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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제5장 도방의 친구



“오늘 왜 마루를 데려왔나요? 차후를 위해 동지들에게 미리 선을 보이기 위해선가요?”
알몸의 연화란이 남조문웅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대며 물었다.
조금 전의 뜨거웠던 열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땀으로 끈적거렸던 몸도 점점 식어 가며 약간의 한기마저 돌았다.
“그러려고 했어.”
“지금은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래.”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나요?”
“마루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명확한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이 없어. 하다못해 흥미나 관심도 없어. 그래서 고민했던 거야.”
“그러면 지금까지 한 일은 단지 당신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말인가요?”
“그래, 그랬어. 녀석은 내가 시키니까 할 뿐이야.”
“아무런 명분도 없이 우리 일을 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보다 오히려 단순해서 좋지 않을까요?”
“우리는 나파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분명하고 확실한 명분에 따라 행동하고 있어. 따라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야지, 마루처럼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무작정 끌려가는 태도는 본인은 물론이고, 조직을 위해서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그렇다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생각 중이야.”
“빨리 결정하셔야 할 거예요.”
“알고 있어.”
남조문웅의 볼에 입술에 맞춘 연화란이 일어나 수욕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남조문웅은 문득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루는 똑똑한데다 눈치가 빨라 무엇이든 금방 배우고 익힌다. 거기다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가볍게 물었지만 내심은 마루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한 질문이었다.
한데 마루의 입에서는 전혀 의외의 말이 나왔다.
대선에서 제일 큰 제과점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얼굴에 생기를 띠었고, 음성은 활기에 차 있었다.
마루는 지나칠 정도의 단정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지닌데다 불필요한 말은 거의 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다.
따라서 평소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의 꿈을 말하는 마루의 얼굴은 정말 밝았다. 그렇게 밝은 표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남조문웅은 그 얼굴에 대고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무공을 가르치지 말 것을…… 그랬다면 그런 일도 시키지 않았을 터인데…….”
남조문웅의 음성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사실 그가 마루에게 무공을 가르친 것은 저항군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데리고 다니면서 도둑질에 이어 강도질을 시킨 것도 다 훈련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마루에게 조국의 독립이라는 목적보다 못하지 않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좇는 한, 지금 하는 일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일에 불과했다.

