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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다음 날 동이 트기가 무섭게 주인환은 계획대로 마교의 정예를 집결시켰다. 이전과 같은 돌진은 사실 필요가 없었다. 이미 무당삼자를 비롯한 무당의 정예들이 전장의 전면에서 군웅들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환은 그들을 향해 힘차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를 신호로 마교의 정예들이 무당의 정예들을 향해 앞서서 돌격했다. 그 뒤를 쫓아 마교도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 수비에 전념하던 마교의 예상외의 반격,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제법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내 무당삼자가 전면에 나서며 마교를 상대하자 잠시나마 올랐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러나 무당의 일천 검수도 이미 삼백여 명으로 줄어든 상황, 그 정도는 살아남은 마교의 주력이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한 숫자였다.
역시 문제는 수뇌부의 대결이었다. 무당삼자와 마교의 수뇌부 사마의 대결, 검마 이진중의 분전으로 그나마 백중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당의 주력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당을 대표하는 칠성검수를 시작으로 무당의 장로들과 무당 장문인 조무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 전세는 삽시간에 무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군웅들이 열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잠시뿐이었다. 칠성검수들은 모두 미쳐 있었다. 갑자기 마교가 아닌 무당의 삼백 검수를 도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예상외의 상황에 군웅들은 적지 않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무당 장문인 조무겸이 삼엽진인 풍천양의 가슴에 검을 후벼팠다. 조무겸의 실력은 평소 세인들이 말하던 수준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조무겸의 암습 따위에 당할 풍천양이 아니었던 것이다. 풍천양은 가슴을 부여잡고 지금의 상황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조무겸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무겸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해서 풍천양의 가슴을 후려쳤다.
풍천양의 몸이 뒤로 쓰윽 밀려나고 이를 확인한 무당삼자의 나머지 이 인이 황급히 풍천양을 돕기 위해 조무겸을 공격했다. 그 순간 조무겸의 흑발이 핏빛의 적발로 바뀌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검이 달려드는 무당삼자 이 인을 향해 움직였다.
단 한 수의 교환으로 무당삼자의 두 명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조무겸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검을 버리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으로 튕겨 나가던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조무겸을 바라보았다.
아직 대결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검을 버리는 조무겸의 행동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은 이를 기회라고 생각하고 조무겸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뻗었다.
순간 다가오던 조무겸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조무겸의 손과 부딪친 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동시에 검을 쥔 이 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검마 이진중이 놀란 표정으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혈옥수(血玉手), 검마 이진중이 마교 서열 칠 위 혈마님을 뵙습니다.”
나머지 삼마가 동시에 조무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혈마님을 뵙습니다.”
그 순간 조무겸은 활처럼 휜 이 인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두 사람이 허공에서 재빨리 몸을 뒤틀었지만 그런 그들보다 조무겸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이내 허공에서 두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무겸이, 아니 혈마가 허공에서 그 두 사람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내공이 출중한 도사 놈의 심장이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혈마는 두 사람의 심장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걱우걱, 심장을 씹어 먹는 그 섬뜩한 모습에 무당 사람들은 물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군웅들과 심지어 마교의 인물까지 전율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당 장문인이 바로 혈마였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이곳에 모인 군웅들에게는 악몽에 가까운 현실이었다. 혈마가 허리를 숙인 사마를 향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저리 같은 놈들. 결국 본좌까지 이런 하찮은 전투에 나서도록 하다니. 지금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나머지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지 않고.”
혈마의 말에 사마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존명.”
대답과 동시에 사마가 전장으로 달려들었다. 그때는 이미 칠성검수들에 의해 삼백 명의 무당검수들이 대부분 도륙당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계속해서 사마가 가세하자 전세는 완벽하게 마교 쪽으로 넘어갔다.
달아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일단의 무리가 무당산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외부에서 무당을 돕기 위해 무당산으로 향하는 세력을 막고 있던 마교의 인물들이었다. 바로 과거 우문량이 변장했던 철마 담대비우와 같은 역할을 하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혈마의 명령을 받고 무당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돌연한 혈마의 등장으로 무당산은 피바다로 변했다. 세인들은 이 일전을 혈마의 변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무당 장문인 조무겸, 그가 혈마라는 사실은 무림에 또 다른 공포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당 장문인은 그야말로 정도무림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그런 인물마저 마교의 간세라면 이제는 누가 마교의 간세일지 도무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중원무림에는 거대한 불신의 벽마저 생기고 있었다.
혈마의 변에 무당에 운집한 이만의 사람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고, 최초 무당을 공격하던 마교의 삼만 중 이만오천이 그곳에서 뼈를 묻었다. 도합 사만오천 사람들의 피가 도가의 성지인 무당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앞으로 벌어질 마교지란의 서막에 불과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혈마님.”
