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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처음 사도레 저택에 들어섰을 때처럼 집사장 에데몰렙의 손에 이끌려 부두로 팔려 나갈 때, 셀로에는 차마 에넬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기둥 저쪽 응달에 숨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에넬륀은 그녀의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에넬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친누나가 있다면 꼭 셀로에 같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을 다정하게 감싸 준 존재. 에넬륀은 지금 기둥에 묶여서, 만약 자신이 제물로 바쳐져 정말로 은룡을 만나게 된다면 용에게 셀로에의 행복을 기원하리라 다짐했다.
은룡이 따뜻한 존재라면, 기꺼이 제물로 바쳐진 자신의 몸값 삼아 셀로에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바람이 멎은 듯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삼 일째 물만 마시며 부멕에 묶여 있는 동안 에넬륀은 낮에는 겨울에 접어드는 계절임에도, 날카롭게 쪼아 대는 바다 햇살과 싸우고 밤에는 차갑게 얼굴을 때리는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과 싸워야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빈센 선장이 지나가는 말로, 만약 이대로만 간다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에넬륀에게 말했을 때, 에넬륀은 그 말이 좀체 실감 나지는 않았다.
몸은 아직 묶여 있었고, 자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단지 생각했던 폭풍은커녕 너무나도 맑은 날씨에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되면 셀로에의 얼굴을 언젠간 한번쯤 볼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폭풍이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에넬륀의 바람에 용이 화가 난 것인지―에넬륀은 정말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그 해가 저물기 무섭게 바다 저 남쪽에서 검은 구름 떼가 피어올라 몰려와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남쪽 바다의 습윤한 공기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은 이내 비바람을 뿌려 대기 시작했고, 배는 곧 나아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까지는 거친 폭풍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선상에 나와 있는 수부들은 죄다 제물을 바칠 때라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에넬륀은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점차 스스로 체념하기 시작했다.
에넬륀이 멍하게 바다 저편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때, 선미 쪽에서 리쉬 빈센 선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풍향계로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는, 다시 육분의를 하늘로 올려보았다. 그러나 먹구름 아래로 잔뜩 낀 비바람 때문에 하늘의 성좌(星座)는 자리를 감춘 지 오래였다.
“젠장맞을. 올게 왔어. 지금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겠군.”
빈센 선장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고뇌하며 갑판 위에서 서 있었다. 어느새 선원들도 하나둘 그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바다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파도는 이제 배를 흔들기 시작했다. 족히 6세림(대략 3m)은 올려치는 너울이었다. 빗방울은 굵어지기 시작했고, 거친 바람에 돛대가 깃발처럼 울렁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부멕에서 제물을 풀어라.”
빈센 선장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넬륀은 그 표정에서 그가 이런 상황이 아니면 꼭 제물로 에넬륀을 바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뱃사람답게 말은 거칠고, 에넬륀을 바다의 관습으로 묶어 두었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에넬륀은 지금 그 사실을 빈센 선장의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만약 폭풍을 만나지 않아 살아남게 된다면 백작의 하인으로라도 넣어 주겠다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두말 않는 뱃사람답게, 폭풍을 만나지 않아 제물을 버려야 되는 상황을 피한 것을 감사하고, 기꺼워하며 에넬륀의 행복을 빌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은룡해 한가운데에서 폭풍과 맞서고 있는 참나무호의 선장으로서의 결정을 해야만 했다.
“꼬마. 안됐지만, 꼭 내려가서 은룡에게 우리의 안전한 항해를 빌어다오.”
“이 더러운 세상보다는 은룡과 바다의 품에서 안식을 찾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다.”
빈센 선장의 명에 따라 부멕에 묶여 있던 에넬륀을 풀어서 데려오기 위해 다가온 선원들이 한참을 묶여 있어서 제대로 걸음 하지 못하는 에넬륀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들도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바닷사람은 바다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지난 몇 백 년간 이 바다를 항해하던 모든 제게쉬헴의 배들이 해 온 일이었다. 제물은 폭풍을 만나면 던져지고, 만약 만나지 않으면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이 바다는 열 번 항해에 아홉은 폭풍을 마주치는 바다였고, 신기하게도 제물을 바치게 되면 폭풍에 피해를 입을지언정 난파되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미신 같은 징크스가 있었다.
“안타깝지만, 은룡은 너를 원하는구나. 젠장맞은 일이다만, 나는 바다의 율법대로 너를 던져야 한다. 이건 제게쉬헴의 모든 뱃사람들이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지켜 내려온 일이다. 나에게는 도리가 없구나.”
