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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마을로 내려가는 길 내내 승현― 에딜린은 미칠 지경이었다.
아델리에가 사춘기 소녀답게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재잘거리는 것이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고, 거기에 차마 용언으로 받은 이름을 댈 수 없어 엘프어로 된 이름을 댔다가 소녀가 용케 알아채는 바람에 다시 아뎀데나펜에서 쓰이는 익숙한 형식으로 바꿔서 대야만 했다.
승현이라는 이름을 대봐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게 뻔하고, 이왕 이 세상에서 정을 붙이고 살아야 할 처지가 된 바에야 에딜린이란 이름이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꺼낸 이름에 고작 그녀가 보인 반응이라곤 콧방귀를 뀌며 ‘그렇다고 해 두죠’였다.
에딜린은 순간 머리 뚜껑이 열릴 뻔했다.
기껏 구해 줬더니 이 조막만 한 계집애가 자길 가지고 노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저쪽 세상에서 이미 서른네 살의 나이를 먹고, 이곳에 와서 거의 7년이 넘게 더 지낸 에딜린은 굳이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우스워 그저 내려오는 내내 이 건방진 소녀― 아델리에의 재잘거림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그러니까, 거의 씹어 가면서 걸어왔다.
“……그러니까, 우리 마을은 알뵈스 섬의 남쪽 해안을 따라 있는 루비외넨 백작령에서도 동쪽 언저리에 있는 마을이야. 테로이실 계곡을 아우르는 테로이실 자작령에 속해 있는데, 말이 자작령이지 자작님 같은 건 안 계셔. 이쪽 동쪽 해안 지대는 높은 산들과 숲으로 울창하기 때문에 우리 마을만 해도 엄청 깊은 오지에 들어와 있는 셈이고. 주변으로는 듬성듬성 해안가까지 조그만 마을들이 몇 개 있을 뿐이야. 지금 따라 내려가는 개울이 계곡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가장 산 쪽으로 안쪽에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을은 그저 ‘윗마을’로 불려…… 야! 듣고 있어?!”
어느새 아델리에는 말까지 놓고 있었다.
별로 이제는 오크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듯, 그저 비슷한 나이 또래에 신기한 남자아이를 만났다는 생각으로 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 그래 듣고 있어. 마을은 언제쯤 나오니?”
“흥, 듣고 있기는. 이 고개만 올라서면 마을이 보일 거야. 거기서 부턴 쭉 내리막.”
아델리에의 말대로 고개에 올라서자 숲이 끝나고 아래로 시원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길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리던 개울은 어느새 물줄기가 성히 굵은 내천이 돼서 목초지 사이로 휘감아 치듯 내려가 마을의 가장자리를 둘러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 내내 밀밭과 조그만 농장들이 염소 치는 들판 사이로 듬성듬성 보였고, 마을은 이십여 호 남짓 되어 보이는 크지 않은 마을로, 산에서 벌채한 나무로 지은 목채(木寨) 같은 집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우리 집이 바로 저기야. 다들 그렇지만 우리 집도 양이랑 염소를 치고, 조그마한 밀밭도 가지고 있어. 엄마! 나 왔어요!”
아델리에가 폴짝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내 문을 열고 인상이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이 나왔다. 아델리에의 엄마였다.
“아유, 데리. 너 또 옷이 엉망이잖니?”
“그럴 일이 있었어요. 사실은 나 오크한테 잡혀갈 뻔했어. 아니 잡혀가고 있다가 살았다고 해야 되나?”
태연하게 오크에게 잡혀가는 이야기를 하는 아델리에를 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정말이니?”
“쟤 아니었으면 그만 끌려갔을 거야. 다행이 숲을 지나가다 날 구해 줬어.”
“누가?”
“저기 쟤. 똥색 머리에 얼굴 반반한 애.”
아델리에의 어머니는 귓속말로 조용히 물었다.
“어린애잖니.”
