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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승현은 그 신검(神劍)을 아이로에메의 이름에서 딴 로엠이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검을 쥐고서,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하자 마나가 폭증하듯이 주변을 끌어당기면서 바다를 가르듯이 검강의 줄기가 몇 리 밖까지 뻗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게 되면 힘을 좀 갈무리해 둘 필요가 있음을 느끼며 승현은 검을 오른쪽 허리춤에 단단히 매어 두었다.
활 또한 그 궁신이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마 검을 만드는 데에 쓰인 뼈와 같은 재료로 보였다. 승현은 화살도, 시위도 없음에 의아해했으나, 마치 소드마스터들이 검에 검강을 불어넣어 쓰듯이, 이것도 득도한 궁사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마나의 힘으로 화살을 날리는 활임을 알 수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 멈춘 뒤로, 이제는 그런 오러를 다루는 존재들이 거의 사라진지 오래였고, 난데없이 자신이 나타나 활에다 마나를 실어 날리면 그 힘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될 거라 생각하자, 승현은 이 활은 검처럼 따로 차지 않고 아공간에 넣어 필요할 때까지 보관해 두기로 했다.
남은 것은 망토였다.
그것은 회색의 정말로 평범한 망토로서, 아무런 무늬나 장식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뭔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옛 시대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승현은 얼핏 보기에 어쩌면 그것이 용의 망토라 불리는 물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용의 망토라는 것은, 옛 용들이 모습을 바꾸고 세상에 나설 때, 이 망토를 뒤집어쓰면 자연스럽게 퍼져 나오는 용의 막대한 기운과 힘을 감춰 주고, 때에 따라서는 몸을 보이지 않게 하거나 혹은 눈에는 보이나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게 존재감을 지워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승현이 몸을 망토에 집어넣으니 과연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던 강대한 기운이 조용히 갈무리되어 숨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행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망토를 쓰고 있으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도 남들에게 힘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들 사이로 조용히 섞여 들어가 지내본 뒤 앞으로의 살아갈 방향을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은 승현에게 당분간 거대한 힘을 드러내는 것은 조금 꺼림칙한 일이었다.

레어를 둘러싼 마법장의 붕괴가 임박한 것이 승현에게 느껴지자, 승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아이로에메가 죽은 뒤 계속한 수련의 힘을 가늠도 해 볼 겸, 땅으로 올라서기까지 도움을 얻을 요량으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불러내기로 마음먹었다.
“에델, 엘―라―임, 세라두엘 멜라쉬 넵 아델룬 엔크리세, 네가로날 페롬 테로갈 에 세날 마지눌. (Eel, L―RA―IM, Seladuel mla nep adelun encrise, Negaronal perom terogal e senal magidul, 그대 고결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은 내 의지에 반응하여 이곳에 나오라.)”
승현이 고대어로 영창 하는 의지가 울려 퍼지자 이내 물이 크게 요동치면서 엘라임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별의 아들, 오랜만이오.”
“이제 에디아이네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편하게 말하시오. 이제 그대는 나조차 감히 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구려. 이전의 무례 또한 용서하시길. 나는 철저히 나를 부리는 자의 힘에 복종하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일이었소. 그러나 이제는 용의 이름을 얻었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다루기 힘들다는 엘라임이 나오자마자 꼬장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쩌나 조금은 걱정하고 있었던 승현도 달라진 그의 태도에 마음을 놓고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확실히 예전에 처음으로 엘라임을 불러냈을 때 채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간신히 계약만 맺고 돌려보낸 것에 비하면, 지금은 그 막대한 마나를 소모하는 엘라임을 불러냈음에도 그것이 겨우 호흡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승현은 마나를 몸에 모아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마나를 수족처럼 부리는 존재가 되었고, 세상의 마나가 고갈되지 않는 이상 그가 마나를 사용하는 일에 힘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아이로에메는 안배로서의 과업을 벗고 예정된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소? 그가 쌓아 온 힘들이 이제 낱낱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 내게도 느껴지고 있소.”
엘라임은 아이로에메의 부재를 느끼고서는 물로 만든 얼굴에 침통한 표정을 새기며 승현에게 물었다.
“아이로에메는 그 살아야 할 숙명을 이제 벗어 두고 예비 된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됐군……. 좋소, 에디아이네, 나를 부른 이유는 무엇이오?”
