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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세겔이라는 것은 화폐 단위로, 아뎀데나펜의 일곱 공국에서 통용되는 세겔은 전부 은화였다.
공국들은 제각기 이 세겔 은화를 찍어 냈는데, 어느 곳에서 언제 주화(鑄貨)된 것이냐에 따라 가치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대충 1세겔이면 보통 부두 노동자의 한 달치 품삯이니, 10세겔이면 빈민가에서 굴러다니는 벤델에게는 거의 일 년을 두고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럼 소인은 이만…….”
사내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대에서 은화를 셈해 주자 벤델은 돈을 받기 무섭게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목적하던 것은 달성했으니 더 이상 이렇게 주눅이 드는 곳에 더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중년의 사내와 덩그러니 남은 에넬륀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은 하지 못해도 들을 수는 있다고 했지?”
사내의 물음에 에넬륀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좋다. 일단 들어가서 대충 저녁을 먹고 몸을 단정히 씻도록 하자. 그것이 끝나면 내가 너에게 할 일을 알려 주도록 하마. 일단 간단히 말해 두도록 하지. 너는 이제 사도레 가문의 가노(家奴)가 된 것이다.”
중년의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에넬륀은 가노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좀 좋아졌다.
벤델에게 삯을 지불한 사내는 이내 하녀에게 에넬륀을 떠넘기고 사라졌고, 하녀는 에넬륀을 저택의 하인들이며 노비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데려가 먹을 것을 내어 주었다.
보발 언덕의 빈민촌에서 내어 주던 것과는 질이 다른 음식이었다.
물론 저택의 주인이 먹는 음식에 비하면 형편없다고 해도 좋을 음식이었지만, 에넬륀에게는 처음 먹어 보는 진수성찬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보드랍게 윤기가 흐르는 빵은 얇고 넓게 퍼져서, 그 위에 상추며 소금간이 잘된 정어리까지 올려서 싸 먹을 수 있었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있는 에넬륀에게 하녀는 말없이 친절히 빵을 싸서 주었다.
주린 배에 정어리가 든 빵을 채워 넣고 나니 이제는 거의 채소로 끓였지만 고기 건더기가 듬성듬성이나마 떠 있는 스프가 나왔다.
산나물 몇 개가 장식품처럼 맥없이 떠 있던 맹물이나 다름없는 빈민촌의 스프에 비하면, 이것도 진수성찬이었다. 에넬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부르게 먹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식사가 끝나자 다른 하녀가 와서 에넬륀을 데려갔다.
아까의 말이 없는 조용한 늙은 하녀와는 다르게 젊고 예쁘게 생긴, 얼굴에 조금 번진 주근깨가 매력적인 하녀는 에넬륀에게 생글거리며 말을 붙여 왔다.
“네가 이번에 새로 온 그 아이로구나.”
에넬륀은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우, 귀여워. 나는 셀로에라고 해. 너는 에넬륀이라고 하지?”
에넬륀은 어째서 셀로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아까 자신을 넘겨받은 사내가 벤델에게서 이름을 물어 두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분명히 그 꼼꼼해 보이는 사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에넬륀 대신 하녀들에게 일러두었을 것이다.
“일단, 주인님을 뵈기 전에 몸을 단정히 씻어야 해. 너같이 잘생긴 아이는 깔끔하게 해 둬야지.”
에넬륀은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셀로에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밝게 웃으며 커다란 두레박처럼 생긴 나무 욕조가 있는 방으로 에넬륀을 밀어 넣었다.
이제 열 살이지만, 자기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여자 앞에서 발가벗긴 채로 씻겨지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셀로에는 귀엽다는 듯 에넬륀을 보며 온몸을 구석구석 씻겨 주었다.
물은 적당히 데워져 있어 몸에 부어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찬물로도 씻어 본 것이 오늘 우물에서가 거의 처음인 에넬륀에게는 채 날이 지나가기도 전에 이렇게 따뜻한 물에 씻어 본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몸이 깨끗해질 정도로 씻고 나자, 셀로에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너 깨끗이 씻고 나니까 정말로 예쁘구나.”
아직 어린 소년의 뽀얀 피부는 따뜻한 물에 약간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터럭 같던 머리카락은 깨끗이 때를 벗겨 내자 산뜻해 보였다.
셀로에는 소년의 모습에 감탄하며 구석의 찬장에서 단지를 꺼내 와 뚜껑을 열고 손에 부었다. 향긋한 냄새가 에넬륀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이건 향유라고 해. 저 바다 남쪽을 항해해 먼 나라에서 가져오는 거란다. 몸을 향긋하게 해 줘. 나도 발라 본 적이 없는데, 너는 오늘 주인님을 모시러 들어가야 하니 꼭 이 향유로 단정히 하고 가야 해.”