“열일곱은 되어 보이는데 뭘. 검 쓰는 기술 하나는 장난 아니었어. 오크들 다섯 마리 앞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안 했다니까. 어쨌든 쟤 덕분에 나 살았으니까 밥이나 한 끼 든든하게 지어 줘. 배도 고프대.”
“그래. 그래야지. 내가 손님을 앞에 두고 정신이 없어서 원. 실례가 많았어요. 어서 들어와요.”
한참을 모녀간의 대화의 소재로 그저 뒤에서 멀뚱히 서 있어야 했던 에딜린에게도 드디어 주의가 돌아왔다.
아델리에나 그녀의 어머니나 성격들이 참 태연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면서 에딜린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시골 농가치고는 꽤나 단정하게 정리된 집으로, 가운데의 거실을 둘러싸고 몇 개의 방이 사방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가운데의 거실에는 화덕이 있었고, 따로 주방이 없이 여기서 요리와 식사를 해결하는 듯 보였다. 겨울에는 난방까지 용이하게 할 수 있어 꽤나 합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델리에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요리가 벌써 한창이었는데, 아델리에가 오크에게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놓여 가며 따온 산나물을 듬뿍 스프에 넣고, 허브로 향을 낸 다음 양고기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이내 시원한 허브와 나물 향이 배어 나와 코를 자극했다.
요리가 익어 가는 동안, 밖에 양을 몰러 나갔던 아델리에의 아버지도 들어왔다. 아델리에의 아버지는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이는 건강한 사내로, 이름은 넬이라고 했다. 보통 다들 윗마을 골짜기의 넬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왜냐 하면 넬이라는 이름은 이 지방에서 매우 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알뵈스의 ‘넬’ 같은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겠는가.
아델리아의 어머니의 이름은 벨리에라고 했는데, 남편 넬보다는 조금 어려 보이는 원숙한 중년의 솜씨 좋은 가정주부였다. 물론 집안 살림뿐만이 아니라, 밀밭을 돌보고 가족의 농사에 일손을 쉬지 않고 거드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이 넬, 벨리에, 아델리에가 부모와 딸로 이루어진 한 식구였고, 아이들은 아델리에를 제외하고는 더는 없다고 했다.
“덕분에 딸이 살아 돌아왔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델리에와 그녀의 어머니 벨리에의 당황스러울 정도의 태연한 성격과는 달리 아버지는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겸손하고 안절부절하는 성격인 듯 보였다. 그는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에딜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거듭 딸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고서는 이내 염소까지 한 마리 잡아다가 그릴에 구워 주기까지 했다.
벨리에가 만든 스프를 다 먹고 나서도, 염소 구이는 계속해서 구워졌고 넬은 그것을 사람 좋게 뜯어다가 계속해서 에딜린에게 밀어 넣었다.
“아빠. 그만 줘도 돼.”
계속해서 염소 고기를 에딜린에게만 밀어주자 아델리에는 약간 심통을 부리며 넬에게 볼을 부풀렸다.
“데리. 에딜린 님 아니었으면 너 꼼짝없이 오크들에게 끌려갔지 않았겠니. 아빠는 그 광경만 생각해도 가슴이 멎을 것 같다. 검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델리에를 향한 꾸중은 어느 순간엔가 에딜린에 대한 감사로 바뀌었고, 이 덩치 큰 아저씨의 감사를 에딜린은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해서 받아야만 했다. 어쨌든 꽤나 유쾌하고 즐거운 식사였다. 그렇게 에딜린이 세상으로 나온 첫날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제5장.
테로이실 계곡


알뵈스 섬은 아뎀데나펜의 동남방에 있는 알뵈스 공국의 근거지였다.
알뵈스 공(公)은 대륙에도 그 세력이 뻗혀 있었지만, 내전 이전의 알뵈스 공가(公家)가 대를 물려 다스려 온 그 영지는 알뵈스 섬이었다.
