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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이세계의 수학 수준은 중세에 가까운 생활수준에 비하면 높은 편이었지만, 현대의 고급 수학에 비하면 매우 질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예전 고대 종족들(고대 인간족을 포함해, 하이 엘프들과 이제는 사라진 조인족, 마족 등)은 말의 힘을 빌어 마법을 다뤘기에, 수학이라 봐야 별의 주기를 헤아리기 위해 발명된 60진법과 기하학 정도가 다였다.
수학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 학문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용들이 떠나가기 시작하고 고대 종족들이 멸절(滅絶)된 시기에 이르러 드워프들이 대수(代數)의 개념을 발명해 냈다.
그러나 이 개념이 다시 인간들의 말로 옮겨지기까지는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그제야 인간들의 마법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 세월만 해도 족히 이천 년은 헤아리고도 남았다.
대수가 도입 되고나서 500여 년간은 마법의 융성과 함께 인간들의 수학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마법사들은 곧 수학자였고, 이들은 이제는 잘 알려진 대수학을 정교화시켜 방정식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고, 기호와 0의 개념도 고안해 냈다.
60진법은 보다 배우기 간편한 10진법으로 대체되었으며, 융성기의 끝자락에는 고차원의 마법을 4차 방정식에 삼각법(三角法)을 이용한 공간적 응용까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마나의 흐름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점차 떨어져 가는 마나의 힘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서클 별로 구분된 클래스에 따라 수식이 정리되고, 정교하게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수식들만이 이용됨에 따라 마법은 고착화가 되었다.
그 뒤로 천 년이 흐르자 그 수식들을 이용하기 위한 수학적 방법론 이상으로는 수학의 진전이 없게 되었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나마도 점점 잊혀, 마법을 다루고 가르치는 이들은 큰 국가의 대학이나 궁정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도 죄다 5서클 이하의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잔챙이들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승현은 달랐다.
미적분은 기본으로 다루는 승현은, 기존의 저차원적인 이세계의 마법 수식을 보다 단순 명료하게 분해에 사용할 수 있었고, 뛰어난 오성(悟性)을 얻은 두뇌는 마음껏 떠오르는 마법 수식들을 암산을 통해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아이로에메 앞에서 3서클의 마법을 시전한 뒤 3개월 동안 마법 수학을 연구하는 틈틈이 마나를 쌓아 7서클에 이른 승현은 아이로에메 앞에서 그동안 벌려 왔던 마법 시전을 보였다.
이번에는 마법의 이름을 부르는 영창도 없었다.
순전히 승현이 새롭게 짜낸 마법이기 때문이었다.
6서클의 마법력을 사용했지만 위력은 그것을 초월했다. 레어 주변의 해저에 쌓여 있는 심해의 잔잔한 바닷물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해저의 바닥이 뒤집히고 아래위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요동치는 물의 흐름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내 그것은 커다란 소용돌이가 되어 아이로에메의 힘으로 보호받는 레어 밖의 모든 생물이며 물질들을 소용돌이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놀랍군. 인간의 6서클 마법력으로 이 정도라니.”
“6서클의 날씨 조종법(Control weather)를 좀 응용했습니다.”
“어떻게 한 거지?”
“굳이 복잡한 방정식을 여러 번 계산할 필요 없이 미분(微分)해 버렸습니다.”
“미분이란 게 뭔가?”
