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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포 마델은 이제 찻잔을 내려놓고, 파이프에다가 담뱃잎을 쑤셔 넣은 다음에 불을 댕기고 있었다.
에딜린은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보는 담배의 모습에 순간 흡연욕이 올라왔지만, 생각만큼 몸이 간절히 원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니코틴에 찌든 전생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포 마델은 한 모금 깊게 담배 연기를 마시고서는 문득 말을 던졌다.
“그런데 젊은 마법사 양반, 당신 도대체 누구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마나의 흐름이 돌아왔다지만 그런 힘은 지혜를 잃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오. 이 늙은이에게는.”
“그저 기연을 조금 얻어 스승을 잘 만났다 해 두지요. 그럼 도대체 노인장은 뭐하시는 분입니까? 저도 포 마델 경이 그저 단순한 테로이실 계곡의 징세책임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도 그냥 젊은 시절에 기연을 좀 얻어 떠돈 세월이 길어서 그렇소. 허허.”
이 능글맞은 늙은이, 하고 에딜린은 생각했다.
자신이 얼렁뚱땅 중요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고 은근슬쩍 포 마델의 정체를 묻자, 그 노인네는 자신도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일단 에딜린은 포 마델의 진짜 정체는 둘째 치고, 그거 더 이상 자신을 추궁해 들어오지 않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한 발짝 물러섰다.
물론 용언까지 쓰지 않더라도, 적마법이나 청마법을 사용해 포 마델의 정신을 조정하면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실전된 힘을, 그것도 이 유쾌한 노인에게 사용하고 싶은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어쩐지 이 포 마델과는 단순한 인연으로 엮인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노인도 어느 정도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담배를 뻐끔거리더니 흘러가는 소리 하듯 말했다.
“모레에 도뷜과 함께 오시오. 이 노인네가 좀 빌붙어 갑시다.”
어느새 징세관 포 마델경을 자신과 도뷜이 호종하는 일이 늙은 노인네가 길손에게 얹혀 가는 것처럼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에딜린은 이 노인의 능글맞음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제6장.
세금 마차와 포 마델 경
테로이실 계곡의 징세관이자 루비외넨 백작의 가신인 제3등 훈작사(勳爵士) 포 마델 경이 지난 1년간 테로이실 계곡에서 수금한 계곡 주민들의 세금을 루비외넨 백작에게 바치기 위해 세금 마차에 싣고 출발한 것은, 아뎀데나펜 개국력(開國曆) 986년 노루의 달 하고도 열이레 되는 날의 일이었다.
밤나무 골의 주민들은 이 인자하면서도 약간은 괴상한 면이 있는 노인이 자경단원 중에서도 탁월한 실력인 도뷜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지만, 갑자기 나타난 처음 보는 얼굴 반반한 청년이 남은 수행원의 한 명으로 발탁된 것은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포 마델 경이 세금을 바치러 영주성으로 가는 것은 이 밤나무 골 주민들에게는 나랏일이라 신경 쓸 것이 못 되었고, 이 테로이실 계곡의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에는 관심을 오래 두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포 마델 경의 세금 실은 마차와 그 일행은 밤나무 골을 출발하기 무섭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졌다.
마차는 천천히 달려서 테로이실 계곡을 벗어나 남쪽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평원 지대로 접어들었다.
바쉴강과 루비외넨강이 만나서 바다로 들어가는 루비외넨 성(城)까지는 여기서부터 사흘 길이었다.
“계곡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데요?”
에딜린이 감탄하듯이 말했다.
알뵈스 섬의 남쪽 해안가는 거의가 루비외넨 백작의 봉령지(封領地)로서, 드문드문 서 있는 성채에는 백작의 가신들의 장원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가 백작 가문의 소유 아래에 있는 대영지였다.
척박한 산골인 테로이실 계곡의 마을들을 제외하면, 이 해안가의 평야 지대는 알뵈스 섬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밀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장관이었다.