알뵈스 섬은 그만큼 알뵈스 공작을 대대로 걸쳐 섬겨 온 오래된 귀족들이 섬의 여기저기를 봉지로 받아 다스리고 있었고, 섬 가장 남쪽의 루비외넨 백작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백작령은 섬의 남쪽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는데, 그 동쪽 끝은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몬스터들이 창궐했고, 상대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루비외넨 백작은 이 지역을 방치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 동쪽 지방에는 산과 숲을 지나 계곡을 만들며 좁은 평지에 나가서는 짧은 강이 되어 남쪽 바다로 흘러드는 ‘테로이실’이라 불리는 물줄기가 있었고, 특히 숲과 마주한 깊은 곳은 ‘테로이실 계곡’이라고 불렀다.
이 계곡 일대는 테로이실 자작령으로 묶여 있었지만, 허울만 좋은 자작령으로, 루비외넨 백작이 자작의 지위만 지니고 있을 뿐, 사실상 백작령의 일부로서 계곡 전체의 인구도 영지 하나를 이루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계곡을 따라서는 마을이 세 개가 있었는데, 세 마을의 가구 수를 다 합쳐도 채 백 호가 되지 않았다.
이런 험지까지 루비외넨 백작의 통치력은 잘 닿지 않았고, 이 계곡의 세 마을은 백작 다른 가신들에게 영지로 내려지지도 않았다. 단지, 그저 세금 징수관이 영주를 대표해 계곡의 가장 아래에 있으면서, 외부와 가장 가까운 밤나무 골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 세금 징수관은 영주에게 청원해 일곱 명의 자경단원을 꾸릴 수 있었고, 이들이 밤나무 골 위에 있는 아랫마을, 그리고 그보다 더 위의 가장 계곡 깊은 곳에 자리한 윗마을, 그러니까 아델리에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까지의 치안을 책임졌다.
그리고 그 일곱 명의 자경단원 중 가장 덩치가 크고, 머리도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는 도뷜은 오늘 그 윗마을에 나타났다는 ‘검사’를 취조하기 위해 밤나무 골에서 잘 벼린 창을 거머쥐고서 위협적으로 계곡을 네 시간을 걸어 윗마을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넬 아저씨. 이다 크지도 않은 게 댁의 따님을 구하기 위해 오크 다섯 마리를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구요?”
“어허 그렇다니까. 뭐 순식간에 베어 버렸는지는 내가 보지 못했으니 확실하진 않지만. 뭐 딸아이가 그랬다니까. 오크 시체는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고.”
도뷜은 넬의 말에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었다. 3세림 8리(190cm)에 가까운 키에, 훈련과 농사일로 남다르게 단련된 근육, 거기에 영주님이 보내신 세금 징수관님 마저도 인정해 주실 정도의 계곡의 세 마을을 통틀어서 가장 튼튼한 자신도 한 마리 잡기 힘든 오크를, 그것도 다섯 마리를 순식간에, 이제 겨우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만 번지르르한 이 소년이 잡았다고?
“야, 너. 지금이라도 빨리 사실을 실토하는 게 좋아.”
도뷜은 괜히 심통이 나서 에딜린에게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니, 에딜린에게 그렇노라고 인정하라고 무조건 떼를 쓰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딜린은 에딜린 대로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며칠 아델리에의 집에 머무르면서 농사도 도와주고, 정도 쌓으며 음식도 잘 대접받고 있어 만족하고 있던 차에, 갑작스럽게 저 아래에서 왔다는 무식하게 생긴 놈이 조사를 한답시고 들들 볶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슨 사실을 실토하라는 건가?”
“야, 너. 말투가 왜 그래. 내가 누군 줄 알어? 나로 말할 거 같으면, 루비외넨 백작 각하의 성은을 입어 그분의 의지를 위해 봉사하시는 세금 징수관 포 마델 경(卿)의 명령을 받는…….”
“일개 자경단원.”