그 다음 날부터 아이로에메는 승현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승현 아이로에메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로에메는 순전히 마법 때문이 아닌 이계의 지식 자체에 흥미를 느꼈고, 미적분과 통계학, 리만 기하학, 쌍곡선 기하학, 추상대수학에 범주 이론까지 빠른 속도로 익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정교해진 수리논리학이나 위상수학을 설명하는 데는 승현 또한 힘이 부침을 느끼고 있었고, 어느 정도 기초가 잡히자 아이로에메는 스스로 연구를 해, 어느 날 갑자기 티호노프의 정리를 들고 와 승현에게 검산을 부탁해 그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용이 괜히 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로에메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동안, 승현은 어느덧 9서클의 마법까지 마스터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하고, 이미 서클을 통한 방법으로는 마나의 축적을 더 이상 이룰 수 없어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자, 아이로에메는 그에게 고대어와 엘프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두 개의 마법은 서로 방법은 같았지만 체계가 크게 달랐는데, 우선 마법에 힘을 싣는 말이 서로 달랐고, 엘프들의 마법이 자연을 부리는 데에 중심을 둬 수많은 물질들의 이름을 외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반면, 고대어를 이용한 마법은 크게 흑마법, 백마법, 적마법, 청마법, 녹마법 등으로 대별(大別)되어 세세하게 분류 되어 있었다.
이들 마법 사이에는 같은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 서로 다르고, 그 말의 차이는 서로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흑마법에서 자세히 다루는 지옥의 권속들과 몬스터들에 대한 낱말들은, 백마법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등, 중점을 두는 부분도 서로 달랐다.
그중에서도 백마법은 고대마법의 본산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가장 넓게 사용되었고, 일부는 더욱더 체계화되고 고급화된 신성마법(神聖魔法)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이에 상응하게 흑마법은 강신술(네크로멘시)나 주술법이 큰 분류로 나뉘어져 있었고, 적마법이나 청마법은 철학적 토대 위해 사람의 마음이나 의식을 조종하는 술법으로 고대에도 흑마법과 함께 때에 따라 금기시되어 왔고, 또한 상대적으로 고대마법의 멸절기가 가까워졌을 때 등장했기에 그 깊이가 깊지 않았다.
녹마법은 특별한 경우로, 고대마법과 엘프마법의 교류를 통해 발전한 마법이었다.
엘프들의 마법에서 처음 시도되었던 정령술이 고대마법의 전승들과 융합되면서 녹마법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이것은 고대마법의 사멸 뒤에도 4대 원소론의 등장으로 정령술의 새로운 지평이 열려, 정령마법의 존재로 아직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엘프마법과 고대마법을 배우는 것은 인간의 마법을 배우는 것보다 더욱더 인내를 필요했다.
인간의 마법으로 9서클을 만드는데 겨우 반년이면 충분했었지만, 서클을 허물고 축기를 시작하자 더 많은 양의 마나로도 인간의 마법보다 더 하등의 기술만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수식으로 정교화 된 인간의 마법과는 다르게 이름을 아는 모든 존재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매력이었다.
엘프마법과 고대마법의 5대 술법에 대해 이해가 깊어지고, 엘프어와 고대어를 어느 정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는데 5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축기도 어느 정도 진행되어 인간의 9서클의 5배에 해당하는 양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상당한 양이군. 용을 제외한 존재들 중에서 과거에도 이 정도로 마나를 쌓은 이들은 손에 꼽힐 정도였지. 이 정도만으로도 지금 이 세상에서 나를 제외하고 너와 겨룰 존재는 열 명도 안 될 것이다.”
아이로에메의 말에 승현은 어깨가 으쓱했지만, 이내 침울해졌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서 열심히 했는데도 저와 겨눌 만한 자들이 열이나 됩니까?”
“건방진 소리 말아라. 엘프들은 아직도 그들의 마법을 잊지 않았고, 수명이 천 살에 가까운 혈통도 아직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지금의 엘프로드가 지닌 마나의 양에 비하면 네놈은 그 절반도 못 돼. 땅 파는 난쟁이들 또한 그놈들만의 마법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놈들은 말로도 마나의 힘으로도 마법을 부리지 않아. 어떤 면에서는 용만큼은 아니지만 마나를 선천적으로 부리는 놈들이다. 특히 땅의 기운과 오래 접해 온 드워프들은 지상에서 만큼은 탁월한 마법들을 부리곤 하지. 거기에 이제는 혈통이 흐려졌지만, 옛 종족들의 피를 이어받고 가르침을 근근이 이어 고대마법을 다루는 이들이 완전히 사멸된 것은 아니다. 비록 형태나 기능은 많이 바뀌고 떨어지지만 애초에 인간들의 마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좀 더 정진하겠습니다.”
