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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에딜린은 감염을 막기 위해 입었던 마스크와 옷들을 벗으며 땀을 손으로 닦았다. 시선을 앞으로 보니 아직까지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흘리며 신성마법의 감동에 잠겨 있는 사람들과 완전 회복된 백작의 몸을 보며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포 마델, 루이나 두 사람이 보였다.
에딜린은 갑자기 장난기가 돌아 루이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아가씨. 사람이 하는 일은 항상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그렇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뛰어들어 와서 수술을 막았으면 그때는 아버지를 다시는 살릴 수 없었을 거야. 할아버지, 좀 쉬겠습니다. 백작 각하의 호흡이 좀 안정되면 슬립마법을 해지하셔도 괜찮아요.”
“그래, 그러마.”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푹 숙인 루이나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흰수염의 포 마델. 왠지 앞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에 에딜린은 눈물을 흘리며 신성마법을 한 번만 더 시전해 주기를 갈구하는 가신들과 기사들 사이를 헤쳐 나와 침실로 향했다. 좀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제8장.
야연(夜宴)


루비외넨 백작 갈렙 가쉬엘레딘이 건강한 몸으로 깨어난 것은 바로 수술한 다음 날이었다.
포 마델은 에딜린이 수술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탁받은 대로 백작의 호흡이 안정이 되자 곧 슬립 마법을 풀었지만, 백작은 오랜 만에 찾아온 편안한 잠자리에 깊고 고른 숨을 쉬며 늦은 새벽까지 깊은 숙면을 취했다.
백작이 자는 동안 곁을 지킨 것은 백작 영애 루이나와 포 마델, 그리고 몇 명의 가신과 기사들이었다.
특히 루이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그만큼 걱정했던 아버지의 차도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종증조부님, 설마 이대로 깨어나시지 않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백작이 이제는 안정된 것을 눈으로 보고 있지만, 아까의 수술 장면을 본 충격에 아직 완전히 안정을 찾지 못한 루이나가 불안한 듯 포 마델에게 물어 왔다.
“괜찮다. 슬립 마법은 해지시켰으나 그간 네 아버지가 폐가 많이 상해 몸이 고단했던 터라 그간의 피로를 풀고자 몸이 저절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니, 충분히 자고 나면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실 것이다.”
포 마델은 수술의 경과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마나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그의 능안(能眼)으로 백작이 정상적인 수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루이나는 불안한 듯 아버지의 손을 꼭 쥐고 기도를 거듭하며 밤을 지새웠다.
“아, 몸이 가뿐하구나.”
늦은 새벽, 동틀 녘이 되어서야 눈을 뜬 백작은 잠기운이 가시자마자 그의 몸 상태가 달라진 사실에 눈에 띄게 기뻐했다.
한 숨 한 숨 들이키는 것이 고역이었던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고 시원한 호흡이 되어 몸을 안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숨이 막혀 자다가도 수 없이 깨기를 반복했던 그가 이렇게 숙면을 취한 것은 오랜만이니 당연히 몸이 개운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백작이 눈을 뜨고 시원한 숨소리를 내자, 루이나는 순간적인 기쁨에 젖어 백작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백작은 딸을 바라보며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루이나, 물 한 잔 주겠니?”
백작은 호흡이 안정이 되자 말도 편하게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시원한 음성에 루이나는 눈물을 쏟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나는 눈물을 어렵사리 훔치고서는 머리맡에 두었던 자리끼에서 물을 받아 백작에게 건넸다.
백작은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 마신 뒤에, 옆에서 루이나와 함께 밤새 간호했던 포 마델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작은 할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할아버님과 조카에 대한 제 믿음이 이렇게 보상을 받게 되었군요.”
백작의 심심한 감사에 포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은 들이킬 만한가?”
“네. 예전의 건강한 몸으로 완전히 돌아온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조카의 솜씨가 예삿것이 아닌 줄 제 몸만 봐도 알겠습니다. 어찌 감사드려야 할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에딜린이 한 일이네.”
“작은 할아버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까? 그러나 제 짧은 생각에도 마법이나 치료술로 고쳐질 몸이 아니었는데……. 도대체 그 수술이 어떤 것이였기에…….”
