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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광서성의 칠가가 제왕성에 의해 무너졌다. 소문은 삽시간에 광서성 일대를 뒤흔들었다. 이 소식을 접한 몇몇 군소방파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제왕성에 투항해 왔다. 그리고 몇몇 방파들은 뒤늦게 칠가연맹을 돕지 않았던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며 저항의 뜻을 내비쳤다.
반면에 막붕은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무모한 돌격으로 이미 폭풍대의 팔 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막붕은 일단 제왕성의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저항하는 방파들의 정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선봉에 사마우가 서 있었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십팔 세의 청년, 하지만 누구도 그를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청년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창은 노인, 여자,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저항하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조리 도륙했다.
그런 잔인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를 사신이라고 불렀다. 더불어 그의 손에 들린 진혈창을 사신의 창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광서성 사람들에게 사마우는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소문은 광서성을 넘어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사신의 창이 빛을 번쩍이면 하나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 마치 노랫말처럼, 사신의 전설은 그렇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사신 사마우는 제왕성의 또 하나의 기둥으로 우뚝 서고 있었다.
막붕과 사마우가 광서성을 완전히 정리하는 데는 꼬박 일 년의 세월이 걸렸다. 칠가의 잔존 세력을 상대하는 동안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단은 원군을 기다려야 했고, 투항해 온 세력들의 진위를 파악해야 했으며, 저항하는 방파들을 일일이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절차들은 비교적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서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미 전투의 즐거움을 알아 버린 사마우에게 그런 일 년의 시간은 다소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광서성의 정리가 끝나자 막붕에게 다시 새로운 명령이 도착했다.
바로 호남성 공략이었다. 하지만 호남성의 상황은 광서성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호남성에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확실한 중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은 바로 호남성의 형산에 위치한 형산파였다.
호남성 일대의 군소방파들이 형산파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들이 조직적으로 제왕성에 맞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년에 걸친 지루한 소모전, 광서 정비를 끝내고 충원한 무인들과 제왕성의 세 개 대대 육천의 인원이 동원되고서야 비로소 호남 일대를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혁련천세는 그런 와중에 사마우의 휘하에 사신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그 사신대의 구성원은 제왕성의 후기지수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른바 제왕성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들이 배치되었던 것이다.
무림 출도 삼 년, 당년 나이 이십일 세, 사람들은 그 파격적인 인사에서 사마우를 제왕의 후계자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붕과 사마우가 호남 일대를 평정하는 동안 모용백을 중심으로 한 제왕성의 본대는 강소 일대를 평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호남과 강소는 혁련천세의 쉰한 번째 생일의 제물로 바쳐졌다.
대륙 남부의 일곱 개 성을 확보한 제왕성, 이제 명실상부한 대륙 동남부의 지배자로 우뚝 서고 있었다. 그런 제왕성의 위세는 이미 구파일방을 능가하고 있었고, 제왕성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차 늘어만 갔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 대륙정세의 중심은 제왕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밝은 법이라고 했던가?
미래라는 것은 늘 일반적인 예상처럼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제5화 검후(劍后)
제왕 혁련천세의 쉰한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대륙 남부의 일곱 개 성을 차지한 제왕성, 그 제왕성의 위세에 걸맞게 거창한 생일잔치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대륙 남부 일곱 개 성 군소방파의 수장들이 모두 제왕성을 찾았다. 모처럼 제왕성의 실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이를 기회로 혁련천세는 제왕성의 대대적인 개편에 착수했다. 이미 제왕성의 덩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고, 이러한 개편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 개편에 소외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제왕성의 군사인 모용백이었다. 개편의 내용이 어떠하든 통상 혁련천세는 지금까지 이런 큰일들을 그와 의논해 처리해 왔다. 하지만 이번 개편은 급작스럽게, 그와 일체의 상의도 없이 혁련천세의 독단으로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혁련천세는 우선 성주의 아래에 삼전을 두었다.
천왕전, 군사전, 패왕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름처럼 군사전의 전주는 모용백이, 패왕전의 전주 자리는 막붕이 차지했다. 이런 편제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삼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천왕전의 전주에 뜻밖의 인물이 기용되었다. 고작 이십일 세의 젊은이, 사람들이 은연중에 후계자로 지목하던 인물, 바로 사마우였다. 지금까지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혁련천세의 일단의 조치에, 모용백뿐만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그가 등장한 지는 이제 고작 삼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그런 그를 모용백, 막붕과 같은 자리에 둔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발표와 동시에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혁련천세는 삼전의 휘하에 각 삼대를 배치했다.
