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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도뷜은 뒤뚱거리며 술통과 술통 사이를 허겁지겁 뛰어다니기 빠빴고, 그것을 마치 사냥감 몰듯이 겁을 주어 가며 느긋하게 쫓아 가는 에딜린의 모습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저렇게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차갑게 군 걸까.’
즐겁게 웃으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과 다르게, 루이나는 마냥 웃기엔 썩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가슴이 칼로 열려진 모습을 보고 지나치게 흥분해 무례를 범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에딜린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 고고한 태도로 쏘아보는 시선을 이겨 낼 강단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이제 다 멸족해 가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젊고 든든한 남자가 생겨서 좋다는 기분도 에딜린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는 죄 부질없는 생각처럼 바뀌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번 미소 지어 주기가 그렇게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계속하던 중에 저렇게 나가서 술통 위를 즐거운 표정으로 뛰는 모습을 보니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섭섭하고 말 것도 없는 사이라는 사실은 루이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꼭 이성적으로 따져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일이다.
“백작 각하께서 완쾌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간 정말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루이나 영애.”
그렇게 복잡한 표정으로 술통 돌기를 즐기지 못하는 루이나의 곁에 젊은 남자가 바짝 다가와 말했다.
시원한 외모와 탄탄한 어깨를 지닌 그는, 바로 이 루비외넨 백작의 궁정에서 봉사하는 림바델 준남작 게데뉠 아벤들렙이었다.
루이나는 옆에서 들려온 은근한 남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바라보았다.
으레 힘들 때 옆에서 많은 의지가 되어 주었던 림바델 준남작이었다.
“림바델 준남작, 정말 고마워요. 당신의 마음 덕분에 아버지의 차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과찬이십니다. 다들 알다시피 에딜린 경의 기묘한 환술(幻術)이 없었다면 힘들 법한 일이었지요.”
교묘하게 에딜린을 칭찬하는 듯하면서도, 그의 실력을 기묘한 환술로 깎아내리는 림바델 준남작이었다.
“예. 어쨌든 대단한 실력이었지요.”
루이나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술통 위를 도는 실력을 보니 몸의 날렵함도 장난이 아니로군요. 마치 날쌘 족제비 같습니다.”
“그렇네요.”
그러나 루이나는 림바델 준남작이 하는 이야기가 귀에 잘 들려오지 않았다.
괜히 에딜린에게 느끼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이미 연회를 제대로 즐기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정산해야 할 것이 남은 관계에서, 부채를 진 자가 제대로 그 채무를 돌려주지 못할 때의 기분 같다고 루이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진 마음의 빚을 빨리 마무리지어 보다 좀 균형적인 관계로 거듭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에딜린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녀가 빚을 갚을 기회마저 주지 않고 있었다.
쿵!
그녀가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결국 도뷜은 술통에서 엎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에딜린이 술통에서 내려와 도뷜을 일으켜 세워 줬다.
도뷜은 괜히 부끄러움에 얼굴이 다시 벌게져서는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다가 결국 땅바닥에 엎어져 한 번 술을 게워냈다.
“하하하하!”
“거 잘난 척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에딜린! 에딜린!”
좌중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연회장을 매웠다.
한바탕 즐겁게 술통 돌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들뜬 기분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추거나, 남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뜯거나, 아니면 술잔을 다시 기울이기 시작했다.
악단은 경쾌한 음악의 연주를 멈추지 않았고, 연회는 날이 샐 때까지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제가 한번 에딜린 경에게 술통 돌기를 도전해 보아도 될까요?”
루이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멀찍이서 다시 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에딜린을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림바델 준남작이 은근히 루이나의 귀에 대고 물어 왔다.
그러나 루이나는 괜히 자기의 치기 어린 감정 때문에 그런 우스꽝스러운 시합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아니요, 됐어요. 이제 주빈(主賓)이신 에딜린 경께서도 다시 자리에 오시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세요.”
루이나의 말에 림바델 준남작은 약간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제가 이 백작가의 근신(近臣)으로서 영애의 곁에 머무르는 것이 어찌 에딜린 경과 상관이 있는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복잡한 기분을 더 끌고 가고 싶지 않았던 루이나였지만, 뭔가 섭섭해 보이는 림바델 준남작의 표정을 보자 답답해졌다.