“에딜린은 내게 찾아오기까지 많은 곳을 유랑하고 견식하며, 가진 재능을 모두 쏟아부어 여러 가지를 성심껏 배우고 성취해 왔네. 어제 자네를 치료하는 데 쓴 것은 비단 수술뿐만이 아니라, 그간 실전돼 왔던 고위 신성마법이었네.”
“하…….”
백작은 고위 신성마법이란 말에 놀라 깊은 숨을 토해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서는 옆에 시립해 있던 시종 기사를 바라보았다.
“아갈렙 경, 신성마법을 직접 보았는가?”
“네. 백작 각하의 폐부가 갈리고 피가 솟구칠 때까지만 해도, 저는 손에 쥔 칼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에딜린 경은 엄청난 마법을 시전하셨고, 찬연한 빛에서 뿜어 나오는 신성한 파장은 저 같은 속인(俗人)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감히 그 경외로움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치료의 신의 가호로 백작 각하께서 몸이 회복되시고, 이곳에 시립해 있던 모든 이들이 그 성스러운 정화를 경험하였으니, 저도 그간 훈련 중에 부은 다리가 어느 순간 멀쩡히 가라앉았습니다.”
백작의 시종 기사 아갈렙 도릴은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 무릎을 깊게 눕혔다 다시 폈다. 한동안 그의 발이 불편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백작 또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좋아진 사실은 충분히 잘 알 수 있었지만, 다른 이의 몸까지 괜찮아진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은 더욱 신선한 충격을 백작에게 주었다.
“아! 치료의 라카르께서 내게 자비로운 은총을 이렇게 베풀어 주셨구나. 어서 몸을 일으켜 보아야겠다.”
백작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자, 루이나가 얼른 아버지를 부축하려고 다가섰으나, 백작은 도리어 손을 내저었다.
“회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몸이 당장에 좋아진 듯하다. 루이나, 굳이 부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구나.”
“그래도…….”
루이나는 걱정스러운 음성이었지만, 백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 일어나 침전(寢殿)을 한 바퀴 빠르게 걸으며 오랜만에 찾아온 몸의 자유를 느꼈다.
이렇게 한 번에 많은 걸음을 하여도 숨이 가쁘지 않은 것을 느낀 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일이었다.
밖이 보이는 창문을 활짝 열고,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폐부 가득히 들이마신 백작은 잠시간의 그 행복함을 즐긴 뒤, 다시 그를 밤새 간호해 준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작은 할아버님, 루이나, 그리고 밤새 나를 지켜 준 모든 이들이여, 고맙다.”
백작의 말에 가신과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포 마델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이나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들어 가 안겼다.
백작은 루이나의 등을 토닥여 주며 다시 좌중을 돌아보았다.
“오늘 밤, 연회를 열겠다. 그러나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바로 오랜 세월 만에 돌아온 귀한 왕손(王孫)이자 나를 병마로부터 구해 준 은인인 내 육촌 형제 에딜린이 될 것이다. 모두, 오늘 밤 그를 위해 축배를 들도록 하라.”

루비외넨 성의 백작 거관(居館)에 연회가 차려진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해가 지기 전부터 성안의 시종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이니만큼, 각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루비외넨 성에서 연회가 열리는 것은 매우 오랜만의 일이었다.
백작의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는 함부로 연회를 열지 못하고 자중해 왔던 것이다. 백작령의 주인이 몸져누워 있는 상황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를 부르는 연회는 그야말로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러니 만큼 오랜만에 열리는 이 연회는 값지고 즐거운 자리가 되어야만 했다.
그간 창고 속에 묵혀 두었던 밀은 이제 빵으로 굽히고, 마른 볕에 잘 말려진 과일들은 쟁반 위에 올라왔다. 그간 잡지 않았던 성안의 가축들은 솜씨 좋은 도축장에 의해 육질이 선명한 고기가 되어 올려 보내졌다.
이렇게 준비된 음식을 홀 위에 차려진 길다란 상과 상 위에 가득히 올리고, 그간 창고에서 닫혀 있던 술통의 마개도 시원하게 열었다.
루비외넨 평야는 밀 농사를 넓게 지었고, 때문에 이 일대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맛은 아뎀데나펜 남부에서 제일로 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영지 북쪽의 놀도레일 분지에서 여름간 햇빛에 잘 단련된 포도의 맛이 일품이었으니, 그 열매로 담근 술맛 또한 적어도 알뵈스 공국 내에서는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질 좋은 상등품의 술이 아낌없이 풀린 것이다.
