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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포 마델의 눈꺼풀은 정말로 무거워 보였다.
그는 흰 수염을 축 늘어뜨리고서는 한숨을 푹 쉬었다. 도뷜은 어려운 이야기가 오고 가자, 어느새 자리를 아주 피해 버린 듯 보이지 않았고, 에딜린도 영 자신이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지 슬슬 의구심이 들고 있었지만, 포 마델은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종친이신 경의 의견을 꼭 듣고 싶었습니다.”
‘종친!’
남작의 말에 에딜린은 깜짝 놀랐다. 그의 표정이 살짝 드러났는지 포 마델은 수염 아래로 피식 웃었다.
남작은 몰랐던 것이 당연하다는 듯, 에딜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뭔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포 마델이 왕실의 친척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남작이 포 마델에게 공손한 것도 이해가 갈 만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성은 마델인데, 가쉬엘레딘이 아니라. 거기에 아무리 몰락해서 백작가로 유지하는 왕실이라지만 겨우 3등 훈작사라니.’
에딜린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포 마델이 입을 연 것이었다.
“불경한 이야기이긴 하나, 백작 각하께 더 이상 아들을 바라긴 힘들겠군.”
“그렇습니다. 의관들이 앞으로 두 달을 넘기지 못하시리라고 하시니…….”
“입성하거든 직접 찾아뵙고 어찌할까 여쭈어 봐야겠지만, 방법은 있네.”
그 방법이란 말에 남작과 에딜린의 시선이 동시에 포 마델에게 가서 닿았다. 사실 에딜린이랑은 큰 관련이 없는 문제이긴 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해결책이라는 것이 궁금해졌다.
“남의 가문에 주기 싫으면 왕실의 핏줄 안에서 혼사를 맺어야지.”
포 마델의 말에 남작이 얼빠진 모습으로 물었다.
“남자 왕족이라고는 이제 백작님을 빼고는 포 마델 경밖에 남지 않으셨는데, 설마 경께서 열여섯 살의 영애를 취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라는 듯, 남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이 포 마델에게 소리를 질렀다.
에딜린이 생각하기에도 노인이 노망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남작의 말대로 남자 왕족이라고는 포 마델 노인밖에 남지 않았는데, 적게 잡아도 일흔은 넘겨 보이는 이 늙은 기사가 촌수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 스물도 안 된 친척 여자아이랑 혼사를 맺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아, 당연히 내가 아니지. 여기 또 후사가 있네.”
“후사라뇨?”
포 마델은 에딜린을 향해서 손가락을 가리켰고, 이내 남작의 시선이 그 손가락이 향한 곳을 따라 에딜린에게 닿았다.
‘내가?!’
에딜린은 순간적인 당황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얼빠진 만찬 뒤에 적어도 테실 남작에게만큼은 에딜린은 포 마델의 숨겨 둔 손자로서 가쉬엘레딘의 종통을 이어받을 남자가 되었다.
뒤에 알게 된 포 마델의 정체는 이랬다.
무려 그 백 년 전의 70년 내전이 발발할 당시,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되었던, 마지막 국왕의 사촌인 발테젤 가쉬엘레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넷째 아들에 늦둥이었다고는 하지만,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지도록―적어도 실제 나이보다 십 년은 젊어 보였다―징세관이니 뭐니 하며 뒷방에 앉아서 백작과 그 가신단에게 어르신으로서 조신하게 조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제가 어르신의 손자라니 뭡니까, 그게?”
“어쨌든 이제 내 손자가 되었으니 말을 편하게 하겠네. 에딜린 네가 좀 맞춰 줘야 할 일이야. 헐헐.”
처음부터 이 노인에게는 뻔뻔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했던 에딜린이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도와드려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만 떠나 볼 테니 죄송하지만, 이런 무리한 일은 스스로 수습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딜린이 등을 돌리려던 차, 포 마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에딜린, 자네, 내가 처음 봤을 때 마나를 ‘볼’ 줄 안다며 자네 정체를 물었던 것 기억나나?”
에딜린은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 시선을 포 마델에게 돌렸다. 노인네가 무슨 수작인지는 몰랐지만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하긴 했다.
“기억납니다.”