“그런 게 아녜요.”
루이나는 한숨을 지었다.
에딜린은 그런 그녀와 림바델 준남작을 흘끔 보고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아 남은 술을 조금 들이켰다.
림바델 준남작은 그것이 꽤나 무례하게 여겨졌는지, 살짝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감정을 다스리고서는 에딜린에게 말했다.
“저는 백작가의 가신인 림바델 준남작 게데뉠 아벤들렙입니다. 백작가의 큰 은인이신 귀공을 오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에딜린은 림바델 준남작이 딱딱하고 경직된 음성으로 인사를 해 오자, 그제야 루이나와 림바델 준남작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에딜린의 대답은 건조하고 형식적이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가 누군지는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지만, 에딜린은 형식적으로라도 자신이 누구라고 소개하지도 않고, 그런 무미건조한 대답만 남긴 채 다시 자기 음식과 술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림바델 준남작은 순간 루이나의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몸이 부들 떨리며,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옆에 찬 칼집으로 옮겨 가려 했다.
그러나 그걸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던 루이나가 림바델 준남작의 손을 잡아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거, 이거, 잠시 측간을 다녀온 사이에 재미있는 술통 돌기가 끝나 버렸구나!”
밀실에 다녀온 것을 시침 뚝 떼고, 에딜린과 루이나의 사이에 비워 둔 자기 자리로 백작이 돌아왔다.
그리고서는 흘끔 에딜린과 옆의 루이나를 돌아보더니, 루이나의 곁에 서서 뭔가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림바델 준남작에게로 백작의 시선이 옮아 갔다.
“그대는 림바델 준남작이 아닌가?”
“백작 각하. 정말 완쾌하심을 축하드립니다.”
훤칠한 키의 림바델 준남작이 허리를 숙여 백작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은 그것대로 그림이었다.
“그래 고맙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만,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만 자리로 돌아가 보게.”
백작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림바델 준남작을 자리로 돌려 보냈다. 백작은 림바델 준남작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그는 손뼉을 길고 크게 세 번 두드려 음악을 멈추게 하고서는, 옆에 세워 두었던 백작의 홀로 바닥을 한 번 크게 두드려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연회 중이나, 내 긴히 이 자리에서 치러야 할 셈이 있어 이렇게 그대들의 흥을 잠시 멈추게 했다.”
백작은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확인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나, 루비외넨의 백작이자 클로벤과 테로이실 자작, 그리고 플랑헨의 남작인 갈렙 가쉬엘레딘은 오늘 죽어 가던 몸이 새로이 태어난 것을 치료의 신 라카르께 감사하며, 그 귀중한 사역의 도구로서 나를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이끌어 준 나의 귀중한 종친 에딜린 가쉬엘레딘에게 그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자 하니, 에딜린 경은 내 앞으로 나오라.”
백작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지켜 보던 에딜린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이 되자, 무언가 싶어 백작의 앞에 나가 섰다. 백작은 에딜린의 훤칠한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내가 가진 작위 중에서 테로이실의 자작위를 이 뛰어난 젊은이에게 헌사하고자 하니, 이의 있는 자는 지금 나와서 말을 하라.”
백작의 말에 좌중은 조용했다.
감히 이견이 있더라도 왕실 종친인 에딜린이 백작의 목숨을 살렸는데, 자작위를 주니 마니 하며 따지고 들 자신이 있는 이는 없을 터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것은 에딜린이었다.
“제가 그 작위를 수락하면 그에 따라오는 의무는 무엇이 있습니까?”
작위 하나에 과중한 의무를 떠맡고 싶지 않았던 에딜린이었기에, 미리 그것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
“그대가 봉신(封臣)으로서 져야 할 의무는 매년 세납(稅納)할 의무와 전쟁 시에 주군을 따라서 종군(從軍)할 의무, 백성을 안위하고 신앙을 보호할 의무, 이 세 가지뿐이니 혹여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
그러나 에딜린은 더 이상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당연한 의무로 자신의 권한 아래 놓이는 영지를 가질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혹여나 우려했던 루이나와의 혼인 같은 복잡한 일은 따라오지 않는 듯했다.
에딜린은 그가 알고 있는 예법대로 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편 다음 오른팔을 가슴께로 가져가서 백작에게 예를 표했다.
