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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오래 전부터 그 국토가 수 백개의 여러 귀족 가문들과 그 영지로 갈라져 있던 아뎀데나펜 왕국에서는 이런 가문과 봉토를 식별하기 위한 문장 표식이 매우 섬세하게 발달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 문장에 관한 관습은 아뎀데나펜의 구왕조 시절에 문장법(紋章法)으로 정리되어 공표되었고, 계급과 작위, 그리고 서열에 따라서 쓸 수 있는 문양과 없는 문양이 치밀하게 할당되어졌다.
문장의 제도 또한 복잡했는데, 각 가문은 예전 수도에 있었던 문장청(紋章廳)에 각 가문의 표지 상징(標識象徵)을 등록해야만 했었다.
지금은 왕조가 무너지고 그런 법률도 유야무야되었지만, 가문의 문장에 개인의 혈통과 작위를 표시한 표식이 들어가면 그것이 개인의 문장이 되고, 그가 다스리는 봉토의 문장은 그 개인의 문장을 준용(準用)한다는 기본적인 틀은 바뀌지 않고 있었다.
용의 표식은 왕족만이 쓸 수 있었고, 따라서 일반 제후들은 쓸 수 없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에딜린은 왕족 종친이기는 하지만 겨우 자작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용의 표징을 쓰는 것이 애매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례를 꼼꼼히 따져 가며 주위의 시선을 의식할 정도로 에딜린은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다. 힘을 숨기든 펼쳐 놓든, 굳이 그런 부분까지 조심해 가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에딜린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포 마델도 마찬가지였다.
“파도와 별은 가쉬엘레딘가의 표징이고, 그 사이에 별을 삼키려는 은룡(銀龍)을 넣어 너의 표징으로 삼는다. 그리고 용의 두 발에 마법사의 홀(忽)을 쥐게 하여 왕족 중에서도 마법(魔法)에 정통한 핏줄이라는 것을 알리게 하자. 이것은 내가 예전 젊은 시절 문장에 사용했던 상징이기도 하니, 네가 물려받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포 마델의 부탁을 에딜린은 선선히 수락했다.
“그야 어렵지 않지요.”
“그 다음에는 네가 가진 작위가 테로이실의 자작 하나뿐이니, 자작의 관을 가장 윗부분의 테두리에 둘러서 완성을 삼으면 된다. 자작의 관은 테두리 위에 철식(凸飾)이 하나밖에 올라가지 않으니 그렇게 그리면 된다.”
얼떨결에 에딜린은 포 마델의 설명에 따라 직접 문장을 그리고 있었다.
영지 내에 제대로 된 문장관은커녕 환쟁이 하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도뷜을 포함한 7명의 자경단원들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밤나무 골부터 시작해 아랫마을, 윗마을을 다니며 영지민들에게 새로운 영주가 부임해 온 사실과 그 때문에 밤나무 골의 광장에 모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영지민들은 그 소식을 듣고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왜냐하면 그간 포 마델이 징세관으로서 영지민들을 별다른 제약 없이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영지민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학정이나 수탈이 없는 지금의 삶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어설픈 얼치기 영주가 와서 괜히 자신들을 들들 볶고 못살게 굴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아, 영주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아랫마을에 올라왔을 때 늙은 기하넬 영감이 영주는 무슨 영주냐고 투덜거리며 도뷜을 쫓아내려 했다.
도뷜은 손을 막 내저으며 아니라고 영감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은 하여간, 검술도 뛰어나고, 마법도 쓰시고, 무엇보다 백작 각하의 목숨도 구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도뷜이 뭐라고 하든 기하넬 영감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하여간 귀족이란 놈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야. 어떻게든 못난 사람들 등쳐 먹고 살까, 그 궁리밖에 안 하는 놈들이라 이 말이지. 날마다 하는 건 싸움박질이고, 계집질이고, 하여간…….”
“어이구, 아버님, 좀 그만하세요. 도뷜 총각,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고 넘어가 줘요, 그냥. 아버님이 하여간 나이가 드시니 망령 기가 드셔 가지고는 자꾸 이러시네.”
기하넬 영감이 귀족을 욕하기 시작하자, 부뚜막에 있던 며느리가 기겁하고는 달려 나와 영감을 집안으로 잡아끌었다.