“엘라임, 나는 땅 위로 다시 올라서려 한다. 내 힘으로도 그 길을 열고 나설 수 있지만, 이곳은 그대의 힘이 크게 미치는 바다의 아래. 그대와의 교감을 두텁게 할 겸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그대를 불렀다.”
“알겠소.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되겠소.”
“엘라임, 그대도 신의 권세를 나눠 받은 정령왕이니 어떤 예지가 있겠지?”
엘라임의 바닷물로 이루어진 얼굴이 실룩거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렇소……. 당신은 내가 그 운명의 실이 자연스럽게 닿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군.”
“그렇다. 나는 자연의 지배자인 그대들 네 원소의 정령왕에게 가장 크게 허락된 그 힘을 빌리기 위해 그대를 부른 것이네.”
“알겠소. 당신이 가야만 할 곳, 시작 해야만 할 곳으로 내 힘을 다해 보내 드리겠소.”
엘라임이 말을 마치자 그 주변의 바닷물들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거듭하며 하나의 거대한 장막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 힘들에 이제 거의 무너졌던 아이로에메의 마법도 이제 전부 흩어져 엘라임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마나의 흐름에 녹아들어 갔다. 엘라임은 물들을 부리며 겹겹이 쌓아 가기 시작했는데, 엘라임이 그 힘들을 일순간 풀어내자 물의 장벽이 걷히고 보인 풍경은 아이로에메의 해저 레어가 아니라, 파도에 모래가 쓸려 오는 어느 해변의 새벽이었다.
엘라임은 터져 나오던 그 기세를 안으로 숨기며 말했다.
“이곳이 내가 느낀 그대의 인연이 닿은 곳이오. 나는 인간들이 붙여 놓은 땅 이름은 잘 모르니 그대에게 이곳이 어디라고 설명은 못하겠으나, 아이로에메가 거하던 바다에서 가깝지는 않으나 아주 먼 곳은 아니라오.”
“엘라임, 그대의 도움은 고맙게 받아 두겠네.”
“계약의 주인의 의지에 봉사하는 것은 나의 기쁨. 그대와 같이 마나를 다스리는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정령들에게도 은사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다음에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너를 부르도록 하겠다.”
“이제 땅 위로 올라섰으니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정령왕들도 불러 사역(使役)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용들이 모두 떠나간 뒤로 우리를 불러 줄 강한 힘이 오랜 세월 없었으니 그들 모두 당신의 부름에 기뻐하며 달려올 것이오.”
“필요한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불러내겠다.”
공기 중에 모여 있던 물의 형상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이 보이더니, 이내 승현이 마나의 힘을 풀어내자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엘라임이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었다.
엘라임이 사라지자 승현은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좁은 모래사장이 길게 늘어선 어느 해변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려 보니 은룡해보다 조금은 북쪽인 곳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은룡해 바로 위쪽의 델바팀 공국의 섬들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는 좀 더 떨어진 곳으로 보였지만, 제대로 된 지도도, 육분의도 없는 승현에게 지금 당장 이곳이 어느 곳인지 알아내는 것은 조금 번거로운 일이었다.
정령들을 보내 주변 먼 곳까지 탐색하게 한다거나, 마법의 힘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로 텔레포트를 해서 알아본다거나 하는 것은 쉬웠지만,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지금, 당장 그렇게 무리한 힘의 운용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승현은 망토를 덮어쓰고 우선 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해변 저 너머로는 그다지 높지는 않아 보이는 산들이 먼 곳으로 으스름하게 보이고 있었고, 그 사이로는 산기슭 닿는 곳까지 해변으로부터 드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동쪽으로 펼쳐져 있었고, 밤의 그늘이 걷히기 시작하며 먼 바다 아래에서 태양의 붉은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이제 아침 해에 그 자리를 내어 주며 옅어져 가고 있었고, 태양은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어느덧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승현은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곧 아침이 시작될 것이었다.
반나절을 걸었음에도 울창한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인간의 손이 크게 닿지 않은 영역임에 분명했다.
해는 어느덧 중천에 올랐지만, 울창한 수림으로 비껴 들어오는 빛을 그렇게 밝지는 않았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새 지저귀는 소리와 먼 곳에서 개울이 흘러가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한 정적 사이로는 바람 소리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숲의 고요함을 즐기며 걷고 있던 승현의 귀로 일순간 날선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살려 줘요!!”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승현은 어지간한 일에는 나서지 않을 요량이었지만, 호기심이 생겨 물의 하위 정령인 운디네를 불러냈다. 물의 정령왕과 이미 계약한 승현에게 있어서 그보다 하위의 정령을 불러내는 일은 별도의 계약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바다에서 멀지 않고, 숲 자체의 습기도 꽤나 있어 물의 정령은 어렵지 않게 소환되었다.