승현의 기죽은 목소리에 아이로에메가 코웃음 치며 말한다.
“그래도 이 정도 했으니 그동안 배운 녹마법의 정령술로 정령을 소환해 봐라. 그동안의 고생이 정령과 계약을 맺는 기쁨으로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을 거다.”
“정말 불러내도 됩니까? 저는 녹마법에서 다루는 정령술 수준밖에 몰라서 정령마법으로 4대 원소의 정령은 불러낼 수가 없습니다.”
“정령마법이란 것도 다 녹마법의 정령술에서 나온 것이다. 그건 그저 하나의 인식의 범주일 뿐이야. 용들은 그깟 녹마법이니 정령마법이니 하는 것 없이도 정령왕들을 불러내곤 했다.”
승현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신의 마나를 풀어 가닥가닥 흩어 놓으며 정령들의 정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원래 녹마법의 정령술로는 4대 원소의 일족에 속하지 않은, 오래된 나무나 돌 따위에 깃든 잡령들만 불러낼 수 있었지만, 특별히 익히지는 못했어도 4대 원소론에 입각한 정령마법의 대강을 알고 이미 그 한계를 머릿속으로 허문 승현은 자신의 소환 대상을 특정하게 한정하지 않았다.
마나의 가닥을 따라 마나와는 다른 자연의 힘들이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큰 힘으로 자신의 마나를 당기는 존재를 향해 승현은 외쳤다.
“두에 멜라흐 델 엠디놀(Due mellach el emdinol).”
고대어로 ‘그대를 부르는 말을 내게 다오.’라는 신성한 구절이었다.
다른 마법들은 이름을 알아서 부르지만, 정령계에서 어떤 존재가 소환될지 모르기에, 그 존재에게 이름을 묻고 거기에 응한 정령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만 소환자는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내 그 물음에 응답하듯 마나의 진동이 커지더니 그 흐름을 따라 하나의 선명한 의식이 전해져 들어왔다.
“라흐 엘―라―임(Lach L―LA―IM).”
“엘―라―임!”
들린 이름을 승현이 외치자 이내 폭풍처럼 승현의 마나가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내 바다에서 요동치던 물이 한곳에 마나와 뒤엉키며 하나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용 중에서도 나이를 매우 먹어 상당히 큰 편인 아이로에메에 필적하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특정한 물질적 형상 없이 물의 결을 따라 그 명암을 드러낸 존재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끊임없이 빨려 나가는 마나에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이로에메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엘라임, 그대가 나올 줄이야.”
“마지막 용에게 경의를. 아이로에메, 당신이 불러낸 것이 아니라 이 꼬마가 불러낸 것이었습니까? 이 마나도 모자라서 헉헉대는 놈이 안배된 자, 별의 아들입니까?”
“그렇네. 설마설마했는데 처음 불러낸 게 물의 정령왕이라니, 이거 놀랍구만.”
“이놈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별의 아들에게 계약을 맺게 할 작정이십니까, 아이로에메?”
“그건 이놈이 판단할 일이지.”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라임의 소환을 유지시키는 승현은 죽을 맛이었다.
벌써 마나의 양은 반을 넘어서 바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간단히 묻겠다. 나,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계약을 맺겠는가?”
“……예!, 맺… 겠습… 니다!! ……헉헉.”
“그래. 알았다. 언제든지 물이 있는 곳에서 마나를 보내 내 이름을 부…….”
혼신의 힘을 다해 계약을 맺고 나자, 엘라임이 하는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몸의 마나가 전부 바닥이 나자 소환은 중지되고 말았다.