셀로에는 손에 부은 향유를 조심스레 에넬륀의 머리부터 발까지 발라 주었다. 에넬륀이 그 향기에 취해 있는 사이, 문이 열리며 다른 하녀와 아까의 사내가 욕탕으로 들어섰다.
“셀로에. 목욕은 깨끗이 시켰나?”
사내의 물음에 셀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성들여 씻겨 주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아이인걸요.”
“그래. 아까보다 보기가 훨씬 좋구나. 주인님께서도 좋아하시겠어. 아나. 옷을 입히게.”
아나라 불리는 늙수레한 하녀가 손에 조심스럽게 품어 왔던 옷을 풀어 에넬륀에게 입혀 주었다.
품이 좋게 편안한 옷은 면의 질감이 좋았고, 여러 가지 염료로 화려하게 색이 먹여진 것이 여간 비싸 보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덮고 자는 거적더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성긴 옷을 입고 지내던 에넬륀은 그저 이런 옷을 입는다는데 신경이 깜짝 놀랄 뿐이다.
“그래. 너희들은 물러가도록 하고, 너는 날 따라오도록 해라.”
셀로에와 아나는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고, 욕탕을 빠져나온 에넬륀은 옷이 조금이라도 더러워질까 봐 약간 불편한 걸음으로 사내의 뒤를 쫓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은 사도레 가문의 저택이다. 주인님께서는 이 가문의 당주(堂主)이시고. 아직 네게는 무슨 말인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알아 두어라. 나는 주인님을 수족처럼 모시며 이 집안을 관장하는 집사장 아데몰렙이라고 한다.”
사내, 아데몰렙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할 일은 주인님이 원하실 때 밤에 그 침소에 들어가 모시는 일이다. 힘들지는 않은 일이야. 그저 주인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아 두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네가 주인님을 기쁘게 하면 할수록 너는 좋은 음식과 좋은 이부자리를 주인님께 받을 것이고, 네가 총애를 받게 된다면 장차 자라 글을 배워 주인님의 일에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니지.”
아데몰렙은 그렇게 말을 하고선 에넬륀을 바라보았다.
에넬륀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애써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데몰렙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 회랑을 따라가서, 계단을 오르면 삼층이 주인님의 침소다. 오늘 너를 단장시킨 이유는 주인님께 인사드리고, 주인님을 모시기 위해서다. 오늘이 처음이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어. 모든 일에는 항상 처음이 있는 법이지.”
에넬륀은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이 많았는지 의아했다.
하긴, 말이 많아지긴 했지만 꼭 필요해 보이는 말만 하고 있었다.
“너는 그저 주인님이 하시는 대로 몸을 맡기고 단정히 있으면 된다.”
아데몰렙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니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나왔다. 아데몰렙은 그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고서는 안으로 여쭤 물었다.
“주인님. 아데몰렙입니다. 애동(愛童)을 데리고 왔습니다.”
애동. 처음 듣는 단어였다.
에넬륀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자신을 일컫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들어오게.”
안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데몰렙은 몸을 한 것 낮추고는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방 안은 화려한 장식품이 즐비하고, 바닥에는 처음 보는 문양의 카펫이 이리저리 깔려 있었다. 안쪽으로는, 창문을 마주보는 곳에 자리한 침대의 높은 천개(天蓋)의 사방으로 화려한 색의 부드러운 천들이 둘러쳐져 있었다.
에넬륀은 부유한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내 침대 옆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사내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너로구나. 내가 바로 루가멜 사도레. 이곳의 주인이다.”
루가멜 사도레의 목소리가 뜨겁게 늘어지고 있었다.
에넬륀이 두들겨 맞아 멍이 잔뜩 든 채로 아래층에 끌려온 것은 밤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를 들쳐 업고 내려온 집사장 아데몰렙은 짜증난 표정에 약간 안타깝다는 듯 그를 아래층에 던져두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잠시 뒤에서야 셀로에가 연고와 붕대를 가져와 에넬륀을 보살펴 주었다.
셀로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묻지 않았지만, 에넬륀은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 또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넬륀은 그곳, 사도레 당주 루가멜의 방에서 일어난 일을 잊을 수 없었다.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에데몰렙이 에넬륀을 놓아두고 물러간 뒤, 루가멜은 에넬륀을 가까이 앉히고서는 땀으로 흥건한 손으로 에넬륀을 이리저리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주먹코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나이는 오십줄에 접어들어 보였고, 기름을 잔뜩 먹인 콧수염 아래로 혈색 없는 입술이 있었다.
에넬륀은 그가 왜 자신을 만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맞는 것보다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참고 있었다.