*
*
*

해가 질 무렵.
마루는 용마루의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밀접한 햇빛대로로 수레를 몰았다.
이곳은 그가 남조문웅을 만나기 전까지 머물며 치열한 생존 투쟁을 하던 거리였다.
이곳에서 좀도둑질을 하고 소매치기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때는 날마다 배부르게 먹는 게 소원이었지.’
그때만 해도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던지라 내일은 물론이고 장래와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다.
‘주인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까지도 짐승처럼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겠지.’
그것도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때의 경우다.
그렇지 않다면 진즉 시궁창에 머리를 처박고 썩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늙은 말이 이끄는 작은 수레에는 상당한 물건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무게는 많이 나가지 않는지 늙은 말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길이 평탄한 게 늙은 말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마차 여덟 대가 일시에 지나갈 만큼 커다란 대로의 양편은 4층 높이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건물들은 저마다 다채롭고 균형있게 열을 맞추어 햇빛 대로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이 거리는 순전히 귀족들을 위한 거리다.
화려한 색을 입힌 건물에는 수많은 사교관과 귀족들이 좋아하는 고급스럽고 화려한 물건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점들이 밀집하여 붙어 있다.
그래서 거리 곳곳에는 새로운 물건들을 구매하기 위해 나온 귀족들과 그 자제들의 마차와 시종들로 북적거렸다.
나파의 식민지가 되었음에도 귀족들의 권위와 위엄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돈도 넘쳐 나는지 소비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훈련이 잘된 경비대에 의해 안전한 치안이 확보되자 귀족들은 오히려 나파의 지배가 낫다고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나파에서 들어온 수많은 문물과 값비싼 물건들은 이들 귀족들에 의해서 대부분 소비되고 있었다.
적어도 귀족들은 나파의 지배가 시작되기 전과 다를 바 없이 풍족하고 안락하게, 그리고 더욱 호사스럽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일반 평민들은 어둡고 긴장한 기색으로 거리 곳곳에서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 경비대원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종종걸음을 치면서 그들의 눈을 피하고자 했지만, 여지없이 경비대원의 눈에 걸렸다.
“이봐, 거기! 이리 와!”
“저, 저희들 말입니까?”
“그래, 너희들 말이야.”
남녀가 다가오자 경비대원 하나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호패.”
여자는 품에서 호패를 꺼내었지만, 사내는 더없이 당황했다. 표정으로 보아 호패를 지니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리, 저는 미처 가지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분은 확실합니다.”
“뭐야? 누가 호패도 없이 싸돌아다니라고 했나? 호패를 지니지 않으면 중죄라는 것을 모르나?”
“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지니고 다니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고, 지금은 호패를 소지하지 않은 죄로 연행하겠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나리. 한 번만 봐주십시오.”
사내가 슬그머니 은화를 찔러 주자 경비대원은 주변을 쓰윽 둘러보더니 잽싸게 받아 챙겼다.
부부가 다 없다면 모를까, 여자가 호패를 지니고 있는 이상 신분은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은화를 챙긴 것이다.
“험험, 내 이번 한 번은 특별히 봐주겠지만, 다음엔 어림도 없다. 알겠나?”
“예예, 잘 알겠습니다.”
사내들은 거리를 나설 때마다 한두 차례 이러한 일을 당한다. 이골이 날 대로 나서 그럭저럭 견디어 내지만, 그들의 아내와 딸이 희롱당하는 모습은 차마 견디기 힘들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은 양보하고 감내하면서도 부모와 아내, 자식에 관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불사하고 나서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 아니던가.
그래서 일부 혈기왕성한 사내들은 경비대의 횡포에 항의를 하고 대항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일방적인 뭇매일 뿐이다.
아니, 뭇매 정도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심한 경우엔 저항군이란 누명과 함께 끌려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강제 입대를 당해 최전선으로 끌려가거나, 그도 아니면 노예로 팔리거나 죽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대선의 사내들은 모두 분노하면서 나라 없는 서러움을 절실히 느껴야만 했지만, 그래도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경비대의 거칠고 음흉한 손길이 몸수색을 빙자하여 아내와 딸들의 몸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희롱함에도 그들은 속으로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면서 나라를 빼앗긴 왕과 귀족들을 이를 갈며 원망하고 증오했다.
이런 상황에 의식있는 귀족들은 어찌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귀족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대선의 귀족은 없다. 오히려 나파의 귀족처럼 행세하는 친나파의 귀족들만 있을 뿐이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귀족들은 나파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나파군보다 더 증오하고 더 죽이고 싶은 존재였다.
마루는 햇빛대로를 지나면서 밝은 모습의 귀족들과 암담한 얼굴을 한 서민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어두운 표정으로 스쳐 보았다.
이런 모습도 이제는 일상이었다.
“휴우!”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아무리 외면하려 하여도 그의 몸속에는 어쩔 수 없는 대선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한데 뭉쳐 시끌벅적한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앙에서 한 사내가 불쑥 솟아올랐다.
아마 단상에라도 오른 모양이었다.
“자, 여러분. 오늘 임시 경매에 나온 노예들은 아주 특별합니다!”
나파 제국은 태호 제국과 전쟁 중이라 그곳에서 들어오는 노예들이 많았다.
보통 노예 시장은 신전 앞 광장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린다. 그때는 규모가 커서 몇 백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까지 노예가 거래된다.
그러니 오늘처럼 햇빛대로의 한쪽에서 열리는 임시 경매는 순전히 귀족들을 위한 특별 경매라 할 수 있었다.
확성기 소리를 들었는지 화려하게 성장 차림을 한 귀족들이 사교관에서 나와 몰려들었다.
“오늘 나온 노예는 그동안 말로만 듣던 저 북방의 수인족들입니다.”
사회자의 말에 귀족들이 웅성거렸고, 이내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호기심이 동한 마루는 고삐를 당겨 수레를 세웠다.
수인족은 녹평 왕국 위쪽인 북방의 얼어붙은 동토에 살고 있다는 종족이다.
비교적 따뜻한 지역인 이쪽 대선에서는 이야기책에서나 읽어 볼 수 있는, 거의 전설에서나 나오는 종족이었다.
“제일 먼저 선보일 수인은 견인족입니다.”
마루는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수레의 좌석 위로 올라갔다.
확성기를 든 사내가 뒤에 대고 손짓을 하자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쇠사슬을 손에 쥔 채 단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쇠사슬을 따라 손에는 수갑이,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움직임을 제한한 견인이 엉거주춤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목에 구속 목걸이가 채워진 갈색 머리의 견인은 키가 크고 말랐다 싶을 정도의 여린 체형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인간과의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자루 같은 허름한 옷을 걸친 견인은 여자인 듯 가슴이 봉긋 솟아 있었다. 그녀는 겁을 먹었는지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굴을 보여라!”
누군가 소리치자 확성기를 든 사내가 견인에게 뭐라 말했다. 하지만 견인은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듣지 못한 척하는 것인지 반응이 없었다.
순간, 확성기의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쇠사슬을 쥔 사내에게 뭐라 말했다. 그러자 쇠사슬을 쥔 사내가 허리춤에서 넓적한 채찍을 꺼내더니 견인을 후려쳤다.
“아악!”
채찍에 맞은 견인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사내가 다시 채찍을 들어 올리자 황급히 엎드리더니 사내의 바지를 부여잡았다.
아마도 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사내가 뭐라 말하자 겁을 먹은 견인이 사내의 눈치를 보며 일어나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갈색 머리가 넘겨지며 양쪽으로 쫑긋 솟은 귀가 보였다.
“오오, 짐승치고는 아주 예쁜데!”
생각 외로 예쁘장한 견인 여자의 얼굴을 본 귀족들은 저마다 감탄을 했다.
귀가 유난히 긴 견인 여자는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