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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에넬륀은 그 골목에서도 가장 허름한 거적으로 엮은 축사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이제 겨우 나이 열 살. 하얀 피부에 짙은 갈색의 머리를 가진 잘생긴 아이였지만, 잘 먹지 못해 체구는 작달막했고, 게다가 말도 할 줄 모르는 벙어리였다.
뭔가를 시키면 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데다가 평소의 행동도 굼뜨기 짝이 없어 사람들은 그 아이가 모자란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댔다.
게다가 에넬륀은 그나마 술 마시고 두들겨 패는 아버지나 몸이나 파는 어머니조차 없는 천애 고아로, 이곳에서 아무도 그를 챙겨 주지 않았다. 그저 또래에게 두들겨 맞기나 일쑤인 그야말로 버려진 아이나 다름없었다.
에넬륀은 원래 이곳의 아이가 아니었다.
아이가 골목에 나타난 것은 1년 전 일로, 한겨울에 윗도리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누더기 같은 바지만 입은 채로, 추위에 몸이 벌겋게 익어 이 골목 구석으로 기어들어 왔다.
운하 청소를 하는 잡역부들의 우두머리인 늙은 가넵이 그 아이에게 피죽을 먹이고 하루 재워 준 뒤 알게 된 것은, 아이의 나이가 아홉 살이며, 벙어리라는 것뿐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아이에게 가넵은 죽은 아들의 이름을 가져다 에넬륀이라 붙여 주고, 다음 날 도시의 뒷간을 청소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에넬륀을 데려가 맡겼다.
가넵은 이 골목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였고, 그가 하고 있는 운하 청소를 같이 하기에는 에넬륀은 너무 힘들고 여렸다. 하지만 똥물을 지게로 날라다 성 밖 자드락밭에 버리는 일은 이 골목의 어린아이들이 으레 하는 일이었고, 그 일로 한 사람 몫을 한다면 나름대로 결성되어 있는 처변인조합(處便人組合:골목의 똥퍼들은 으레 고상하게 이 일을 처변한다고 불렀다.)에서 식사와 잠자리 정도는 돌봐 줄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가넵이 에넬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다음 날부터 에넬륀은 소년 똥지게꾼들을 따라 똥물 나르는 일을 시작했다.
이런 골목에서 자라 온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구역질 나는 냄새와 골목을 굽이굽이 따라 걸어 성 밖까지 나서야 하는 힘든 지게질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일을 해 온 아이들이었다.
에넬륀은 처음에는 똥지게를 보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아이들 중에 대장 노릇 하는 벤델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고 나서는 똥지게를 들 수밖에 없었다.
에넬륀은 힘도 약하고 아직 어렸지만, 똥지게를 놓을 때마다 벤델은 에넬륀을 반쯤 정신을 못 차리게 두들겨 팼고, 에넬륀은 맞기 싫으면 억지로라도 똥지게를 지고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여자들이 남의 빨래를 해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이 골목에서 하는 일 중에서는 가장 수월한 편이었다.
운하 청소나 선창(船艙)하역 작업은 다 큰 성인 남자가 아니면 하기도 힘든 고된 일이었다.
뒷간에서 도르래로 똥을 퍼서 그저 성 밖으로 나르는 것이 다인 똥일은 그래서 어린애들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에넬륀의 하루 일과는 새벽에 두들겨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똥지게를 짊어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해가 뜨기 전부터 행렬의 가장 앞에서 나무 패각을 두드리며 똥퍼라고 외치는 절름발이의 뒤를 따라, 다른 열댓 명의 소년들과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똥을 퍼 나르기 시작해,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쯤 똥을 펀 집에서 아침 먹다 남은 것을 얻어다 주워 먹고, 그러고 나서 해질 때까지 일한 다음에야 처변인 조합에서 던져 주는 다 쉰 빵조각과 나물을 끓인 스프로 허기를 달랜 다음 잠드는 것이었다.