백작이 연회를 열라는 명을 내리자, 이내 그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루비외넨 성내와 주변 일대의 가령을 순례하며 소식을 전했다.
연회에 참여할 신분이나 특권이 있는 자들은 빠짐없이 연회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라는 것이었다.
다연히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이니 만큼 이 소식을 듣는 이들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백작 아래의 가신단과 여러 직급의 기사들, 한껏 멋 부린 숙녀들과 깃털 모자를 쓴 향사(鄕士)들, 그리고 백작의 궁정에서 일하는 서기관과 아전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연회를 즐기기 위해 이른 저녁부터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회라뇨?”
백작을 치료한 뒤, 시원하게 한잠 푹 자고 그간의 노독을 푼 에딜린은 일어나자마자 찾아온 포 마델이 연회에 대해 이야기하자 표정을 찌푸렸다.
괜히 사람이 우글거리는 장소에서 술잔이나 기울이는 것이 번거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 마델은 늙은이 특유의 지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에딜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카 손주가 특별히 너에게 감사하고 있단다. 네가 그의 몸을 고쳐 주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거기에 어제 고위 신성마법을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바람에 성중에 소문이 자자하니, 모두들 네 얼굴을 한 번 보고자 연회에서 목을 빼 놓고 기다릴 것이다. 네가 안 나타나면 다 망치고 말어.”
“그러나 제가 가지고 있는 사교에 관한 지식은 가까운 것이 200년 전의 것이라 솔직히 연회에 참가해서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에딜린이 은룡의 레어에서 습득한 지식들은 그다지 최근의 것은 없었다. 때문에 이 세계에 대해 폭넓고 깊은 지식을 가진 에딜린도, 최근의 역사나 상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일천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의 유행은 매우 빠르게 바뀌는 것이었다. 비록 사회의 급변을 겪지 않는 조용한 봉건 사회인 이곳 아뎀데나펜이지만, 200년이라는 세월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200년 전, 봉건 군주의 궁정에조차 거칠게 요리된 통구이에는 나이프만이 따라 올라 왔었고, 그런 요리의 간을 맞추는 것은 고작 해야 소금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포크와 스푼이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고, 성장하는 무역에 힘입어 바깥 먼 곳에서부터 요리를 감질나게 하는 향신료가 들어와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에 으레 따라 오는 무곡(舞曲)은, 2백 년 전 유행했던 류트와 만돌린으로만 연주하는 4박자의 춤곡 크뤼멜이, 다양한 현악기를 동반하는 경쾌한 3박자의 프롬겐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그런 시답잖은 예절 따위는 내가 가리쳐 주도록 하마.”
아직도 선뜻 내키지 않는 에딜린이었지만, 포 마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겠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전생에서부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 왔던 에딜린이었으나, 이제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꼭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능력이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화를 시키기는 힘든 일이었다.
결국 아무리 초인적인 이라고 한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 어느 정도 묶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딜린이 백작을 치료하는데 권능을 사용하고, 포 마델에게 신변의 실체를 공유하며 조손의 관계를 맺었으니, 이 연회는 그가 싫더라도 이런 행동에 대해 당연히 지불해야 할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에딜린은 귀찮았지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요.”
“너무 성가시다고 생각하지 말고, 맘 편하게 즐기러 나서면 된다. 너는 비록 남에게 몸을 낮추지 않아도 될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때로는 사람이란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도 허리를 숙여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다.”
포 마델의 진심 어린 말은 에딜린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던 바였다.
이렇게 아뎀데나펜 남부의 연회 격식에 대해서 짧게 설명을 듣고 몸에 익힌 에딜린은, 연회가 시작할 때쯤 연회장에 들어섰다.
“3등 훈작사이자 테로이실의 징세관 포 마델 경과 그분의 손자시며 오늘의 주인공이신, 왕실의 종친(宗親) 에딜린 경께서 드십니다!”
연회장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문장관(紋章官)이 소리 높여 외치자, 이내 백작을 비롯한 모든 장내의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에딜린과 포 마델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주었다.
