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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문인호는 남궁혜와 대치한 사마우를 보면서 진정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 아니 자신보다 오히려 네 살이나 더 어린 나이에 저 검후 남궁혜를 상대로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저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문인호가 그런 사마우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역시 본연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순간 사마우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사마우의 창이 빠르게 남궁혜를 향해 움직였다. 남궁혜는 그런 사마우의 창을 가볍게 피하면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마우 역시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뒤로 물러나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사마우의 선공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창은 검보다 간격이 더 길다. 그만큼 근접전보다는 원거리의 공격이 유리하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접근하는 남궁혜를 저지하기 위해 선공은 필수였다.
선수필승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선수의 효과를 살리지 못하고 잠시나마 접근을 허용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대가로 사마우의 옆구리에 옷자락이 찢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사마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은 분명히 그녀의 검을 피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런 사마우의 표정을 본 남궁혜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미소와 함께 다시 그녀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검 끝에 보이는 가느다란 검기, 사마우는 비로소 자신의 옷자락을 벤 것이 바로 그 검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마우는 웃고 있었다.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 그것은 사마우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칠가연맹과의 교전 당시 처음 심장을 취했을 때의 그 느낌, 아니 그 이상의 즐거움이 지금 이 순간 느껴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십여 합의 교전, 남궁혜의 검은 여지없이 사마우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것으로 이미 두 사람의 우열은 가려졌다. 실력의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쯤 되면 물러설 법도 하건만 사마우는 전혀 기세를 늦추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더구나 얼굴에 미소마저 짙게 머금고 있었다.
사마우의 전신은 이미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전진하는 기세만큼은 결코 꺾이지 않을 듯했다. 그런 사마우를 상대하는 남궁혜의 얼굴에 당혹감이 내비쳐졌다. 이미 웬만한 사람은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웃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살려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구나.’
남궁혜는 결심을 굳힌 듯 천천히 검을 다잡아 갔다. 그리고 다시 사마우를 향해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일합, 이합, 삼합, 사합, 오합, 남궁혜의 검이 계속해서 사마우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사마우는 결코 쓰러지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남궁혜는 비로소 그가 쓰러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남궁혜 역시 이제야 비로소 간파할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의도적인 움직임은 분명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본능일 것이다. 사마우는 결정적인 순간 아슬아슬하게 치명적인 사혈만은 피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비록 많은 피를 쏟아 내고 있지만 가까스로 치명상만은 피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모질게 급소를 두드려 맞았던 사 년의 시간을. 그 속에서 사마우는 본능적으로 치명상을 피하는 기술을 연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치명상이 아니더라도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사마우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있었다. 문인호와 마찬가지로 사마우 역시 혁련천세를 제외하고 자신의 적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망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덕분에 살기마저 한풀 꺾인 상황이었다.
반면 검후의 기세는 더더욱 강해지고만 있었다.
‘기세라는 것인가?’
창을 움켜쥔 사마우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사마우의 웃음에 검후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지금까지의 살기와는 또 다른 기운이 살기와 함께 그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내 검후의 검이 수직으로 세워졌다. 마치 조금 전 문인호가 펼쳤던 참혼세를 연상시키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문인호의 패도적인 기운과는 달리 검후의 자세에서는 고요함이 느껴졌다. 이를 지켜보던 남용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천지합일(天地合一). 오늘날의 검후를 낳은, 검후의 독문검법 천지무애검법의 기수식인가?”
천지무애검법, 남용이 알기로 그것은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을 기초로 검후가 만들어 낸, 현존하는 최고의 검법이었다. 이를 알아본 남용이 황급히 문인호와 계강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순간 문인호와 계강자, 남용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바로 그때 검후가 사마우를 향해 움직였고, 사마우의 진혈창이 빙그르르 회전하며 검후의 검을 맞아 갔다. 그 한 번의 교전으로 사마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검후는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듯 사마우를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순간 문인호와 계강자, 남용이 동시에 검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후는 갑작스런 삼 인의 합공에, 허공에서 빙그르 몸을 회전하며 멈춰 섰다. 남용은 그런 검후를 무시하고, 떨어지는 사마우를 받쳐 들었다.
