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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그런 와중에 날이 밝아 왔다. 잠시 후 젊은 여인도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여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상황을 살폈다. 중년의 여인을 확인한 그녀는 옆에 선 마장전을 바라보며 의문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마장전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뭔가 나무라는 표정으로 마장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손히 검후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는 무당의 속가제자 이수연이라고 합니다.”
검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지사거늘 과히 마음에 두지 말게.”
이수연이 고개를 들면서 마장전과 대장장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드렸건만 사형의 경솔함 때문에 애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잖아요.”
이수연의 말에 마장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연, 이수연이 사마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동시에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이곳은 마교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무당 공략을 준비하는 마교를 염탐하기 위해 이곳에 잠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장전이 대장장이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장장이가 자신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때문에 이수연은 어쩔 수 없이 대장장이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순간 대장간의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선 인물은 또 한 명의 대장장이, 바로 남용이었다. 이내 남용과 이수연의 눈빛이 교차했다. 이수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다짜고짜 남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남용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검을 피하면서 그 손목을 움켜쥐었다. 뜻밖의 반격에 맥문을 잡힌 이수연은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남용이 이수연의 맥문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이내 이수연의 검이 바닥에 떨어지자, 그는 조용히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대장간의 문을 닫았다.
“누구냐, 넌.”
남용의 물음에 이수연은 목을 컥컥거렸다. 남용이 그녀의 목을 움켜쥔 손을 조심스레 놓았다. 이수연이 다시 바닥의 검을 움켜쥐려 하자 남용이 오른발로 그녀의 검을 밟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물었다.
“누구냐, 넌.”
마장전이 그런 그를 향해 살수를 펼치려는 순간 검후가 그런 그의 검을 막았다.
“오랜만이군.”
비로소 검후를 확인한 남용이 흠칫 놀라며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입니다.”
남용과 검후가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하자 마장전은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서로 아시는 사이입니까?”
마장전의 물음에 검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남용이 사마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마우의 옆에는 십여 자루의 검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남용이 사마우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찾아오신 손님들입니까?”
순간 이수연과 마장전이 놀라며 화로 앞에 앉아 있는 대장장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평범한 대장장이인 줄 알았다. 그런 그에게 남용과 같은 고수가 존대를 하자 놀랐던 것이다. 사마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검후가 남용에게 말했다.
“자네가 어째서 제왕성이 아닌 이곳에 있는가?”
남용이 씁쓸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그야 이곳에 제 주군이 계시니까요.”
그제야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검후가 사마우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제왕성의 성주가 아닌 남용의 주군, 그것도 이십 대의 청년, 떠오르는 인물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순간 검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까지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도 그가 사마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사마우의 모습에서 도무지 과거 자신을 상대하던 살인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사마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검후에게 말했다.
“내상이 심한 듯하니 당분간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시지요.”
사마우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검후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폐가 되지 않을는지.”
사마우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일전에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폐랄 것도 없지요.”
일전에 받은 은혜라면 삼 년 전 그들을 놓아주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검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자네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검후의 말에 사마우가 남용을 바라보았다. 남용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문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조금 전 일남 일녀가 앉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남용이 그곳에 서서 안쪽 벽면을 더듬거리자 이내 땅바닥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그곳에 감춰져 있던 비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연히 이곳에서 발견한 공간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주변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시지요.”
검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네.”
그러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검후가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두 사람은 남용과 사마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마우가 바닥의 은자와 금자로 시선을 돌렸다. 남용이 사마우의 뜻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중히 그들을 안내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들 역시 검후가 사라진 계단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통로로 사라지자 남용이 다시 벽면을 더듬었다. 이내 통로가 다시 자취를 감췄다.
남용이 의아한 눈으로 사마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의도입니까?”
사마우가 그런 남용을 향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의도는 무슨, 그냥 은혜를 갚는 것으로 해 두지.”
기대와는 다른 대답에 남용이 실망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남용의 마음은 그야말로 착잡했다. 검후 남궁혜, 그녀는 사마우에게 첫 패배를 안겨 주었던 여인이다. 그런 자를 대하면서도 이렇듯 담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이미 그가 무림에서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것이다.
차라리 검후와 한바탕 실랑이라도 벌였다면 그의 마음이 이렇듯 착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던 검후의 내상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곳에서 대장장이 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무공은 과거와 그다지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적어도 자신보다는 뛰어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날 밤, 남용은 비밀 계단을 통해 밀실을 방문했다. 그들에게 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밀실로 들어서자 마장전과 이수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검을 든 채 그를 맞이했다. 상대가 남용임을 확인하자 그들은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한쪽 침상 위에는 검후가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었다. 남용은 음식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검후의 운기조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무척이나 배가 고팠던 것일까? 검후의 운기조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마장전과 이수연의 입에서 침이 꿀꺽꿀꺽 넘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마침내 검후가 운기조식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탁자로 다가왔다. 남용은 그런 검후에게 남용이 식사를 권했다.
“시장하실 테니 우선 요기나 하시지요.”