과거 광서성의 공략 당시 막붕 휘하 폭풍대의 수는 일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팽창한 제왕성의 위세에 걸맞게 우선 각 대의 수를 삼천으로 늘렸다. 그나마 이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마우의 천왕전 아래에도 사신대, 참혼대, 등용대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총 구천의 인원이 사마우의 휘하로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인사, 바로 그 삼 대에 소속된 인원들이었다.
우선 사신대의 대주는 문인호라는 인물이었다.
당년 나이 이십오 세, 그는 제왕성에 의해 무너진 절강성 오도문의 후예였다. 그가 과거 오도문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제왕성에 입문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그를 신임 사신대주로 임명한 것은 어떤 면에서 사마우를 천왕전주로 임명한 것만큼이나 파격적인 인사였다.
더구나 문인호는 딱히 큰 공이 없었다. 단지 지난번 호남의 형산파 공략 당시 사마우의 눈에 들어 사신대의 부대주 위치에 오른 것이 그의 경력의 전부였다. 그런 그의 밑으로, 기존 사신대에 더해 제왕성의 후기지수들이 채워졌다. 누가 보아도 사마우의 후계 구도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 인사임이 틀림이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참혼대의 대주는 남용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역시 당년 이십오 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광동성 외딴 시골 마을 농부의 아들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혁련천세의 눈에 들어 그의 진전을 이었다. 현재로써는 혁련천세의 유일한 제자이기도 했다. 한때 사람들은 그런 그를 후계자로 손꼽을 정도였다. 그런 남용이 사마우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사마우가 후계자임을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참혼대의 구성원은 남용을 비롯해 성주가 직접 키운 인물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도 그나마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등용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등용대의 대주는 계강자라는 인물로, 그는 다른 두 명의 대주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당년 이십삼 세, 광서성 계씨세가의 수장인 계륵의 아들이었다. 광서성 계씨세가는 제왕성에 의해 무너진 칠가연맹을 제외한다면 광서성의 최고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큰 세력에 비해 계륵은 다소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처럼, 버리기도 아깝고 남 주기도 아까운 마치 계륵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계강자의 경우는 아버지와는 달리 진정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지금까지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혹자는 그런 인사를 새로이 편입된 신흥 세력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다소 파격적인 인사였지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등용대에 소속될 사람들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제왕성에 소속된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한눈에 천왕전의 구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신대의 경우는 사마우의 심복들로 채워졌다. 거기에 참혼대가 부족한 힘을 받쳐 주고 있었다. 그 속에 다시 앞으로 각 군소방파를 책임져야 할 후기지수들을 등용대에 배치했다. 그야말로 등용대는 인질의 성격이 다분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각 문파의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각 문파의 반발은 예상처럼 그다지 거세지 않았다. 그것은 등용대에 소속될 후기지수들이 그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다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사부와 아버지를 설득하고 나섰다. 그것은 바로 등용대의 대주가 계강자이기 때문이었다. 계강자는 그만큼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제왕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천왕전이 그렇게 삼십 대 이하의 젊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것은 현재가 아닌 향후 십 년, 혹은 이십 년 이후를 염두에 둔 조직이었다.
막붕의 패왕전에도 역시 삼 대가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따로 배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기존의 막붕의 폭풍대에 그가 지금 다스리고 있는 광서, 호남, 호북 군소방파들의 단순한 모음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막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번 개편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하지만 혁련천세가 그런 그의 주장을 외면하자 막붕은 그 길로 호남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제왕성의 현재 실질적인 주력은 모용백의 군사전에 편입되었다. 지금까지 혁련천세와 함께 움직였던 모용백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세력을 응집시킨 것은, 여전히 혁련천세가 그와 함께 당분간의 정세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혁련천세의 제왕성 개편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더욱더 놀라운 발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휘성 공략, 그 선봉을 천왕전이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가 있기가 무섭게 지금까지 참아 왔던 각 문파의 수장들은 물론 모용백마저도 거세게 반대하고 나섰다.