도뷜은 괜히 머쓱해져서는 머리만 긁었다.
“하여간 꼭 영감님도 모시고 내일 정오까지 밤나무 골로 내려와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아주머니.”
“예, 예, 가세요.”
비단 기하넬 영감뿐만이 아니라, 계곡의 주민들의 반응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통찮기 짝이 없었다.
갑자기 조용하던 이곳에 영주랍시고 귀족이 한 명 나타났다는 소식이 반가울 리 없었다.
특히나 이곳 테로이실의 주민들은 70년 내전 당시 전란과 학정을 피해서 살 길을 찾아 들어온 농꾼들과 그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귀족에 대한 냉소는 상당한 편이었다.
기하넬 영감만 해도, 이곳에 와서 다시 가정을 꾸리기 전에, 예전 살던 곳에서 전쟁 중에 처자식을 모두 잃고 자기 몸만 겨우 살려 나왔었다. 그러한 사연들을 지니고 있는 계곡의 주민들이니 만큼, 귀족이라는 말을 들어서 반가워할 턱이 없었다.
도뷜과 자경단원들은 한참을 진땀을 빼며 걸어 윗마을에 가서야 겨우 대접을 좀 받을 수 있었다.
일전 에딜린에게 구함을 받은 일이 있는 아델리에의 가족들이 여기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정말이야? 그니까 에딜린이 돌아온다 이 말이지? 진짜?”
소식을 듣고 제일 기겁한 것은 바로 아델리에였다. 에딜린이 떠나고 종일 울었던 아델리에는, 영주니 자작이니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고 단지 에딜린이 계곡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자, 자, 아델리에. 방정맞게 굴지 말고 그만 앉아. 도뷜은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아델리에의 어머니 벨리에가 사발에 시원한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자 도뷜은 계곡을 올라오며 실컷 흘린 땀을 소매춤으로 닦고서는 물을 들이켰다.
“아이고, 어머님밖엔 없네요. 넬 아저씨는 어디 가셨나요?”
“잠시 장작 하러 가셨어. 좀 있으면 들어오실 거야.”
아니나 다를까, 넬이 곧 문을 열고 시원스레 들어왔다.
“어, 이게 누구야, 도뷜 아니야? 세금 마차가 그새 갔다 왔나 보구만.”
“예.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잘 있지. 그나저나 전에 에딜린 검사님이 주고 가신 보석 말이야. 이거 워낙에 가지고 있기가 부담스러워서. 나 같은 무지렁이가 어디 가져다 팔기도 좀 그렇고. 무슨 방법 없을까?”
넬은 도뷜이 뭣 때문에 왔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듯,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분명히 도뷜이 아델리에 얼굴이나 한 번 보려 별 이유도 없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저씨, 저 그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에딜린 님이, 그, 우리 영주님이 되셔서 돌아오셨어요.”
“어? 무슨 소리냐 그게?”
“테로이실 자작령의 자작이 되셨다구요. 지금 밤나무 골에서 포 마델 님과 함께 계세요. 그래서 부임하신 김에 영주민들을 전부 보고 싶으시다고, 내일 정오까지 밤나무 골에 모두 모이라고 하는데…….”
“역시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만, 귀족이신 줄은 몰랐구나.”
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이제 자작 부인이 될 수 있는 건가? 오호호!”
집안에 흐르는 침묵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델리에는 혼자 건방을 떨었다.
“하여간 이놈의 계집애는……. 혼자 헛꿈 꾸지 말고 가서 소여물이나 쑤어 놔.”
벨리에가 한마디 쏘아붙이자, 아델리에는 뾰로통해져서는 입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고서는 피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흥!”
아델리에가 여물을 쑤러 나가자 넬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오신 것도 이곳 영주로 부임해 오시기 전에 실정을 살피러 오신 것이었나. 그것도 모르고 이만저만 무례한 게 아니니…….”
