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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에델리아라는 엘프 여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언으로 마나를 다스리는 힘을 후천적으로 얻은 존재라고 하니 아이로에메가 그 방법을 알아낸 것임에 틀림없다고 승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로에메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마나를 ‘다스리는’ 힘을 얻은 것은 그녀 스스로였어. 나의 도움 없이 말이다. 그녀는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한순간에 그 힘을 깨닫고 사용했다. 그녀는 그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사용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향해 용언을 깨달은 것을 알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숨을 거둬 가는 순간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은 그녀에게 용언을 사용할 힘을 허락했다. 그녀가 그 힘을 사용해 남긴 것은 단 하나.”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용족이지만, 아이로에메는 그 말을 하는 동안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딸. 에레나. 엘프 마법의 조종(祖宗)으로 부름 받은 아이. 그녀는 용언의 힘으로 자그마한 아이를 내게 남겨 주었다. 그녀와 내 모습을 섞은 듯한. 세상에, 그건 일반적인 용언의 힘조차 뛰어넘은 것이었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용언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일부나마 창조의 힘 또한 가지게 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마법의 힘만으로 생명을 창조해 내는 것은 신만이 가능한 일이야. 내 제자야, 너의 경우처럼 말이다. 비록 우리의 딸 에레나는 너처럼 신성한 육체도, 다른 엘프들에 비해서 탁월한 육체나 수명을 가지고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것은 너를 제외하고 내가 본 유일한 어머니의 태를 빌리지 않고 태어난 순수한 생명이었다. 어쩌면 신이 나를, 너를 위한 안배로 선택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일하게 지상의 생명이 그 한계를 뚫고 깨달음을 얻어 마나를 ‘다스리는’ 힘, 그리고 어쩌면 그마저도 지나 마나를 통해 ‘이뤄 내는’ 힘을 손에 넣은 것을 지켜본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에델리아는 에레나를 나에게 안겨 준 뒤 곧 숨을 거두었고, 그녀의 몸은 가루처럼 흩어져 바람 속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스스로를 풍장(風葬)한 것이었다. 나는 에레나를 엘프로 키웠고, 그녀 또한 내가 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그저 에레나나 다른 엘프들에게도 그저 느릅나무의 어머니를 보좌에서 내려 한 남자의 반려로서 함께하게 한 그저 독특한 엘프였을 뿐이었지. 에레나는 에델리아가 남긴 마도의 길을 내게 가르침 받아 엘프들 가운데에 첫 마도사가 되었다. 그 아이는 마법의 창시자인 에델리아와 그저 이상한 엘프였던 엘레이온의 딸로서 자작나무 혈통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용언의 힘을 깨달은 엘프는 그 혈통에서도 나오지 않았어. 에레나의 딸들도, 손녀들도, 그 후손들도 그저 마나에 조금 더 민감했을 뿐이었다.”
“…….”
“내가 이 이야기를 계속한 것은 나 또한 용이 아닌 존재에게 용언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델리아의 깨달음을 지켜보며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죽음에 가까워 왔을 때 어느 순간엔가 엘프로서의 자각도 지워 가며 그저 순수한 원념 하나로 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때 그 각성의 순간이 온 것이 틀림없다.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이 정도구나. 나는 이제 마지막 수면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이 잠에서 깨어 나면 그다음은 영원한 잠이 되겠지. 네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나를 깨우도록 해라.”
아이로에메는 마지막 수면을 시작했다.
승현은 레어의 한쪽 귀퉁이, 먼 바다의 소리가 부딪히는 결계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몸을 바다 안으로 흐르는 마나들의 통로로서 내어놓았다.
자연의 기운에 따라 생명이 유지되는 동안은 생리 활동이 불필요했다.
식욕 등의 욕구로부터 자유스럽게 몸을 내어두자, 정신만이 또렷하게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을 없애고, 정신마저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어느 순간이 지나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뚜렷하지 않았다.
심해저에는 낮도 밤도 없었고, 그저 아이로에메가 레어에 밝혀 놓은 은은한 빛만이 해저의 물들 사이로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의 흐름을 끊기는커녕 단순화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간을 계속해서 마법에 관해서 생각하다가, 어느 날은 해저에 떠도는 물고기들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지구에서의 전생에서 익혔던 각종 학문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고 정리되기도 했다.