주인환이 혈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주인환을 향해 혈마가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수고? 큭큭큭, 너 따위 한심한 놈 때문에 본좌가 정체를 드러내야 하다니.”
그렇게 말하며 혈마가 천천히 주인환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인환이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혈마의 손이 그의 머리를 움켜쥐자, 이내 그의 머리가 수박이 으깨지듯 박살났다.
“병신 같은 놈, 이런 놈이 백마 중 서열 십삼 위라니, 하늘이 웃을 일이군.”
혈마의 말에 이진중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혈마가 그런 이진중을 힐끔 쳐다보았다.
“검마 이진중이라고 했는가?”
이진중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혈마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진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진중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런 혈마를 바라보았다.
“제법이군, 본좌의 혈안을 대하고도 그토록 담담할 수 있다니.”
혈마는 적지 않게 감탄스런 표정으로 이진중을 바라보았다.
“자네 본좌의 휘하로 들어오지 않겠는가?”
이진중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마교의 휘하입니다.”
혈마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임자가 있는 물건이었던가?”
이진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하긴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임자가 있어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겠지. 어찌 되었건 이곳은 앞으로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허니 뒷수습은 자네가 책임지고 하도록 하게.”
이진중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존명.”
절혼도마와 영마가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런 이진중을 바라보았다. 그런 절혼도마와 영마를 혈마가 쓱 훑어보았다.
“머저리 같은 놈, 앞으로는 검마가 비천마를 대신해 서열 십삼 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이 본좌의 뜻임을 명심해라.”
절혼도마와 영마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존명.”
혈마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진중을 바라보았다.
“언제라도 생각이 바뀌면 나를 찾아 주게.”
혈마의 말에 이진중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헌데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자신의 거취를 묻는 이진중의 물음에 혈마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누군지 몰라도 좋은 개를 키우고 있군.”
순간 이진중이 깊게 읍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내 혈마가 마지막까지 살육을 벌이고 돌아오는 칠성검수를 바라보았다. 아니, 혈마칠사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칠사 중 일인이 쓰러진 주인환의 시체에서 심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혈마칠사 역시 혈마의 저주 받은 마공 혈영신공을 익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혈마칠사가 돌아가면서 주인환의 심장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이진중을 비롯한 나머지 십사마가 그런 혈마칠사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인세에 존재해서는 안 될 절대마공의 등장에 그들 역시 적잖이 반감을 가진 듯했다. 몇몇은 그런 혈마가 자칫 앞으로 마교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비로소 마교의 진정한 잔인함이 세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혈마가 혈마칠사와 함께 자리를 벗어나자 이진중이 담담한 표정으로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
“우선 주인환의 시체를 처리하고 전열을 정비하라. 다음은 소림이다.”
이에 십사마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마교 서열 십삼 위, 그것의 의미는 자못 대단했다. 지금 대륙 전역의 전장을 지휘하는 것은 서열 십 위 독마 갈자하였다. 십마인 그를 제외한다면 검마의 위치는 실질적으로 마교의 전장을 지휘하는 서열 삼 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전장에 참여하지 않는 구마를 제외한다면, 독마를 포함해도 그의 위에는 단 세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 역시 단순한 숫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검마 이진중에게는 그 숫자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이번 교전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기에 그를 바라보는 십삼마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였다.
비록 마교의 이름으로 중원 정벌에 참가하고 있지만 그들의 진정한 지존은 분명 따로 있었다. 그것은 혈마의 태도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십마지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마교 내 싸움이 점차 현실화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남아 있는 중원의 절반을 차지한 이후에도 그들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언젠가는 서로가 적으로 다시 만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그런 생각들을 떨쳐 버리고 재빨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지금 그들의 상관은 검마, 그리고 지금 그들의 당면한 목표는 소림이었다. 소림, 마교의 사람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중원 정벌이 거의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소림의 무게는 무당과는 또 달랐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마교뿐만이 아니었다. 천년 도가의 상징인 무당의 괴멸은 전 무림에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때문에 소림을 지키기 위해 그곳으로 모여드는 인파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오히려 섬서, 냉하, 감숙 등 무림인들이 빠져나간 지역이 손쉽게 마교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하남 숭산의 소림을 중심으로 전 무림이 마지막 배수의 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4화 회강현에서
그 즈음 사마우는 군마현 대장간에 도착해 있었다. 군마현의 그 좋던 경기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마교의 북상과 더불어 장사치를 비롯한 전쟁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이 북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장간 주변은 과거 남용과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한가로웠다.