사마우의 가슴에 선명한 검상이 남겨져 있었다. 검후가 검을 바닥으로 비스듬히 내리면서 자신을 막아선 문인호와 계강자를 노려보았다. 남용은 황급히 사마우의 상처 부위를 지혈하고 그의 입으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검후를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이제 그만 저희들의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이쯤에서 저희의 퇴각을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순간 이를 지켜보던 남궁천이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남궁세가가 오고 싶으면 마음대로 왔다가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남궁천의 호통에도 남용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검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후가 그런 남용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저 아이만 남겨 둔다면 그대로 떠나도 좋네.”
검후는 이 참에 사마우를 살려 두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내 줄 수 있지만 사마우만은 보내 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남용이 씁쓸한 표정으로 검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안 될 말씀이지요. 그를 남겨 두고는 저희 역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남용의 말에 문인호와 계강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마우가 의식을 잃은 상황, 남용은 마치 자신이 대장인 양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한 제 마음대로 모두가 살 기회를 포기하고 있었다.
검후는 대답 대신 조용히 검을 꽉 움켜쥐었다. 사마우를 보내 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물러났던 남궁천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검수들 역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순간 남용이 차분한 표정으로 검후를 바라보았다.
“죽어 가는 연인의 마지막 부탁이라면 들어주시겠습니까?”
남용의 말에 전장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연인이라니? 지금까지 검후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의 누구도 들은 적이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남동생인 남궁천마저도 놀란 표정으로 검후를 바라보았다. 남용이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검후의 반응이었다.
“……이제 와서 그가 나의 연인임을 자처하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더구나 그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믿으라는 말인가?”
다소 격앙된 검후의 목소리에 남용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검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있어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남용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교의 무영지독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검후가 흠칫 놀라 되물었다.
“지금 마교의 무영지독이라고 했느냐?”
남용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검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찌 너를 믿을 수 있겠는가?”
남용은 대답 대신 검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정확히 일곱 번 검을 휘둘렀다. 지극히 평범한 동작, 하지만 그런 동작을 지켜보는 검후의 눈빛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는 것인가?”
남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성주께서는 아직도 당시의 일들을 후회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성주께서도 혼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검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남용은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사마우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적상에 올라타 천천히 말을 몰았다. 검후는 검을 든 채로 한동안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궁세가의 검수들 역시 그런 검후의 눈치를 살피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천왕전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검후는 자신의 동생인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들을 쫓지 말아 주게.”
누이의 말에 남궁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궁세가를 벗어난 남용은 천왕전 사람들을 이끌고 강서성과 안휘성의 접경지인 안경현에 둥지를 틀었다. 정확한 정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문인호와 계강자는 묵묵히 남용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제6화 마교, 그리고 제왕성


천왕전의 사람들이 안경현에 머무른 지도 한 달여가 지나갔다. 문인호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마우의 옆에 앉아 있는 남용에게 말했다.
“답답하군, 대체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생각인가?”
남용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주님께서 깨어나시기를 기다려야겠지. 달리 무슨 대안이라도 있는가?”
계강자가 기다렸다는 듯 남용에게 말했다.
“이미 우리의 패전은 제왕성에 알려졌을 것이네. 이제 그만 패배를 인정하고 제왕성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여기서 전주님의 회복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남용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네.”
그에 문인호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부터 네가 우리들의 지휘관이 되었지?”
계강자가 동조하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네. 하지만 전주님이 깨어나시지 않는 이상 나 역시 더 이상은 자네의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네. 이미 천왕전의 안휘성 공략은 실패했어. 더 이상 패전의 책임을 미루지 말고 서둘러 제왕성으로 돌아가 성주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남용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주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줄 수는 없겠는가?”
계강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한 달을 기다렸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더 이상 기다린다는 것은 무리야.”
문인호가 계강자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시간 낭비일 뿐이야.”
남용은 여전히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남용의 태도에 문인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남궁세가에서의 그의 행동이나 지금까지의 행동 모두가 의문투성이였다.