승현은 더 이상 몸을 가눌 힘조차 없어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대단하다. 물의 정령왕을 불러내다니. 하지만 이래서야 계약은 맺긴 했어도 엘라임을 부리는 것은 힘들겠구나. 소환 시간도 너무 짧고, 게다가 지금 네가 실력이 미쳐서 엘라임을 불러냈다기보다는, 물의 기운으로 충만한 심해저에서, 거기에 은룡해에 가득한 마나의 기운과 큰 힘들과 반응하는 내 존재 또한 영향을 끼쳐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다른 원소의 일족들이라면 정령왕은커녕 최상급 정령도 힘들 수 있어.”
“……정말……휴우, 힘든 것 같습니다.”
“우선 마나를 다시 축기하며 힘을 비축하도록 해라. 어쨌든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으니 그 아래의 권속들은 네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정령사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령왕 중에서도 엘라임은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놈이다. 네가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동안은 엘라임은 널 인정하려 들지 않을 거야. 꽤 애먹을 게다.”
엘라임을 불러낸 뒤로는 승현은 한동안 정령왕을 다시 불러낼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마나의 양은 계속 해서 쌓여 가 이제는 9서클의 몇 배니 하는 식으로 세지 않고 엘프마법에서 다루는 연수법(年數法)에 따라 몇 년 분의 마나라는 식을 세기 시작했다.
보통 엘프 중에서도 탁월한 마나의 감각을 가진 이들은 엘프 마법에 정진하여 마도사의 길을 걸어왔고, 이들이 정교하고 체계화된 마법학에 따라 매년 일정히 축기하는 양을 1년치로 계산하는 방법이었다.
대충 9서클의 마나량은 300년분이었고, 엘프 마도사들도 500년분 이상은 잘 쌓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직접 빚은 육체인 승현의 몸은 마나를 집어삼키듯 몸에 저장하고 있었고, 엘라임을 소환한 지도 1년여가 지난 지금은 4,000년분의 마나를 몸에 축기할 수 있었다.
마나를 꾸준히 축기하는 동안, 엘프마법은 거의 그 처음과 끝에 통달하게 되었고, 고대마법의 5대 계통과 거기서 뻗어 나온 신성마법, 강신술, 주술마법, 정령마법을 비롯해 백마법과 녹마법의 영향 아래 번성했던 연금술 또한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드워프의 엘람마법, 금수를 부리는 마법, 옛 마족들의 마술들에 잊힌 언어들의 힘으로 마법을 다루는 방법까지 익힐 수 있었다.
아이로에메의 서고에는 물에 젖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 놓은 수만 년에 걸쳐 쌓아 놓은 책들이 하나의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이 책들로도 메워지지 않는 지식은 아이로에메가 직접 승현에게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틈틈이 물의 정령들을 소환해 친화력을 늘리곤 했다. 이제는 마법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충분히 지금 뿐만이 아니라 옛 시대를 통틀어서도 용들을 제외하고는 너만큼 마법에 통달한 이는 없을 것이다. 3만 8천 년을 살아온 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족들의 번영과 몰락을 쭉 지켜보아 왔지만, 그 오랜 세월의 마법을 너만큼 통달한 이는 없을 것이다.”
승현은 아이로에메가 부쩍 늙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3만 8천 년의 세월 동안 용으로서의 젊음을 유지하던 아이로에메였지만, 이제 삶을 연장해 왔던 이유가 달성되어 가고 있기에 늙는 것을 막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승현에게 힘을 나누어 주고 자신의 능력으로 승현의 성장을 도움으로써 노화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현은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안타까웠지만, 승현과의 안배를 위해 이미 원래의 정해진 수명을 넘어서 3만 년에 가까운 세월을 더 살아온 아이로에메가, 더 이상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이 오로지 승현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그저 아이로에메의 가르침을 받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제 마법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용언(龍言)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이건 배움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용이 아닌 존재가 용언을 다루기 위해서는 각성(覺性)이 필요하다. 이론상으로만 있었지만, 역사상 단 한 명의 존재가 이것을 이루어 냈다.”
