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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나라로 날아간 야심한 밤, 사마우는 그날 저녁에 대충 꾸려 둔 여장을 챙겨 들고 당당히 방문을 나섰다. 막상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왠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삼 년 그나마 정들었던 보금자리였다. 건물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사람이 죄지, 사마우는 이런 생각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젠 안녕.”
그런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그 지옥 같은 늙은이의 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복한 미소는 잠시뿐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그리고 섬뜩한 느낌, 사마우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는 순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동시에 간절한 마음으로 반야심공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기도하는 심정으로 암송한 반야심공,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 정말 부처님이 도우신 것일까? 자로의 지팡이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저 빤히 사마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로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사마우는 왠지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다.
“헤. 헤. 헤.”
사마우는 자신도 모르게 헤픈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로는 여전히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그런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사마우 역시 스스로에게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헤픈 웃음을 흘릴 수 있으리라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헤픈 웃음을 흘리면서, 사마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반야심공을 암송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사마우는 침상 위에 반듯이 몸을 뉘었다.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던 자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귀신같은 늙은이.’
단순히 독심술만 쓰는 것이 아니었다. 늙으면 잠이 없다고 했던가? 빌어먹을 늙은이는 늙은이답게 잠도 없었다. 아니면 이미 그의 탈출을 알고 있었던가? 어찌 되었건 그날 밤 사마우는 어쩌면 탈출조차도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불길함을 느꼈다. 귀신같은 늙은이는 말 그대로 정말 귀신같았기 때문이다.
탈출에 실패했기 때문일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사마우는 조용히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차분히 반야심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이토록 진지한 자세로 운기에 힘을 쏟은 적은 없었다. 그것은 막연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금 전 결정적인 순간 자로의 지팡이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 그것이 어쩌면 반야심공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운기를 거듭하자 단전에서 무언가 따끔따끔한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이내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힘차게 돌기 시작했다.
풀리지 않았던 숙제, 반야심공의 구결들이 속속 그의 머릿속을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반야심공은 단숨에 사성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불문의 무상심법인 반야심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의 살기도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문밖에 서 있던 자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야심공은 불문의 내공심법, 그것을 운공하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짙어지는 사마우의 살기. 자로의 상식으로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사마우는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반야심공을 운용했다. 운기는 이른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이른 아침 사마우는 운기를 끝마치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의 앞에는 자로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자로가 예의 그 시선으로 천천히 그와 소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마우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소검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사마우가 힘겹게(?) 소검을 손에 쥐자 자로는 말없이 밖으로 움직였다. 사마우는 역시 알았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그런 자로의 뒤를 쫓았다.
다시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날도 여전히 별은 번쩍였다.
사마우가 허튼 생각을 할 때마다 자로의 지팡이가 기다렸다는 듯 불을 뿜었다. 하지만 사마우에게는 이제 부처님이 계셨다. 사마우는 맞을 때마다 반야심공의 구결을 마음속으로 암송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부처님의 놀라운 기적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자로의 지팡이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로는 불교를 신봉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사마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야심공의 구결을 마음속으로 암송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의 세월이 더 흘러갔다.
이제는 사마우도 어엿한 화원지기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지만 자로의 지팡이질도 다소 뜸해졌다. 그리고 언제나 반야심공의 구결을 암송하는 것이 사마우의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야심공을 암송했기 때문일까? 반야심공에 담긴, 풀리지 않았던 오의들이 자연스럽게 조금씩 깨우쳐지기 시작했다.
