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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펠 영감이 다리를 떨며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에딜린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우선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예전에 만들던 가구처럼 한두 개씩 만들어 보시오. 그동안 내가 이 공방에서 일을 거들 사람을 물색해 보겠소.”
“알겠습니다.”
펠 영감은 아직 불안이 해소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영주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우선은 알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리를 다시 한 번 깊숙이 숙여 예를 표한 영감은 낡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안쓰럽게 제재소로 숨어들어 갔다.
“휴…….”
에딜린도 그저 한숨만 나올 수밖에.
우선은 어떻게 가구를 만들지 포 마델과 상의해 보기 위해 에딜린도 관저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구라…….”
포 마델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 든 얼굴은 주름이 얼기설기 피부에 균열을 내어놓고 있었는데, 연초를 태우며 찌푸린 눈은 처진 눈꺼풀에 묻혀 버릴 것같이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의 영지의 인원으로는 제지업 같은 것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척박하고 사람도 없는 영지에서는 소규모로 할 수 있는 일로 우선 재원(財源)을 만드는 수밖에요.”
“그거야 그렇지만, 가구가 돈이 되려나.”
포 마델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뎀데나펜에서 봉건 영주들이 주요 수입원으로 삼는 것은 농지에서 농노들을 부려 걷는 소출과 소작농들에게 땅을 빌려 주고 받는 각종 세금들이었다.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대영주이거나, 길목 좋은 곳에 영지를 보유한 귀족들은 교역로를 낀 거점을 육성해 성채 도시에서 걷는 세금도 만만치 않기는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아뎀데나펜은 농업 위주의 사회였고, 공예품들의 생산은 상업 도시의 길드들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쓰이는 가구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귀족들의 과시욕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고급의 제품을 우선 한정적으로 만들어 팔아야지요.”
에딜린의 말에 포 마델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적어도 로쉬엠 항을 거쳐서 수입되는 북방의 가구들 못지않은 고급품이어야 하겠군.”
“북방이라 하면?”
“겔라하윈 공화국의 공예품이 대륙 전체에 명성이 자자하지. 소문에 의하면 드워프 장인들이 면허를 지니고 열어 놓은 공방만 수십을 넘는다고 하니 대륙의 사치품은 이곳의 생산이 그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내전기에 번성하던 아뎀데나펜의 수공업도 모두 그 씨가 말라, 요즘에는 로쉬엠의 무역상들이 모두 이 겔라하윈의 수입품을 들여오고 있네.”
“그 수입품을 구경 좀 해 볼 수 있을까요?”
“루비외넨의 성에나 가 봐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 도뷜을 통해서 서찰을 조카 손자에게 보내서 손재주 좋은 목공(木工) 두엇이랑 가구 두세 점만 보내 줄 수 있겠냐고 여쭤 보는 게 어떤가?”
“백작 각하께 말씀이십니까?”
“옛말에 명가(名家)는 망해도 그 들보는 백 년은 간다고 했다. 백작의 작위에 걸맞는 품위 때문에라도 그런 가구 몇 점 정도는 가지고 있을 터이니 부탁하면 쾌히 들어줄 것이다.”
포 마델의 말에 에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해 보니 아무래도 당대의 유행하는 제품을 먼저 보지 않고서 장식만 화려하게 한다고 해서 가구가 잘 팔릴 턱이 없었다.
그리고 백작에게서 장인들을 조금이라도 지원받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제재소 주인 펠 영감과 일곱 명의 나무꾼만으로는 제대로 된 가구를 생산하는 것은 엄청 힘든 일일 것이었다.
다행히도 백작이 사람을 보내 준다면, 이들을 고용해 지불할 삯은 충분히 있었다.
