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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 일이 있고 사흘 뒤에야 전마는 제왕성에 도착했다. 모용백이 그런 전마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애송이의 시신은?”
전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패했다.”
순간 모용백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놈의 실력이 철위명 님을 따돌릴 정도였다는 말입니까?”
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용백이 그런 전마에게 따지듯 물었다.
“허면 어이하여 그를 놓쳤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모용백의 추궁에 전마가 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따위가 감히 지금 나를 심문하자는 것인가?”
전마의 분노에 모용백은 일단 꼬리를 내렸다. 그런 모용백을 향해 전마가 담담히 말했다.
“뜻밖의 원군이 있었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용백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참혼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용백이 참혼대를 언급하자 전마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전마의 태도에 모용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그들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모용백의 말에 전마는 곧바로 몸을 돌려 제왕전으로 향했다. 그렇게 전마가 사라지자 모용백의 뒤에 있던 야율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모용백에게 말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고작 참혼대 따위가 전마 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야율을 보며 모용백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겠는가? 전마 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뭐 이 기회에 그에게 빚을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일단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에는 나의 실수로 해 두도록 하게. 어차피 그따위 애송이에 대해서는 상부에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야율이 내키지 않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오나…….”
모용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만, 이 일은 이쯤에서 덮어 두도록 하지. 우선은 당면한 시급한 문제들이 많으니까.”
야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말하는 시급한 문제, 그것은 패도 막붕에 관한 것이었다. 성주의 부고를 접하기가 무섭게 막붕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막붕은 성주가 죽고 사마우가 실종된 지금 의당 성주의 자리는 자신의 차지이며,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또한 강서, 호남, 호북, 광서 지역에 이를 선포하고 그 일대의 세력을 규합해 새로운 제왕성을 건립하고 있었다.
모용백에게는 정말 뜻밖의 상황이었다. 성주의 죽음이 알려지면 의당 막붕이 가장 먼저 달려올 줄 알았다. 그때 막붕을 처단하고 완벽히 제왕성을 수중에 넣으려 했다. 그런 그의 계획은 막붕의 예상 밖의 행동에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모용백은 막붕에게 야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막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야심은 있다는 것인가?”
모용백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야율은 마치 모용백이 자신을 향해 말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모용백을 바라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혁련천세가 죽고 제왕성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남용이나 계강자의 기대와는 달리 마교는 더 이상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제왕성의 붕괴를 시작으로 마교는 본격적으로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먼저 대륙 서쪽에서 시작되었다. 청해의 곤륜파가 첫 희생양이었다.
고작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구파의 하나인 청해의 곤륜파를 시작으로 사천의 아미, 청성, 당문을 비롯한 운남, 귀주, 광서, 호남, 광동, 복건, 강서, 절강성에 이르는 대륙 남부의 전 지역 백여 개 군소방파가 마교의 제물이 되었다. 고작 삼 년 만에 대륙 남부 대부분의 지역이 마교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고작 삼 년이었다.
그 삼 년 만에 혁련천세가 삼십 년을 공들여 이룩한 제왕성의 두 배를 훨씬 넘는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그 긴 침묵의 시간만큼 마교의 힘은 세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막붕을 중심으로 한 제왕성의 잔존 세력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제왕성이 차지한 지역 중 대부분이 마교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렇게 막붕은 광서, 호남, 광동, 복건, 강서, 절강성 일대를 마교에게 내주었다. 대신 전력을 강소성에 집중하고 마교와의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검을 든 무림인이라면 누구든 이제 선택을 해야만 했다. 마교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마교의 폭풍을 피해 북부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북부로 이동한 사람들, 그들 역시 마교와의 일전을 위해 각자의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크게 네 갈래였다.
정, 사, 오대세가, 제왕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파의 경우 그 중심은 물론 구파일방이었다. 그중에서도 하남 숭산의 소림과 호북 무당산의 무당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사파의 경우는 산동성 태산에 위치한 사황 기무령의 사혈문이 그 중심이 되었다.
각자가 나름대로 마교와 대치한 상태에서도 서로를 경계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이들 사대 세력이 마교의 폭풍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제7화 군마현의 대장간에서
갑자기 호남성 일대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마교의 다음 목표가 바로 다름 아닌 호북성 무당산에 위치한 도가의 성지 무당파였기 때문이다. 마교의 주력이 시시각각 호남성 일대로 몰려들고 있었다.
단지 마교의 주력뿐만이 아니었다. 마교에 귀부한 군소방파들이 줄지어 호남성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마교의 요청에 의해서, 그리고 일부는 스스로 자청해서 공을 세울 기회를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호남성 일대에는 때 아닌 호황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호남성 남부 영주의 군마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작스레 곳곳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객점, 유곽, 기루 등을 시작으로 대장간, 목마장 등 일전을 앞둔 사람들에게 필요한 부대시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호남성에 위치한 수많은 대장간 중에서도 유독 인기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군마현 입구에 위치한 작은 대장간이었다.
