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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도뷜은 자신의 왼쪽 목덜미에서 칼의 서늘함이 느껴지자 몸에서 저절로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에딜린의 실력에 대한 승복과 함께 괜히 아델리에 앞에서 흥분하다가 결국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그래, 내가 져… 졌다.”
“졌다는 말 한번 힘들게 나오는군.”
뒤에서 듣던 넬의 이죽거림에 도뷜은 마음속의 장인을 한번 째려보고서는 들고 있던 창을 놓았다.
에딜린은 도뷜이 패배를 인정하자 아무 말 없이 검을 거두어 검집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고룡의 뼈로 다듬은 이 검은 오래 사람들 눈에 나와 있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 에딜린의 생각이었다.
“……한,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등을 돌리고 아델리에의 집으로 들어서려는 에딜린을 도뷜이 붙잡았다.
“뭔가?”
“이번에 징세관님께서 지난 1년간에 이 계곡에서 걷힌 세금을 모아다가 영주님께 바치러 가는데, 그 길에 동행할 호위가 필요하다. 원래는 우리 자경단원 중에서 나를 포함해 차출해 갈 생각이었지만, 너와 함께 갔으면 좋겠다.”
“왜?”
“그야, 강한 사람이 가면 든든하고, 가는 길에 너한테서 무술을 좀 배울 수도 있을 것 같고. 아, 그렇다고 나만 좋은 일은 아니야. 네가 여기 계속 머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참에 징세관님께 잘 보이는 게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먹여 주고 잠자리를 해결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일 아니냐. 더군다나 너는 자경단원도 아니니 징세관님 마음에 든다면 은화 몇 푼을 보수로 받을지도 모르지.”
징세관에게 뛰어난 검사를 소개해 잘 보이는 동시에 일이 잘되면 동행하는 길에 에딜린을 졸라 검술이라도 좀 배워 보겠다는 심수가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어차피 곧 이곳을 떠나 내려가 볼 생각이었고, 가는 길에 이 멍청한 떡대를 좀 부려 먹으며 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다. 일단 짐을 챙겨 올 테니, 징세관이라는 사람한테 가 보도록 하자.”
“징세관님이야. 그분은 훈작(勳爵)받은 귀족이시라니까.”
“어찌 됐던. 조금만 기다려라.”
징세관 이래 봐야 겨우 영주의 세리(稅吏)였다. 귀족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권세가 조금 있다 싶은 영주들이 아무에게나 덜컥 덜컥 주는 봉토도 없고, 세습도 안 되며, 그저 일반 기사를 최 말단 귀족으로 올려주는 기능밖에 없는 훈작의 작위를 가진 존재가 에딜린에게는 별로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원래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인간들이 서로 나눠가진 권력이 지니는 힘 따위로는 어떻게 하지 못할 능력을 지니고 나온 에딜린이었다.
그러나 도뷜이 징세관에게 보이는 충성이나 경외의 깊이는 좀 이상한 면이 있기는 했다.
에딜린은 문득 그 징세관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꼬리를 무는 에딜린의 생각을 아델리에의 목소리가 끊고 들어온다.
“야, 그냥 이렇게 가 버릴라구?”
그녀는 화가 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에딜린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약간은 무신경하게 짐을 챙기는 일을 계속했다.
“그럼 여기 계속 있으라고? 나는 원래 떠돌이야. 며칠간 머물게 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야, 그래도. 그게 아니잖아.”
뭐가 아닌 건지 모르겠다는 기분에 힐끔 돌아보니, 그렇게 떽떽거리던 아델리에가 눈을 글썽이고 있었다. 벌건 눈은 눈물을 머금고 있었고, 꽤나 귀여운 그녀의 볼은 붉어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약속은 못해 주겠다.”
에딜린은 그녀가 자신을 조금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어쨌든 오크 다섯 마리에게 끌려가려던 것을 구해 주었고, 신의 안배를 받은 육체는 가만히 있어도 어떤 매력을 풍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겨우 열여섯의 한창 꿈 많은 소녀였고, 에딜린은 아직까지 그런 것을 돌아봐 줄 여유는 없었다.
‘미련을 두지 않는 수밖에…….’
에딜린이 생각하기에는 그것 이외의 좋은 방법은 알 수 없었다.
“……너무하잖아.”
아델리에는 상처를 받은 표정으로 뾰로통한 채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밖에는 넬과 벨리에 부부가 그를 전송하기 위해 나와 서 있었다.
“이렇게 가십니까. 아직 딸을 구해 주신 은혜도 다 못 갚았는데…….”