빈센 선장은 정말로 안타까운 눈빛으로 잠시간 에넬륀에게 시선을 머물렀다.
에넬륀은 그에게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빈센 선장은 그를 때리지도 않았고, 괴로운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정해진 대로 에넬륀의 운명을 결정했을 뿐이었다. 에넬륀은 어쩐지 슬펐지만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셀로에의 얼굴을 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마음먹은 대로 은룡에게 그녀의 축복을 빌어 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말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에넬륀은 고개를 굳세게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천국에서 보자.”
폭풍은 점차 거세졌다.
조금만 균형을 잃으면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빈센 선장은 선수로 에넬륀을 데려갔다. 그는 옆의 선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선원들은 에넬륀을 선수 밖으로 밀어 넣었다.
바다로 들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거센 바람이 얼굴에 부딪혀 왔다. 이내 파도 아래로 몸이 잠기기 시작했다. 푸른 물이 몸을 감싸 안고, 멀리서 선원들의 영창(咏唱)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다의 주인
세월의 용이여
이제 여기
제물을 바치옵나니
이를 어여삐
흠향하시고
파도를 멎게 하소서
바람을 잦게 하소서
에에룹 아에바덴
에에룹 아에바덴―
물에 잠겨 들어가며 에넬륀은 의식을 잃어 갔다. 멀리서 여러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빈센 선장, 셀로에. 그래, 셀로에는 따뜻한 누나였다. 그리고 더러운 종자 루가멜 사도레. 저녁놀이 비치던 운하 지구의 장관과 그와는 비교도 안 되게 초라한 보발 언덕의 빈민굴. 그리고 그곳에서 에넬륀을 학대하며 못살게 굴었던 똥물대장 벤델. 거적 집에서 함께했던 친구 레덴. 그리고 비오던 날 처음 들어선 빈민가의 거리― 그리고 어렴풋이 무언가 잊고 있었던 그 이전의 기억들이 밀려오는 것을 에넬륀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채 그것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기도 전에 몸과 마음 모두 심연의 바다 끝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의식을 잃던 순간, 에넬륀이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뭔가 포근하게 그를 감싸 오는 어떤 기운이었다.
“별의 아들이여. 정신이 드는가?”
승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느낀 것은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시야는 밝은 빛무리처럼 빛의 흐름만 느껴질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몸은 어쩐지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언가 공기가 아니라 물같이 축축한 느낌이었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는 커다란 빛덩어리만 움직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환각을 느끼는 건가?’
승현은 이 상황이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환각 증상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그러나 생물학 공부를 할 때도, 화공학 공부를 할 때도 일산화탄소 중독 상태에서 이런 환각이 보이는지는 배운 바가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 승현이 배우고 알고 있었던 대로, 산소 대신 일산화탄소와 결합한 피가 온몸을 돌기 시작하면서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띵해지며, 점차 온몸이 무거워지며 정신이 흐려져 갔었다. 그런데 정신을 잃고 나서 갑자기 환각 증상이라니. 아니면 누가 자신을 살리면서 일어나고 있는 증상인가.
‘……산소를 고압으로 주입해서, 르 샤틀리에― 브라운 원리에 따라 헤모글로빈과 결합한 일산화탄소(HbCO)에 산소가 들어가 일산화탄소(CO)를 떼어 내고, 정상적인 산소를 나르는 혈액으로(HbO₂)…….’
의식의 저편에서 원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중요한 건 급속한 산소의 공급에 의해서도 정상적인 신체 기질이 회복될 뿐, 이런 환각 증상이 나타날 리는 없다는 점이었다.
점차 복잡해져 가는 정신을 뚫고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머리 한가운데에서 공명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별의 아들이여.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내 지혜로 가늠할 도리가 없도다. 그러나 그대가 있는 지금 이곳은 나, 남겨진 말로는 아압―레―임, 그리고 우리 용들의 말로는 아이로에메, 나 자신의 수궁(水宮)이다.”
처음 듣는 언어였다.
그것은 거칠게 공명하며 승현의 머리를 때려 댔다.
남겨진 말, 그리고 용들의 말이라니. 그리고 수궁이라니. 이것이 환각이라면 여기는 어딘가.
“눈을 떠 보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승현은 눈을 떴다.
화려한 빛무리가 느껴져서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은 푸른빛을 띠는 물이 둘러싸고 있었고, 공기라고는 보이지 않는데도 어쩐지 숨 쉬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곳은 수궁이라는 말마따나 물속이 분명해 보였다.