간판도 푯말도 따로 없었지만, 그 대장간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무인들이 검을 맞추거나 수리하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몰려든 손님에 비해 대장간의 규모는 너무나 왜소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대장장이는 고작 두 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실제로 주문을 받는 사람은 그중에서도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매일 그저 한가로운 표정으로 화덕의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 오늘 주문은 여기까지입니다.”
주문을 받는 대장장이의 말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렸다.
이곳 대장장이의 실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그들이 받는 주문은 한정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좋은 제품이란 결코 쉽게 만들어지는 법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적당한 양의 주문만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미 한 달치 주문이 밀려 있는 상태였다. 그만큼 제품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성질 급한 사람은, 혹은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은 결국 다른 대장간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문을 닫겠습니다.”
주문을 받던 대장장이가 마치 보고하듯 다른 대장장이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두 대장장이들의 나이는 그다지 차이 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문을 받던 대장장이의 태도는 너무나 깍듯했다.
고개를 숙이는 대장장이, 그는 다름 아닌 삼 년 전 사마우를 등에 업고 전마의 손아귀에서 탈출했던 남용이었다. 그가 인사한 곳에는 한 젊은이가 물끄러미 화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른 대장장이, 그는 바로 사신 사마우였다.
지난 삼 년의 세월, 대체 사마우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지금 그의 모습에서는 언제나 주변을 떠돌아다니던 짙은 살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과거 사신이라 불리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사마우는 남용의 인사에도 딱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마우의 모습에 이미 익숙한 듯 남용은 개의치 않고 천천히 대장간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용은 수리를 부탁 받은 십여 자루의 검을 따로 정리하고, 제작을 부탁 받은 검의 도면을 사마우 옆 준비된 자리에 놓아두고 땔감을 옮기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 사마우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남용은 그렇게 자신의 일을 마치고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대장간을 나섰다.
실제로 사마우는 낮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불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반면에 남용은 언제나 그랬듯 대장간 주변을 정리하고, 땔감을 구하고, 그날 먹을 음식과 야식을 준비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마우는 밤이 되어야 비로소 일을 시작했다.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묵묵히 쇳덩어리를 상대로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남용은 항상 그렇게 사마우가 일을 시작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대장간을 나서곤 했다. 사마우는 대장간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지만 남용은 따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호남성 영주 군마현의 대장간, 삼 년 전 그곳의 화로에 다시 불이 붙었다. 그것은 폐가로 변해 버린 대장간에 거의 사십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십 년 전, 그 대장간의 대장장이 이름은 자로와 진규였다.
자로는 언젠가 무심결에 이곳 대장간에 대해 사마우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사마우는 어렵게 기억을 더듬어 이곳을 떠올렸다. 전마의 손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마우는 남용의 치료로 상처가 회복된 이후 미련 없이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처음 군마현의 대장간이 문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그저 비웃기만 했다.
호미나 낫 등의 농기구를 취급하는 대장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기를 취급하는 대장. 당시에 이곳은 이미 제왕성의 영역으로 무림의 분란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더구나 군마현은 외진 곳이라, 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때문에 무기를 취급하는 대장간을 운영하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으로 보였다.
처음 일 년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그다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제련하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사마우는 진규가 진혈창을 제련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나름대로 대장장이의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렇게 다시 이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대장간은 다른 곳이 십 년을 일해도 다 벌지 못할 돈을 벌어들였다. 사람들의 비웃음은 이내 동경으로 바뀌었다.
선견지명, 처음 비웃음을 흘렸던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내다본 두 대장장이의 탁월한 안목에 찬사를 보냈다.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은 몇몇 사람들의 생각처럼 단순한 행운에 불과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마교가 등장한 지 일 년 만에 이곳 일대에 전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전란은 계속해서 주변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렇게 대륙 남부를 거의 평정한 마교는 곧장 호북성 공략을 준비했다.
상대가 도가의 성지인 무당파였기 때문일까? 여타 지역과는 달리 호북성 공략을 위한 준비 기간은 다소 길었고, 덕분에 호황은 한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지난 삼 년, 사마우는 세상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장장이 일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용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교의 하늘임에도 별들은 여전히 그 찬연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과거 혁련천세는 그에게 사마우의 보필을 명했다. 전마와 상대할 때만 하더라도 남용은 일말의 망설임도,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 사마우가 마교에 대적할 유일한 인물이라는 확신마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단순한 망상에 불과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전마에게서 벗어나 다시 눈을 뜬 사마우, 그는 더 이상 자신이 기대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사위를 압도하는 살기도,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던 그 예리한 눈빛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남용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혁련천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를 무림이라는 세계로 이끌었다. 그에게 무림에서의 새로운 삶을 부여해 준 것이다. 그런 혁련천세의 마지막 뜻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옛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사마우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사마우는 이제 아마도 자신의 길을 확실히 찾은 것 같았다. 사마우의 길, 그것은 바로 대장장이의 길이었다.
화로 속 이글거리는 불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의 아지랑이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듯했다.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훨씬 좋은 느낌이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더 이상 격변하는 난세를 주도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이상 사마우에게 목을 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무의미한 생활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막붕의 휘하에 들어가 마교와의 일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하늘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시각, 대장간에는 때 아닌 손님이 찾아들었다.
