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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계강자가 그런 문인호를 다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처럼 나름 천하를 꿈꾸던 인물이었다. 하긴 무림인 중에 천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왠지 그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비로소 그런 자와 경쟁한 자신의 처지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제왕의 그늘 아래서 천하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마교라는 이름 앞에 한없이 움츠러드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계강자가 이내 웃음을 지우며 남용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검후의 적수조차 되지 못하네.”
그의 말에 남용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수하들도 아직 나의 수하들에 미치지 못하네.”
말하자면 앞으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계강자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마교가 그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겠는가?”
남용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 전의 마교와 지금의 마교는 많이 다르니까.”
계강자는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문인호는 여전히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 년 전 마교는 압도적인 힘으로 무림을 제압하려 했다. 그 압도적인 힘 앞에 무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하지만 강호의 은거기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전 무림이 힘을 합치자 점차 전세는 박빙의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혈투는 이십여 년을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마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하지만 새로이 등장한 마교는 단순히 힘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바로 혁련천세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무영지독이었다.
마교의 무리들은 지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변수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있었다. 치밀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혁련천세를 상대한 것이 십 년의 세월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 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였다.
계강자가 남용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남용이 기다렸다는 계강자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고맙네. 결코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네. 정말 고맙네.”
계강자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남용의 손을 뿌리쳤다.
“무림인이라면 의당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나 말해 보시게.”
남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는 그저 지금까지 자네가 마음에 품었던 일들을 계속해서 실행해 주게.”
계강자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 그것은 천하를 꿈꾸는 것이었다. 남용은 계속해서 계획대로 그것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천하를 품에 안을 힘을 키우라는 말이었고, 또한 그 정도의 힘이 아니고서는 마교를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용이 계속해서 계강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이미 제왕성은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네. 허니 자네는 등용대를 해산하고 본래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면 되네.”
계강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용의 말은, 등용대를 각 문파로 돌려보내고 이후에도 계속 그들과의 결속을 다지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 속에서 힘을 키우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내 남용의 시선이 문인호를 향했다. 문인호 역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문인호에게 남용이 말했다.
“자네는 막붕 어르신의 휘하로 들어가 그분을 도와주시게.”
남용의 말에 문인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패도 막붕을 떠올렸다. 문인호가 기억하는 막붕은 한마디로 무식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그 정도의 무위를 가졌다면 진즉에 천하에 뜻을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제왕의 그늘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다.
문인호는 그 이유가 막붕이 무식하고 야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런 자의 휘하로 들어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계강자는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곰 두 마리가 나란히…… 왠지 썩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들의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삼 인이 공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마우가 지긋한 살기를 내뿜으면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천왕전을 해산한다는 것이냐?”
남용이 그런 사마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전주, 우선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남용의 말에 사마우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제왕이 죽어 가고 있다고 했는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군.”
하지만 그 표정은 그런 말과는 조금 달랐다. 사마우는 자신이 제왕성을 떠나기 전 혁련천세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창을 움켜쥔 채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상처가 욱신욱신 그의 육체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마우는 통증 때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삼 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 있기는 한 것인가?”
통증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 듯 그가 남용을 향해 물었다. 남용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사마우는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군, 내가 아직 살아 있었군.”
너무나 담담한 사마우의 태도에 계강자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마치 자신의 목숨을 타인의 목숨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말투에서 적어도, 그가 자신이 죽인 타인의 목숨과 그 자신의 목숨의 가치에 그다지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재미있군.”
계강자가 부지중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계강자를 사마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 몰골이 그렇게 재미있는가?”
계강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사마우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계강자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해체할 천왕전, 존대 따위는 집어치워.”
이에 동의하듯 계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문인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문인호는 언젠가는 천왕전의 전주가 되겠다는 야심 찬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혁련천세의 사후 자신이 제왕성의 성주가 된다는 수순이었다.
하지만 사마우는 그런 천왕전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역시 야망이 없는 단순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생각만 드는 것은 아니었다. 왠지 그런 그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재미있군.”
문인호 역시 부지중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와중에 남용이 조심스레 사마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몸을 보중하시지요.”
계속되는 그의 존대가 껄끄러웠던 것일까? 사마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확인했다.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검상이 그의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멋지군.”
문인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고 멋지다고 말하는 인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사마우 역시 그런 또라이는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면서 사마우는 검후를 떠올리고 있었다.
“검후라고 했는가?”
사마우는 엄습하는 통증을 느끼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자신의 가슴에 흔적을 남긴 검후의 마지막 일검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말 멋진 일검이었다. 검후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그러고는 그대로 다시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삼 인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계강자였다. 그는 밖으로 나가는 즉시 등용대의 대원들을 소집했다.
한동안 그의 유창한 달변이 계속되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등용대의 대원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몇 번의 만세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리고 그 길로 등용대의 대원들은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계강자 역시 이내 자신의 길을 떠났다.
밖의 소란이 잠잠해지자 문인호 역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대원들과 함께 조용히 밖으로 사라졌다.