“아뇨. 에딜린 님은 포 마델 경의 손자셨고, 그냥 그분을 찾아뵈러 이곳에 오셨던 거예요. 그러다가 백작님의 병환을 그 귀한 재주로 고치시는 바람에 이렇게 얼떨결에 자작이 되어 이곳에 돌아 오시게 된 거구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넬이 괜한 걱정을 하자 도뷜이 자신이 아는 한에서 정성껏 설명을 해 주었다. 사실 도뷜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으니, 그저 포 마델의 손자로 귀족의 혈통이 조금 남아 있는 에딜린이 친척인 백작의 병을 고쳐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무슨 신성마법인가를 쓰셔서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는데. 그게 좀 대단한가 보더라구요.”
“그런가보구나.”
실전된 지 오래인 고위 신성마법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넬과 도뷜은 그냥 서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럼 내일 정오까지 밤나무 골로 가면 되는 건가?”
“네. 그렇게 오시면 돼요.”
“알겠네. 여기가 마지막일 텐데 좀 쉬었다 가게. 저녁도 좀 들고 말이야.”
넬이 간만에 섭섭하지 않게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하자 도뷜은 그간 잊고 있었던 미래의 장인에 대한 사랑이 솟아올랐다.
“아버님, 아델리에는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이만 허락해 주십시오.”
도뷜이 혼자 흥분해서 넬의 손을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웃고 있던 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놈이 하여간, 자경단장이 되더니 자꾸 기어올라. 간만에 볼기짝 한 번 맞아 볼 테냐?”
“…….”
도뷜은 또다시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밤나무 골의 광장은, 광장이래 봐야 겨우 흙을 잘 다져 놓은 공터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곳에 아침부터 사람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 다 모여드니, 어림잡아 광장을 빼곡히 채울 만한 머릿수가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영지민의 전부라는 것이었다.
자경단원들은 이들을 줄 세우면서 꼼꼼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는데, 숫자를 세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마을의 어떤 집의 누구, 하는 식으로 에딜린이 시킨 대로 호적을 작성했다.
자경단원들이 글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이 수고는 포 마델이 해야만 했다.
“다 늙어서 이러고 있자니 허리가 그냥 무너지려고 하는구만.”
“저희가 해야 하는데 글자 한 줄 모르는 무지렁이다 보니.”
포 마델의 불평을 그저 자경단원들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사람 좋은 웃음만 지을 뿐, 이런 구시렁댐은 포 마델이 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그들로서는, 그저 무식한게 죄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주가 직접할 수도 없고, 영지에 글을 아는 사람도 포 마델뿐이니 포 마델이 결국 펜대를 쥐고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세어진 테로이실 자작령의 총 인구는 98호 436명으로, 말 그대로 100호가 안 되는 인구였다.
그중에서 밤나무 골이 46호 221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가 살았고, 아랫마을이 30호 147명, 아델리에가 사는 윗마을이 22호 68명었다.
“좀 적지?”
포 마델은 불평불만을 했었지만 생각보다 조사는 일찍 끝났다. 인구가 없으니 조사를 해 봐야 별로 시간이 걸릴 리가 없었던 것이다.
포 마델이 건네준 서류를 살펴본 에딜린은 말을 잊었다. 그저 적다 못해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 인구로 어떻게 자작령이 될 수 있죠?”
“그야, 애초에 사람이 살지 않을 때부터 명예직으로 만들었던 영지랑 작위고, 나중에 가서는 그냥 그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지민이 된 거니, 원래는 한 명도 살지 않을 것이 그나마 조금 있는 거라고 봐야지.”
포 마델이 멋쩍게 말했다.
사실 포 마델 자신도 이 정도로 사람이 없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한 오백 명은 되지 않나 내심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여기서부터 열심히 해 보아야죠.”
에딜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만큼 남의 시선 밖에서 하고자 하는 뜻을 펼칠 수 있다는 말도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영지를 어떻게 일으킬지 함께 생각해 보자.”
포 마델의 말은 빈말은 아니었다. 그는 이곳 테로이실 계곡에서 징세관으로 몇 년을 있었기에, 이곳이 가능성이 있는 땅이라는 사실을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다.
에딜린이 예복을 갖춰 입고 관저 밖을 나서자, 광장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리하고 있었다. 7명의 자경단원들은 어설프게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에딜린은 그 광경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자작님이십니다. 예를 표하시오!”
