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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실제로 그들의 힘이 부족해서 천 년의 세월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중원 정벌을 위한 힘만이 아니었다. 내부의 다른 세력마저 제압할 힘, 바로 그 힘을 키우고자 했다. 때문에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천 년 만에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단순한 중원 정벌이 아닌 또 다른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바로 혼자서도 여타 가문을 제압할 수 있다는, 바로 그런 자신감이었다. 문제는 그런 자신감을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그들이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중원 정벌의 선봉에 선 것은 독마 갈자하였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가 선봉에 섰다는 것, 그것은 이미 독마가 다른 구마에게 밀렸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런 독마를 중심으로 시작된 마교의 중원 정벌이 바로 작금의 중원이 처한 현실이었다.
결국 진정한 마교의 중심은 상위 구마였고,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마교지란(魔敎之亂)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었다.
혁련광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사마우가 조금 심각해진 표정으로 혁련광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마교의 주력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혁련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력이 등장하지 않은 마교, 하지만 그 힘만으로도 이미 중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자는 것인가?”
사마우의 물음에 혁련광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마교의 진정한 강자는 철마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철마님의 후예이신 담대비우 님이 그 뒤를 이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마우 님이 그런 철마님의 뜻을 이으신 분, 이제 사마우 님이야말로 진정한 마교의 종통(宗統)이라는 뜻입니다.”
사마우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 모든 일들이 단순히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들에 불과했다. 때문에 마교의 종통(宗統)이니 뭐니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혁련광이 그런 사마우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사마우 님께서 지존의 뜻을 이어 가신다면 저희가 사마우 님의 옆에서 있는 힘을 다해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사마우가 혁련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미 혁련광과 사마는 자신의 수하들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백마의 일인으로서 설사 수하들을 새로이 고른다 할지라도 잃어버린 수하들을 대신할 수준은 아닐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련광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들이 또 다른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터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이들과 함께할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단지 갑작스레 다가온 현실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문제는 마교의 세력이 아직은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실상 그것조차도 사마우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이 마교 천하가 되건 누구의 천하가 되건 지금 사마우에게는 관심 밖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 사마우에게 혁련광이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이제는 철마님의 절기를 제대로 익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혁련광의 말에 사마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철마의 절기,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수천 년 마교사에서 최강의 무공이었고, 또한 고금무적의 무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검을 든 무인이라면 뉘라서 그런 무공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혁련광 따위가 감히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것 자체를 사마우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담대비우가 죽은 상황, 누가 있어 사라진 철마의 절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사마우의 의문스런 표정에 혁련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철마님의 절기는 특별히 비급이 없습니다. 오직 구술로만 철마님의 후예들에게 전수될 뿐입니다. 비록 철마 담대비우 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렇다고 담대가문의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행히도 그분의 동생이신 담대혁 님께서는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이내 사마우가 묘한 표정으로 혁련광을 바라보았다. ‘담대비우의 동생이 살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철마의 후계자로 내세우면 될 일이었다. 차라리 지금 자신을 제압하고 그에게 철면을 가져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을 담대혁에게 데려가려는 의도가 자못 궁금했다. 하지만 솔직히 철마의 절기에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윽고 사마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인즉 담대혁을 만나겠다는 뜻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혁련광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마우는 철면을 쓰면서 침상에 몸을 뉘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렸지만 나름 재미있을 것도 같았다.

그렇게 혁련광이 밖으로 나가자, 그동안 밖을 지키던 삼마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헌원풍이 서둘러 무언가를 물으려는 순간 혁련광이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손가락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었다. 삼마가 혁련광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헌원풍이 혁련광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헌원풍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혁련광이 다소 뜸을 들이자 용골대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급히 옆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가 우리를 따라나선다고 하던가?”
혁련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륜마 적륜이 당연한 결과라는 듯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최강의 무공과 무림지존의 자리를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적륜의 말에 혁련광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 사마우와의 대화에서 혁련광은 적어도 그가 무림지존의 자리 때문에 자신들을 따라나서는 것은 아님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용골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혁련광을 향해 말했다.
“헌데 이대로 그를 담대혁 님께 데려가도 되겠는가?”