에딜린에게 일장 훈시를 늘어놓던 도뷜의 말을 끊고 들어온 것은 아델리에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아델리에의 목소리에 도뷜은 씩씩거리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델리에. ‘일개’,라니 그게 ‘겨우’랑 뭐가 다르지?”
“그럼 ‘겨우’ 자경단원인 사람에게 ‘일개’말고 어떤 다른 호칭을 붙여 줄까?”
“야. 나 말야, 이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자경단원으로 뽑혀서 혼자 밤나무 골로 내려가게 됐지만, 거기서 아랫마을이나 밤나무 골 자식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윗마을의 위상을 세운 사람이란 말이야. 이래 봬도 자경단장이라고, 자경단장. 근데 아델리에 니가 어떻게 나를 무시하니?”
에딜린은 이제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이 촌구석에서 이 도뷜이라는 자식은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를 마주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백작은커녕 그 기사들조차 한번 얼굴 내미는 법이 없는 오지다 보니 말이다.
나름 그중에서도 가장 시골인 윗마을에서 그나마 규모도 있고 외지인도 들어오는 밤나무 골까지 나가 영주가 보낸 세금 징수관의 신임을 받으며 자경단장이 된 도뷜이었다.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니 도무지 자기보다 더 센 놈이 불쑥 나타나 오크 다섯 마리를 때려잡고 동네의 귀엽고 청순한(?) 여자아이를 덥석 구해 내며 영웅 행세(?)를 하고 있는 상황이 꼴 사나워 보이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러나 이 흥분한 멧돼지 같은 자경단원에게 확실히 말해 줄 필요는 있었다.
“내가 오크 다섯 마리를 베고 아델리에를 구한 건 사실이오. 이 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계곡물을 따라 숲으로 한 시간쯤 들어간 곳에서.”
“그래, 좋아. 그렇다 쳐. 그럼 너는 도대체 어디서 굴러들어 와서 그 숲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던 거냐? 나에게는 정체불명의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야 할 의무도 있어.”
“그냥 숲을 지나가던 길이었다.”
그러나 도뷜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그게 말이 되냐. 여기 테로이실 계곡은 알뵈스 섬 동쪽 끄트머리에,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야. 여기서 숲을 지나 산을 건너 봐야 하루 거리에 아무것도 없이 동쪽 해안만 나올 뿐이고, 위로는 첩첩산중에, 이 계곡을 통하지 않고는 사람 사는 곳으로는 갈 수가 없어. 그런데 네가 이 계곡의 아래에서 올라온 게 아니라 갑자기 숲에서 나타났다는데 어떻게 이상하지 않냐?”
에딜린은 몰상식하게 침을 튀겨 가며 자신에게 강변하고 있는 이 떡대만 좋은 거한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아이로에메의 레어에서 지내는 동안 에딜린의 몸도 성장기를 거쳐 이제는 3세림 6리(180cm)를 조금 넘는 키가 되었지만, 이 도뷜은 거기에 2리나 되는 키를 더 붙여 놓은 정말 거한이었다. 에딜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도뷜을 향해 말했다.
“해안가에서 이리로 들어왔다.”
“야, 열일곱이라는 놈이 말투가 왜 그래. 내가 너보다 네 살은 더 먹었다. 하여간, 동쪽 해안가에는 사람도 살지 않고 배도 다니지 않는데, 갑자기 그리로 들어왔다?”
족히 서른은 가까워 보이는 외모였는데, 도뷜의 나이는 겨우 스물 하나였다.
위압적인 외모로 에딜린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에딜린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억지를 부리는 데야 대충 뭐라고 둘러대는 것밖에는. 에딜린은 잠시 아뎀데나펜의 지리를 머릿속에서 떠올려 보고서는 대충 변명으로 둘러댔다.