그가 에넬륀의 옷을 벗기고 어리고 좁은 어깨에 입술을 맞추며 핥기 시작했을 때 에넬륀은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아까 에데몰렙이 일러 준 것을 생각하고서는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
맛있는 밥과 좋은 잠자리를 주는 사람에게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루가멜은 에넬륀이 부끄러운 듯 어깨만 움츠리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자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을 에넬륀의 오밀조밀하게 잘생긴 어린 얼굴을 혀로 핥아 대더니, 이내 에넬륀의 샅을 만져 댔다.
에넬륀은 질겁했다.
잘은 몰랐지만 아무한테나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곳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루가멜은 옷을 벗어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땀으로 흥건한 몸으로 에넬륀의 몸을 깔아뭉개고는 이내 뭔가를 하려 했다.
에넬륀은 더 이상 불쾌한 기분을 참기 어려웠다. 자기도 모르게 루가멜의 몸을 발로 차대며 그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 살점이 말려 오며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루가멜은 순간 안색이 급격히 변하며 분노한 표정으로 옆에 장식으로 걸려 있던 승마용 채찍을 들어 에넬륀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분이 안 가신 그는, 에넬륀의 얼굴을 몇 번이나 갈긴 다음에 옷을 주섬주섬 입고서는 큰소리로 에데몰렙을 불러 댔다.
잠시 뒤 부름을 받아 들어온 에데몰렙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고서는 이런 모자란 아이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해 거듭해서 루가멜에게 죄를 청했다.
루가멜은 아직 분이 덜 풀렸는지 거친 숨결을 씩씩거리며 에데몰렙에게 ‘이 썩을 놈을 늘 하던 대로 처리해 버려.’라고 던지듯 말했다.
에데몰렙은 허리를 깊숙이 조아리고서는, 정신이 혼미한 에넬륀을 들쳐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셀로에에게 맡긴 것이었다.
“불쌍한 것. 고운 얼굴이 다 상했구나.”
셀로에가 미열을 내며 누워 있는 에넬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에넬륀은 따뜻한 체온에 몸이 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넬륀은 아직도 오늘 하루 종일 일어났던 일을 대체 종잡을 수 없었다.
“너도 내일이면 떠나겠구나. 주인님은 마음에 조금이라도 차지 않으면 쉽게 사람을 내쳐 버리셔.”
셀로에는 고운 얼굴에 눈물을 드리웠다. 에넬륀이 지금 정신을 잃고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혼잣말하듯 계속해서 울먹였다.
“나센도 그랬고 작은 가쉬도 그랬지. 너도 이제 바다로 가겠구나. 왜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매정히도 못살게 구는 걸까.”
에넬륀은 정신이 들어 있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왠지 눈을 뜨면 그녀가 내버려 두고 옆을 떠날 것만 같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1년 이전의 일은 제쳐 두고서라도, 기억하고 있는 그간의 1년은 빈민촌에서 맞으며 학대당하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루가멜에게 맞은 것은 그렇게 억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다만 처음으로 느껴 보는 따뜻한 온정을 잃을까 봐 그것이 더 두려웠다.
셀로에는 에넬륀이 바다로 가야 할 거라고 말했다.
에넬륀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내일 바다로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셀로에의 품에서 조용히 잠들고만 싶었다.
그것은 뒷골목에서 자라 온 것이나 다름없는 에넬륀에게는 축복이자 처음 느껴 보는 삶의 온기였다.
비록 다음 날이면 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질지라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 기분을 이 순간만큼은 따뜻하게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제2장.
은룡해(銀龍海)
파도는 거칠었다. 포도의 달 아흐레에 로쉬엠 항을 출항한 참나무호는 로쉬엠 만(灣)의 잔잔한 파도를 헤치며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만 바깥쪽을 끼고 있는 아들렙 공국의 해안을 따라 내려간 참나무호는, 만 입구를 보초처럼 지키고 있는 알뵈스 섬에 기항한 뒤 서해(西海)를 건너 델바팀 공국으로 들어섰다가, 그곳에서 물자를 거래하고 다시 은룡해(銀龍海)를 건너기 위해 막 출항한 참이었다.
이 은룡해를 건너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로, 왜냐하면 원양(遠洋)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라 도무지 날씨가 종잡을 수 없고 높고 거친 파도로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델바팀의 많은 뱃사람들은 이 은룡해를 두렵게 여겼는데, 이곳은 예전 다셀루인 대양 건너로 사라진 땅에 살던 용들의 말예(末裔)가 모두 떠나간 뒤에도, 이곳 바다를 터전 삼아 신룡(神龍)이 거하고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은룡족의 후예인 이 용은, 옛 전설에서는 그 이름을 아압―레―임이라고도 하고, 엘프[妖精族]들의 말로는 엘레이온이라 불렸다.