남용이 준비한 음식은 한 끼 식사라고 하기에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너무 많지 않은가 하는 듯한 검후의 표정에 남용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외부의 이목도 있고 하니 아무래도 자주 드나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부족하지만 세 분이 내일 점심까지 드실 식사입니다. 아무래도 낮에는 외부의 눈이 있으니 이제부터 매일 이 시각에 이 정도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검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그들이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남용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남용을 바라보며 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남용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작금의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무래도 촌구석에 눌러앉아 있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검후는 음식을 먹으면서 오늘날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검후의 이야기를 듣는 남용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특히 막붕이 이끄는 제왕성 세력의 붕괴는 그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인 듯했다. 하지만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검후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수연이 남용을 향해 물었다.
“제왕성의 인물이 어째서 이곳에 있나요?”
남용이 씁쓸한 표정으로 이수연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나름대로 사정은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과거 제왕성의 인물이었을 뿐 지금은 그저 이름 없는 대장장이에 불과합니다.”
남용의 대답에 이수연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얼마 전 그가 자신을 제압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이수연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나름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실력을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었다.
남용의 나이는 얼핏 보기에 기껏해야 이십 대 중후반 정도, 그런 그가 자신을 그토록 쉽게 제압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인물도 나름대로 훤칠했다.
“이토록 뛰어난 무공을 가지신 분이 어찌 이렇게 초야에 묻혀 계십니까? 의당 검을 들어 분연히 마교에 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수연의 말에 남용은 또 한 번 씁쓸하니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검후를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있어 검후께 이런 상처를 입혔습니까?”
남용의 물음에 검후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검후 역시 마교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호남 일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달아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마교의 졸개들을 피해 달아나던 그녀를 홀로 막아서는 인물이 있었다. 그 한 명의 등장과 동시에, 그녀를 추격하던 마교의 움직임이 멈췄다. 혼자서 검후를 막아섰다는 것, 그리고 그를 확인한 마교의 추격이 멈췄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때문에 검후 역시 방심하지 않고 신중하게 상대를 맞았다.
상대는 이미 검후를 알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 자신의 소개를 잊지 않았다. 홀로 검후를 막아선 그는 마교 서열 십칠 위인 검마 이진중이었다.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검마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검마와 검후의 일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고작 이십여 초도 지나지 않아 싸움의 승패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검후는 스스로 검마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달아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검후가 달아나자 검마는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대일의 정당한 대결에서 검후가 달아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검후는 무사히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승부를 결하지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마교의 무서움을 세상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고작 서열 십칠 위의 고수를 자신이 상대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실로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남용 역시 제법 놀란 표정으로 검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정 일대일의 정당한 대결이었습니까?”
검후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수연이 부연 설명하듯 말했다.
“저희들 역시 합공을 취했음에도, 마교 서열 백 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빙마조차 제압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은 채 도주해야만 했습니다. 마교의 강함은 실로 상상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승산이라는 것이 있을지…….”
그들의 비관적인 표정에 못지않게 남용의 표정도 굳어졌다. 마교가 판을 치고 제왕성이 궁지에 몰려 있는데 촌구석에서 대장장이 노릇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현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검후가 그런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제왕성 소성주인 그가 이곳에 있는 건가?”
남용이 씁쓸한 표정으로 검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과거의 사신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무림을 떠나려는 듯합니다.”
검후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심각하게 굳어진 남용의 얼굴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검후가 차분한 어조로 남용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그의 살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남용은 허탈한 표정으로 검후를 바라보았다.
“그의 살기는 이미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지난 삼 년간 한 번도 살기를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무림을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 아마 천살의 기운도 함께 사라진 듯합니다.”
검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용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천살의 기운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인가?”
남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은 아닐 겁니다. 검후께 패한 이후 그는 다시 전마에게 패했습니다. 그 두 번의 패배 이후 모든 의욕을 상실한 듯합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천살의 기운마저 몸속으로 숨어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검후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이내 과거 사마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나 그가 고작 두 번의 패배로 자멸하고 말 정도의 인물이었던가?”
죽음을 앞두고도 투지를 불태우던 사마우의 모습이 좀처럼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남용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씁쓸한 표정으로 대신했다. 그런 남용을 향해 검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자네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생각인가?”
남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검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가? 제왕성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나와 함께 남궁세가로 가지 않겠는가? 지금 마교를 상대로 한 명의 고수라도 더 필요한 상황, 자네라면 적지 않은 힘이 될 것이네.”
검후의 말에 남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제게는 저 나름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결국 제왕성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남용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늦었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이수연이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장전이 씁쓸한 표정으로 그런 이수연과 남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온 남용은 여전히 불과 검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마우의 모습을 보았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그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삼 년의 시간, 그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그 자리를 지켰다. 심지어 잠도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어쩌면 이런 생활도 그에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대장장이로 일생을 보내는 것도 어쩌면 행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이제는 그를 놓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길이 있기에…….
사마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남용의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용은 고개를 돌려 그런 사마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결심한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제8화 빙마(氷魔) 냉상아(冷祥雅)
그렇게 칠 일의 시간이 흘렀다.