“나는 원래 로쉬엠 출신으로, 우연찮게 검술을 좀 익히게 되어 아뎀데나펜 전국을 유랑하며 검술을 연마하던 중에, 리겔 공국의 가센에서 안쪽 바다 끝의 외네스트랄 섬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동쪽 해안가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깨어 보니 이쪽 동쪽 해안가에 쓸려와 있더군. 그리고 좁은 해안가 안쪽으로 숲과 산만 보이길래, 우선 그리로 들어서 한참을 걷다가, 겨우 이쪽 계곡의 상류에서 아델리에를 잡아가려는 오크들과 마주쳐 그놈들을 해치우고 나서야, 여기가 알뵈스 공국의 루비외넨 백령(伯領)의 변방이라는 걸 알게 된 거다.”
그저 에딜린이 마음에 안 들어 억지를 부리고 있었던 도뷜은 에딜린의 설명에 그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니까 뭐 대충 용병 같은 걸 하다가 배를 타고 남쪽에 있는 섬으로 건너가는데, 운이 안 좋아 표류하다가 이쪽 동쪽 해안에 쓸려 들어왔다는 거지?”
“그렇다 해 두지.”
사실 허점이야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스스로는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나머지, 실제로는 그닥 좋지 않은 도뷜은 그저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도뷜은 더 이상 에딜린이 수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러자 이제 그의 진짜 실력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오크 5마리를 잡았다는 실력을 나한테도 좀 보여 줘. 진짜 실력을 보여 준다면, 나는 모든 것을 납득하고 징세관님께 가서 너에 대해 좋게 보고해 주마.”
도뷜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도 듣지 않고 자경단원들이 늘 소지하고 다니는 긴 장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에딜린을 향해 겨누고 섰다.
“야, 멍청아 그만해!”
“도뷜, 그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아플 텐데.”
도뷜이 어릴 적부터 신붓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아델리에와 미래의 장인으로 생각했던 넬이 자신을 응원해 주기는커녕 반쯤 놀리듯 말리고 나서자, 도뷜은 정말로 호승심이 치밀어 올랐다.
비록 넓은 세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테로이실 계곡의 세 마을을 통틀어서 도뷜은 자신에게 힘이나 운동신경으로 겨룰 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앞에 서 있는 낯짝만 반반한 놈이 오크 다섯 마리를 잡았다는 것을 아직은 믿지 못하겠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떠돌았다는 검사랑 한번쯤 붙어 보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도뷜은 정말로 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아델리에와 넬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두꺼운 두 다리를 땅 위에 튼튼하게 받혀 세우고서는 에딜린을 도발했다.
“한 번 대련하자. 네가 정말로 뛰어난 검사라면 그 실력을 증명해 보이면 될 거 아냐. 적어도 나를 누른다면 이 테로이실 계곡에서는 네가 최고다.”
아이로에메에게 마법은 물론이거니와 검술, 권각술, 격투술, 창술, 봉술, 기마술 등의 고금 절예들을 물려받아 통달한 에딜린에게 겨우 테로이실 계곡의 최고를 놓고 겨루자는 도뷜의 제안은 어리광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에딜린은 힘을 마냥 숨길 생각은 없었다.
에딜린은 편안하기 위해 어느 정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힘을 보여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좋다.”

에딜린이 발검(拔劍)해 도뷜에게 겨누자, 도뷜은 이내 코웃음 치며 땅을 구르며 창을 질러 들어왔다.
에딜린이 보기에도 그렇게 나쁘진 않은 자세였다.
긴 창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옆으로 젖힌 몸은 공격 받을 수도 있는 면적을 최대한 줄이면서, 창에 힘을 실어 한 번의 타격을 강하게 줄 수 있었다. 길이 면에서 압도적인 창으로 간격을 벌려 검을 애초에 휘두르지 못하게 할 생각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에딜린은 보통내기 검사가 아니었다.
도뷜은 경계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창을 내질러 들어왔지만, 일반적인 육체의 소유자가 아닌 에딜린은 이내 그 흐름을 순식간에 읽고 도뷜의 창이 다가왔을 쯤에는, 도뷜의 등 뒤쪽으로 돌아 칼로 도뷜의 반대쪽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끝난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