“70년 내전 동안 알뵈스 공국의 군대의 절반은 이 루비외넨의 평야가 먹여 살렸다고 봐도 좋소. 허허.”
“70년 내전은 뭡니까?”
비록 아이로에메의 도움으로 이세계의 온갖 지식을 머릿속에 담아 둘 수 있었던 에딜린이지만, 그 지혜로운 은룡 또한 최근 몇 세기간 밖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로에메의 능력이 모자랐다기보다는, 마법의 힘이 사라지기 시작한 뒤로 인간의 문명은 정체와 후퇴의 연속이었고, 안배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고 있었던 아이로에메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 큰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안배자에게 전수할 것들을 준비하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는 것은 어딜 봐도 이상했다. 그건 도뷜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에딜린. 지금 농담하는 거지? 아뎀데나펜에서 사는 사람이 70년 내전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나는 아뎀데나펜 사람이 아니야.”
“로쉬엠 출신이라며, 너? 거기에 아뎀데나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는 놈이 어떻게 아뎀데나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로쉬엠에 들어온 건 3년 전이었어.”
“그럼 그전엔 뭐했는데?”
다시 마치 조사관이 된 것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도뷜의 말에 에딜린은 약간 난처해졌다. 대충 둘러대기에는 이 아뎀데나펜이나 주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은 최소 두세기 전의 것들이었고, 그 뒤 200년간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자, 자 도뷜. 그만하게. 젊은 선생이 모른다 하니,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뭔가 에딜린에 대해 심상치 않은 눈치를 보내고 있던 포 마델 노인이 도뷜의 말을 자르고 들어다.
‘고맙소 노인장.’
에딜린이 정말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개방한다면 감히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에딜린이 판단하기에 아직 그럴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없는 거짓말을 계속 부풀려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던 에딜린에게 적당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기회를 만들어 준 포 마델은 어쨌든 고마운 노인이었다. 게다가 설명까지 해 준다지 않는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젊은 양반도 아뎀데나펜이 지금도 왕국이라는 사실은 아시오? 물론 명목상이긴 하지만 말이오.”
“예.”
“백여 년 전만 해도 아뎀데나펜에는 왕실이 있었소. 물론 개국년까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천 년 전에 이 땅에 자리 잡은 크게 일곱 개의 가문이 있었고, 이 땅 이름도 말 그대로 일곱 군주들의 땅, 즉 아뎀데나펜이 되었소이다.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를 누르고 이 땅 전부를 지배하길 시도했지만, 결국 세력들은 비등비등했고, 이들은 북방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결국 연합해서 왕실을 추대하기로 결정했소.”
“구왕조(舊王朝) 말씀이시군요.”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신왕조라고 들어선 게 없으니 꼭 구왕조라 불릴 필요는 없지 않겠소.”
포 마델의 말에서는 뭔가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노인은 표정을 지우고서는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지금 여기 알뵈스 공국과 리겔 공국 사이에 7공국이 생기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오래된 도시 엘루에덴의 토후(土侯)였던 가쉬엘레딘 가문이 있었고, 그 가문의 장자(長子) 레텔은 어떤 공국도 엘루에덴을 차지하지 못하게 10년간 막아온 젊고 뛰어난 사람이었지. 일곱 공작가는 중립성 때문에 그들 중에서 왕을 추대할 수는 없었고, 결국 어떤 공국의 세력 하에도 놓여 있지 않았던 엘루에덴의 레텔을 모셔와 왕위에 앉혔소. 그분이 레텔 1세시지. 그러나 원래 탄생부터 아뎀데나펜 왕국은 왕권이 매우 약했고, 7공국간의 협의체로 창설된 추밀원(樞密院)이 국가의 대사를 거의 주관하고, 왕은 거기에 형식적인 승인을 내려주는 것이 전부였소. 때론 조금 왕권이 강해질 때도 있었고, 추밀원의 전횡이 극에 달하던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 아뎀데나펜의 근본 세력은 일곱 공국에서 나오는지라, 국왕은 그저 구백 년간 엘루에덴에서 도장만 찍어대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소이다. 하지만 덕분에 크게 왕권에 위협을 받지 않고 한 가문이 구백 년을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
“그런데 왜 그 왕실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겁니까.”