하지만 대장간 주변은 최근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처럼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더구나 과거 그가 떠나던 날 있었던 격전의 흔적조차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주변을 경계하는 사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대장간의 내부마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사마우는 문득 빙마 냉상아를 떠올렸다. 그녀를 제외하면 이렇게 대장간을 정리해 놓았을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부에 쌓인 먼지로 보아 한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한동안 이곳을 정리하던 냉상아 역시 호북성 무당 공략을 위해 길을 떠난 듯했다.
사마우는 우선 과거 남용이 건네준 궤짝부터 찾았다. 앞으로 혼자서 생활하려면 돈은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궤짝은 한쪽 귀퉁이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의 금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 역시 아마 냉상아의 배려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금화가 든 궤짝을, 이곳으로 오는 길에 사서 타고 온 말의 등짝에 실었다. 그리고 다시 대장간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벽면을 더듬었다. 이내 밀실로 통하는 내부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실로 들어간 사마우는 너무나도 깨끗하게 잘 정리된 안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냉상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과거 남용과 검후 등이 한동안 머물면서 먹었던 음식물 찌꺼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마우는 천천히 밀실 한쪽 벽면에 있는 찬장으로 다가갔다. 찬장에는 과거 남용 등이 사용했던 식기들이 깨끗하게 씻긴 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일단 사마우는 찬장의 그릇들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텅 빈 찬장의 뒷면을 쓱 밀었다.
이내 찬장 뒤에 감춰져 있었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한 자루의 검이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검집에는 선명하게 ‘와룡(臥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와룡검, 바로 과거 진규에게 받은, 자로가 남긴 검이었다. 사마우는 와룡검을 챙겨 들고 곧장 밀실 밖으로 나왔다. 그가 깊숙이 숨겨 두었던 와룡검을 챙겨 나왔다는 것, 그 행동에는 비로소 이곳을 완전히 떠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밀실 밖으로 나온 사마우는 모처럼 대장간의 화덕에 불을 지폈다. 이곳에서 생활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사마우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타오르는 불길을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화덕에서 적당한 열기가 몸으로 느껴지자 비로소 그는 와룡검의 검집에 묻어 있는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천천히 와룡검을 빼어 들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음에도 와룡검은 여전히 그 날카로운 예기를 뽐내고 있었다. 사마우는 망설임 없이 와룡검을 불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그렇게 와룡검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와룡검의 수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진혈창의 수리를 시작했다.
와룡검과 진혈창의 수리를 모두 끝내자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마우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이내 그는 진혈창과 와룡검을 들고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대장간은 여전히 타고 있는 화덕의 불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대장간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짧지만은 않았다. 막상 그런 곳을 떠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씁쓸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사실 떠나면서 대장간을 불태울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혹시나 훗날 남용이나 냉상아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남겨 두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과 동시에 사마우는 다시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습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마우는 대장간의 문을 걸어 잠그고 천천히 말에 몸을 실었다. 돈이 있고 건강한 몸뚱이가 있는 이상 그가 가지 못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상 뚜렷이 가야 할 목적지도 없었다. 결국 발길이 닿는 대로 이리저리 대륙을 주유하기를 삼 개월, 그런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절강성의 회강현이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강이 바다로 돌아온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곳을 회강현이라고 불렀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그곳을 고향이라 생각해서였을까? 사마우는 그곳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회강현에 도착한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로 과거 소년 사마우가 낚시를 하던 낚시터였다. 이곳에서 혁련천세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십오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음에도 그곳에는 눈에 띄는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낚싯대를 드리우던 소년이 이십오 세의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는 것과 물고기를 잡던 소년이 물고기 대신 사람을 잡는 무인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이다.
문득 지금까지의 일들이 그의 머리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로, 진규, 혁련천세, 죽어 간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꿈처럼 파도를 타고 바다 저편으로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검후와 전마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내 사마우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패배의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검후와, 전마와의 대결은 사마우에게 커다란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었다. 그들에게 패함으로써 사마우는 비로소 세상이 넓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단순한 살육이 더 이상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살육 그 이상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서 비로소 깨우쳤던 것이다.
실제로 그 뒤로 사마우는 자신의 살기를 몸속으로 숨기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어설프게 표출되는 살기는 잔챙이들에게나 효과가 있을 뿐, 앞으로 그가 낚아야 할 대어들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검마와 검후의 일전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에 눈을 떴다. 바로 가슴속에 숨겨 왔던 살기를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이다.