시간은 흐르는 동시에 멈춰 있었고, 신체의 감각도 사라지고 그저 마나의 흐름 위에서 정신만 떠다니고 있었지만, 생각의 흐름만큼은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고하고, 배운 것을 다시 되새김질하고, 머릿속에서 몇 번인가 세상을 만들고, 지우고를 반복했을 쯤, 각성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때서야 겨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생각이 사라졌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그 사이의 공백 동안 승현은 그 자신이면서 그 자신이 아니었고, 세상 전체이면서도 그 일부에 불과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열반(Nirvana)의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하고 나중에 승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정말 그것은 인식되지도 못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때 승현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얼마 동안이었을지 모를―찰나였을 수도 있고, 꽤나 긴 시간이었을 수도 있는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생각이 의식의 수면 위로 깨어났을 때, 모호하기 시작된 생각은 새로운 힘을 자각하고 있었다. 몸은 마나를 더 이상 쌓아 두고 있지 않았다.
비록 물질적으로 보면 세상과 구별되어 움직이는 하나의 실체로서의 육체가 있었지만, 마나의 흐름으로 보면 이제 강제로 머무르는 상자 같은 것이 아니라, 승현의 육체는 그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나가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에 있어서는 승현의 육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생물이나 무생물은 마나에 대하 각각의 저항력(抵抗力)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은 마나가 들어오는 길은 저항을 없애고, 나가는 길은 저항력을 높여 마나를 몸 안에 머무르게 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나가는 마나의 저항을 줄이는 기술을 탁월하게 익힌 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마법사’들은 어디까지나 마나에 대한 무저항과 강력한 저항 사이를 저울질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승현은 달랐다.
그의 육체는 마나의 흐름의 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나가 지나다니는 길인 동시에, 마나의 일부였다.
정신은 직접적으로 육체를 지배했지만, 그 육체는 마나의 흐름과 곧 연결되어 있었다. 마나의 흐름은 이 행성을 감싸며 떠도는 거대한 마나의 대기(大氣)의 일부였으며, 승현은 이제 자신이 곧 그 대기를 신체의 연장으로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깨달음의 순간 승현은 육체와 정신 모두를 마나의 바다에 던짐으로써 그 스스로 마나의 흐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었다.
마나는 더 이상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승현의 의지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의지만으로 이 행성을 둘러싼 거대한 마나의 흐름 전체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승현은 그 자신이 마나를 지배한다기보다는 그 거대한 마나의 흐름의 일부로서 ‘기능’하고 그 ‘기능함’을 통해 마나를 ‘다스리는’ 것이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승현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이로에메가 깨어난 것은 승현이 깨달음을 얻은 다음 날이었다. 그는 한참은 늙은 용의 모습으로 물끄러미 승현을 지켜보더니 그 커다란 고개를 끄덕였다.
물살이 그의 수염 곁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흩어져 갔다.
용은 청록색의 눈을 끔뻑이며 승현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승현도 아무 말 없이 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직접 성대를 울려 말을 하거나, 혹은 마법을 통해 상대에게 의지를 직접 전달하고자 하지 않았다. 모든 생각하고 느끼는 이성과 감성이 마나의 공명으로 자연스럽게 승현에게서 나와 아이로에메에게로 흘러갔고, 아이로에메에게서 나와 승현에게로 흘러갔다. 그것은 예전 용들이 번성하던 때에 용들 사이에서 행하던 공명(共鳴)이었다.
마나를 통한 공명을 하는 동안 용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더욱 커다란 하나의 일부이자 전체였다. 하나의 생각이 전체의 생각이 되었고, 전체의 느낌은 하나에게로 전해졌다. 주체적인 의지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의지가 공명을 하는 동안 모두와 함께했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공명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도 그것이 마치 자신의 느낌이고 생각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반대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자신을 잊고 내 것을 모두 상대방에게 보여 주고, 상대방의 것을 모두 내게 받아들이는 행동이었다.
둘 사이에 공명이 이루어지자, 아이로에메는 더 이상 승현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자연스럽게 승현에게로 옮겨져 갔다.