“저, 에딜린 가쉬엘레딘은 오늘, 노루의 달 그믐에 제후(諸侯)로서 주군의 칙임(勅任)을 받들고 봉지(封地)를 안무(按撫)하기로 서약하노니, 오늘 함께 뜻한 바대로 영원을 기꺼이 하겠나이다.”
200년 전의 예법이라 혹시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했지만, 다행히도 예법 자체는 크게 바뀐 것이 없는 듯했다. 진지하고 숙연해진 좌중의 시선은 에딜린에게로 모아졌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찬 칼을 뽑아 든 다음, 그 칼 등으로 에딜린의 어깨와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로서 나 루비외넨 백작 갈렙 가쉬엘레딘은 에딜린 가쉬엘레딘에게 테로이실의 자작령을 양도하고, 그에 따른 자작의 지위를 부여하며, 앞으로 함께하기를 서약(誓約)하니, 무궁한 번영이 있을지언저.”
“무궁한 번영이 있을지언저.”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백작의 마지막 말을 영창했다.
백작이 칼을 거두자, 뒤에서 포 마델이 테로이실 자작의 관(冠)을 조심스레 가지고 나와 백작에게 건네주었다.
백작은 그것을 에딜린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테로이실의 자작으로서 아뎀데나펜의 당당한 제후가 되었노라.”
백작이 손을 내밀자 에딜린은 그의 반지에 간단히 키스했다.
포 마델이 향유를 에딜린의 머리에 발라 축성(祝聖)하고 나서 모든 예식이 끝났다.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박수와 환호로 새로운 자작의 등장에 응답했다.
에딜린 마델 가쉬엘레딘이라는 귀족이 새롭게 아뎀데나펜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제9장.
테로이실 자작, 에딜린 마델 가쉬엘레딘
테로이실 계곡은 인간의 지도에 들어온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땅이었다.
알뵈스 섬의 동남쪽 끝의 산지(山地)를 꿰뚫고 바다로 내려가는 이 좁고 긴 계곡은, 경작하기에 좋은 땅도 아니었고 상업적인 중심지에 위치한 것도 아니었기에 많은 공후(公侯)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거점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때문에 250년 전 루비외넨 백작령에서 그 자녀에게 주기 위한 작위가 필요해 이곳 테로이실 계곡을 묶어서 하나의 봉토로 만들고 그곳에 자작위를 놓아 자작령으로 만든 다음, 알뵈스 공작과 아뎀데나펜 국왕의 인가를 받아 정식 영지로 창설시키기까지 그저 주변 영지의 부속 지역처럼 딸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그렇게 만든 자작령도 구색만 맞춰 놓은 것이었는데, 루비외넨 백작의 장자(長子)에게 내려지는 작위이다 보니, 공석일 때도 많았고, 백작가를 물려받게 될 장자가 가진 명예상의 작위이니 그가 테로이실 계곡에 커다란 관심을 보일 이유도 없었다.
거기에 자작령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계곡 전체의 인구는 채 스무 명 남짓했었는데, 당시 마나의 힘이 계속해서 떨어지며 몬스터가 활개치던 때라 이 척박한 산중으로 몬스터와 싸워 가며 들어와서 살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70년의 내전을 겪으며 많은 유랑민들이 이곳 테로이실 계곡까지 흘러들어 왔고, 차례로 밤나무 골, 아랫마을, 윗마을로 정착촌이 구성되면서 지도와 세금 장부에 그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의 루비외넨 백작인 갈렙 가쉬엘레딘은 슬하에 외동딸 루이나 하나뿐이었고, 따라서 장자(長子)가 없으니 테로이실의 자작위는 백작이 겸임하고 있었는데, 그 자작위가 이번에 에딜린 가쉬엘레딘에게 주어져, 정말로 제대로 된 영주가 처음으로 테로이실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영주가 제대로 기거할 만한 거처도 없단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되어 다시 이곳 계곡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밤나무 골에 있던 포 마델의 거처를 임시로 영주관(領主館)으로 삼은 에딜린은 창문을 열어 놓고 바깥의 한적한 풍경을 보면서 말했다.