“그토록 돌아가는 것을 반대한다면 이제는 우리에게도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이것은 지금까지 한 달여를 참아 왔던 질문이었다. 그가 성주의 절기를 어느 정도 이어받았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또한 참혼대의 살아남은 오백 명은 분명 예상을 뛰어넘는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그가 검후를 저지한 것은 아마도 성주의 밀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왕성으로의 회군을 한사코 반대하는 데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위기 상황이었다. 때문에 애써 궁금증을 참고 묵묵히 그의 뜻에 따랐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문인호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우선은 제왕신단이다.
남용이 혼절한 사마우의 입에 황급히 집어넣은 단약은 아마도 제왕신단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문인호의 단순한 짐작일 뿐이었다. 하지만 검후의 치명적인 일격을 받고도 사마우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그것이 남용이 먹인 단약의 효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효능을 가진 단약,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제왕신단뿐이었다.
그 정확한 효능은 알 수 없었지만 제왕신단은 제왕성에서 오직 하나뿐이었다. 혹자는 그것이 소림의 대환단을 능가하는 효능을 갖고 있다고도 했다. 만약의 경우 제왕 혁련천세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을 대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땅에 단 하나뿐인 단약이었다. 그 보관 역시 혁련천세가 직접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런 문인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혁련천세가 직접 단약을 남용에게 전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혁련천세 역시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 번째 증거는 바로 그들이 머물고 있는 안경현의 안가였다. 남용은 안가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미 충분한 식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하지 않았다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패전 이후의 남용의 대응이 너무나 매끄러웠다. 모든 상황을 예측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과 남용이 굳이 제왕성으로의 회군을 반대하는 것이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강자 역시 그런 눈초리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솔직히 말해 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남용이 조심스레 누워 있는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차분한 표정으로 문인호와 계강자를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전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설명해 달라고 했건만 그는 오히려 사마우에 관한 그들의 생각을 묻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용이 다시 한 번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자네들의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네.”
남용의 진지한 태도에 문인호와 계강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인호의 경우, 솔직히 처음에는 사마우를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생각했다. 그저 운 좋은 살인귀 정도라 할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적이라면 누구든 일체의 망설임 없이 죽이는 악귀 같은 인물이었다. 물론 그래 봐야 미친 야수 정도였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는 야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검후와 그의 대결을 지켜보기 전까지의 평가였다. 하지만 검후와 그의 대결을 지켜본 이후 그의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세상이 넓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고 할까? 문인호는 평소 혁련천세의 모습에 익숙했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혁련천세의 모습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혁련천세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검후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처음 검후에게서 느낀 것은 제왕의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뭐랄까, 일파의 종주만이 내뿜을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검후의 실력, 그것은 문인호가 쉽게 눈빛조차 마주할 수 없는 경지였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초라함이었다. 바로 검후의 눈빛에 움츠렸던 자신의 초라함이었다. 하지만 사마우는 달랐다.
애초에 감추고 있던 실력이 자신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물론 사마후 또한 검후와 현격한 차이가 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확연한 실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검후의 검을 십오초 이상 받아 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나라면 가능했을까?’
그렇게 자문해 보았지만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인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인물이지.”
오랜 생각 끝에 나온 문인호의 대답에 계강자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계강자가 보기에 문인호는 다소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와 조금만 같이 행동해 본다면 누구나가 쉽게 그런 성격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런 대답은 전혀 문인호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후를 대한 충격이 그의 자존심마저 꺾을 정도로 상당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남용이 문인호를 바라보는 계강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느낀 계강자가 오히려 그런 남용을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전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용은 마치 그런 계강자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 별호대로 그는 사신이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계강자가 다소 의문스런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남용이 자신들에게 사마우에 대한 생각을 물은 것은 그가 사마우를 비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한데 남용의 대답은 오히려 냉철하게 사마우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런 대답은 계강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때문에 계강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하는가?”
계강자의 물음에 남용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을 따름일세.”
계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나 역시 공감하네.”
남용은 마치 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의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네.”
남용의 말에 문인호와 계강자가 제법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남용이 저렇게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남용이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성주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마교의 무영지독임도 밝혔다. 이런 사실은 이미 두 사람 역시 검후와 남용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막상 남용의 입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자 문인호는 물론 계강자의 표정 역시 심각하게 굳어졌다.
마교, 그것은 아주 오래된 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무림에 몸담은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존재이기도 했다.