용골대의 말에 혁련광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린가?”
용골대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행여나 그가 우문량의 첩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일세. 그럴 경우 자칫 담대혁 님의 위치마저 노출시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혁련광이 그런 용골대의 염려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지그시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어쩌겠는가? 철면은 어떤 식으로든 담대혁 님께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세 사람이 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광이 그런 세 사람을 쓱 훑어보면서 말했다.
“어찌 되었건 우문량이 철면을 순순히 돌려준 것은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토록 빠른 시간에 철면을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은 천운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다시 세 사람이 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륜이 혁련광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우문량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군. 내가 보기에 그는 우문량과 일체의 관계가 없는 인물 같았네. 그렇다면 대체 우문량은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철면을 내준 것일까?”
혁련광이 힐끗 적륜을 바라보았다.
“너무 쉽다는 말인가?”
적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풍이 그런 적륜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철면은 그에게는 무용지물.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철면을 돌려줌으로써 웅크리고 있는 다른 십마를 끌어내려는 계획이겠지.”
헌원풍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혁련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일리가 있는 말일세. 하지만 왜 하필 그일까?”
적륜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혁련광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아. 의도적으로 그를 찾아간 것이며, 또한 그가 진규 노사의 제자라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군.”
혁련광이 담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규 노사라…….”

다음 날 혁련광이 앞장서서 사마우를 안내했다. 그리고 혁련광을 제외한 나머지 삼마가 사마우의 뒤를 호위하듯 따랐다. 호위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마우의 퇴로를 차단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마우 역시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때때로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쓱 훑어보곤 했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보름간의 제법 긴 여정, 그들은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곧장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로 향했다. 사천의 성도인 성도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당가가 위치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미 사천당가는 마교의 손에 무너졌다. 혁련광이 사마우를 안내한 곳은 바로 과거 사천당가가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마교가 성도를 점령한 이후 사천당가는 사천성 마교의 임시 지부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주변으로 일단의 마교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한 명이 혁련광에게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혁련광이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그는 조심스레 사마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를 따르시지요.”
그의 말에 사마우가 혁련광을 힐끔 쳐다보았다. 혁련광이 그런 사마우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안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 나오실 때까지 저희는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지요.”
사마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혁련광이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혁련광의 태도에 사마우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안내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사천당가의 내부로 들어서자 곧바로 다른 안내인이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용담호혈(龍潭虎穴), 사마우는 곳곳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자들이 매복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몇 번이나 안내인이 바뀐 것일까? 모퉁이를 돌 때마다 안내인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내부로 들어감에 따라 매복인의 수는 반대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쪽에 위치한 전각 안으로 들어선 사마우는 곧이어 다시 건물 내에 있는 지하통로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자 또 다른 안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속해서 안내인이 바뀌자 사마우는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수시로 바뀌는 안내인들을 바라보곤 했다. 고작 사람 하나 만나는 데 너무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지하 통로에는 횃불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지하 통로의 어둠에 눈이 조금 익숙해지기도 전에 안내인은 사마우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렸다. 뿌리칠까도 생각했지만 이왕 내친걸음, 여기까지 왔는데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에서 순순히 그의 지시에 따랐다.
이내 안내인이 사마우의 손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마우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르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발걸음을 세기 시작했다. 대충이나마 어느 정도 거리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한동안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안내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도착한 것일까? 사마우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지면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얼마 동안 한 장소를 빙글빙글 맴돌자 또 한 차례 지면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또 다섯 번, 사마우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눈을 가린 검은 천을 풀어헤치려는 순간 안내인이 멈춰 서서 그의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그런 사마우의 눈앞에는 한 늙은이가 우뚝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마우는 한눈에 그가 담대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담대비우의 모습과 지금 담대혁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담대혁임을 확인한 사마우가 이내 얼굴에 쓴 철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담대혁이 손을 흔들며 그런 사마우를 제지했다.
“철면을 벗지 말게.”