“이제는 알겠지만 내 원래의 성은 가쉬엘레딘이요. 마델이라는 성은 그저 왕족 중에서 마법의 길을 걸은 자들에게 붙어 오던 경칭일 뿐이었지. 이제는 내 성으로 삼았을 뿐, 보다시피 볼썽사나운 3등 훈작사 노릇이나 하고 있네만…….”
마델이라는 경칭은 원래 궁중의 마법 시강관(侍講官)을 일컫던 마데기쉬에서 나온 말로, 이것이 아뎀데나펜 왕족 중에서 마법사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경칭으로 사용된 것은 백팔십 년 남짓이니, 에딜린이 포 마델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마법을 쓰실 줄 아시는군요. 하지만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데…….”
확실히 그랬다.
에딜린은 이 정체불명의 노인을 살짝 알아볼 요량으로 마나 스캔을 해 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마나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내 마법은 폐해졌네. 전쟁이 한창일 때 나는 5서클의 마법사였고, 적어도 그 당시에 아뎀데나펜에 나보다 높은 서클의 마법사는 없었네. 더군다나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은 유례가 없었지. 그러나 그건 내 오만이었네. 뢰반데엔 공작의 후원받는 마법사 중에 삼백 년 만에 6서클에 진입한 갈데하레 몰라쉬라는 완전 늙은 마법사가 있었지.”
포 마델의 표정은 갈데하레 몰라쉬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잔뜩 일그러졌다. 한숨을 푹 내리쉰 노인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큰 항구, 로쉬엠의 지척에 있는 큰 들판에서 합전(合戰)이 벌어졌네. 그때 나는 적의 마법을 봉쇄하기 위해 전장을 종횡무진하고 있었고, 사실 적의 마법 수준을 우습게 봤기에 그저 쉬운 일이라 생각했지. 오히려 젊은 날의 혈기와 방종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네. 적의 마법 병단을 휘저으며 덤비고 있던 차에, 어디 선가 우레 같은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마나의 힘이 나를 속박해 오기 시작했네. 나는 그 근원지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반격했지만, 나를 옭아 오는 그 늙은이의 힘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더군. 결국 멋도 모르고 덤빈 잘못으로 마나홀이 파괴되는 고통과 함께 내 마법은 닫혔네.”
그 말을 듣고 다시 포 마델의 몸을 보니 확실히 마나의 기운이 크게 단절된 느낌이 확 풍겨져 왔다.
“나는 그 길로 전쟁터를 떠나 이 부서진 마나홀을 매우기 위해 해매고 다녔네.”
포 마델의 눈썹이 쓸쓸하게 내려앉았다.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도 노인은 힘에 겨운 듯 보였다.
“온갖 방법을 다 수소문해 보았네. 온갖 약초를 복용하며 기맥을 뚫어 보려고도 했고, 왕가에 내려오는 고대의 마법서들을 일일이 해석해 나가며 혹여 실마리라도 있지 않나 천 날의 밤을 새워 보았네. 얼마나 비참했으면 내 마법을 폐한 갈데하레 몰라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마법을 돌려 달라고 청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 그런 비참한 생각을 할 때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갈데하레 몰라쉬는 저승으로 가 버렸지만 말이네. 물론 지금 돌이켜 보면, 그 갈데하레 몰라쉬도 마법을 되돌릴 능력은 없었을 게야.”
“노인장의 구구한 사연은 잘 알겠습니다만 아직까지 제가 포 경의 손자 노릇을 해야 할 이유를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포 마델의 이야기는 충분히 안타까웠지만 에딜린은 그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손자 노릇을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끊어야겠다고 에딜린이 비집고 들어오자 포 마델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을 뿐이다.
“일단 들어 보게.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왕국 전체를 비집고 다니며 마법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보다가 은룡해에 이른 것이 이십 년 전의 일이야.”
은룡해.
포 마델의 한마디에 에딜린의 몸이 굳었다. 노인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에딜린은 그의 하얀 수염 아래로 움직이는 입술에 온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위대한 은룡, 경배받을 자, 아이로에메를 친견한 것은 그때의 일이네.”
“아이로에메, 아이로에메를, 그분을… 뵈었단 말씀이십니까!”
아이로에메의 이름이 나오자 에딜린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로에메는 신성한 용의 말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그것은 용들 사이에서만 알려지는 이름으로, 용은 함부로 믿지 못하는 자에게 그 진명(眞名)을 알려 주지 않는다.