모두가 천왕전을 향후 십 년, 이십 년 후를 바라본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들의 아들이나 수제자들의 편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혁련천세는 그런 그들을 곧바로 전장으로 투입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이에, 이미 자리를 비워 버린 막붕과 그를 따르는 군소방파들 수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들이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안휘성은 지금까지 여타의 성과는 사뭇 달랐다. 바로 오대세가의 중심인 남궁세가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주변으로 하남 숭산의 소림, 호북 무당산의 무당, 산동의 황보세가를 비롯한 거대 방파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군소방파와는 달리 그들의 유대는 매우 돈독하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자칫하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모두 상대해야 하는 상황까지도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비록 이들 방파의 위세가 이전만 못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호남의 형산파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 주는 일례였다.
이 년여의 소모전과 제왕성의 주력 투입, 명문의 힘을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모용백은 이런 일련의 사태를 이야기하면서 조목조목 천왕전의 안휘성 공략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요는 안휘성을 공략하기에 천왕전의 인물들은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애송이라는 것이다.
모용백은 이토록 중요한 안휘성 공략의 선봉을 이런 애송이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며 혁련천세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혁련천세의 안휘성 공략의 진위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 안휘성 공략은 말뿐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후계자 구도를 완성하기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수순이라는 것이었다.
사마우를 비롯한 젊은 층이 주축이 된 안휘성 공략, 그것은 그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 주는 한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들의 유대감을 돈독하게 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볼모로 끌려가는 등용대의 후기지수들과 사마우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한편, 그들 간의 위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뜻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모용백은 사마우의 잔인함을 비난하며 그가 성주의 후계자로 자질이 없음을 주장했다.
사람들의 불만은 한동안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장 심하게 반발한 것은, 등용대에 속한 자녀를 둔 군소방파의 수장들이었다. 천왕전만으로는 이번 안휘성 점령은 어차피 불가능했다. 선봉에 섰다고 하지만 차지할 공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반면에 위험은 너무나 컸다. 그런 위험 속으로 자식을 몰아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마우는 한동안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신과 관련된 일이기에 따분한 자리였음에도 피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사마우는 그저 혁련천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혁련천세의 일단의 조치는 그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후계자라니, 그런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사마우 자신이었다. 스스로 냉정히 생각해 보건대 자신에게는 막붕을 능가하는 무위도 없었다. 모용백처럼 뛰어난 두뇌를 가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공을 세운 것도 아니다. 세인들의 말처럼 성주의 자식도 아니었다.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본다면 언젠가 그들을 능가할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아직은 일개 전의 전주 자리를 사양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대체 이런 풍파를 일으켜 가면서 성주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다.
하지만 제왕의 결정은 번복되는 법이 없었다. 한동안 반발하던 모두가 지쳐 돌아가자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마우 역시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사흘 뒤 혁련천세가 따로 사마우를 찾았다. 제왕의 부름을 받은 사마우는 곧장 그의 거처인 제왕전으로 향했다. 그렇게 제왕전으로 들어서면서 사마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뭔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쓱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마우의 모습을 확인한 혁련천세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제법이군. 어느새 환사를 감지할 정도로 성장했는가?’
환사, 그는 혁련천세의 친위대인 환영대의 수장이었다. 또한 혁련천세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모용백과 막붕을 제외하고는 제왕성 내의 누구도 그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단번에 환사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 환사의 존재를 사마우가 단번에 감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마우의 무위가 모용백이나 막붕보다 뛰어나다 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한 가지 특출한 능력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재능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 달리 사마우가 가진 능력, 그것은 바로 살기를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다른 살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까? 사마우의 살기를 감지하는 능력은 남들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환사의 살기는 그야말로 순간적이고 미세했다. 하지만 사마우는 그것마저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성주의 거처다. 그리고 자신은 성주의 부름을 받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런 자신을 향해 잠시나마 살기를 내비치는 인물이 있다는 것, 그것은 가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사마우의 떨떠름한 표정에 혁련천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녀석, 제법이구나.”
혁련천세의 칭찬에 사마우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소 껄끄러운 표정으로 힐끔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혁련천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자리를 비워 주겠는가?”