당시 사마우는 단지 검마를 노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만약 검후가 패할 경우 자신이 검마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흥분과 함께 전의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가슴속에 품어 왔던 살기가 그의 투지와 함께 검마를 향해 달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단순한 위협은 생각지도 못했던 효과를 가져왔다. 등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살기를 느끼고 당황한 검마가 검후와의 일전에서 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묻어 둔 살기는 짧은 순간 나름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에게 위협을 줄 만큼 사마우의 내부에서 오히려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섭공과의 대결이었다. 담대혁이 있었던 지하 밀실의 안내인 섭공, 그는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마우의 살기에 놀라 본능적으로 심장을 방어함으로써 그의 실질적인 일격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마우는 그 순간 자신의 살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다시 한 번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를 활용하기에 따라서 자신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철마와 같은 절대강자를 상대하기란 역부족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전마와의 일전 이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삼 년간의 대장간 생활은 그 스스로 절대강자가 되기 위한 수련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철마가 다시 한 번 그에게 보여 주었다.
당금의 무림, 바야흐로 난세였다. 덕분에 그의 손에 낚일 만한 월척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에게 짜릿한 손맛을 느끼게 해 줄 대어들은 실제로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전마, 검마, 검후를 비롯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십마 등의 무수한 고수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런 대어를 낚을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사마우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마우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재미있게들 즐기고 있어라.”
사마우는 바다에 노니는 고기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부가 다가올 출항을 위해 어망을 수리하듯, 이제는 자신을 수리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바다가 좁다고 놀고 있는 물고기들을 거둬들일 어망이 완성될 때까지 사마우는 당분간 이곳 회강현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낚시터를 떠난 사마우는 우선 일단 지낼 만한 거처를 찾았다. 다행히 지낼 만한 곳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과거 회강현에서 사마우를 입양한 부부가 떠나고 남겨 둔 집에 지금까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 사마우를 혁련천세에게 넘긴 덕분에 큰돈을 거머쥐었다. 때문에 행여나 혁련천세가 마음을 바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덕분에 그들에게는 집을 처분할 시간조차 없었다.
사마우는 그들이 버리고 간 집을 수리하고 그곳을 새로운 거처로 삼았다. 그렇게 회강현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회강현에서 그의 일상은 매일 바닷가에서 삽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이것은 다른 사람들, 즉 일반인들이 보기에 그의 모습이 그랬다는 뜻이다. 그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물속에서 창과 검을 휘둘렀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진규의 창법과 자로의 검법을 나름대로 수정 보완하고, 철마를 통해 느꼈던 경지를 떠올리며 자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를 향해, 참아 왔던 살기를 마음껏 분출했다. 놀란 물고기들이 그런 사마우의 살기에 반응해 황급히 달아나곤 했다. 필요한 순간에 살기를 발출하고, 살기를 감춘 채 물고기에 접근하는 등 바다는 그에게 적지 않은 수련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파도 역시 적지 않게 그를 단련시켜 주고 있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그는 결코 수련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또한 살을 에는 추위에도 결코 단 한 번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목표가 있는 사마우에게는 그것이 결코 단순히 지루한 일상이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는 존재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 그에게 그것은 결코 지루한 일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밤이 되면 그는 철혈심공과 반야심공을 번갈아 운용했다. 어찌 보면 두 개의 심법을 번갈아 운용하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더구나 두 심법은 아직까지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반야심공을 운용할 때면 여전히 적지 않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것은 반야심공이 그의 살기와 아직도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철혈심공을 운용하면 그런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철혈심공을 운용할 때면 때때로 단전에 붙어 있는 철면이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꿈틀 움직이며 몸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들곤 했다.
가장 큰 부작용은 무엇보다도 철혈심공과 반야심공을 통해 축적되는 내공이 좀처럼 몸속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를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사마우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단련해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젠가 그 둘 모두 자신에게 유용해지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사마우는 그런 자신의 느낌을 믿었다.
그렇게 일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사마우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가 하는 짓이 단순히 미친놈 널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때때로 어부들은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한 광주리씩 놓아두고 멀찍이서 사마우를 구경하곤 했다. 시골 어부들에게는 사마우가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이 다소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시장에 가야만 했다. 인간인 이상 먹고살기 위해서는 식재료를 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사람들이 그에게 앞 다투어 좋은 물건을 권하곤 했다. 물론 확실하게 돈을 지불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마우의 요상한 행태는 이미 이곳에서 나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특히 호기심이 강한 아이들이 그에게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그를 지켜보며 그의 흉내를 내곤 했다.
한적한 마을의 아이들에게 전쟁놀이는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촌구석 무지렁이들이 출세할 수 있는 방법, 글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들에게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무림에서 명성을 얻는 것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의 거의 전부였던 것이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대장군을 꿈꾸고, 적지 않은 아이들이 혜성처럼 등장하는 무림의 고수를 꿈꾸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그들에게 사마우의 모습은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이제 그의 몸속의 살기가 민감한 아이들마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비로소 완벽히 외부와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사마우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강해지고 싶다는 일념이 자연스럽게 그의 살기마저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가 완벽하게 사라지자 주변 사람들도 그런 그에게 더 이상의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