넬의 겸손한 말에 에딜린은 밝게 웃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잘 머물다 갑니다. 벨리에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는 앞으로도 잊기 힘들 것 같네요.”
에딜린의 말에 벨리에는 눈을 조금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아델리에도 그렇지만 참 경계심 없이 사람들을 믿고 또 정을 주는 이들이었다. 에딜린은 이런 포근함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에딜린은 뭐가 이들에게 남겨 주고 떠나고 싶었다.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시면,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이 정도밖에 안 되네요. 잘 갖고 계시다 꼭 필요할 때 쓰세요.”
에딜린은 여행 경비로 쓸 일이 있을까 싶어 아공간에서 꺼내 두었던 보석 꾸러미를 풀어 오팔 결정석 하나를 건네려다 말고 금화 몇 닢을 대신 꺼내서 넬의 손에 건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보석을 건네주고 싶기도 하지만, 이런 산골의 농군에게 잘못 쥐어진 보석은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넬은 얼떨결에 에딜린이 건넨 금화를 받아 쥐었다가, 이내 손을 내저으며 그걸 돌려주려 했다.
“저희는 이런 것이 굳이 필요치 않습니다. 딸아이를 구한 것은 에딜린 님이신데 이런 것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요. 겨우 해 드린 게 음식 몇 끼뿐인데. 이런 거까지 받기는…….”
넬이 절대 사절할 태세를 보이는 데에 비해 벨리에는 눈앞에 보이는 금화에 약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지자, 에딜린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제 선물이라 생각하시고, 염소를 몇 마리 늘리시던지, 나중에 아델리에의 혼수에 요긴히 보태 쓰거나 하세요.”
그제야 넬이 마지못해 금화를 받았고, 두 부부의 진심 어린 배웅을 받으며 에딜린은 그 집을 나섰다. 기다리고 섰던 도뷜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나무 골까지 내려가려면 갈 길이 멀다.”
에딜린은 가벼운 마음으로 도뷜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계곡을 따라 아랫마을을 지나 또 한참을 내려가 밤나무 골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 다 될 무렵이었다. 그래도 계곡의 가장 아래, 그러니까 평야가 시작되는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위의 두 마을에 비하면 규모도 좀 있어 보였고, 나름 울타리 비슷한 것도 마을 둘레에 쳐져 있었다.
“여기가 테로이실 계곡의 입구 밤나무 골이다. 그냥 계곡 이름을 따서 테로이실 촌(村)이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윗마을 아랫마을까지 포함한 거고. 그냥 우리들은 밤나무 골이라고 부른다. 이 둘레 언덕들에 밤나무가 무성하거든. 꽃이 한참 필 때면 냄새가 지독하지. 어휴.”
무게를 잡고 잘 말하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 도뷜의 장기임에 틀림없었다.
에딜린은 밤꽃냄새를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도뷜은 자기의 말에 에딜린이 반응해 준 것에 고무되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냄새만 빼고는 밤 열매를 따먹는 재미도 쏠쏠하고, 이 마을은 살 만한 곳이야. 비록 나는 윗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긴 했지만 여기도 내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앞으로도 자경단 일을 계속하는 이상 여길 떠날 생각도 없고 말야.”
에딜린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마을로 다가서자 멀리서 보이던 울타리가 의외로 사람 키보다 높이, 빈틈없이 튼튼하게 잘 짜인 것이 보였다.
어설프긴 하지만 목책 밖으로는 해자도 파여져 있었다. 계곡물이 그 해자로 흘러들어 와 한 바퀴를 돌아 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만들어 놓았는데?”
“모두 징세관님이 오시고 생긴 거야. 예전 징세관들은 세금을 불려 받아서 제 배 불리기 바빴는데, 포 경(卿)은 그런 장난 따윈 절대 치지 않으셨지. 구휼세로 걷어 두었던 곡식들이 다행히도 흉작이 들지 않아 남게 되자, 그걸 팔아다가 이렇게 번듯한 목책도 세우고, 해자도 파서 계곡 밖의 마을들과도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만들어 두셨어. 뭐 이런 시골 마을에 이런 게 꼭 필요하겠냐 하겠지만 흉년이 들면 생기는 유랑도적들이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큰 피해를 입곤 했었거든. 요 몇 년간은 작황이 좋아 그런 도적 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징세관님은 그걸 내다보고 이런 일도 하신 거야.”
테로이실 계곡의 징세관이자 루비외넨 백작의 가신인 제3등 훈작사(勳爵士) 포 마델 경에 대한 도뷜의 자랑은 시작하면 끝도 없었다.