“수 백 년에 걸친 평화는 다시 공국들의 신경전을 불러왔소. 세력을 계속해서 비축하기만 할 뿐, 사용할 일이 없었던 그들이었지. 결국 889년에 마지막 국왕 나센 6세 전하께서 승하하실 때 그 슬하에 아무도 없었소이다. 다만, 그 사촌 되시는 당대 루비외넨 백작, 발테젤 가쉬엘레딘 각하께서는 그나마 대대로 친왕파(親王派)였던 알뵈스 공국 내에 봉지를 가지고 계셨고, 돌아가신 국왕 전하와는 가장 가까운 친족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종법(宗法)에 따라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계신 분이었소.”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들어보시오. 여기 루비외넨이 바로 발테젤 백작께서 다스리시던 백작령이었소. 그분의 부인 되시는 분은 바로 알뵈스 공국의 영애셨고, 아까도 말했지만 이 루비외넨은 알뵈스 공국의 영지를 떼어 받은 왕령지로서 하사된 영지였소. 당연히 알뵈스 공국에서는 이 루비외넨 백(伯) 발테젤 가쉬엘레딘이 왕위를 계승하길 원했고, 이내 추밀원에서 델바팀 공과 아들렙 공의 지지를 받아 거의 성공할 듯했지.”
“반대자들이 있었군요.”
포 마델이 비죽이 웃었다.
“정확하오. 특히 왕실과 알뵈스 공국과는 대대로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던, 가장 강력한 공국인 뢰반데엔과 리겔에서는 강력히 반대하고, 종법의 사소한 구문을 들어 계보의 항렬상 국왕보다 아래 세대가 아니면 왕위를 승계할 수 없다는 것을 들어, 이제 왕실의 혈통이 사멸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추밀원 회의를 통해 왕을 선출하자고 했지. 지지부진한 논란이 1년간 거듭되었고, 결국 서로 타협하지 못한 공국들은 두 파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소. 승계파와 선출파로 말이오.”
“그 내전을 70년이나 했단 말씀이십니까.”
“겨우 30년 전에야 끝난 일이오. 정확히는 70년하고도 여러 해를 더 전란에 휩싸여 있었지. 그사이에 발테젤 각하도 전사하시고, 전쟁이 한창일 때는 그저 공국간의 힘겨루기일 뿐 왕위 따위는 다들 관심 밖이 되었소.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패퇴시키지는 못했고, 결국 종전을 해야만 했소. 양 진영은 서로 적법한 승계자에 대한 합의가 나오면 왕위를 복위(復位)한다고 정하고, 그때까지는 추밀원을 복구시켜 국가의 대사를 책임지게 하기로 했소. 그러나 여전히 루비외넨 백작가에서 왕위를 잇는 것은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고, 백작가를 제외하고는 가쉬엘레딘 왕가의 혈통이 남은 곳이 없으니 결국 왕위를 올리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게 되었소.”
“그럼 루비외넨 백작께서는 아직도 왕위의 승계를 주장하십니까?”
“아니오. 지금 루비외넨 백작이신 갈렙 각하의 아버님 되시는 카툴렌 각하께서 더 이상 왕위를 주장하지 않고 알뵈스 공국의 가신단(家臣團)으로 들어가셨지. 내전이 치열해지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처음에는 알뵈스 공국도 왕위를 승계시키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소. 오히려 루비외넨 백작을 가신단에 넣음으로써 ‘왕실호법관(護法官)’이라는 거창한 직책이나 만들어 왕위 승계자를 가신으로 두는 문제를 적당히 땜질하려고나 했지.”
포 마델은 씁쓸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추밀원은 왕위 승계자가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왕위가 승계 되길 바라지는 않고, 알뵈스 공작은 루비외넨 백작가에서 왕위가 승계되기 전까지는 왕실호법관이라는 타이틀을 휘두르면서 백작가를 가신단에 둘 수 있으며, 루비외넨 백작께서는 혈통 상 유일무이한 승계자시지만,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대외적으로 주장하시지 않는 상황이시오.”