또한 밤이 되면 늘 반야심공을 운기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탈출에 실패한 그날부터 매일 습관처럼 반야심공을 운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 또한 나쁘지 않았다.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한 다음날부터 비교적 깔끔한 몸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야심공은 그야말로 자로의 매질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었다. 이미 탈출의 꿈은 버린 지 오래였다. 자로가 거의 매일 밤 자신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일 밤 운기조식을 하는 그의 방 앞에서 자로가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도 자지 않는 정말 지독한 늙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자로가 누군가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사마우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딱히 자신을 노릴 만한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제왕성 내에서도 자신을 알고 있는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알고 있는 자라면 단순히 화원지기의 조수 정도일까? 또한 그중에서도 자신을 노릴 만한 인물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제왕성의 군사 모용백.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죽이고자 했고, 지금까지도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때때로 우연히 사마우를 만날 때면 은근한 적의까지 내비치곤 했다.
‘설마 자로가 모용백을 경계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모용백은 제왕성의 군사였다. 그리고 자로는 제왕성의 일개 화원지기에 불과했다. 언뜻 보아도 일개 화원지기가 모용백을 견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저 학대 늙은이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발상이었다. 결론은, 혹시라도 그가 달아날까 감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반야심공, 참 우스운 내공심법이었다. 그것이 불문의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운기하는 와중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운기를 멈추면 몸은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상쾌했다. 이런 알 수 없는 현상에 사마우는 항상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자로 역시 항상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야심공을 운용하는 사람의 몸 주변에 살기가 득실거린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운기를 할 때는 살기가 득실거렸다. 하지만 낮에 암송할 경우 그 살기가 반감되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자로는 사마우가 살기를 일으킬 때마다 몽둥이찜질을 해 왔다. 우연히 반야심공을 암송하기 시작했던 그날 밤 이후, 사마우가 반야심공을 암송할 때는 그의 살기가 분명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운기에 돌입하면 사마우의 살기는 더욱더 강렬하게 몸 밖으로 표출되었다.
지난 일 년간 사마우를 지켜보면서 자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암송할 때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밖으로 표출된 살기가 다소 가라앉는 것이었다. 하지만 운기를 할 경우 반야심공으로 형성된 내공과 내부에 숨 쉬는 천살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서로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결국 반야심공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리고 사마우의 내공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거기에 맞춰 천살의 기운도 강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는 자로로서도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때때로 운기 중에 느끼는 사마우의 고통, 그것은 아마도 그 두 기운 사이의 충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듯했다.
‘성주는 대체 무슨 의도로 저 아이에게 반야심공을 전해 주었는가?’
자로는 그런 성주의 의도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과거 사마우를 자신에게 보낼 때 성주의 요구는 오직 한 가지였다. 훌륭한 검을 완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로의 눈에도 사마우는 훌륭한 검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검이긴 하되 살검(殺劍)의 경우였다.
그런데 성주는 그런 살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불문의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었다. 사파나 마도 계열의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었다면 아마 지금쯤 제법 높은 경지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로는 굳이 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성주에게 무언가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덧 구타의 시절은 끝나고 평화의 시절이 돌아왔다. 나름 행복한 시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행복은 그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자로의 지팡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악의 사도는 이제 마침내 부처님의 힘조차도 극복하고야 말았다. 반야심공의 암송도 이제는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더 이상 부처님을 믿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고민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교적 쉽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자로 영감의 지팡이가 휘둘러지는 때는 바로 그가 가꾼 꽃이나 나무가 시들어 갈 때였다. 잘못이 있으니 맞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늙은이도 이제 늙을 만큼 늙었다. 아마도 이번 기회에 이 일을 확실히 자신에게 물려주려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며칠 전부터 갑자기 자신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맡길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워낙 말이 없는 늙은이라 그저 그의 동작을 유심히 관찰하고 배울 수밖에는 없었다.
사마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자로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일단 대상의 차이는 없는 듯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비록 삼 년은 아니었지만 꽃과 나무를 선별하는 방법은 지난 일 년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습득할 수 있었다. 절단하는 부위에서도 그다지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내가 손댄 나무만 죽어 가는 것일까?’
사마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로 영감이 손을 댄 꽃이나 나무는 결코 시들거나 죽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거친 꽃이나 나무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가 시들거나 죽기 일쑤였다.