상위의 정령이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하기에 승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지시했다.
“운디네. 방금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으로 다가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내게 알려 줘.”
조그마한 물로 된 소녀 모양의 운디네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습윤한 숲의 공기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운디네는 눈을 껌뻑이면서 자신의 물의 형상으로 된 몸을 나누어 몬스터로 보이는 모습을 만들어 내고는 그 몬스터에게 위협받는 시늉을 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운디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조그마한 물방울로 된 여자아이가 꿈틀거리며 몬스터에게 맞는 시늉을 하는 모습에 승현은 그저 웃었지만, 생각해 보니 웃고만 있을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렴.”
승현은 운디네의 소환을 풀어 정령계로 돌려보내고서는, 아까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재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로에메와의 공명을 통해 하이엘프들의 경신술(輕身術)또한 몸에 받아들인 승현이었기에, 숲을 가로지르며 비명이 들려온 장소로 다가가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숲 사이로 난 개울 위로는 나물이 담긴 바구니가 나뒹굴고 있었고, 아까 비명의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승현은 몬스터들이 사라진 방향을 찾기 위해 감각을 확장시켰다.
이내 승현이 보낸 마나의 가닥들 한 구석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감정 하나가 느껴졌다. 그 주변에는 위협적인 생명체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마나의 느낌을 끊지 않은 채 승현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혹시 느껴질지도 모를 용의 힘을 갈무리하고서 그곳으로 쏘아지듯이 뛰어들어 갔다.
숲길 사이로 보인 것은 재갈을 물린 채 초록색 몸의 괴물들에게 사로잡혀 있는 소녀였다.
붉은색 머리의 조금은 예쁘장한 얼굴은 공포에 사로잡혀 눈물이 범벅되어 있다가, 이내 승현의 모습을 발견하고선 순간적인 기쁨에 사로잡혔다.
몬스터들에게 속절없이 끌려가는 상황에서, 적어도 저 사람이 구해 주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마을에 자신이 잡혀간 것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일말의 기대였다.
승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자, 그 녹색의 괴물들도 그 기척을 느끼고선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괴물들은 모두 5마리 정도로, 돼지 머리에 사람과 비슷한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피부는 기분 나쁜 녹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놈들이 오크로구나.’
승현은 이내 놈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전생에서는 괴물이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살았었고, 이곳에서 1년간 에넬륀으로 살았던 로쉬엠은 아뎀데나펜에서도 가장 중심부의 번창하는 항구로서, 인간들로 북적대는 몬스터 따위야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아이로에메와 지낸 2년간, 그리고 혼자서 물려받은 기술들을 익히고 다듬으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5년간 축적된 지식으로 놈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승현의 생각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는 듯, 오크들은 이내 손발을 꽁꽁 묶어 버린 소녀를 땅바닥에 내던져 두곤, 손에 든 도끼와 곤봉을 치켜들고 씩씩거리며 승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취이익. 너는 뭐다?! 취익.”
“취익. 인간. 취익. 우리와 함께 취익. 간다 취익.”
“우리 오크. 취익. 인간. 좋다.”
보통 동물이랑은 다르게 이성이 조금은 있어 보였지만, 문법에도 맞지 않는 단어의 나열을 사용하며 단어 마다 거친 숨결을 끊임없이 뿜어 대는 놈들이 승현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이래서 몬스터라고 부르는군.”
승현이 혼자 중얼거리듯이 한 말에 오크들은 분노했다.
“취익. 우리. 오크. 취익 아니다. 몬스터. 우리. 취익.”
“취이이이이이익!!! 우리 오크!!!! 취이이이이익!! 오우거!!! 몬스터!!! 취이이익.”
몬스터라는 말에 분노한 듯 오크들은 곤봉을 들고 승현을 찢어발길 듯이 육박해 들어왔다.
5마리 거대한 오크의 위협에 뒤에서 던져진 채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소녀는 순간 눈을 질끈 감고 말았지만, 승현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허리춤에 차 있던 칼을 뽑아 놈들의 곤봉이며 도끼를 모조리 베어 버렸다.