그 용은 인간족이 이 바다를 다니기 시작한 뒤로는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 바다 위에서 용을 노하게 하면 천벌을 받는다 했다. 그 전설은 모두가 사실처럼 믿고 있었다. 때문에 바다 이름도 은룡해(銀龍海)가 되었으며, 바다의 거친 파도와 수시로 몰아치는 폭풍은 용의 분노로 여겨졌다. 때문에 이 바다를 건널 때에 풍랑과 마주하면 용의 노함을 달래기 위해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곤 했던 것이다.
참나무호는 은룡해의 바깥, 대양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 섬인 제게쉬헴 섬의 백작이 재산을 쌓기 위해 운영하는 배였고, 그래서 돌아가기 위해서는 꼭 은룡해를 건너야만 했다.
에넬륀은 바로 이 배의 귀항로(歸航路)에 바쳐질 제물이었다.
제물은 바다에 오른 뒤로 말도 해서는 안 되고, 몸을 더럽혀서도 안 되며, 폭풍을 만나서 버려질 때까지 선수에 묶여서 오로지 물밖에 마실 수 없었다.
“너는 벙어리니 말할 수 없고, 거기에 그 젠장 맞게 곱상한 외모도 용이 좋아하겠지. 비록 너를 사는데 그 썩어 빠진 돼지 루가멜 사도레에게 20세겔이나 셈해 줬지만, 너같이 좋은 제물을 사는데 그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오늘 이 델바팀을 떠나 바다로 접어들게 되면 너는 선수에 묶이게 될 거고, 폭풍을 만나면 아쉽지만 제물로 바쳐지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폭풍을 만나지 않고 안전히 제게쉬헴에 돌아가게 된다면, 용의 은혜를 입은 아이로 여겨 백작 각하의 청지기라도 삼아 달라 청할 테니, 배가 출발하거든 젠장맞을 네놈 운명은 바다에 맡겨라.”
델바팀 공국의 메넴 섬을 등 뒤로 하고 제게쉬헴을 향해 출발할 때, 참나무호의 선장 리쉬 빈센은 에넬륀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얼굴 한쪽에 예전 서해 기사단의 기사와 다투다 생겼다는 칼자국 때문에 웃을 때마다 근육이 이죽거리는 빈센 선장은, 아니나 다를까, 출항을 하자마자 직접 에넬륀을 선수에 있는 사람 높이의 기둥에 묶어 버렸다.
다른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는 없는, 오로지 제게쉬헴으로 가기 위해 은룡해를 지나는 배들에만 있는 독특한 기둥이었다.
제게쉬헴 사람들은 그들의 독특한 방언으로 이 기둥을 부멕[祭柱]이라 불렀다.
에넬륀은 그렇게 이틀 밤낮을 기둥― 부멕에 묶여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다행히 허락된 깨끗한 물은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제물이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빈센 선장이 에넬륀의 운명이 바다에 달렸다고 했을 때, 에넬륀이 느끼기에 그것은 새삼 별스러울 것도 아니었다.
에넬륀의 기억이 남아 있는 지난 1년간, 자기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발 언덕의 빈민가에 있을 때에는 벤델이 자기 맘대로 에넬륀을 휘둘렀고, 그가 에넬륀을 루가멜 사도레의 남색용 애동(愛童)으로 판 뒤로, 며칠간 루가멜 사도레가 에넬륀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는 다시 지불한 값의 두 배를 받고, 에넬륀을 참나무호의 제물로 팔았다. 비록 비역질은 못했지만 실컷 두들겨 패고 두 배로 이득을 남기고 팔았으니 루가멜 사도레에게는 절대 손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에넬륀은 참나무호의 제물로 묶여 있게 되었다. 이제 바다가 운명을 결정한다고 한다.
문득 떠나오던 날 밤 셀로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센도 그랬고 작은 가쉬도 그랬지. 너도 이제 바다로 가겠구나. 왜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매정히도 못살게 구는 걸까.”
바다로 간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에넬륀은 생각했다.
아마 나센이라는 아이도 작은 가쉬라 불리던 아이도 루가멜 사도레에게 남색 상대로 팔려 왔다가 어떤 이유에선지 루가멜의 눈 밖에 나 되팔린 아이들일 것이다.
에넬륀은 셀로에의 안타까워하는 동정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의 품은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었다.
처음 느껴 보는 포근함.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고 가족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느 순간 보발 언덕의 빈민가에 비오는 밤 홀로 서 있던 그 순간부터의 기억밖에 없는 에넬륀에게는 그녀가 준 따뜻한 동정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문득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