그런 담대혁의 반응에 사마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마우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혁련광 등의 목표가 철면에 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사마우를 대하는 태도는, 과거 담대비우를 대했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공손한 그런 점이 더 이상했다. 또한 자신을 호위하는 와중의 이상한 느낌과 마지막으로 이곳에 도착한 이후 자신을 안내하는 안내인의 태도에서 그런 막연한 느낌은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처럼 철면이 곧 철마를 상징한다면 자신에게까지 이렇게 대할 까닭이 없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목적이 철면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까짓 철면 따위에 연연해 할 사마우가 아니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담대혁에게 철면을 던져 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순순히 돌려보내 준다면 말이다.
그러나 정작 담대혁은 의외로 그에게 철면을 벗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이 이것 아니었습니까?”
사마우의 말에 담대혁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수하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게.”
사마우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무례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융숭한 대접을 받은걸요.”
담대혁이 살짝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다행이군. 우선 자리에 앉도록 하지.”
담대혁이 자리를 권하자 사마우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담대혁이 담담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안내해 온 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차라도 내와야 하지 않겠는가?”
담대혁의 말에도 불구하고 안내인은 선뜻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안내인이 행동을 망설이자 담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비로소 안내인은 밖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차를 가져오자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네. 허니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사마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사마우를 안내한 사람은 아마도 담대혁의 심복일 것이다. 그가 잠깐 망설인 것은 아마도 담대혁의 안위를 걱정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혁은 그런 그를 굳이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담대혁은 자신의 심복인 안내인조차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혁련천세가 환사를 내보내고 사마우에게 서찰을 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역시 적의 간세가 판을 치고 있음을 의미했다. 담대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마우에게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그래, 혁련광이 뭐라고 하던가?”
사마우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제게 지상 최강의 무공을 주신다고 하더군요.”
담대혁 또한 피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 말을 믿었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담대혁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럼 자네는 왜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왔는가?”
사마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이라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순간 담대혁이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때로 그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명을 단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 보니 아직 어리군.”
사마우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무모함이란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이내 담대혁이 부드럽게 인상을 바꾸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안내인이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인이 탁자 위에 차를 놓는 동안 담대혁의 말이 이어졌다.
“아쉽게도 나는 자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네. 형의 죽음으로 철마의 대는 이제 완전히 끊어졌다고 봐야겠지.”
사마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담대혁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아쉬운 일이군요.”
담대혁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 아쉬운 일이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우리 담대가문은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천명이 우리를 따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사마우가 공허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천명이라.”
담대혁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들지 마시게.”
갑작스런 담대혁의 전음에 사마우가 입으로 옮겨 가던 찻잔을 멈췄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담대혁을 바라보았다. 순간 안내인이 빠르게 사마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마우의 오른손에 들린 진혈창이 곧바로 빛을 뿌렸다. 마치 이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안내인이 유유하게 창을 피하면서 사마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마우는 생각 이상으로 민첩한 상대의 움직임에 놀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안내인의 손에 들린 검이 곧장 사마우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마우가 왼손으로 탁자를 툭 치자 의자가 스르륵 뒤로 밀려나면서 그의 몸이 뒤로 홱 젖혔다.
동시에 진혈창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상대를 찔러 갔다. 사마우의 빠른 대응에 안내인 역시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 듯 조심스레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밀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마우와 안내인의 팽팽한 신경전. 먼저 움직인 것은 안내인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담대혁이 한순간 흠칫 놀라며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안내인이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방어했기 때문이다.
담대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사마우가 노린 곳은 안내인이 방어하는 심장이 아니었다. 사마우가 실제로 노린 곳은 안내인의 심장이 아니라 바로 그의 머리였다. 안내인의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움직임 때문에 사마우는 그의 머리에 너무도 쉽게 창을 꽂을 수 있었다.
담대혁은 이런 일련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에 머리가 꿰뚫린 안내인 역시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안내인은 숨을 거두었다. 자신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담대혁을 사마우 역시 의아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이내 담대혁은 적잖이 감탄스런 표정으로 그런 사마우를 향해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대단하군, 천하의 섭공을 그렇게 간단히 제압하다니.”
사마우가 여전히 의문 어린 표정으로 담대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가?”
자신을 경계하는 사마우의 모습에 담대혁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보시다시피…….”