오늘도 에넬륀은 똥물을 지치도록 퍼 나르고 나서는 딱딱하게 굳어 쩍쩍 갈라진 빵을 한 조각 주섬주섬 먹고, 나물이래 봐야 건더기도 안 되는 맹물이나 다름없는 스프로 잔뜩 곯은 배를 채운 다음에야 거적더기 안에 누웠다.
에넬륀이 잠을 청하는 거적 집에는 에넬륀 말고도 부모가 죽거나 애를 두고 도망가서 혼자가 된 아이 일곱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똥지게 대장인 벤델이 거적 집 안의 아이들에게 자리를 나눠 주고 일도 시키곤 했다.
벤델이 에넬륀에게 나눠 준 자리는 가장 외풍이 심하고 문과 가까운 벽 쪽 자리였는데, 반쯤 함몰된 흙벽에다 거적 두 장만 씌워 놓은 바로 그 자리였다.
자리에 눕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어 왔다.
있으나 마나 한 거적 한 장을 몸에 둘러치고 에넬륀은 최대한 등을 벽 쪽으로 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말아 누웠다.
바로 옆자리에는 같은 나이의 레덴이 누워 있었다. 레덴도 잠이 오지 않는 듯 뒤척이더니 이내 에넬륀을 향해 돌아눕고서는 말했다.
“에넬. 겨울이 오나 봐. 요즘 들어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아.”
레덴의 말에 에넬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에넬륀에게는 고갯짓이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빛도 하나 없이 벽을 막아 놓은 거적과 듬성듬성 뚫려 있는 지붕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전부인데도, 이런 곳에 익숙해진 레덴은 쉽게 에넬륀의 끄덕임을 알아보았다.
레덴은 다른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혼자 재잘거림을 계속했다.
“항구에서 짐 나르는 게데뉠 형이 그러는데, 자기는 여기서 계속 이런 일을 하면서 살 생각이 없대. 먼 바다로 나가는 탐험선이 얼마 뒤에 출발할 예정인데, 자기는 그 배에 잡역부라도 타겠다는 거야.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수부조합 사람들과도 친해졌다면서.”
에넬륀은 레덴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라는 의문을 가득 품은 듯 보이는 눈이었다.
“게데뉠 형도 원래는 여기서 똥지게를 날랐대. 그리고 나이가 차니까 항구에 가서 짐을 나를 수 있게 됐고. 그리고 이제는 이곳을 떠날 수도 있게 된 거지. 나도 그 형처럼 바다로 나갈 기회를 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근데 아직 나는 겨우 열 살이야. 게데뉠 형이 똥지게를 벗고 항구에서 짐을 나르기 시작한 건 열다섯이었고, 그러고도 삼 년을 더 일했어. 그리고 열여덟이나 돼서야 겨우 배를 타 볼 만한 나이가 됐다는 거지.”
레덴의 표정은 뱃사람에 대한 선망으로 들떠 있었다.
에넬륀은 그러나 관심 없다는 듯 이내 레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차피 말도 할 줄 모르는 자기 같은 아이는 커서도 똥지게를 벗어나 봐야 겨우 항구에서 짐꾼을 하거나 운하 청소밖에 할 수 없었다.
뱃사람이 돼서 복잡한 바다의 일을 하려면 적어도 의사소통은 되어야 했다. 듣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에넬륀에 비하면 그런 기대라도 가져 볼 수 있는 레덴은 차라리 나은 형편이었다.
에넬륀의 기분이 바뀐 것을 눈치챈 레덴은 화제를 바꿨다.
“근데 왜 아직도 대장이 안 오는 걸까?”
대장이라는 것은 이 거적 집의 우두머리이자 똥지게를 나르는 아이들의 왕초 노릇을 하는 처변인 조합의 하수인 벤델이었다.
이제 열일곱인 벤델은, 운하로도, 항구로도 일을 하러 나가지 않았다. 벤델은 똥 일에 눌러 붙기로 작정한 지 오래였다.