용언을 얻기까지 어렵게 가르쳐 왔던 마법에 관한 지식뿐만이 아니라, 3만 8천 년간 살아오며 듣고 겪고 느껴 왔던 모든 감정들, 지혜들, 그리고 사라진 종족의 생각들과 그 언어들, 기술들, 농사짓는 법, 가축 기르는 법, 고기 잡는 법, 승마술부터 시작해서, 각종 검술, 창술, 봉술, 격투술, 은신술의 오의를 비롯해서 이들 기술이 극해 달했을 때 오라를 뿜어내는 방법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반대로, 승현이 저편 세상에서 익혔던 각종 학문들과 승현이 짧은 세월이나마 살아오며 겪었던 기억들과 그 감정들이 아이로에메에게 전해졌다. 공명을 통해 경제학을 접할 때, 아이로에메의 순수하게 신기해하는 느낌이 승현에게도 느껴졌다. 의학, 생물학, 물리학, 철학, 정치학, 외교학, 기계공학, 화학……. 하나하나 전해질 때마다 아이로에메의 울림은 커졌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로에메는 승현의 모든 것을 얻었고, 승현은 아이로에메에게서 모든 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공명은 흩어졌다.
그러나 공명이 끝난 뒤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일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의 동족들이 모두 서쪽으로 떠나가 안식을 맞이한 뒤로 죽기 전까지 이 의식을 치룰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설사 네가 용언이 힘을 얻게 되더라도 이 공명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 보니 내 생각이 짧았구나. 너는 이 두껍고 쓸모없는 비닐로 뒤덮인 거죽만 없을 뿐 이제는 용(龍)의 권속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용은 나, 아이로에메가 아니라, 네가 될 것이다.”
아이로에메는 이제 숨결을 차분히 하지 못했다.
그동안에 멈췄던 세월의 흐름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와 이제는 꿈쩍도 할 수 없이 그저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러나 승현에게 건네는 말 단어 단어마다, 음절과 음절 사이의 말은 또렷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너에게 용(龍)으로서의 이름을 내리노니. 너는 이제 단지 세상 밖에서 온 별의 아들이 아니오, 그저 운명의 일부로 존재했던 안배된 자도 아니니, 옛 삶에서의 이름은 잊고 새로운 ‘말’을 그대의 ‘존재’로서 얻을지라.”
용은 매우 엄숙했다.
그것은 1만 년 하고도 5천 년 만에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용들의 명명식이었다.
용은 그 이름을 얻는 순간 진정한 용으로 거듭나기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태고의 숨결을 가장 많이 담은, 신성한 용의 말로서 그대의 존재를 이름 하나니. 지금 이때로부터 마나의 부름을 받아 숨결 아래로 되돌아갈 때까지 ‘에디아이네’라 불릴지니. 이것은 잊힌 말로는 ‘데엔―로―임’으로 불릴 것이오, 귀한 엘프들의 말로는 ‘에딜레온’으로 불릴 것이니, 이 뜻은 ‘마지막 가운데 처음 된 자’이다.”
“나 ‘에디아이네’는 ‘아이로에메’의 축복을 받아 마나를 ‘다스릴’ 자격을 얻었음을 확인하노라.”
그의 선언을 받은 순간 아이로에메는 길고 길었던 삶의 마지막 숨결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마나를 통해 마지막으로 승현 ― ‘에디아이네’에게 전달해 온 것은 ‘네 뜻대로 행하라’라는 의지의 편린 하나였다. 그러나 그 의지의 힘만큼은 엄청나게 커 오래도록 강렬히도 남아 있었다.
이것이 지난 세월의 모든 역사를 짊어지고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며 모든 용족들의 떠나간 길 뒤에 홀로 남아 있었던 전설 ‘아이로에메’의 마지막이자, 앞으로 마지막 남은 용으로서 더 이상 아무도 불러 주지 않을 이름인 ‘에디아이네’를 진실 된 이름으로 얻게 된 자, 엘프들에게는 ‘에딜레온’으로 불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에딜린’으로 불리게 된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제4장.
세상에 나서다
아이로에메가 숨을 거둔 지도 오 년이 흘렀다.
승현은 그동안 아이로에메의 넋을 기리면서 레어에 남은 유품들을 정리하거나, 전생과 현생에 걸쳐서 배우거나 아이로에메와 공명(共鳴)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정리하고 익히는 데 시간을 보냈다.
믿고 의지하던 은룡 아이로에메가 숨을 거두고 난 뒤에 승현은 별로 바깥세상으로 나설 맘이 생기지 않았다.