대장간은 여느 때처럼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다. 해가 지고 문을 닫을 시각이 되자 남용은 서둘러 대장간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섰다. 이제는 이 시간이면 언제나 검후를 비롯한 두 사람의 음식을 구하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 그리고 사마우는 언제나처럼 그저 검 손질에 몰두하고 있었다.
남용이 밖으로 나간 지 일각이 지났을까? ‘끼이익’ 소리를 내며 대장간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서늘한 한기가 사마우를 엄습했다. 분명 문을 연 자는 남용과는 전혀 다른 기질의 인물이었다. 사마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천천히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문 앞에는 한 여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느꼈던 한기는 바로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었다. 서늘한 한기가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극음의 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내뿜는 한기로 보아 그것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듯했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마교 복장을 한 사람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일한다는 곳이 이곳인가?”
여인의 말에 마교 사람들 틈으로, 장사꾼처럼 보이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인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확신하듯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여기가 바로 놈이 일하는 대장간입니다. 이 일대에서 너무나 유명한 대장간인지라 제가 잘못 볼 리가 없습죠.”
사마우는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다시 태연하게 검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너무나 태연한 사마우의 모습에 여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교 소속의 빙마 냉상아라고 한다. 네놈이 이곳의 주인이냐?”
빙마의 다소 앙칼진, 그리고 위협적인 어투에 사마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냉상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문득 얼마 전 이수연을 치료하면서 검후가 빙마를 언급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검후는 이수연이 입은 상처가 빙마에게 입은 상처라고 확신하듯 말했다.
그렇게 검후가 단번에 빙마를 언급했다는 것, 그것은 비록 빙마가 마교 백마의 일인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비중을 가진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사마우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당시 사마우는 그들이 빙마, 빙마 하기에 적어도 제법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성의 모습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정작 앞에 서 있는 빙마는 사마우보다도 나이가 어린, 그리고 그 차가운 표정만 아니라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리따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분명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흉악한 마두와는 다소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사마우는 굳이 대장간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 대장간의 주인이지요. 한데 무슨 일로 마교의 고수께서 늦은 시각에 이 누추한 곳을 찾으셨습니까?”
사마우의 여유 있는 태도에 냉상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마우의 너무나 여유로운 태도에서 그가 결코 평범한 대장장이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 말고도 여기서 일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냉상아의 말에 상인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사마우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내 냉상아가 사마우를 위협하듯 노려보았다. 사마우는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런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마치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오히려 냉상아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것입니까?”
냉상아는 그런 와중에도 사마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놈은 어디에 있는가?”
사마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조금 전에 일을 끝마치고 퇴근했습니다만.”
냉상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사마우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뚜렷이 의심할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놈이 눈치를 채고 달아난 것인가?”
그녀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수하 장삼이 나서며 말했다.
“차라리 여기 이놈을 족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냉상아가 사마우를 힐끔 쳐다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죄 없는 민간인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라던 상부의 지시를 잊었느냐? 내가 보기에 저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 앞에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겠느냐?”
냉상아의 말에 장삼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놈이 눈치를 채고 달아났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는 않겠지.”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냉상아는 계속해서 사마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사마우는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계속해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비로소 냉상아가 자신을 안내한 상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놈이 너의 집에서 음식을 사 갔다고 했느냐?”
상인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냉상아를 향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빨리 도착하셨다면 분명히 놈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냉상아가 그런 상인의 손에 금화 닷 냥을 쥐어 주었다.
“너의 제보가 아마도 사실인 것 같군. 자, 약속대로 금화 닷 냥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냉상아는 다소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고 있었다. 다분히 사마우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금화를 받아 든 상인이 연방 고개를 숙이며 냉상아를 향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내 냉상아가 다시 사마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구든 놈의 위치를 제보하는 사람에게는 금화 닷 냥을 주마.”
사마우가 그런 그녀를 향해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냉상아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담담한 태도가 너무나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물증도 없이 괜한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면 용서하게. 아무래도 자네의 동료는 정파의 첩자인 듯하니 보는 즉시 가까운 본교의 분타에 연락해 주게.”
사마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냉상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음식을 구한 것으로 보아 일당이 이 근처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놈의 거처를 파악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이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라.”
“존명.”
그렇게 수하들이 사라지자 냉상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상인을 대동해 밖으로 사라졌다. 냉상아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사마우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교 서열 백 위에도 들지 못하는 년이라…….”
대략 사태를 유추해 본 결과 아마도 남용은 조금 전 냉상아와 함께 온 상인에게서 음식을 구입한 듯했다. 그가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달리 많은 음식을 구입하자 상인이 이에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때마침 마교는 이 일대 정파의 첩자들을 수배하고 있었다. 정파의 첩자인 경우 그 위치만 제보한다 할지라도 금화 닷 냥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금화 닷 냥은 일반 가정에서 육 개월을 넉넉히 생활할 수 있을 만큼 큰돈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난전 상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상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곧장 마교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에게 연락 받은 마교도들이 곧장 대장간으로 찾아온 것이다.
아마도 음식을 구입해 돌아오던 와중에 남용은 운 좋게 이곳으로 향하는 마교 인물들과 그들을 안내하는 상인을 만난 듯했다. 이내 그들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잠시 다른 곳에 몸을 숨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