분명히 이곳이 깊은 물속이라면 빛이 들어오지 않아 눈앞을 가늠하기 힘들어야 할 것인데도, 어쩐지 얕은 물속처럼 물은 맑고 빛을 머금은 것 같았고, 사방이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물속에는 멸망한 문명의 유적처럼 여기저기 무너진 듯 보이는 석축 건물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고, 승현은 그중 가운데에 있는 잘 다듬어진 석판으로 된 뜰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은빛 비늘로 몸을 둘러싸고 누워 있는 거대한 생명체가 보였다.
머릿속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말한 대로, 그것은 용이었다.
아이로에메.
그임에 틀림없었다.
“내게로 오게.”
이제는 목소리가 머리를 때릴 듯 울리지 않고 잔잔하기 멀리서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현은 마치 자석에 끌려가듯 어느 순간 그 용의 발톱 아래에 다가서 있었다.
용은 거대했다.
엎드려 누워 있음에도 그 높이는 20m는 됨 직했고, 꼬리까지의 길이는 족히 80m는 되어 보였다. 시선 위에서 조용히 뉘인 채로 굴러가는 커다란 용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차갑게 보였다.
용은 승현을 꿰뚫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 용의 기운이 승현의 정신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차갑고도 시원한 기운이 생각과 생각 사이로 누비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부의 촉각 신경이 아니라 의식이라는 개념에서 이런 감각이 느껴진다는 것은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 기운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기에 승현은 그냥 의식 사이를 흘러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용이 다시 목소리를 보냈다. 입을 열어 발성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듣던 것처럼, 승현의 의식으로 직접 보내는 신호에 가까운 것이었다.
“별의 아들이여. 먼 곳의 기억은 얻었으나 가까운 곳의 기억은 두 번 잃었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의 몸을 보게.”
승현은 용― 아이로에메의 말을 듣고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익숙한 성인의 몸이 아니었다. 시선은 낮아져 있고, 팔다리는 하얗고 매우 가늘었다. 승현이 기억하는 어릴 적 자신의 몸과도 달랐다. 피부색부터 황인종의 누런빛을 띠는 피부가 아니었다. 승현이 기억하는 백인의 피부도 아니고, 약간 혼혈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어린 남자아이의 몸. 거울이 없어 보지 못하지만 얼굴의 생김새 또한 승현 자신의 것과는 매우 다를 것 같았다.
용을 처음 보았을 때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이제는 큰 충격이 다가왔다. 머리가 띵하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승현은 자신의 머리가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자신이 아는 과학의 세계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 당혹스러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전혀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지러운 기분만이 맴돌고 있었다.
거대한 생명체인 용에다가, 모르는 몸에 달랑 정신만 들어가 있는 자신. 그리고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 오는 의지 같은 것들.
도대체 생각조차 못한 것들이었다.
“자네가 허락해 주어 다행히 내 의지가 그대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었네. 비록 강제를 할 수도 있으나, 그대가 편히 받아 준 덕분에 나 또한 즐거웠네.”
승현은 용의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로에메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웅웅거리며 어떤 공기의 파장처럼 느껴지는 의지의 말들을 계속 이어 갔다.
“자네는 분명히 전생에서 수명을 다했네. 천부의 능력을 받았으나 자네 자신의 교만함과 세상의 견제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군. 별의 아들이여. 그대는 먼 천공(天空)의 회랑 바깥, 신들과 의지들이 빚어낸 안식의 저편의 별들에서 건너온 존재가 되었네. 3만 8천 년을 살아오고 신의 의지와 교감하는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어떤 안배에 의해 그대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이네. 그대의 새로운 몸은 단지 그대의 정신을 담을 그릇으로 준비되었고, 그것이 준비된 다음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왔던 일에 따라 그릇은 정신을 봉인한 채 인간들의 땅에 갑작스레 나타났을 테지. 그렇기에 첫 번째 기억은 잃었으되 처음부터 없었으니 잃은 것이 아니요, 두 번째 기억은 먼 별로부터 가지고 온 옛 기억을 찾으며 잃었으니 두 번 잃게 되었네. 이제 그대가 걸어온 세월을 모두 되찾아 줄 테니 받아들이게.”
혼란스러워 하는 승현의 정신으로 다시 서늘한 바람 같은 기운이 스며 들어왔다.