“거창한 시선을 받으며 부담스러운 걸음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이런 곳에서 차근차근 시작해 나가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포 마델이 멋쩍게 말하자 에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명색이 자작령인데 성 한 채 없는 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너도 여기가 이런 곳인 줄 알고서도 넙죽 받지 않았냐?”
“그야 뭐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말이죠.”
에딜린은 미소를 지으며 바깥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나마 포 마델이 기거하던 이 집은, 조그만 2층짜리 마을 회관이긴 하였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집이었다. 주변의 고만고만한 목조 건물들에 비해서도 그랬다.
포 마델이 그동안 성심성의껏 영주 대리이자, 징세 책임관으로서 이 마을을 돌본 덕분에 그럴싸한 목책과 해자까지 있는 것도 주목할 만했다.
산촌 오지인 것은 확실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에딜린은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님, 혹시 예전 징세 업무를 보실 때 기록해 두신 주민 명부 같은 것은 없나요?”
“그런 거 없다.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주민 명부 씩이나 만들겠어. 머리로 다 기억해도 될 정도니 말이야. 아니면 이 앞 광장에다 다 모아 놓고 세어 보는 것도 괜찮지.”
포 마델의 말에 에딜린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영지에는 기사도 없지요?”
“전에 들렀을 때 이미 다 보지 않았느냐. 교대로 순찰하고 여기 목책으로 드나는 입구를 지키는 7명의 자경단원이 전부 다. 도뷜을 포함해서 말이야.”
“…….”
막상 영지를 꾸려 가려고 생각해 보니, 이곳은 생각 외로 척박한 지역이었다.
우선은 넓은 평야가 없어 곡물 농사를 크게 지을 수 없었고, 사람의 손이 닿은 계곡의 좁은 길과 가축을 방목하는 초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울창한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는, 예전 에딜린도 직접 겪었지만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관리는 없습니까?”
“없다. 마지막으로 정확히 설명해 주지. 네가 오기 전까지, 테로이실 자작대리 겸 징세 책임관인 나 포 마델이 테로이실 촌, 즉, 밤나무 골, 아랫마을, 윗마을의 세 마을을 모두 총괄했으며, 그 아래에서 일을 도운 것은 오로지 일곱 명의 자경단원들 뿐이었다.”
말인즉슨, 이 테로이실 자작령을 책임지던 것은 포 마델 이하 일곱 명의 자경단원이 전부였고, 그로서도 충분할 정도로 별 볼 것 없는 영지라는 것이기도 했다.
“우선은 제가 영주로 부임해 왔으니, 제 깃발이라도 올려야겠네요. 그러고 나서는 영지민을 모두 불러 모아 부임을 알리고 그 김에 호구조사도 해 보도록 하지요.”
“알았다.”
얼떨결에 징세 책임관에서 손자의 총관(總官)으로 별 하등 차이가 없는 업무의 이동을 한 포 마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 폐해졌을 때는 은연자중하느라 제3등훈작사이자 징세 책임관이라는 지위에 나름 만족하고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제는 안배가 나타나 자신의 손자가 되고, 5서클의 마법이 돌아왔는데도 결국 하는 일은 총관이었다.
‘내 업보지 뭐.’
포 마델은 오히려 기분이 즐거워졌다.
뭔가 무가치하게 죽어 가던 인생이 요즘 들어 좀 즐겁게 바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배운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좀 많은 수명을 누린다고는 하지만, 이미 여든을 넘긴 포 마델에게는 앞으로 남은 수명이래 봐야 이십 년이 못되는 세월이었다.
그래도 만년(晩年)에 웃을 일이 많아진 것 같았다.
“문장(紋章)은 어떻게 하겠느냐. 문장이 있어야 깃발이 나오지.”
“어쨌든 가쉬엘레딘의 핏줄이니 그것을 앞세운 문장이어야겠지요.”
“가쉬엘레딘 가문은 대대로 파도와 별을 그 문장으로 삼아 왔다. 지금 루비외넨 백작 또한 그것을 따라 파도 위로 별을 이고 달리는 유니콘을 그 문장으로 삼았지.”
“그렇다면 파도 위로 날며 별을 삼키는 은룡(銀龍)은 어떻습니까?”
“위대한 용 아이로에메로구나. 그러나 용은 함부로 문장에 올리지 않는 법인데…….”
포 마델은 관습적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