울컥, 담대혁이 한 사발의 피를 토해 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을 집어 들고 옆에 있는 화분으로 다가갔다. 차를 화분에 뿌리자 이내 화분의 식물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독?”
사마우의 말에 담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지독이라고 하지. 야비한 독마의 작품치고는 생각 이상으로 잘 만들었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담대혁이 몸을 휘청거렸다. 사마우가 황급히 다가가 휘청거리는 그를 부축했다. 그의 안색이 점차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마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황급히 그의 맥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내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담대혁을 바라보았다.
“무영지독이라는 놈이 제법 대단하긴 하군. 고작 삼 년 만에 나의 내장을 이렇게까지 녹일 수 있다니. 이제는 버티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것인가?”
담대혁이 허탈한 표정으로 사마우를 바라보았다.
“그만 나를 내려 주시게.”
사마우는 그를 의자에 앉힌 후에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맥을 통해 확인한 담대혁의 몸 상태는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당당한 표정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담대혁은 지금까지 애써 태연한 척 허세를 부리며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여기까지 간세가 침입했다면 우리의 존재가 대부분의 적에게 알려졌을 터. 자네는 즉시 이곳을 떠나도록 하게. 그리고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도 믿지 말게.”
담대혁의 말에 사마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대혁은 그런 사마우를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결국 우리 담대가문의 역사가 내 대에서 끝이 나는군.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담대가문은 이렇게 끝나지만 철마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이렇게나마 철마의 유일한 절기를 자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인가?”
사마우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자네에게 철혈지기가 전해진 것은 그나마 하늘이 우리 담대가문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혜일지도 모르겠군.”
담대혁이 천천히 품 안에서 소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가슴살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진짜 가슴살을 벗겨 내는 것은 아니었다. 담대혁이 벗겨 낸 것은 가슴에 미세하게 착용하고 있던 인공 피부였다.
“이것은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내공 운용법인 철혈심공일세. 바로 자네의 몸에 있는 철혈지기를 운용하는 방법이지. 형님의 철혈지기가 자네에게 전해진 것은 천운, 이 양피지는 오로지 철혈지기에 반응해 철혈심공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네.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면 철혈심공을 한 번쯤 연마해 보게나. 조금만 더 시간이 허락했다면 내가 직접 자네에게 이것을 전수해 주었으련만.”
그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벽면을 더듬었다. 이내 한쪽 귀퉁이에서 새로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두르게. 이곳을 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네. 부디 무운을 빌겠네.”
사마우가 어리둥절한, 그리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담대혁을 바라보았다.
“함께 가시지요.”
담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누구도 믿지 말게.”
그렇게 사마우가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 담대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벽면을 더듬었다. 이내 통로의 문이 스르륵 닫혔다. 그러자 담대혁은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으로 벽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벽이 살짝 흔들렸다. 더 이상의 출입을 막기 위해 벽면의 기관을 파괴한 것이었다.
담대혁은 비로소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끝낸 사람처럼 허허로운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사천당가의 용독술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건만 무영지독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동안 그가 사천당가에 머물렀던 것은 독마의 무영지독을 해독할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독과 함께해 온 사천당가의 용독술로도 무영지독을 해독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탁자 위에 자신의 피로 글을 써 갔다. 이윽고 글을 다 쓰자 그의 몸이 바닥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들어와 담대혁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탁자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앞으로는 그가 철마다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그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우선 철마의 추종자들에게 사마우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반면에 십마의 간세들에게는 철마의 맥이 아직 끊기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들 중 사마우의 진면목을 아는 자는 창마 혁련광, 도마 헌원풍, 륜마 적륜, 극마 용골대뿐이었다. 그것이 앞으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마우는 곧장 통로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적상을 찾아야 했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었기에 그 길로 일단 사천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철면을 쓴 상태에서는 오히려 움직임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철면을 벗어 들었다. 철면은 손에 찰싹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철면을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사마우는 철면을 단전에 붙이고 옷으로 그것을 덮었다. 그리고 그 길로 곧장 호남성 영주의 군마현으로 향했다.
마침 돈도 떨어졌거니와 대장간도 다시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찾아야 할 물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