그것은 무엇 인가를 깨우고, 살리고, 무의식에서 불러와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지난 1년간 있었던 일― 빈민가의 소년 에넬륀으로서 살아왔던 기억이 의식의 일부로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식을 담을 그릇으로 존재했던 시간, 그저 감각으로만 느껴져 왔던 신성이 담긴 의지가 부어 주는 느낌들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자각이 없기에 기억할 수 없으나, 몸이 알고 있는 신들의 느낌.
“어째서 내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에넬륀으로서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나서 승현이 처음 물은 것은 바로 목소리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물속에서 성대를 울려 말을 한다는 것에만 신경이 쓰여 신기해하고만 있었지만, 새로운 기억들을 흡수하고 나니 이 몸이 벙어리였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것은 그대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 단지 그것은 의지를 담을 그릇으로 준비되었기에, 입을 열게 되면 자아가 미숙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몸에 담긴 신성(神聖)의 말들을 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네.”
“만약 정말 신들께서 안배를 하여 저를 당신에게로 이끌고자 하신 것이라면, 왜 굳이 사람의 땅으로 보내어 저를 핍박받게 하신 겁니까?”
“비록 신들이 세상 밖에서 의지를 부어 만든 몸이라 하나, 이제는 이 땅 위의 존재가 되어야 하고,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곳의 일부가 되어 단련되어야 했다. 그것은 신들이 태초에 정해 놓은 섭리. 쉽게 말하자면 빗물이 땅 아래에 고이기 위해서는 흙과 자갈과 모래의 사이로 스며들어야 하는 법. 어떤 빗물도 스스로 하늘 위에서 땅 아래로 옮겨 다닐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네. 신이 의지만으로 만든 그릇, 거기에 담길 정신은 신들조차 손이 닿지 않는 저 바깥 별들에서 온 의지. 나름의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이 세상에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갑자기 나타날 수는 없네. 그런 것은 이 세상의 순리가 받아들이지 않아. 그래서 자네의 정신은 봉인되어야 했고, 봉인된 채로 자네의 몸은 이 세상에서 다시 한 번 죽어야 했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 위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남으로써 진정으로 이 세상의 일부가 된 것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승현이 생각하기에 이곳은 자신이 있던 우주의 물리법칙을 적용받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상상 밖으로 다르지 않은 것을 보아 기초 규칙들은 비슷하지만 작용하는 힘의 종류가 다르거나 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용의 말대로라면 이 우주에도 라부아지에가 발견한 질량보존의 법칙 내지, 현대 물리학에서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원칙, 즉, 소위 잘 알려져 있는 공식인 E=mc²와도 비슷한 종류의 규칙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현이 있던 우주에서는 물리법칙 상, 갑작스럽게 새로운 물질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우주는 총질량의 지배를 받으며, 물질이나 원소 따위가 질량을 가지고 반응해서, 열 같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되어도, 그 총 규모는 정해져 있다.
모든 에너지는 그 형태와 구조가 바뀌더라도 전체 우주의 정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아무리 작은 전자나 미립자, 쿼크 같은 입자들도 어떠한 원인 없이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상에는 그 현상을 위해 지불된 합당한 대가, 즉 원인이 있어야 한다.
용이 말하는 것이 소위 승현이 있던 우주에서의 물리법칙이라고 불릴 만한 것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종의 어떤 우주의 규범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것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법칙에 따라 순리대로 그 과정을 거쳐야 할 터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도대체 제 전생의 기억을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이 땅 위에 현신시켜야 했던 이유는 뭔지 아십니까?”
“그건 나도 잘 알지 못하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신들이 순리에 따라 안배해 둔 일들의 하나일 뿐이란 것. 내가 느끼기에 신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네. 무엇인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위의 힘으로 그 시간을 규율하는 것 같네. 즉 신들의 눈은 이 우주의 태초와 최후를 동시에 보고 있는 듯 보이네. 내가 느끼기에 신들은 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저 이 우주의 법칙이기만 한 것 같기도 하네. 어찌 되었든 그대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라고밖에 말을 못해 주겠군. 그대가 가는 길이 곧 그 이유가 될 것이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이로에메, 당신에게로 제가 인도되어야 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그건 매우 잘 알고 있지. 나는 그대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전수할 의무를 띠고 있네. 별의 아이. 그대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용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될 것이네.”
용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승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용은 그저 푸르고 시린 눈으로 승현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은룡해 깊은 바다 아래, 그 바다의 지배자 아이로에메와 먼 여정을 거쳐 그에게로 찾아온 별의 아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