멸무림(滅武林) 절인간(絶人間), 무림을 멸하고 인간을 존재를 절하는 존재. 마교의 부활, 그것은 곧 무림의 재앙을 의미했다.
마치 무서운 괴담처럼 마교는 그렇게 무림 중에 존재해 왔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마교는 오랜 세월 그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무림사에 그들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천 년 전이었다.
천 년 만의 부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디선가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천 년이라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참고 또 참으며 때를 기다려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참아 온 기나긴 침묵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다는 것, 그것은 오늘에야 비로소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무르익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계획을 실현시킬 만큼 확실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참아 온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천 년을 절치부심한 그들의 힘은 분명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할 것이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제왕 혁련천세였다.
당금 무림에 그에 견줄 존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직 마교는 모습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상황. 그런데도 그들은 이렇게 독이라는 수단으로 쉽게 혁련천세를 제압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혁련천세의 죽음으로 시작될 혈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문인호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정 마교가 확실한가?”
남용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계강자가 차분하게 마음을 추스르며 지그시 남용을 바라보았다.
“마교의 등장과 성주의 죽음, 그것이 전주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남용이 적지 않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과연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만하군.”
지금까지 남용이 한 이야기는 바로 사마우에 대한 이야기의 서두에 불과했다. 계강자가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문인호를 바라보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자네의 그 정도 의도야 충분히 간파할 수 있지 않겠는가?”
순간 문인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나도 그 정도는 이미…….”
남용이 그런 문인호를 무시하며 계강자를 향해 말했다.
“자네가 등용대의 사람들을 돌보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당장 눈앞의 어떤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겠지. 그들의 세력이야말로 미래에 네게 적지 않은 힘이 될 테니까.”
계강자는 굳이 이를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앞서의 교전에서 등용대의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몸을 사렸다. 그것은 그들이 비겁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계강자의 지시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계강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문득 계강자의 머릿속에 이전의 교전들이 떠올랐다. 등용대의 절반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참혼대가 등용대를 대신해 적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계강자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설마…….”
남용이 이를 시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마교를 상대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힘이 필요하겠지.”
계강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의도는 분명 달랐다. 계강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남용은 마교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 하지만 취한 행동은 둘 다 똑같았다. 등용대를 보호하는 것. 결국 은연중에 남용이 자신을 돕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강자가 여전히 의문스런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것이 전주와 무슨 상관인가?”
남용이 천천히 문인호와 계강자를 훑어보았다.
“나 역시 자네와 마찬가지로 좀 더 먼 미래를 바라보았지. 다가올 시대는 피의 시대, 시대가 그를, 사신을 원하고 있음이지. 때문에 나는 마교를 상대할 유일한 인물은 바로, 앞으로 다가올 피의 시대를 주도할 전주라고 생각하네.”
문인호와 계강자가 일제히 눈을 돌려 누워 있는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내 계강자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남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자네라면 내 기꺼이 믿고 따르겠네. 하지만 저자는 아닐세. 그저 미친 살인귀에 불과한 인물이야. 그저 잔인한…….”
남용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고맙군, 나를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해 주다니. 하지만 상대는 마교, 저 정도의 잔인함이 없이는 앞으로 마교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야.”
문인호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부지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은근히 공감이 가는 말임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계강자는 여전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야말로 만세(萬歲)의 진리, 어찌 저따위 살인귀에게서 정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어찌 천명(天命)이 그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문인호가 다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천명이 저런 녀석에게 있을 리가 없지.”
계강자의 말도 은근히 공감이 갔다. 남용 역시 계강자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에게 천명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네. 다만 그에게는 천살의 운명이 있을 뿐이겠지.”
남용이 오히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듯 말하자 계강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계강자를 향해 남용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천살의 운명이 바로 이 시대에 하늘이 내린 천명이라고 생각하네.”
계강자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괴변이로군.”
남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네. 바로 제왕의 생각이기도 하다네.”
문인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혁련천세의 생각이란 말이지.”
문인호에게 제왕 혁련천세는 그야말로 천명을 가진 것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지금 죽어 간다는 이야기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는 혁련천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왠지 제왕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더욱 공감이 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