일남 일녀, 얼핏 보기에 연령은 대략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기척도 허락도 없이 대장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사마우는 그런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검 수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군.”
사내의 말에 여인이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이대로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안심하라는 듯 여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누군가. 차세대 천하제일검, 떠오르는 무림의 샛별이 아닌가? 나와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자신감에 찬 그의 말에도 여인은 통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사형, 제발 무턱대고 엉뚱한 일에 나서지 좀 말아요. 괜히 사형이 나서는 바람에 일행 모두가 위험할 뻔했잖아요.”
그녀의 말에 사내가 발끈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장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말에 여인이 한껏 눈을 부라렸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친 챈 두 사람이 서로 묘한 시선을 교환하며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먼저 여인이 그를 향해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오늘 하룻밤만 쉬어 갈 수 없을까요?”
여인의 정중한 태도에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개 대장장이에게조차 지나치게 깍듯한 그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여인과는 반대로 사내는 거만한 표정으로 은자를 바닥에 툭 던졌다.
“그 정도면 우리가 하룻밤 묵어 가는 삯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사내의 건방진 말에 사마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살짝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수리하던 검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에 사내가 다소 험악해진 얼굴로 사마우를 노려보았다. 마치 지나가는 개를 보는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사마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를 대신해 여인이 다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끝낸 여인은 사마우를 지나쳐 한쪽 귀퉁이의 공간에 쪼그리고 앉았다. 사내 역시 그런 그녀를 따라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사내는 쪼그리고 앉은 여인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주인장. 뭐 덮을 만한 것은 좀 없소?”
사마우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선반 위에 놓여 있던 두 장의 모포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모포를 받아 든 사내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자신이 던져 준 은자라면 그럴듯한 객점에서 하룻밤을 보내도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불친절한 사마우의 태도가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여인이 그런 사내의 손을 붙잡으며 그를 제지했다. 사내는 애써 불쾌함을 참으면서 서둘러 한 장의 모포를 바닥에 깔고, 나머지 한 장으로는 여인의 몸을 덮어 주었다.
잠시 후 여인이 부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가을로 접어드는, 제법 밤바람이 쌀쌀한 날씨였지만 지금 이곳은 화로가 불을 뿜는 대장간이다. 더구나 두 장의 모포라면 추위를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여인의 입술은 이내 새파랗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사내가 여인을 조심스레 부둥켜안았다.
“사매, 무슨 일이야?”
사내의 물음에도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다. 사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내 상태가 조금 호전되는가 싶더니 다시 그녀의 몸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순간 다시 대장간의 문이 열렸다.
사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들어선 인물은 마흔을 훌쩍 넘어선 중년의 여인이었다. 지금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사마우가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한순간이지만 그의 눈빛이 적지 않게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사마우는 다시 불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장간으로 들어선 중년 여인은 조금 전 일남 일녀가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레 대장간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사마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상황이 위급하여 어쩔 수 없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결례를 범했네. 내 사례는 적지 않게 할 것이니 하룻밤만 묵어 가도록 해 주게.”
사마우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검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사마우의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중년의 여인은 조심스레 그 옆에 금자 한 냥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일남 일녀가 그러했듯 반대편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하지만 사내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검을 꺼내 든 채로 조심스레 바닥에 앉았다. 순간 몸을 떨던 여인이 중얼거렸다.
“으∼ 추워……. 엄마.”
젊은 여인의 중얼거림에 중년의 여인이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벌떡 일어서서 일남 일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내가 황급히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한줄기 바람이런가? 중년의 여인은 바람처럼 사내의 곁으로 다가가 너무나 간단하게 그의 혈도를 점했다. 사내는 중년 여인의 빠른 움직임에 놀라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중년의 여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계할 것 없다. 이 아이의 상세를 살펴보려 함이니.”
이내 중년의 여인이 젊은 여인의 맥문을 짚었다.
“빙마의 음한지공에 당한 것인가?”
상대가 한눈에 사매의 상태를 확인하자 사내는 적지 않게 놀라며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 거기에는 ‘절정(切情)’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 비로소 안심의 표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자 그런 사내의 변화를 확인한 중년의 여인이 조금 전에 제압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혈도가 풀리자 사내는 곧장 그녀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당의 속가제자 마장전이 검후를 뵙습니다.”
마장전의 인사에 검후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라고 했네, 젊은이. 그만 예를 거두시게.”
검후의 말에도 마장전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검후가 조용히 젊은 여인의 맥문에 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내 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돌아왔다. 곧 검후는 자신의 품속에서 단약을 꺼내 여인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응급 처치를 끝내자 검후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 와중에도 사마우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검의 제련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마장전이 그런 사마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검후의 존재는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더구나 검을 다루는 대장장이라면 귀동냥으로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이름이었다. 하지만 대장장이는 일체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장전에게는 그런 대장장이의 태도가 무척 꺼림칙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