결국은 한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바로 칼질의 차이였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칼질이지만 자로의 칼질에는 무언가 기술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부터 사마우는 자로의 손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자로의 움직임을 조금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단순한 생각이었다. 단순히, 영감이 하는 것을 따라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사마우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쉬워 보이긴 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영감이 휘두르는 칼의 방향이나 느낌이 각각의 나무와 꽃마다 달랐던 것이다.
제왕성의 화원을 관리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영감의 뛰어난 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영감은 정확히 일천 개의 움직임을 그때그때 바꿔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는 데만도 육 개월이 걸렸고, 그것을 흉내 내는 데만도 다시 육 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능숙하게 꽃과 나무를 가꾸는 데 걸린 시간 또한 육 개월이 걸렸다.
그런 와중에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꽃이 죽어 나가면 매질이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자로 영감이 쉽게 매질을 멈추는 경우가 있었다. 일단 시작하면 좀처럼 멈추지 않았지만 한 번 피하면 더 이상 때리지 않는 것이었다. 단순히 늙은이의 자존심이었을까?
하지만 이제 열네 살 소년이 귀신같은 늙은이의 지팡이를 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늙은이의 지팡이를 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체 늙은이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루가 지나면 어제 피했던 성질의 매질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이전의 매질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교한 매질이 사마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자로 영감의 매질이 얼마나 더 빨라질 수 있을까는 이제 사마우에게 또 하나의 관심거리였다.

이 년의 세월, 분명 그 기간만큼이나 자로는 늙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팡이질은 반대로 더욱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맞는 횟수는 분명히 줄어들었지만 이제 한 번 걸리면 그 고통은 뼛속까지 사무쳐 왔다. 이만하면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고통이라는 것은 적응이 불가능한 듯했다.
그런 와중에 자로의 칼질을 둘러싼 신비는 완전히 베일을 벗었다.
나무나 꽃에 검이 닿는 순간 미묘하게 그 속도나 움직임이 달라졌다. 무언가 결을 찾는다고 할까. 미묘한 결을 쫓아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칼질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화원지기를 해야 저렇게 미묘한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는 걸까? 사마우는 진심으로 자로의 움직임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매질을 피하려면 저 늙은이가 늙어 죽거나, 아니면 자신이 빨리 저 늙은이의 경지에 올라 자유자재로 칼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나이 십육 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로 영감이 자신에게 매질하는 방법, 그것 역시도 꽃과 나무를 베는 칼질과 동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때문에 가끔씩 발생하는 꽃과 나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날아오는 매질을 피하는 것만으로 쉽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자로 영감은 완전히 파삭 늙어 있었다. 아마도 그의 생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때문에 굳이 탈출을 하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탈출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미운 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단순한 동정이라고 해야 할까? 자로 영감을 바라보는 사마우의 눈에는 어느새 적지 않은 애정마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아침이 밝아 왔다.
그날따라 자로 영감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방을 찾았다. 아직 화원을 정리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각이었다. 더구나 자로 영감은 너무나 조심스런 표정으로, 자고 있는 사마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사마우는 이미 그런 자로 영감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는 척하고 있었다.
그의 침대 옆으로 다가온 자로 영감이 갑자기 침대 벽면을 지팡이로 후려쳤다. 순간 침대가 거꾸로 뒤집히면서 하나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침대에 누워 있던 사마우는 그만 통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사마우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자로 영감을 노려보았다. 어쩐 일인지 오늘 자로 영감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쓸쓸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통로를 통해 사마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자로 영감이 바닥에 내려서자 침대는 기다렸다는 듯 원상태로 돌아갔다.
‘이런 비밀 통로가 있었는가?’
사마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통로가 있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예전에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마우의 옆에서, 자로가 어두운 통로의 한쪽 옆에 있는 비치된 나무를 집어 들었다. 순간 자로가 들고 있는 나무에 불이 붙었다.