“용이 아님에도 용언을 다룬 자가 있었단 말입니까?”
“지금으로부터 3만 6천 년 전, 나도 아직 2천 살의 젊은 용이던 시절의 일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마나는 용들뿐만 아니라 다른 고대 종족들도 다루기 시작했지만, 거의 걸음마 수준에 불과했다. 그때 하이엘프 중에 비상한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보이는 자가 있었다. 느릅나무 혈통의 에델리아라는 엘프였다. 지금의 엘프들보다 세 배에 가까운 2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사는 하이엘프 중에서도, 가장 옛 혈통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가장 장수하는 느릅나무 일족의 후계자였던 그녀는 그때까지 땅 위에 떠돌던 주술과 술법을 모아 하나의 마법으로 체계화시켰고, 그것이 엘프마법의 시작이었다. 마나의 힘을 다루는 이들은 존재해 왔지만, 그것을 기술적으로 발전시켜 땅 위에 ‘마법’을 탄생시킨 것은 에델리아였다고 봐야지.”
“…….”
잠시 아이로에메의 눈과 승현의 눈이 마주치고 정적이 흘렀다.
“당시 호기심 많던 나는 엘프의 모습을 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한창 그녀가 정리하던 ‘마법’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누누이 말했지만 용언이라는 것은 마나를 다스리는 방법이고, ‘마법’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기보다는 더 상위에 존재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종족들이 용들이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추구해 마나를 다루거나 부리는 방법을 쌓아 가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지.”
“그녀…… 에델리아와 개인적인 추억이 있으십니까?”
“용들은 추억을 쌓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어제가 내일 같고, 살아온 모든 날들이 바로 오늘 같지. 네가 아무리 신이 지은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 인간의 정신으로 존재하는 한 이것만큼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보는 네 얼굴만큼 3만 년도 더 전에 보았던 에델리아의 얼굴도 선명하다. 그녀의 호기심 많은 눈동자는 너와 꼭 닮았었다. 지혜를 갈구하는 힘으로 번득이고 있었지.”
아이로에메는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고, 어느 때에 이르러 내가 용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이미 6백 년을 앉아 있었던 느릅나무 혈통의 어머니 자리를 버리고 나와 함께 유랑 길에 기꺼이 나섰지. 비록 폴리모프로 빌린 몸으로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우리는 행복하게 지냈다. 그녀는 그동안 마법이라고 불리게 될 길을 닦아 나갔고, 이제 주술이나 술법을 떠나서, 그리고 마치 지금의 인간들이 다루는 마법처럼 조잡스럽게 마나를 ‘다루는’ 경지에서 벗어나 ‘부리는’ 경지를 처음 개척한 것은 그녀였다. 그러나 나와 만났을 때 이미 2천 년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에델리아는 곧 2천 년간의 젊음을 잃고 안식을 위한 노화기로 접어들게 되었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안 그녀는 더 이상 욕심이 없다고 했지만, 그녀의 마나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알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용들에게만 허락된 용언의 힘을, 마나를 ‘다스리는’ 권세를 한번 느껴 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조용히 숲에 자리를 잡고 삶의 흔적들을 낙엽들 사이로 묻어가는 동안, 나는 용언을 느끼게 해 줄 방법을 찾고 있었지. 에델리아는 2천 년을 살았음에도 뛰어난 마나에 대한 친화력으로 지금의 너보다는 적지만 유례없었던 3천 년분의 마나량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나량만 가지고서는 용언을 다룰 수는 없었단다. 어찌 보면 몸에 지닌 마나량은 중요하지 않았어. 그만큼 많은 마나를 신체 속에 공존시킨다는 것은 마나를 친숙하게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절대적으로 많은 양을 쌓아 간다고 해서 용언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방법을 찾아보고, 또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지. 그러는 사이 그녀는 죽음을 완전히 예감하고 있었고, 몸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어졌지.”
아이로에메는 방법을 찾아냈을까. 승현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