똥지게를 져 나르는 것은 어린아이들이고, 깊은 똥통에서 똥을 도르래로 올려 내는 것이나, 운하 지구를 따라 늘어선 대저택들의 큰 집들에서 일을 맡아 오고 처리하는 것은 전부 어른들이었다.
이들 열 명 남짓의 어른들이 처변인 조합이라는 것을 꾸리고 있었고, 벤델은 그들의 지시를 받아 일을 할 아이들을 모으고 나눠 주는 살림꾼이나 다름없었다.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상에 찌든 얼굴을 한 벤델은 덩치도 제법 있었고, 주먹의 힘도 좋았다.
떡이진 머리를 긁으며 비죽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조합의 어른들에게 대포 한잔 얻어먹고 일찌감치 들어와서는, 잘 때까지 애들을 두들겨 패는 것이 일과였던 벤델이, 오늘따라 늦게 들어오는 것이 레덴에게는 의문이었다.
에넬륀은 궁금하다는 듯 다시 레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런 적이 잘 없었는데. 대장이 늦게 들어오는 날은 꼭 일이 터져.”
레덴이 울상을 지었다.
벤델이 늦게 들어온다는 것은 술을 엄청 마셨거나, 이제 막 하기 시작한 오입질을 하고 온 때였고, 이렇게 늦게 들어온 벤델은 자기가 들어올 때에 아무도 일어나 있지 않으면 두들겨 패며 깨워서 밤새 지랄을 해대곤 했다.
에넬륀도 이곳에서 지내면서 벌써 그런 일을 몇 번이나 겪었고, 그때마다 가장 많이 맞는 것은 약하고 멍청하다는 이유로 에넬륀이 되곤 했다. 물론 옆에 있는 레덴도 그에 못지않게 두들겨 맞았다.
레덴은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고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에넬륀도 뚫린 지붕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만 바라볼 뿐 오지 않은 잠을 청하려 해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뒤척였을까. 옆에서 레덴이 겨우 잠든 듯 쌔근대는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들릴 때쯤, 거적으로 덮어 둔 문이 밀려 나며 커다란 몸집이 들어와 순식간에 레덴의 싸대기를 몰아 붙였다.
“으악. 대장!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마요.”
벤델이었다. 뺨을 얻어 맞은 레덴은 순식간에 잠이 깨 그를 알아보고서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 댔다.
순식간에 잠을 자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 벤델 앞에 섰다.
벤델은 술 냄새 풍기는 숨결을 내쉬며 한 명씩 정강이를 까고, 뺨을 올려붙이고, 등을 걷어찼다.
마지막은 에넬륀이었다.
에넬륀은 항상 마지막으로 맞고, 가장 많이 맞고, 늦게까지 맞곤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벤델은 에넬륀 앞에서 서더니 손도 발도 뻗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에넬륀의 얼굴과 몸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이내 잘 보이지 않자 좀 더 밝은 바깥으로 끌어냈다.
“새끼. 따라와.”
거적 집 밖으로 나오자 달빛이 조금 밝아진 느낌이었다.
벤델은 눈을 찌푸리고서 한참을 에넬륀을 뜯어보았다. 잘 먹지 못해 마르고 키도 제 또래에 비해 작지만, 약하게 금빛을 띠는 갈색의 머리는 색이 아름다웠고, 머리색과 같은 눈동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깊이가 있었다. 피부는 거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고, 어린 나이임에도 콧날은 오뚝하게 서 있었다.
때에 찌들고 꾸미지 못해서 그렇지 분명히 잘생긴 아이였다.
벤델은 콧방귀를 끼고서는 에넬륀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채던 손을 놓고선 말했다.
“흥, 그래. 네놈으로 해야겠군. 너는 내일 똥 일을 하지 마라. 대신 나와 저녁 때 갈 때가 있으니 잠이나 실컷 자 둬. 알았냐? 이 벙어리 새끼야.”