삼매진화, 아마도 그들 외의 다른 사람이 지금의 이 광경을 본다면 적지 않게 놀랐을 것이다. 볼품없는 늙은이가 너무나 쉽게 삼매진화로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자로의 마술에 사마우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보통 늙은이가 아니었다.
놀라는 사마우를 남겨 둔 채 자로는 곧장 사마우의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로는 그렇게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마우 또한 습관처럼 천천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통로의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의 화덕이었다. 순간 사마우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감돌았다. 어쩌면 밖으로 나가는 통로일지도 모른다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스스로 화장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사마우는 이런 표정으로 자로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자로의 기력은 쇠약해져 있었다. 당장 저승사자가 방문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자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화덕에 불을 지폈다. 잠시 후 화덕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마력에 심취한 것일까? 자로는 왠지 추억 어린 눈길로 지그시 화덕을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불빛,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 사마우는 그 순간 자로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음을 느꼈다.
돌연 자로가 돌아서며 빠르게 그의 혈도를 제압했다. 예상했던 움직임이었다면 그렇게 간단히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로의 너무나 비장한 모습에 잠깐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사마우는 혈도가 제압된 상황인지라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자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몸이 먼저 불길함을 느끼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내 사마우의 몸에서 진한 살기가 분출되었다. 그런 살기를 느낀 자로가 씁쓸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진정 지울 수 없는 살기인가?”
사마우가 그런 자로를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친 노인네, 설마…….’
자로가 사마우와 화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나를 저 화덕 속에…….’
사마우는 어느새 그런 불길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로가 그런 사마우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어린 시절 나와 내 친구는 대장장이였지.”
갑작스런 어린 시절 얘기에 사마우의 마음이 더욱더 불안해졌다. 자로는 그런 사마우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친구와 나는 경쟁하듯 검을 만들곤 했었다. 당시 우리 둘이 꾸는 꿈은 하나였지. 간장이나 막사를 능가하는 최고의 명검을 만드는 것. 하지만 단순히 쇠를 두드리는 것만으로 그런 검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검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하나의 검결을 완성했다. 이른바 생사일천검결.”
일천이라는 단어, 그것은 정확히 자로의 칼놀림의 숫자와 일치했다. 사마우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자로를 바라보았다. 자로는 이를 확인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일천검결은 이제 너에게 이어졌다. 비록 최고는 아니지만 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검결이지.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나는 대장장이로 돌아가 최고의 검을 만들 것이다. 대륙을 질타할 최고의 검을. 그 검이 바로 너다.”
이내 사마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로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횡설수설, 노망이 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불현듯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지금 자신을 화덕 속에 넣으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곧 사마우의 눈동자가 다소 몽롱해졌다. 화덕의 온도는 얼마나 될까? 그것이 얼마가 되건 간에 분명 살아남을 수 없음은 확실했다. 결국 죽을 날이 된 늙은이가 그를 길동무로 함께 데려가려는 속셈이었다.
자로는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듯 천천히 한쪽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곳에는 한 개의 옥함이 다소곳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로는 조심스럽게 옥함의 뚜껑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삽시간에 주변의 대기를 가득 채웠다. 그 냉기는 화덕이 발산하는 열기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빙정이다. 운 좋게도 십 년 전에 이놈을 발견할 수 있었지. 하지만 마땅히 이것을 사용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제 이것의 주인은 바로 너다.”
자로는 천천히 사마우의 입을 벌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마우의 입으로 자로가 천천히 빙정을 밀어 넣었다. 사마우는 순간 입속이 얼어붙는 느낌이 받았다. 자로가 벌어진 그의 입을 손으로 꽉 닫았다. 그리고 그의 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꿀꺽, 빙정이 그의 목을 지나서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내 몸속에서 이물질의 소식이 전해 오기 시작했다. 사마우의 몸이 점차 차갑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사마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