환사가 천장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가만히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그런 환사를 바라보며 혁련천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환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환사가 밖으로 나가자 혁련천세가 천천히 사마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레 혁련천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사마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혁련천세가 그런 사마우의 손에 한 장의 서찰을 쥐어 주었다.
“그동안 즐거웠느냐?”
혁련천세는 말과 동시에 사마우에게 서찰을 품에 갈무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마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찰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마우를 향해 혁련천세가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그동안 즐거웠냐고 묻지 않느냐?”
사마우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혁련천세를 바라보았다. 진규의 거처에서 혁련천세를 만난 이후 이렇게 따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혁련천세는 그 이후의 생활이 즐거웠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지난 삼 년의 세월, 사마우는 계속되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의 창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살육, 새삼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그것은 자신에게 적지 않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실상 천하니 뭐니 하는 것은 혁련천세의 몫일 뿐 사마우에게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내 사마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마우를 혁련천세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냐?”
사마우가 기다렸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삼 년, 제법 알차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삼 년을 위해서 지옥 같은 칠 년을 보내야 했다. 사마우는 스스로 한 사 년쯤은 더 즐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혁련천세가 담담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러니 앞으로 너의 즐거움은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야.”
사마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혁련천세의 말에 사마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제왕전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제왕전을 나오면서 그는 품 안에 있는 서찰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환사를 밖으로 내보내고 은밀하게 자신에게 전해 준 서찰, 그것은 혁련천세가 환사조차도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방에서 자신의 최측근조차 믿지 못한다는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사마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사마우는 서둘러 서찰을 확인했다. 서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마라
서찰의 내용은 단지 그것이 전부였다. 막상 읽고 나니 마음이 더욱더 심란했다. 혁련천세는 자신의 안방에서 왜 말이 아닌 서찰로 뜻을 전달한 것일까? 그것만으로도 전혀 제왕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따라 혁련천세의 몸에서 제왕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오늘따라 혁련천세가 무척이나 늙어 보였다.
혁련천세는 이미 지천명(知天命, 50세)을 넘긴 나이,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이에 비해서도 오늘의 혁련천세는 더더욱 늙어 보였다. 마치 과거 자로의 마지막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가 아는 혁련천세는 제왕이었다. 세상이 인정하는, 아니 사마우 자신이 인정하는 제왕이었다. 사마우에게 제왕이란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괜한 걱정이겠지.’
사마우는 이런 일련의 불안감을 단지 기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말라는 혁련천세의 말을 사마우는 승리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다음날 사마우는 천왕전의 수하들을 이끌고 안휘성으로 출발했다. 출정하는 그날 혁련천세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를 마중했다. 예전과 다름없는 혁련천세의 제왕의 기도에 사마우는 찜찜했던 마음을 비로소 훌훌 털어 버리고 전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그곳에서 사마우는 남궁세가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침내 도착했는가?”
그런 사마우의 뒤에서 사신대주 문인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궁세가로 이르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문인호의 너덜너덜한 옷자락, 수하들의 몸 곳곳에 남겨진 검흔, 그리고 그 자리에 말라붙은 핏덩어리, 이러한 것들이 그동안의 치열한 격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출발할 당시와 비교해 인원이 대폭 줄어 있었다. 이곳까지 살아서 도착한 인원은 고작 삼천에 불과했다. 정확히 처음 출발할 당시 인원의 삼 분의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우선 등용대가 일천오백으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일천의 사신대와 오백의 참혼대가 살아남아 이곳에 도착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던 문인호의 시선이 다시 등용대의 대주 계강자에게로 향했다.
앞선 설명처럼 등용대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등용대의 대원들이 다른 대원들보다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용대 대주인 계강자가 특별히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등용대가 가장 많이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그들은 몸을 사렸던 것이다. 적어도 문인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았다면 사신대와 참혼대의 희생은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줄었을 것이다. 때문에 계강자를 바라보는 문인호의 표정에는 적지 않은 적의마저 감돌고 있었다.
계강자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애써 문인호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자 문인호의 시선이 다시 사마우를 향했다.
그나마 사신대가 참혼대보다 많이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사마우 때문이었다. 상처 입은 한 마리 야수, 그 야수가 격렬하게 싸워 준 덕분에 그나마 일천의 사신대가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