“취익. 취익. 무섭다. 취익. 놀랍다. 인간. 취익.”
“우리 취익. 싸우지 않는다. 취익. 우리 아내. 취익. 인간. 준다. 취익.”
오크들이 승현의 무력에 놀라 헛소리를 지껄이며 싸울 의사를 보이지 않았지만, 승현은 이놈들을 살려 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승현은 소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칼에 미미한 마나를 흘려 넣은 다음 순식간에 5마리의 오크의 동맥을 따 버렸다.
인간과 비교적 비슷한 신체 구조인 듯, 목 언저리의 동맥이 잘리자 피를 분수처럼 쏟아 내며 오크들은 순식간에 무너지며 목숨을 잃었다.
“정신 차려. 이제 오크들은 모두 죽었다.”
오크들의 죽어 나가는 모습에 얼을 빼놓고 있던 소녀― 아델리에는 자신의 뺨을 툭툭치는 옅은 금발을 띤 소년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소년은 그녀의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풀어 주고서 결박당한 손발의 매듭도 칼끝으로 끊어 낸 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소년은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모습으로, 갈색빛이 감도는 옅은 금발의 머리를 목덜미까지 기르고 있었고, 아델리에가 평생 본 남자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조각품처럼 빚은 것 같은 얼굴이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아델리에는 순간적으로 기가 죽었지만, 어쨌든 자신을 구해 준 은인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오크에게 잡혀가 수모를 당하는 걸 면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아델리에는 아직도 오크에게 잡혀갈 때의 공포감에 다리가 후들거려 왔지만, 앞의 잘생긴 소년에게 기죽고 싶지 않아 일부러 몸을 당당하게 곧추세우며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소년은 피식 웃더니 그녀에게 물어 왔다.
“이름이 뭐니, 너는?”
“저, 저는 아델리에라고 해요.”
“그래 아델리에. 여기는 어디쯤이지?”
아델리에는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소년이 자꾸 반말을 하자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은인이니 함부로 쏘아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대답해 주었다.
보아 하니 주변 마을에서 보던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아, 여행자임에 분명했다.
“루비외넨 백작령(伯爵領)의 바깥쪽을 도는 숲이에요. 이 앞의 개울을 따라 한 시간쯤 내려가면 제가 사는 마을이 있어요. 이 숲으로 들어가는 길의 마지막 마을이죠. 저 안쪽으로는 깊은 숲만 있고, 반대쪽 바깥으로는 바닷가예요.”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혼잣말로 하듯 중얼거렸다.
“루비외넨 백작의 영지가 있는 곳이라면, 여기는 알뵈스 섬의 동남단에 가까운 곳이군. 그래서 바다가 동쪽으로 나 있었구나.”
아델리에는 소년의 중얼거림에 기가 차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니, 그럼 여기가 알뵈스 섬인지도 모르고 돌아다니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델리에는 소년이 자신을 약간 깔보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안 들어 쏘아붙였지만, 그러고 나니 그가 자신을 오크들로부터 구해 준 은인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추태야,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하지만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무슨 고양이 쥐 보듯이 쳐다보는데. 아니야. 그래도, 잘생기긴 했는데……. 아 정말 모르겠다.’
아델리에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소년은 그녀의 순진한 도발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주변을 휘적거리며 둘러보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너희 마을로 데리고 가 줘.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배가 좀 고픈걸.”
“예…… 예?!”
“너희 마을로 데리고 가서 밥 좀 달라고.”
“아, 예. 얼마든지요. 제 목숨도 살려주셨는데 밥이야 까짓것 얼마든지…….”
아델리에는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당황한 것이 부끄러워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그러나 곧 부끄러움은 가시고, 으레 마을에서 제일 뻔뻔한 성격이 되살아났다.
오크들에게 끌려가면서 흙이 묻어 더러워진 옷을 대충 손으로 털어 내고서,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다시 챙겨 들고,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호감 가는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죠. 이 개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내려가면 마을이에요. 그런데 이름이 뭐죠?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요?”
소년은 아델리에의 물음에 한동안 고민하는 듯 대답이 없었다. 아델리에는 왜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고민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한참 뒤에서야 겨우 대답이 들려왔다.
“에딜레온.”
“그건 아뎀데나펜에서 쓰는 이름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엘프들 이름 같아.”
“그럼 에딜린이라고 불러.”
“그렇다고 해 두죠.”
개울가에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