벤델은 절대 에넬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에게 에넬륀은 그저 벙어리 새끼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늘로 다른 가치가 하나 더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넬륀은 내일 가자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왠지 한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벤델은 침을 뱉어 내더니 에넬륀에게 싸대기를 올려붙이려다 참고서 말했다.
“알았냐고 이 벙어리 새끼야. 왜 대답을 안 해?!”
에넬륀은 흠칫 놀라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벤델은 그제야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거적을 제끼고 다시 거적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아이들이 한 번 더 맞는 듯 쿵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왜 안 자냐고 고함을 질러 대는 벤델의 호통이 들려왔다.
에넬륀은 안이 좀 잠잠해지자 조심스레 거적더기로 들어와 누웠다.
어쩐지 오늘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저녁 에넬륀은 벤델의 손에 붙잡혀 골목을 나와 시가지로 들어섰다.
에넬륀은 도대체 벤델이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이 물어볼 수 도 없는 노릇이고, 벤델도 딱히 말해 주려는 눈치가 없었다.
단지 ‘벙어리 새끼, 너 오늘 일만 잘되면 앞으로 마음껏 먹고 잘 수 있을 거다.’라고 주억거렸을 뿐이다.
벤델은 보발 언덕의 빈민촌을 빠져 나오자마자, 운하 지구 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그는 그전에 시장통으로 들어서 에넬륀의 누더기를 벗겨 내고 우물가에 가서 몸을 씻겼다.
보발 언덕의 빈민촌에는 쓸 만한 우물 하나 없었고, 이 시장통까지 나와야 물을 길어 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운 물이라 평소에 씻거나 할 일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벤델은 짜증난다는 듯 에넬륀의 몸을 찬물로 몇 번 헹구고 대충 얼굴이며 몸에 묻은 검은 때를 닦아 낸 후, 에넬륀이 입고 왔던 옷으로 대충 몸을 닦아 주고서는, 가지고 온 좀 멀쩡한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시장 골목에서 발가벗긴 채로 몸을 씻었지만, 아직 열 살인 에넬륀은 부끄러움보다는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슬슬 북쪽에서 밀려오는 늦가을 바람은 오들오들 젖은 몸을 떨게 하고 있었다.
벤델은 옷을 마저 입힌 다음 대충 에넬륀을 아래위로 훑어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뭔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에넬륀은 아직도 벤델이 자신을 데리고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의문투성이었지만, 벤델은 말없이 에넬륀을 이리저리 끌고 가기만 할 뿐이었다.
운하 지구로 접어들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얼기설기 넓고 좁은 운하 사이로 다리들이 놓여 있고, 운하 양쪽의 좁은 인도 안쪽으로는 여러 층으로 높게 올린 저택이며 관저(官邸), 시정부가 소유한 넓은 관청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떤 건물은 정갈한 양식의 아뎀데나펜 구왕조(舊王朝)양식의 오래된 석축이었고, 어떤 건물은 최근 한 세기 간 발전하고 유행했던 남양풍(南洋風)의 화려한 새로운 건물들이었다.
건물들은 주로 백색과 청색으로 단장되어 있었는데, 하얀 벽 위로 운하 저 너머 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의 불그스레한 여운이 비추는 것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에넬륀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침이며 낮으로 여러 번 똥지게를 나르러 운하 지구로 들어선 적은 있지만 남의 눈, 특히 높고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곳에서 운하를 낀 바깥 길로 똥지게를 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건물과 건물 사이로 좁게 난 운하로 가는 하수구 물길을 따라 무릎을 질퍽거리며 똥지게를 나르고 다녀왔었다.
에넬륀이 이렇게 운하 지구의 장관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벤델은 별 흥미 없다는 듯 걸음이 늦어지는 에넬륀을 한 번 쏘아본 뒤 손목을 잡아채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에넬륀은 이내 시무룩해졌지만, 이런 대우에는 늘 익숙해져 있기에 묵묵히 벤델을 쫓아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운하들 사이로 얼마를 걸었을까. 벤델이 에넬륀을 끌고 들어선 것은 어느 저택의 뒷문이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는 무슨 용건이냐는 듯 힐끔 벤델을 쳐다보았다.