에딜린은 이제 곧 그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자 에딜린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도뷜이 물론 단순한 인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충정을 당연하게 얻어 낼 정도면 시시한 인물은 아닐 것이라는 게 에딜린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 계곡에서 그 포 마델 경에 대한 인망이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도뷜만큼 시도 때도 없이 그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지내면서 본 계곡 사람들 모두 그 징세관에 대해서는 별로 나쁜 소리를 하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다.
“어이, 나야. 도뷜.”
목책 사이로 난 문으로 들어서려 하자 두 명의 자경단원이 창을 교차로 세워 가로막고 섰다. 이제 해도 거의 가라앉아 시야가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경계하고 본 것이었다.
도뷜이 다가서며 아는 체를 하자 두 명의 자경단원이 웃으며 반겼다.
“아, 도뷜, 이제 왔구나. 그 검사는 어떻게 잘 취조했어?”
“어떤 허풍쟁인지 잘 알아봤나?”
이들이 하는 말은 에딜린을 만나기 전까지의 도뷜의 생각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도뷜은 시큼한 웃음만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대단한 검사 분이 지금 내 옆에 서 계시지.”
도뷜이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에딜린을 보며 말했다.
경계를 서던 자경단원들은 머쓱함을 느끼고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도뷜이 함께 있으니 그 검사가 뭐 어떻게 하기야 하겠냐는 눈치였지만, 본인이 듣는데서 허풍쟁이니 어쩌니 했으니 썩 시선을 마주치고 넘겨볼 배짱까지는 없었다.
“그럼 들어간다. 이분은 징세관님께 모시고 갈 거야. 징세관님은 회관에 계셔?”
“어, 그래. 어서 어서 들어가 봐…….”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해 어서 에딜린을 들여보내려는 동료들의 수작에, 도뷜은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서는 에딜린을 마을 회관으로 안내했다.
포 마델은 이 계곡을 영주를 대신해 실질상 돌보고 있었지만, 명목상의 직책은 징세관이었기 때문에 따로 성은 고사하고 그럴싸한 저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을 중앙에 2층으로 얼기설기 지어 놓은 회관이 그의 일터고 집이었다.
이 정도면 영주든 관리든, 세리든 상당히 검소한 편이 아닐까 하고 에딜린은 생각했다. 그건 도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영지는 영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징세권만 있는 세리들도 배를 땅땅 불려 가지고는 성안에 저택도 짓고 기름칠해 가며 사는데, 포 마델 경은 욕심 하나 없으시다니까.”
에딜린은 이번 말만큼은 도뷜이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 허름한 관사 겸 회관만 보아도 포 마델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물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징세관님, 계십니까? 도뷜입니다.”
도뷜이 회관 옆에 딸린 조그만 문을 두드리자, 이내 안에서 기척이 나더니, 한 예순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문을 빠끔 열고 고개를 내민다.
“왔나? 이 옆에 계신 분은……?”
“아, 인사드려. 이분이 우리 계곡의 징세관 포 마델 경이시다.”
“아, 예. 에딜린이라고 합니다.”
에딜린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처음에 이 구질구질한 노인이 문을 열었을 때 그저 징세관의 살림을 돌봐 주는 노인네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딜 봐도 도무지 귀족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노인이 도뷜이 그렇게 자랑하던 징세관 포 마델 경이라니.
뭔가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 그렇군. 내가 오늘 그 일로 도뷜을 윗마을에 올려 보냈었지, 아, 이거. 손님 대접할 음식은 없다만 들어오시게.”
문 안으로 들어서자 더욱더 가관이었다.
윗마을에서 지냈던 아델리에의 집의 거실보다 작아 보이는 조그마한 방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먼지 쌓인 책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고, 대충 만들어 둔 것 같은 침대가 조그마한 화로 옆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그래도 기사 출신의 귀족이라는 증거라도 되는 듯, 경첩이 녹슨 갑옷과 이미 벼리지 않은지 한참 된 것이 분명한 칼이 놓여 있었는데, 이미 이 노인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좁은 자리에 어떻게 에딜린과 도뷜이 걸터앉고 나자, 징세관 노인 포 마델은 따뜻한 허브차를 달여다가 내왔다. 향이 절묘했다. 이 궁상맞은 징세관의 집에서 이것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에딜린은 생각했다.
“맛이 참 좋네요.”
“그래, 그럼. 좋고말고. 이 테로이실 계곡에서 나는 세이지의 맛은 뛰어나고말고. 이건 적어도 아뎀데나펜 안에서는 최고일세.”