에딜린은 그 아이로에메가 바다의 품으로 돌아간 뒤로 세상에 나와서 그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리라 감히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노인의 입을 통해서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옛 서적들을 통해 용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나는, 이 마법을 복구해 줄 능력이 있는 존재 또한 용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네. 어차피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목숨, 나는 제게쉬헴으로 가는 배가 은룡해로 지나갈 때, 망설임 없이 몸을 바다로 던졌네.”

“위대한 용이십니까?”
포 마델의 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마나홀이 폐쇄되어 마나의 힘조차 느낄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위대한 존재가 내뿜고 있는 힘만큼은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너는 마나의 자녀였구나. 하지만 안배는 아니다. 내가 너를 가엽게 여겨 이곳까지 불러들였으나, 너는 다시 나가야만 한다.”
“제 마나홀을 다시 열어만 주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제발 부탁드립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지니고 뛰어든 바다. 이렇게 용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기서 더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절박한 심정으로 포 마델은 아이로에메에게 엎드렸다.
“그건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고개를 들라, 가련한 인간이여.”
아이로에메의 말에 포 마델은 그저 눈물만 흘렸다.
“모든 용들이 떠나간 지금, 나, 아이로에메는 신의 안배를 위해 이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안배가 오기 전까지 나는 세상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하지만! 제발!”
“인간이여. 헛된 욕심을 부리지 마라. 너에게는 따로 준비된 운명이 있다. 나가서 안배된 자가 오길 기다려라. 내가 너에게 그 존재가 당도했을 때 알 수 있는 능력은 주도록 하겠다. 그 존재가 오게 되면 그에게 운명의 길을 안내토록 하라. 그 길을 갈 것인지 가지 않을 것인지는 그가 결정할 문제이나, 너는 그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네 잃은 마나 또한 돌려줄지 모를 일이다.”
아이로에메의 말에 포 마델은 그저 부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면, 용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에딜린, 자네를 기다리기 위해 지친 몸을 끌고 전쟁이 끝난 루비외넨으로 돌아와 조카 손자에게 조용히 쉴 곳을 마련해 달라 했고, 그저 한한한 작위를 받아 징세관으로 살면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그리고 그날, 자네가 찾아왔을 때 그때 위대한 용이 내게 해 줬던 말을 몸으로 알 수 있었네. 아, 안배받은 자여!”
“아!”
에딜린은 솔직한 심정으로 감탄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이로에메는 나가서 내키는 길로 가라고 했을 뿐, 어떤 준비된 길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준비된 명령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던 존재가 포 마델이었던 것이다. 그가 에딜린이 능력을 숨겨 주는 망토를 뒤집어썼음에도 정체의 의문을 표시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제가 그 길을 꼭 가야만 합니까?”
“그건 자네가 결정할 문제이네. 나는 그저 내가 생각한 길로 자네를 끌고 왔을 뿐이야. 아뎀데나펜의 국왕이 되고, 언젠가 이 대륙 전체를 새로운 질서로 이끄는 것이 나는 그대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네. 때마침 내게 닿은 기회를 그대에게 이끌었을 뿐이네. 미리 설명하지 못한 점은 용서하게.”
포 마델의 한 점 거짓 없는 모습에 에딜린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왕이라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우선 세상을 돌아다니며 구경 삼아 유랑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준비된 길은 일찌감치 나타났다. 엘라임이 에딜린을 대륙으로 이끌어 줄 때 가야만 할 곳, 시작해야만 할 곳으로 보내 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에딜린은 결심했다.
“아이로에메의 이름은 용언으로 주어진 이름.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기에 당신이 그 이름을 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당신이 한 말은 신뢰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로에메가 스스로 믿지 않은 자에게 그 이름을 밝힐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포 마델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들떠 올랐다. 에딜린은 어쩐지 그 늙고 주름진 그의 얼굴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딜린은 피식 웃었다.
“오늘 부로 포 마델 경의 가계에 입적(入籍)하여 그 가명(家名)을 잇기로 하겠사오니, 부족하지만 받아 주시어 그 뜻하는 길에 닿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에딜린이 허리를 굽혀 말하자, 포 마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름진 눈가를 타고 내리는 그 궤적이 그의 지난 세월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는 듯 보였다.
“고맙네, 고마워. 아……!”