“여기 주인 나리께서 부탁하신 아이입니다.”
문지기는 대답도 없이 성긴 턱수염을 한번 훔치고서는 허리를 숙여 에넬륀의 얼굴을 한번 들여 본 다음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서는 문을 열어 주었다.
항상 신경질적이고 당당하던 벤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문 안으로 들어서자, 어깨를 숙이고 위축된 모습으로 조심스레 에넬륀을 데리고 건물의 복도를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의 저택은 어수선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하녀들이 바삐 움직이고, 짧은 복도를 지나자 나타난 주랑(柱廊) 안쪽으로는 넓어 보이는 내정(內庭)이 있었다.
역시 규모 있는 저택답게, 내정의 뜰 한가운데에는 집 안에서만 쓰는 우물이 지붕까지 씌워져 있었고, 뜰 사방을 둘러싼 저택의 건물은 삼층 높이로 겹겹이 창문들로 쌓여 있었다.
에넬륀은 자기가 사는 거적 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런 풍경에 휘둥그레져 눈을 돌리고 있었지만, 벤델은 아무 말 없이 그 뜰 한쪽에서 에넬륀을 세워 놓고 무언가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외부인은 들어설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내 안채로 보이는 건물에서 깔끔한 복장을 차려입은 장년의 남성 하나가 나왔다.
그는 이내 벤델을 알아보고서는 다가와 물었다.
“그래. 부탁한 대로 아이를 데리고 왔구먼.”
“예. 저…… 제가 구할 수 있는 어린아이 중에서는 제일 예쁘장하게 생긴 놈입니다요. 거기에 들을 줄은 알지만 글도 모르고 말도 못하니 그야말로 안성맞춤입지요.”
사내는 벤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에넬륀을 꼼꼼히 눈여겨보았다.
사내가 에넬륀을 뜯어보는 것이 길어지자 조마조마하게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벤델이 끼어들었다.
“요즘에 남자아이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아닙니까. 최근에 전쟁도 없고, 기근도 없으니 어디 붙일 데 없는 이런 애들이 많은가요. 거기에 이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거야…… 뭐, 더 구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벤델이 조잘대는 것에 짜증이 난 듯 사내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서는 에넬륀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조금 마른 것 같지만 괜찮군. 몸에 상처는 없겠지?”
“당연합죠. 벙어리 새…… 아니, 한번 벗어 봐.”
으리으리한 저택 안이라 그런지 벤델도 평소의 말버릇을 삼키고서는 에넬륀에게 말했다.
에넬륀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옷을 벗어 보았다.
우물물에 대충 씻은 탓에 썩 깔끔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천적으로 태 좋은 피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중년의 사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주인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시겠군. 썩 괜찮아. 이름은 뭔가.”
“에넬륀이라고들 부릅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럼 얼마 정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벤델이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되물었다.
벤델의 숨결이 조금 가빠진 것을 에넬륀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에넬륀은 벤델이 왜 어제 자신을 때리지 않았는지, 그리고 오늘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벤델은 이곳에 에넬륀을 팔아넘기려는 것이었다.
에넬륀은 자신이 머리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만큼은 어쩐지 또렷이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도 어디를 가든 벤델의 거적 집에서 똥이나 나르며 매일같이 두들겨 맞고 풀죽으로 연명하는 생활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에넬륀의 생각은 이내 중년 사내의 말에 끊겼다.
“급하기는. 적당히 쳐주도록 하겠네. 어쨌든 괜찮은 아이를 구해 왔으니 10세겔을 주겠네.”
“그럼 아쉘반넬 은화로 주십니까. 아니면 리겔 은화로 쳐주시렵니까.”
“요즘 아쉘반넬 은화가 많이 풀려 가치가 좀 떨어지니 리겔 것으로 쳐주도록 하겠네.”
이내 벤델의 얼굴에 환한 표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