힐끔거리며 관저를 보다, 어느샌가 에딜린이 밖으로 나온 사실을 눈치챈 도뷜이 짐짓 거만을 떨며 배에 힘을 주고 마을 사람들에게 외쳤다.
언제고 이런 것이 한 번은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테로이실의 주민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벗어 새로운 영주에게 예를 표했다.
“모두들 반갑소. 내가 이 테로이실의 새로운 영주인 에딜린 마델 가쉬엘레딘이오.”
에딜린이 입을 열어 말을 시작했지만, 영지민들은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벗어 허리춤에 놓은 채 복지부동이었다. 영주 앞에서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다는 관습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고개들을 들고, 내 눈을 보며 이야기를 들으시오.”
에딜린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영지민들은 고개를 들어 에딜린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들릴까 조심스럽게 수군거리기는 하지만, 에딜린이 생각보다 젊고 잘생긴 청년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하는 듯했다.
거기에는 이 매력 있게 생긴 외모에 대한 칭찬과 동시에 이런 젊은이가 과연 영지를 잘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불안감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에딜린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말을 이었다.
“우선 그간 징세관님을 제외한 어떠한 귀족도 이곳 테로이실에 직접 부임해 온 일이 없었다고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정당한 테로이실 자작으로 작위를 받아 이곳에 내 영지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대들은 이것에 대해서 아쉽게 여기지 말고 영지의 일에 잘 협조해 주길 바라오.”
영지민들은 영주의 말에 침묵했다.
영지의 일에 잘 협조하라는 말이 앞으로 수탈을 해 줄 터이니, 있는 것 없는 것 싹싹 긁어서 잘 갖다 바치라는 말로 들린 탓이다.
에딜린으로서는 이것저것 이 자리에서 꼼꼼히 따져서 해명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선은 그저 당분간의 방침을 전하기로 했다.
“굳이 영지민들이 고되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소. 국법으로 정해진 세금 이상을 걷을 생각도 없소. 그대들의 딸도 탐내지 않을 터이니 안심하시오. 언젠가 내 직인이 찍힌 포고령이 내리기 전까지는 그간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으면 되오.”
에딜린은 이런저런 부연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 핵심만 전달하고서는 다시 관저로 들어섰다.
어찌 보면 얼마 안 되는 영지민들인데 붙임성 없이 구는 영주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직까지 엄격한 신분의 법도가 살아 숨 쉬는 이곳에서 귀족으로서의 영주는 말이 아니라 영지민에 대한 행정으로 그 따스함을 내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듣기 좋은 웃음과 말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삶이 편안하고 안정되는 것이었다.
새 영주가 다시 관저로 들어가자, 남은 영지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기 시작했다.
겨우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까지 불렀냐는 불만부터, 영주가 잘생겼다느니, 강단 있게 보인다느니 하는 칭찬까지 사람마다 하는 말은 가지각색이었다.
“좀 실망이 많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영지민들이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채로 흩어지고 나서, 포 마델이 에딜린에게 다가와 물었다.
에딜린의 복잡한 표정을 멀찌감치서 읽은 탓이다.
그러나 에딜린은 포 마델의 물음에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야 앞으로 지내 봐야 알겠죠. 원대한 계획은 없습니다. 이곳 영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것부터 시작하지요.”
이렇게 테로이실 자작, 에딜린 마델 가쉬엘레딘의 첫 걸음은 500명이 채 안 되는 영지민들을 흙먼지 날리는 광장 위에 모아 놓고 인구수를 센 다음 인사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 하나 없는 자작령은 2층짜리 관저가 자작의 거처였고, 자작령에 속한 촌락은 겨우 다 합쳐도 큰 마을 하나 정도도 안 되는 조그만 세 마을이 전부였다. 인구는 500명이 안 되고 사방이 산과 숲, 바다로 막혀 있는 그야말로 복잡한 의미에서 천혜의 요새였다.
요컨대 문제는 지금 주변에 적이 없으니 뭔가 하는데 걸림돌이라는 뜻이다.
에딜린은 참으로 단출한 이 영지를 앞으로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히려 영지의 규모가 말할 수 없이 조그맣다 보니 반대로 방법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훗날의 에딜린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으로 초라한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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