포 마델의 흐느끼며 들썩이는, 늙고 왜소한 어깨를 에딜린은 그저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그, 그러니까 네가 바로 포 마델 경의 손자라, 이 말이지?!”
도뷜이 대경실색하고 쫓아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의 일이었다. 그는 뒤늦게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그의 억센 손아귀가 에딜린의 어깨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이 손에 힘부터 좀 풀고 말하지?”
“아, 알았어.”
도뷜이 마지못해 손을 풀고 물러서자 에딜린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어제까진 몰랐다. 예전에 전란 중에 할아버지가 마법의 힘을 되찾기 위해 대륙으로 떠나셨을 때 라데니아 왕국에서 우리 아버지를 얻게 되셨다더군. 할아버지는 다시 이곳에 돌아오셨을 때, 내가 태어난 걸 알게 되시고는 아버지에게 내가 장성하거든 정체를 가르쳐 주지 말고 할아버지께로 보내라고 하셨다.”
“그, 그래서? 하지만 너는 로쉬엠 출신의 용병이라고 했잖아.”
“정체를 숨기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어제 할아버지께서 내 정체를 확인해 주셨고. 나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날 포 마델이랑 밤새 대충 짜 둔 이야기를 맞추자 어느 정도 그럴싸한 윤곽이 나왔다.
바로 당장 도뷜에게 그 거짓말을 써먹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도뷜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포 마델은 같은 이야기를 테실 남작에게도 했을 것이 분명했다. 테실 남작은 오늘 아침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꼭 왕실을 재건해 달라고 연신 부탁했다.
“너, 너도 그럼 귀족이로구나!”
루비외넨 백작가와 포 마델, 그리고 거기에 얽힌 왕실 계승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도뷜에게, 이 왕위 계승의 서열이 달린 복잡한 이야기는 단지 에딜린이 포마델의 손자로서 귀족이 되는가의 문제 정도로 생각되어지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에딜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셈이라 쳐 두자. 하지만 3등 훈작사의 손자면 무슨 작위인가, 대체?”
“그… 잘 모르지만. 핏줄만 귀족인가? 으…….”
“허!”
멍청하게 고민하고 있는 도뷜의 어깨를 툭툭치고서 에딜린은 포 마델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성의 내실을 지나 뒤쪽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방으로 들어서자, 조용히 창밖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는 포 마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님.”
“아, 에딜린.”
어제의 일이 있은 뒤로 정말 둘은 조손처럼 지내고 있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만 그렇게 해도 문제는 없을 터지만, 포 마델은 이 젊고 뛰어난 청년, 거기에 신의 안배를 받은 존재가 너무나도 손자로서 흡족했고, 에딜린 또한 이 노인에게 이상하게도 마치 가족과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거기에 자신의 사부인 아이로에메를 기억해 줄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인간이기에―정말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대하듯이 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3등 훈작사의 손자면 귀족이 맞긴 한가요?”
아까 도뷜에게 던져둔 물음을 포 마델에게도 똑같이 던졌다. 노인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귀족도 아닌 게지 뭐. 하하, 걱정하지 마라. 너는 어쨌든 이제 이 아뎀데나펜의 왕실을 이어받을 존재가 된 것이나 다름없어. 그게 명분상이든 진짜로 이루어지든 말이야. 내일 백작성에 들어가게 되면 아마 조카 손자가 네게 쓸 만한 작위 하나 수여할 것이다.”
이제 아주 에딜린을 손자로 여기고 있는 포 마델의 말투는 한참 편안해져 있었다.
“아, 그렇군요.”
딱히 작위가 탐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봉건제 사회인 이곳에서 귀족의 신분을 따두는 것은 나쁠 것이 없을 듯했다.
“그나저나, 에딜린.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느냐.”
“말씀하세요.”
“네 능력이 진정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고 싶구나. 나는 안배받은 자가 정확히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한단다.”
포 마델의 정말로 궁금해하는 듯한 표정에 에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망토를 벗고 능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와서는 줄곧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조심해 왔던 에딜린이었지만, 범인이 감히 능력을 안다고 해서 해할 수 있는 범주를 이미 넘어선 능력인 데다가, 아이로에메의 진명을 알고 있는 포 마델에게 에딜린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에딜린은 별 고민 없이 포 마델에게 그 능력을 개방해 보여 주었다.
순식간에 폭풍과도 같은 힘이 에딜린의 주변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