“복잡하군요.”
에딜린은 이런 정치 놀음이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예전 에넬륀으로 지내던 시절 로쉬엠에서 보았던 그 많은 빈곤한 사람들과 테로이실 계곡을 그저 징세관만 보내고 방치해 놓는 루비외넨 백작의 모자란 통치력 같은 것들이 이내 한 가지 원인으로 모아졌다.
안정될 수 있는 상태를 무너뜨리고 70년이나 내전을 벌인 뒤에 아직도 정쟁으로 세월을 소모하고 있으니 겉으로는 멀쩡한 것처럼 보여도, 많은 곳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일까?’
에딜린은 조용히 마차 밖을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평원의 그림자들을 눈으로 좇았다. 밀밭 위로 으스스하게 바람이 흩어져 갔지만, 도무지 생각은 말끔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결국 그때 가서야 해답을 보여 줄 것이었다.
마차는 다시 하루를 더 달려 남쪽 해안을 낀 단애(斷崖) 위에 자리한 투박한 모양의 테실 성(城)에 다다랐다. 이곳 일대는 테실 성의 영주인, 테실 남작이 다스리는 장원으로, 열 개쯤 되는 루비외넨 백작의 가신단 중 하나였다.
“테실 남작인 넬 루바즈 경(卿)은 깔끔한 사람이오. 산골에서 내려온 세금 호송단이라고 그렇게 박대하지는 않을게요. 헐헐헐.”
포 마델이 짐짓 어렵다는 듯 엄살을 떨었지만, 에딜린이 보기에 테실 남작 넬 루바즈의 환대는 도무지 그 산골에서 내려온 징세관을 반겨 준다기에는 너무나도 지나칠 정도였다. 게다가 아무리 노인이라지만 성을 가진 남작(男爵)이 일개 3등 훈작사인 징세관에게 몸을 낮추며 공손히 대하는 모습은 포 마델에 대한 궁금증만 더하게 만들 뿐이었다.
“포 경(卿)께서 이 성에 한 번씩 들려 주실 때마다 그저 감읍(感泣)할 따름입니다.”
넬 루바즈 남작은 마치 정말로 눈물까지 흘릴 태세였다. 포 마델은 수염을 푸르르 떨며 피식 웃고서는 남작에게 말했다.
“시골 노인네에게는 분에 안 맞는 환대올시다.”
“그럼 어서 드시지요. 자네들도 와서 함께 준비한 저녁을 들게나.”
귀족들은 기사 신분 이하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들지 않는다.
넬 루바즈 남작은 포 마델 노인을 따라온 에딜린과 도뷜까지 기사 대우를 해 준 셈이었다.
도뷜은 눈이 동그래져 큰 덩치를 뒤뚱거리며 남작을 따라나섰고, 에딜린도 그 뒤를 따랐다. 남작은 자기를 그렇게 높이지 않고 숙일 줄 아는 조금은 겸허한 사람처럼 보였다.
식사는 꽤나 든든하게 나왔다.
루비외넨 평원에서 생산된 질 좋은 밀을 잘 빻아서 만든 전병(煎餠) 위에 여러 가지 야채와 고기를 올려 싸 먹는 ‘펠’이라 불리는 음식은 루비외넨에서도 단연 일품으로 치는 음식이었고, 백작은 저녁 식사에 이 전병 위에 입맛에 당기는 재료를 마음껏 올려 먹을 수 있도록 적어도 충분한 고기와 야채를 내어놓았다.
“든든하게 생긴 청년들을 옆에 두셨습니다.”
남작이 도뷜과 에딜린을 눈여겨 훑어보고서는 포 마델에게 말했다.
“나이가 늙으니 이거 원 허리도 시원찮고. 어디서 엎어지면 엎고 갈 사람이라도 있어야지.”
“입담은 여전하십니다. 하하.”