사마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보름이 지난 후였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입 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참혼대 대주 남용이었다.
“……자네는 아직 떠나지 않았는가?”
이렇게 말하면서 사마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
남용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달 보름입니다.”
사마우는 천천히 진혈창에 몸을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의 외상은 거의 치료된 듯했다. 일어난 상태에서 천천히 이리저리 몸을 뒤틀면서 사마우는 몸 상태를 정비했다.
“괜찮군.”
그러고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대체 어딘가?”
“안휘성 안경현에 위치한 안가입니다.”
남용의 대답에 사마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휘성? 어째서 아직까지 안휘성에 있는가?”
남용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주의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일단 이곳에서 전주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사마우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왕성으로 돌아갔었어야지.”
남용이 진중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성주님의 마지막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사마우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성주의 마지막 당부?”
남용이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안휘성으로 출정하기 전 성주께서 전주에게 따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그제야 사마우는 성주의 서찰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마라

이내 사마우가 지긋한 시선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런 사마우를 향해 남용이 한 통의 서찰을 내밀었다.

성주 위독. 급귀환

짧은 한마디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마우가 남용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다니, 당연히 돌아가야지.”
남용이 담담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성주의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사마우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오의 햇볕이 따사로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덕분에 눈이 시리도록 아팠다.
“말을 타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아닌가? 적상.”
사마우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적상이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며 등장했다. 사마우가 부드러운 미소로 적상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녀석, 살아 있었구나.”
그리고 동시에 적상의 등에 몸을 실었다. 남용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가시더라도 조금 더 요양을 취하고 가시지요.”
사마우가 그런 남용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도 늙은이의 최후 정도는 내가 지켜봐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명색이 후계자인데 말이야.”
사마우는 그대로 적상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적상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남용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사마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완전히 인간말종은 아니라는 뜻인가?”
그런 남용의 등 뒤로 한 명의 참혼대원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참혼대의 부대주 매진상이었다.
“이대로 전주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남용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면 날더러 그를 죽이기라도 하라는 말인가?”
매진상이 씁쓸한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남용이 그런 매진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디 말린다고 들을 사람인가? 그나마 성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을 보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군. 일단 우리도 그의 뒤를 따르도록 하지.”
매진상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회군입니까?”
남용이 입술을 꽉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현을 떠난 사마우는 계속해서 남으로, 남으로 말을 달렸다. 강서성을 지나 광동의 제왕성까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시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닷새를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눈앞에 제왕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왕성 앞에 도착한 사마우는 비로소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적상 역시 다소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제왕성, 대륙 동남부 일곱 개 성의 주인답게 제왕성은 여전히 그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사마우는 천천히 제왕성의 성문 앞으로 말을 몰았다.
끼이익∼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성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제왕성 무인들이 아니었다.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마(魔)라는 글자. 덕분에 사마우가 그들이 마교의 인물임을 알아채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내 사마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그들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마교 따위가 제왕성의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는가?”
사마우의 말에 마교도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마우가 그런 그들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면서 진혈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마교의 인물들은 그런 그를 막지 않고 조심스레 길을 열어 주었다.
그들이 자신을 막지 않자 사마우는 곧장 말머리를 제왕전으로 돌렸다. 잠시 후 제왕전에 도착한 사마우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혁련천세가 머물고 있는 제왕전, 그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긴장감은 마교도들과 환사의 환영대가 대치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단 지상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숫자가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언제부터 제왕성의 제왕전이 두더지들의 놀이터가 되었는가!”
사마우의 일갈에, 땅속에 숨어 있던 두더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확인한 사마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의 몸에서 내뿜는 마기가 결코 녹록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로 익숙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사마우가 얼굴을 붉히며 분노의 일갈을 터트렸다.
“모용백!”
사마우의 외침에 모용백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웃음만으로도 사마우는 이 모든 음모의 주역이 모용백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마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용백, 네가 무엇 때문에,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이따위 짓을, 어떻게 너 따위가 감히 성주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사마우가 알고 있는 모용백은 제법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를 높게 보아도, 도저히 혁련천세를 위협할 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