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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았다. 시간은 너무나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렇게 육 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사마우는 하루 삼시 세끼를 모두 찾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볼일을 보는 날이면 두 끼밖에는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니, 끝일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의 왼쪽 발목에 오른쪽 발목에 채워진 것과 똑같은 족쇄가 채워졌던 것이다. 사마우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아악! 아아아!”
그의 절규를 들으면서 진규가 아침 식사를 한쪽 귀퉁이에 차리고 있었다. 사마우가 자신을 노려보자 진규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향해 말했다.
“벼엉신.”
사마우는 계속해서 그런 진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분명 잠시 방심한 자신의 실수다. 저런 늙은이를 상대로 깊은 잠에 빠진 자신의 실수였다. 실수의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다시 삼시 세끼를 찾아 먹는 데는 삼 개월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다름 아닌 모든 음모의 원흉, 바로 제왕 혁련천세였다. 순진한(?) 아이를 꾀어 늙은이들의 장난감으로 만든 바로 그였다. 그가 일반인의 복장으로 죽립을 쓰고 움막을 찾은 것이다. 그를 지켜보는 사마우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물론 가장 큰 감정은 살심이었다. 음모의 원흉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의 감정은, 혹시나 자신을 구해 줄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사마우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혁련천세는 자신을 노려보는 사마우를 향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있나?”
결단코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이 재미있다고 말할 사람은 분명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었다. 지난 육 년 구 개월의 세월, 돌이켜 보면 그가 배운 가장 큰 덕목은 인내였다. 그리고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평생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만든다는 진리였다.
“큭, 큭, 큭.”
사마우는 웃었다. 그 웃음에, 지금까지 나름 눌러 두고 있었던 살기가 밖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혁련천세가 그런 사마우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식욕은 나름대로 충족시켜 주지 않았는가?”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던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자신을 비웃는 혁련천세의 모습에 사마우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풀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스스로가 어리석었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제왕성의 성주인 혁련천세가, 자신을 이리로 데려온 혁련천세가 지금의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혁련천세의 의도임에 분명했다. 사마우는 혁련천세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혁련천세는 그런 사마우를 무시하고 움막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후 움막 앞에 도착한 혁련천세가 공손히 말했다.
“접니다, 사부.”
사마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부, 그것은 가르침을 베푼 사람을 부르는 칭호가 아니던가? 결국 모든 것은 혁련천세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사마우는 이를 악물고 혁련천세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이 너희 사제지간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마우는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사마우는 정작 혁련천세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다짐하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움막에서 진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는 녀석, 왔으면 냉큼 들어오너라.”
상대는 제왕성주였다. 사제지간이었기 때문일까? 혁련천세를 대하는 진규의 태도는 사마우를 대하는 태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여전히 짜증나고 재수 없는 건방진 목소리였다. 그나마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진규 역시 혁련천세를 재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내 혁련천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움막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마우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이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해 그곳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움막까지의 거리는 고작 이십 보, 하지만 사마우에게는 이십 보나 되는 거리였다. 그가 가는 동안 이야기가 계속될 리도 없고, 계속된다 하더라도 고작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까운 체력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반대편의 이십 보 앞에는 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했던가? 내일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음식이었다. 그는 애써 쓸데없는 궁금증을 떨쳐 버리고 오늘 일용할 양식을 향해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맹렬히, 하지만 질질 쇳덩어리를 끌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둑 사부.”
혁련천세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진규를 바라보았다. 반면에 진규는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말이라도 도둑이 아니라 대도라고 불러 줄 수는 없느냐?”
혁련천세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대도 사부.”
진규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이것 참, 엎드려서 절 받는 격이로군.”
혁련천세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진규는 그런 혁련천세를 향해 비꼬듯 말했다.
“그래, 공사가 다망하신 제왕성주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누추한 도둑의 거처까지 왕림하셨는가?”
혁련천세가 씁쓸한 표정으로 진규를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지요. 얼마면 되겠습니까?”
진규가 씁쓸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천세야.”
혁련천세의 이름을 부르면서 진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 하고는. 이왕에 지을 거면 만세로 짓지 그랬느냐. 하여튼 네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왠지 꺼림칙하단 말이야.”
혁련천세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그깟 이름 따위에 연연하십니까?”
“제자에게 천세, 천세, 천천세 하는 것이 좋을 수만은 없겠지. 헌데 그건 그렇고,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평소 무게를 잡는 너의 모습과 지금의 조급함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구나. 천세야, 너무 서두르면 좋은 물건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혁련천세가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황이 조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조금 서둘러 주셔야겠습니다.”
혁련천세의 심각한 표정에 진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구나. 너처럼 신중한 아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을 서두르는 것이냐?”