넬 루바즈 남작은 정말로 포 마델을 윗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나이 쉰 줄에 접어들어 보이는 그의 풍채 있고 어쩐지 위압감 있어 보이는 외모도 늙은 포 마델 앞에서는 그저 호쾌한 동네 아저씨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식사를 하며 한껏 웃고 떠들던 남작은 표정을 굳히며 포 마델에게 입을 열었다.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힐끗 에딜린과 도뷜을 쳐다보았다. 포 마델은 그 시선을 눈치채고서는 남작에게 말했다.
“괜찮네. 이들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하도록 하지. 굳이 물릴 필요 없으니 듣도록 두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하려던 말이 뭔가.”
“요즘 백작성의 분위기가 영 수상합니다.”
테실 남작 넬 루바즈는 단연 백작가에서도 가장 신임받는 가신이었다. 70년 내전이 한창 막바지일 때는 전대 백작인 카툴렌을 호종하여 출전했었고, 현 루비외넨 백작인 갈렙 가쉬엘레딘을 곁에서 친구처럼 호위하는 사내였다. 그런 그의 말이기에 포 마델은 흘려듣지 않았다. 도뷜은 자기가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 연회실의 장식품만 구경하고 있었지만, 에딜린은 어쩐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귀를 기울였다.
“백작 각하의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병환을 짊어지신 거야 오래된 이야기지만, 요즘은 정말 안 좋아 보이십니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시고, 결국 이렇게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가시면 가쉬엘레딘 왕가는 여기서 단맥입니다.”
“루이나 영애가 계시지 않는가.”
“하지만 종법에 따르면 여인은 왕위를 승계할 수 없습니다.”
“만약의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루이나 영애만 남게 될 경우 추밀원의 공작들이 죄다 혼사를 맺어 제 자식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겠구만.”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 그러면 이제 루이나 영애께서는 단지 가쉬엘레딘의 혈통을 가지고 시집을 가, 새로운 왕실에 명분을 주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흠…….”
간단한 이야기였다. 지금의 루비외넨 백작인 갈렙 가쉬엘레딘은 꽤나 몸이 좋지 않았다.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를 정도인 듯했다. 그러나 슬하에 자식이라고는 외동딸인 루이나라는 영애밖에 없다. 그러니 혹시라도 왕실이 복위할까 싶어, 승계를 반대하던 추밀원의 귀족들이, 이제 그 가문에 여자만 남게 되었으니 서로 앞다투어 제 자식들을 장가보내서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려 할 것이 뻔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일곱 가문의 공자들이 전부 장가들어 왕위를 가질 수는 없을 터. 애초에 선출파였던 리겔이나 뢰반데엔 공국은 그마저도 반대할 것이네.”
“백작성의 분위기를 말씀드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차피 다른 공국들은 시도는 해 보겠지만 큰 기대는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 가문이 성공한다 해도 여차하면 견제할 의도도, 능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지요. 문제는 오히려 알뵈스 공작입니다.”
“흠…….”
“대외적으로 알뵈스 공작은 왕실호법관이고, 왕위가 계승될 때까지 루비외넨 백작은 알뵈스 공작의 보호 아래 있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전이 끝나고 추밀원 때문에 왕위 계승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어느새 알뵈스 공작의 가신으로 입적(入籍)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해 버려서…….”
“그렇지.”
“남자 계승자마저 단맥되어 버린다면, 알뵈스 공작은 종주권을 행사하려 들 것입니다. 마침 그 공자가 나이가 열아홉이라 혼기가 찬 상태이니, 열여섯인 루이나 영애를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왕실호법관이 아니라, 왕실 그 자체에 대한 승계권을 주장할 절호에 기회 아닙니까. 어차피 계속해서 왕실의 복위를 주장하던 알뵈스 공작이니 그게 굳이 루비외넨의 백작이 아니라 자기 아들이 되어도 상관없을 뿐더러, 더욱 좋은 일이겠지요.”
“천 년 왕실이 닫힐지도 모를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