노인은 에딜린을 마주 보는 곳에 걸터앉아 조용히 자신도 차를 들기 시작했다. 도뷜은 차에는 그리 흥미가 없다는 듯 뒤로 머릴 빼고 앉아 있다가, 포 마델이 앉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징세관님. 예의 그 이야기입니다만. 모레 납세하러 영주님 성으로 들어가실 때 말입니다. 이 계곡에 자경단원이래야 겨우 일곱이고, 그나마도 밤이면 사흘 걸러 한 번 교대로 목책을 지키고 섰으니 다들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따라가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이 검사 놈으로 괜찮을지……. 오늘 보니 실력도 매우 좋고 해서 이렇게 둘로 호위를 꾸려서 가시는 게 어떨까 해서 우선 이렇게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대답 없이 눈을 번뜩이고서는 그저 차를 삼킬 뿐이었다. 도뷜은 노인이 곧 대답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듯할 말이 끝나자 태연하게 앉아서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포 마델은 그저 찻잔의 물기가 다 사라질 때까지 그저 마시고, 기다렸다가, 또 한 모금 마시고를 반복했을 뿐이다.
에딜린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포 마델은 그쯤 돼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대답을 기다리던 도뷜이 아니라 에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위야 어찌 되어도 좋소만, 여기 이 청년은 이런 늙은 징세관의 호종이나 하고 다닐 사람이 아는 듯한데, 어떻소? 그렇지 않은가?”
에딜린은 그 노인의 눈이 어쩐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콧수염과 턱수염이 길게 늘어진 왜소한 체구의 노인. 어쩐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의 주인이신 영주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도 가벼운 일은 아니지요.”
에딜린의 대답이 포 마델에게는 영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하얗게 센 콧수염을 꼬면서 말을 이었다.
“그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내가 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소. 마법사 양반.”
그제야 에딜린은 이 포 마델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영문 모를 소리에 도뷜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저, 징세관님. 이놈은 마법사가 아니라 검사인데요.”
“아, 도뷜. 네놈은 눈치 없이 끼어들지 마라. 나가 버리거나 거기 어디 찌그러져 있어.”
포 마델이 도뷜의 눈치 없는 말에 핀잔을 주자, 도뷜은 징세관의 말 대로 화로 춤으로 다가가 이내 불을 쬐며 에딜린과 포 마델 사이의 대화에 관심을 끊었다.
이럴 때는 저 단순함도 대단히 괜찮은 면이 있다고 에딜린은 생각했다.
“노인장. 마나를 다룰 줄 아십니까.”
“허허. 나는 마나를 다룰 줄도 모르고 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오. 그저 ‘볼’ 줄 알지.”
에딜린은 포 마델의 말에 주목했다.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마나를 ‘부릴’ 줄 모른다고 한 것을 보아, 적어도 고대마법이나 엘프마법에 대한 개념이 있는 노인임에 분명했다.
요즘 세상에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마저도 드물었기 때문에, 포 마델이 이상하거나, 혹은 특별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이 보였다. 거기에 마나를 ‘본’다는 것은…….
“마나를 ‘본’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거, 참. 알면서 왜 물어보나. 나는 마나의 흐름을 느낄 줄 아오. 그것도 남들보다 더욱 예민하게. 지난 5년간 세상에 말라 있었던 마나의 흐름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소. 그런데 이제 그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자네의 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보니 그것들이 모두 예삿일이 아녔구먼.”
에딜린은 그때 자신의 능력을 감춰 주는 망토를 입고 있었음에도 노인이 그것을 꿰뚫어 보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이 망토는 용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노인은 그걸 뚫고 마나의 흐름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망토 때문에 깜짝 놀란 모양이군.”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망토의 성능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소. 확실히 내게는 그 망토 안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니까. 다만 그걸 제쳐 놓고서라도 그대의 몸 주위에서 흐르는 마나의 기운은 내가 살면서 보지 못한 강대한 힘이오. 며칠 전에 당신이 이 계곡에 처음 나타났을 때, 여기서는 몇 시간이나 떨어진 윗마을에 있었음에도 마나의 흐름이 이 계곡 아래에서부터 강하게 당신이 있는 곳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 내게 느껴졌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윗마을의 어린 소녀를 오크 다섯 마리로부터 구하고 나타난 남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 뭔가 강한 연관성을 느끼고 도뷜을 보내긴 했지만, 도뷜이 젊은 마법사 양반을 이곳까지 모시고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그런데 오늘 이곳까지 걸음해서 세금 바치러 가는 길을 호종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뭔가 알 수 없는 인연이 이 노인에게는 느껴지긴 하오.”
다행이 포 마델은 생각지도 못하게 놀라운 인물임에는 분명했지만, 용의 능력을 해지시킬 정도의 능력자는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확실히 그런 힘은 에딜린 같이 신의 안배에 의한 기연(奇緣) 정도가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