저번 세상에서도 세상과 믿던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배신당한 기억이 남아 있는데다가, 아이로에메를 만나 전생의 삶을 깨닫기 전의 1년간 에넬륀이라는 어린아이로 지내던 시절의 아픈 기억들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마나의 힘을 다스리게 되는 과정, 즉 용언의 힘을 얻게 되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얻은 힘에 대한 깨달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엄청난 지식과 지혜, 그리고 반신(半神)의 육체를 지닌 승현이었지만, 그 속의 알맹이는 여전히 감정을 지닌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영혼이었다.
승현은 자기가 가지게 된 힘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감정에 지배받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새롭게 거듭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는 사람일 뿐, 세상을 관조하거나 통찰하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제 자신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이로에메와 지내던 이곳이 집처럼 느껴지고, 비록 간간이 외로움이 찾아오긴 했지만 고독을 누리며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나서겠다는 욕망도 시들해져 있었다.
그러나 승현의 생각과는 다르게 점차 그가 밖으로 나서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용들이 떠나간 뒤 남은 마나의 힘은 아이로에메가 있는 은룡해로 모여들어 있었고, 아이로에메는 이를 이용해 해저임에도 마법의 힘으로 숨 쉬고 생활할 수 있는 거대한 레어를 만들어 놓았었다.
그러나 이제 아이로에메가 숨을 거두고, 그의 의지에 반응하여 만들어진 레어에 각인된 마법의 힘도 이제 그 능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승현은 그 마법장을 보수해 가며 계속 머무르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법장이 허물어지는 속도는 빨라지고, 모여 있던 마나들도 더 이상 용언으로도 모이지 않고 흩어지고 있었다.
승현은 그것이 자신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아이로에메의 죽음과 자신의 탄생으로서 용들이 떠나간 뒤 정체되어 있던 마나의 흐름이 다시 세상으로 흩어지려 하는 섭리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진행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며칠 뒤에는 더 이상 이곳에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아이로에메의 레어는 이제 해저 속에서 바닷물에 깎이고 모래톱에 묻히며 세월의 아래로 퇴적되어 갈 것이었다.
이제 결심을 해야 했다.
승현은 우선 아이로에메의 서고에 있던 수백 만 권에 가까운 책들을 아공간을 열어 담기 시작했다.
용들은 책을 쓰지 않는다.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과 놀라운 이해력, 그리고 공명을 통해 늙은 용들의 지혜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용들에게 지식이란 그저 의식 속에 머무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종족들은 달랐고, 8만 년 전 처음으로 이제는 사라진 고(古) 엘프들이 글자라는 것을 만든 뒤로 기록이라는 것이 시작되었고, 곧 책이라는 것이 출현했다.
옛 시대의 점토판이나 동물의 뼈 위에 기록된 기록들부터 비교적 최근의 인간들이 찍어 낸 양장책까지 수 만 년의 시간을 담아 낸 기록이 아이로에메의 서고에는 있었고, 그것을 승현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자세히 정리해 자신의 아공간에 넣어 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아이로에메의 보물 창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보석을 탐하는 용들의 명성에 비해 아이로에메의 보물 창고는 오랜 기간을 살아왔음에도 단출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인 승현이 보기에는 지구에서도 여러 나라의 국고 몇 개는 털어야 모일 수 있는 양으로 보였다.
엄청난 양의 진귀한 보석들이 한쪽에 쌓여 있었고, 다양한 시대를 거쳐 오며 주조된 금괴들과 금은(金銀)으로 치장된 다양한 장신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승현은 망설이지 않고 다른 아공간을 열어 이것 모두를 마법의 힘으로 담아 두었다.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무기와 아티팩트가 저장된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승현은 조금 시큰둥해졌다.
의외로 앞서 본 서고와 보고의 거대함에 비해 정말로 조촐한 규모였던 것이다.
하나하나가 상당한 마법의 힘을 담은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검 하나, 활 하나, 망토 하나가 전부였다.
승현은 먼저 검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처음의 실망감을 잊을 정도의 대단한 물건이었다.
용골(龍骨), 즉 드래곤 본을 세공해 만든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용언의 힘으로 다뤄져 직접, 어쩌면 여러 명의 용의 힘을 빌려 탄생한 그야말로 최고의 검이라고 불려도 손색없는 검이었다.
어떤 용의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뼈의 상태로 보아 다른 용들의 수명을 뛰어넘어 어쩌면 아이로에메에 필적하는 수명을 살았을지도 모를 고룡의 뼈임에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