진규의 말에 혁련천세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부님 말씀처럼 제가 너무 자만에 빠져 있었음은 인정하지요. 마교의 뿌리는 생각 이상으로 깊고 그 힘 역시도 상상 이상으로 강하더군요.”
진규가 씁쓸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네가 앓는 소리를 다 하는 것을 보니 너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구나. 하지만 너에게 그런 침울한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자신감은 다 어디로 갔느냐?”
진규의 비아냥거림에도 혁련천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씁쓸한 표정으로 그런 진규를 바라보았다. 진규의 표정이 돌연 심각하게 변했다. 비로소 혁련천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설마, 중독?”
혁련천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천하에 누가 있어 감히 너를 중독시킬 수 있다는 말이냐.”
진규가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혁련천세의 왼쪽 손목에 있는 맥문을 잡았다. 진규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굳어졌다.
“설마 무영지독(無影之毒)?”
혁련천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한 혁련천세의 표정과는 달리 진규는 적지 않게 놀라는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결국 마교가 무영지독까지 부활시켰단 말인가?”
진규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부터였더냐?”
혁련천세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략 육 년이 조금 넘은 듯합니다.”
진규가 감탄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과연 제왕성주는 제왕성주로구나. 그 지독한 무영지독을 상대로 육 년을 내색조차 하지 않고 버텼단 말이냐? 미련한 놈.”
그리고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제왕성주가 무영지독에 중독되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자못 대단한 것이었다. 마교의 무영지독, 그것은 이름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무색무취무미(無色無臭無味)의 극독이었다. 하지만 무영지독을 사용하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다른 독처럼 호흡기나 피부를 통한 중독은 불가능했다. 오로지 섭취를 통해서만 상대를 중독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 내부인의 소행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성주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진규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냐?”
혁련천세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저로서도 아직까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측근이라고 짐작하는 수밖에는.”
진규가 한껏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혁련천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누구입니까? 제왕입니다. 이까짓 무영지독 따위는 십 년도 너끈히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지요. 그들이 움직인다면, 가까스로 내공으로 억눌러 놓은 독기가 언제 발작할지 저로서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진규가 허탈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너도 참 황당한 시대를 타고났구나, 하필이면 마교라니, 시대만 제대로 타고났더라면 능히 너의 말처럼 한 지역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혁련천세가 다소 섭섭한 표정으로 진규를 바라보았다.
“한 세대가 아니라 고작 한 지역의 패주란 말씀이십니까?”
진규가 그런 혁련천세를 향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곧 죽어도 그놈의 허세는…….”
진규의 눈 주위가 살짝 붉어졌다. 혁련천세가 그런 진규를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교가 때마침 제 앞에 나타나 주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고독하게 보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교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 감히 제왕 혁련천세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혁련천세의 말에 진규가 씁쓸하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하여튼 그놈의 허세는 정말 못 말리겠구나.”
말장난은 여기까지였다. 혁련천세가 정색을 하며 진규에게 말했다.
“저 아이는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진규가 흐뭇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자로가 저 아이에게 건곤대법을 시전했다. 너에게도 주지 않았던 빙정을 사용한 것을 보면 자로의 마음에 들었던 게지.”
혁련천세가 씁쓸한 표정으로 진규를 바라보았다.
건곤대법(乾坤大法), 그것은 인간의 몸에 하늘과 땅의 기운, 바로 음양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대법의 정확한 효능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자로에 의해 만들어지고 최초로 사마우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자로 사부는 제가 아닌 저 아이를 마교를 상대할 신검으로 생각하셨나 보군요.”
진규는 굳이 그 말을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천세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건곤대법의 효능은 제법 괜찮던가요?”
진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확한 효능은 알 수 없었지만 효과의 일부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사마우의 발에 묶인 거대한 쇳덩어리, 그것을 움직이려면 최소한 일갑자의 내공이 필요했다.
건곤대법이 끝나자 자로는 사마우에게 개정대법을 펼쳤다. 자신의 필생의 진력을 사마우에게 전해 준 것이다. 자로의 내공은 이갑자를 상회했다. 하지만 개정대법으로 그 내공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몇 사람의 희생으로 극강의 고수를 만드는 일이 허다했을 것이다.
개정대법으로 전할 수 있는 내공은 잘해야 고작 삼사 할, 그렇다면 많이 잡아도 사마우의 내공은 사십 년을 조금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반야심공을 통해 연마한 내공까지를 포함한 수치였다. 하지만 실제로 사마우는 쇳덩어리를 이리저리 끌고 움직이면서 음식을 섭취하고 있었다. 분명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본래 진규는 그를 한 닷새쯤 굶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마우는 자력으로 사흘 만에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작 육 개월 만에 세 끼를 찾아 먹게 되었다. 더구나 쇳덩어리를 두 개로 늘렸음에도 다시 삼 개월 만에 세 끼를 찾아 먹고 있었다. 이는 사마우의 내공이 이미 일갑자를 훨씬 상회한다는 뜻이었다. 진규는 이 모든 것을 건곤대법의 효과라 믿고 있었다.