에딜린이 기묘한 수술법과 지난 천 년간 사용되는 것이 목격되지 않은 고위 신성마법을 이용해 백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성중에 널리 퍼진 뒤라, 에딜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경이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백작령의 근간을 흔들고, 백 년간 이어지지 못했던 왕실의 핏줄을 아주 끊어 버릴 수도 있는 위기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적어도 에딜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백작 또한, 오늘의 자리를 자신이 건강이 나은 것을 위한다기 보다 에딜린의 공적과 왕의 핏줄이 귀환한 것에 대한 축하의 자리로 돌렸고, 실제로 백작의 오른쪽에 있는 백작 다음의 상석은 에딜린을 위해 비워져 있었다.
에딜린이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그 자리로 다가가는 동안,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가 지나갈 때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손을 휘둘러 경의를 표했다.
“몸이 이제 괜찮으신 듯 보여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백작의 목전까지 다가간 에딜린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백작에게 말했다. 그 예를 표시하는 것은, 백작의 육촌 형제로서 전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르지도 않은 절도 있는 행동이었다.
오히려 백작의 목숨을 구해 준 공로까지 있는 이가 요란스레 허리를 숙인 다거나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거나 했으면 그것이 더욱 유난스러워 보였을 것이었다.
오랜 세월 아뎀데나펜의 예법은 절도 있는 범절을 그 기본으로 삼아 왔으며, 그것은 에딜린의 당당한 태도와 맞물려 그를 빛나게 해 주고 있었다.
에딜린의 문안을 받은 백작은 그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자네 덕분에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연회를 열 수 있었네. 오늘의 주인공은 자네니, 자, 내 오른쪽에 앉아서 기꺼이 이 연회를 즐기도록 하게나.”
에딜린은 백작의 요청을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백작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루이나가, 오른쪽에는 에딜린이 앉아 있었고, 에딜린과 함께 들어온 포 마델은 왕실 종친이었기에 가신단 중에서도 제일 상석에 앉아서 에딜린과 옆으로 마주하고 앉았다.
“자! 연회를 시작하도록 하자!”
백작이 에딜린이 자리에 앉자,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어 보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향해 선포했다.
각자 제자리를 찾아간 이들은 술잔을 손에 쥐고 백작이 선창하기를 기다렸다.
“바다와 들의 땅, 루비외넨이 영원히 번영할 것과 가쉬엘레딘 핏줄이 다시 권좌에서 빛나는 왕관을 쓰는 것을 바라며 나, 루비외넨 백작 갈렙 가쉬엘레딘은 잔을 드노니!”
“복된 나날이 천 년을 이어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기를!”
백작이 선창하며 잔을 치켜들자, 차례로 모든 이들이 일어나 봉축(奉祝)의 축백사를 외치며 건배했다.
건배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 그동안 솜씨를 발휘하기를 기다렸던 악사들이 길고 짧은 현악기들로 연주를 시작하고, 그 선율 위에 아뎀데나펜의 오랜 악기인 하프와 류트의 음율이 더해지면서 연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기 시작했다.
백작은 연신 거듭 감사를 표하며 에딜린에게 충분히 술을 내어 주도록 시종들에게 강조했고,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에딜린이었으나 백작의 성의는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술기운이야 은근한 마법으로 몰아내면 될 일이었다.
포 마델 또한 포도주를 들이키며 얼굴이 벌게져서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마나를 운용해 취기를 지울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검버섯이 조금씩 피어나는 얼굴이 불콰하게 취한 것이 에딜린에게는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약주도 적당히 드시죠.”
괜히 걱정하는 마음에 웃으며 말하자, 포 마델은 시원스레 손을 내젓는다.
“내가 마법이 폐해진 뒤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술 또한 끊었었다. 이제는 마법도 돌아왔고, 오랜만에 이렇게 기쁜 날을 맞아 훌륭한 술들을 들이키게 되었으니.”
포 마델은 다시 술 한 잔을 벌컥 들이키고서는 포도주 방울이 묻은 수염을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안 취하면 안 되지!”
포 마델이 주름진 목젓을 우리며 웃자, 에딜린은 피식거리며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 그럼 제가 드리는 잔도 한 번 받으시죠.”
“옳커니! 그렇지!”
에딜린이 웃으며 시동에게 건네받은 단지에서 붉은 포도주를 포 마델의 잔에 따르자, 포 마델은 시원스레 그것을 목 넘겨 마시고는 트름까지 했다.
즐거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에딜린은 괜히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연회가 흥겨워지자, 이내 어디선가 시작된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술통 돌기!”
“술통 돌기!”
이내 기분에 휩싸인 이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술통 돌기를 외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