누구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의미없이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주는 의미를 여과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마루는 단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고 명화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쉽게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지금 이 나라의 처지가 저 적린괴우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루 님에게 괜한 소리를 했네요.”
적린괴우는 옆구리에 작살창이 꿰인 채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들에서는 천적이 별로 없는 상위의 육식 괴수이지만 인간들에 의하여 유흥의 대상이 되어 버린 지금의 적린괴우의 모습은 도살장에 들어선 가축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적린괴우는 검투사들에게 맹렬한 적개심만을 보인 채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못하고 그저 씩씩거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마치 죽어 가는 적린괴우처럼 마루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감정 변화를 지켜봐야 했다.
그녀의 말이 모순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적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해도…… 적어도 당신만은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항변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당신 부친인 신정영효에게 먼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마루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남조문웅을 바라보았다.
남조문웅은 다섯 명의 사내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모두의 표정이 매우 심각했다.
곁에 있는 연화란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