혁련천세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진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 뜻밖이군요. 자로 사부께서 그에게 건곤대법을 시전하리라고는 저 역시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자로는 혁련천세의 첫 번째 사부였다. 혁련천세가 아는 한, 자로는 누구보다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천살성에게 건곤대법을 사용하리라고는 혁련천세로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규가 그런 혁련천세를 바라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로의 대법은 절반은 실패였다.”
진규의 말에 혁련천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진규가 담담히 말했다.
“자로는 아마도 건곤대법을 통해 저 아이의 살기마저 태워 버리고 싶었을 것이야. 하지만 저 아이의 살기는 약해지기는커녕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 놀랍게도 내공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저 아이의 살기는 더욱 강해지고 있어. 느껴지지 않느냐, 이 움막까지 파고드는 저 아이의 살기가. 천살의 기운은 하늘이 내린 것, 결코 인위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음을 자로도 너도 알지 못한 것이지.”
혁련천세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혁련천세의 웃음에 진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너는 그것마저도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어째서 저 아이에게 반야심공 따위의 불문의 내공심법을 전수해 준 것이냐? 그것이 오히려 저 아이의 수련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마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혁련천세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는 있었습니다.”
진규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허면,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이냐?”
혁련천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운명이라고 할까요? 어찌 되었건 그것은 단지 우연일 뿐입니다.”
진규가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우연이라고?”
혁련천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반야심공을 얻은 것은 그 아이를 만나기 직전 오도문의 서고에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 아이를 만났지요. 공교롭게도 불문의 무상심법과 천살성의 아이를 한날에 만났던 것이죠. 저는 그것이 그 아이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네가 운명 따위를 믿었던가?”
혁련천세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천살의 기운은 어차피 하늘이 내리는 것, 불문의 내공심법 따위가 어찌 하늘의 기운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허나 제가 아는 한, 반야심공만큼 뛰어난 내공심법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해서 그저 뛰어난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었을 뿐입니다.”
진규는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혁련천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는 저 아이가 언젠가는 하늘의 기운을 떨쳐 버리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천살의 기운만으로는 마교를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늘의 기운, 즉 천살의 기운을 떨쳐 버린다면 어쩌면 저 아이가 진정 마교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교의 힘은 지상 최강, 역천의 힘이 아니라면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거기에 반야심공이 어쩌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진규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이라, 과연 너다운 발상이로구나. 하긴, 마교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하지만 너의 그 오만한 생각이 오히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나. 하늘이 천살성을 내렸음은 나름대로 그 뜻이 있지 않겠느냐?”
혁련천세가 그런 진규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고작 천살(天殺)의 기운으로는 마교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살(萬殺), 억살(億殺)의 기운이라면 모를까.”
순간 진규가 혁련천세의 머리를 툭 쳤다.
“허허, 이런 순간에도 말장난이라니. 그나마 아직은 살 만한 모양이로구나.”
농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두 사제지간은 결코 웃음을 보이지는 않았다.
천년마교의 등장, 천 년을 이어 온 마교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할 것이 분명했다. 제왕성은 이미 당금 무림의 십분지 일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런 제왕성주마저도 그들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의 준비가 철저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천살성이든 무엇이든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때문에 진규는 하늘이 천살성을 내린 것은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 악으로써 악을 제압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혁련천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천살성의 기운은 그저 사마우가 떨쳐 버려야 할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때문에 진규는 굳이 혁련천세에게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생각과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동안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규였다.
“얼마면 되겠느냐?”
혁련천세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진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놈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튀어나오다니, 죽을 때가 되어서야 철이 드는 모양이로구나.”
혁련천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진규를 바라볼 뿐이었다. 진규가 왠지 껄끄러운 표정으로 그런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징그러운 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련천세는 마냥 즐거운 듯 미소를 머금었다.
“일 년, 그 이상은 저도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진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천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진규는 가만히 앉아서 밖으로 나가는 제자의 모습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온 혁련천세는 움막을 향해 절을 올렸다. 밥상을 향해 움직이던 사마우가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눈물……이라는 것인가?’
순간 사마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제왕 혁련천세, 그는 분명 제왕의 칭호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제왕이 지금 눈물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우는 그런 혁련천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벼엉신.”
혁련천세가 그런 사마우의 옆을 조용히 지나갔다. 지나가는 혁련천세를 향해 사마우는 연방 짙은 살기를 뿌려 대고 있었다. 마치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혁련천세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