함부로 써 버릴 수는 없는 것이지만 아이로에메의 레어에서 챙겨 온 보석과 옛날의 금화들만 해도 사실 아뎀데나펜의 경제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이 돈을 쉽게 풀어서 단기간에 이 테로이실 영지를 발전시킬 수는 있었지만, 생산 없이 투입되는 돈 만으로 지탱되는 경제는 이 돈이 끊기게 되면 금방 무너지게 마련이었다.
에딜린은 때문에 필요한 투자에는 돈을 아끼지 않되, 다만 돈을 쏟아부어서 그럴싸해 보이게 치장하는 전시 행정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가구랑 장인 몇 명이지요?”
포 마델과 이야기를 마친 뒤에 에딜린은 도뷜을 불러 전령 삼아 백작 성에 보내기 위해 몇 가지를 일러 주었다.
그러나 원체 머리가 좋지 않은 데다가 까막눈이기까지 한 도뷜은 몇 번을 반복해도 혼자 불안해하며 반복해 물었다.
자기가 책임지고 무언가를 백작에게 전달해야 한다 하니 혹여 실수할까 싶어 내심 벌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도뷜이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던 에딜린은 결국 한숨을 푹 쉬고, 아껴 쓰고 있는 양피지를 한 장 꺼내 백작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편지를 마무리 짓고 나서 마지막으로 테로이실 자작을 상징하는 인장를 찍으려고 생각해 보니, 손이 허전한 것이 아직 문장을 새긴 도장을 판 기억이 없었다.
하다못해 영주가 찍을 도장 하나 없는 형편이니 그저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러 준 것은 이 서찰을 백작 각하께 전해드리면 알아서 처리해 주실 것이고. 너한테는 따로 한 가지 부탁해야겠다.”
“예, 예. 말씀하십쇼.”
백작에게 여쭈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따로 한 가지만 부탁한다고 하니, 도뷜의 어깨가 기세 좋게 펴지며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너무 좋아하진 말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내가 금괴를 하나 줄 테니 이 금을 녹여서 문장을 새긴 도장 하나를 만들어 와. 도안(圖案)은 내가 따로 그려 줄 테니 루비외넨 성에서도 가장 솜씨 좋은 주물장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요.”
백작에게 무언가를 아뢰는 것보다 도장 하나 만들어 오는 편이 훨씬 쉽다고 생각하는 도뷜이었다.
“거참, 쉬운 일이 아니래도. 어설프게 만들어 오면 안 돼. 누가 봐도 테로이실 자작의 문장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에딜린의 염려 어린 부탁에도 도뷜은 그저 고개를 시원스레 끄덕인다.
내심 못미덥긴 했지만, 에딜린은 문장을 직접 그려서 도뷜에게 건네주며 신신 당부를 했다.
전에 만들어 두었던 에딜린의 문장인 마법사의 홀을 발에 쥐고서, 파도 위를 날며 별을 삼키는 도안이었다.
“서찰은 백작 각하께 잘 전해드리고, 이 도안은 솜씨 좋은 주물장에게 건네주어 도장을 만들어 오면 된다. 앞으로 이런 일을 할 일이 많을지 모르니, 경험 삼는다 생각하고 잘 처리해 오도록 해.”
이렇게 에딜린의 명을 받아 도뷜은 처음으로 전령 노릇을 하러 루비외넨 백작의 성으로 말을 달려가게 되었다.
제11장.
루비외넨의 어떤 밤낮
“그래, 잘 알겠노라. 돌아가게 되면 내 육촌 형제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도록 하라. 부탁한 것은 사흘 내로 마련해 줄 터이니, 편히 쉬고 있도록.”
서찰을 꼼꼼히 살핀 루비외넨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에딜린이 부탁한 것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했다.
“존명을 받들어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도뷜은 두근거리는 심장이 이제야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끼고서는 혹여 백작이 뭐라고 더 말이나 할까 싶어 넙죽 고개를 조아리고서는 도망치듯 내전을 나왔다.
기껏 시골에서 어깨에 힘이나 주고 다니던 도뷜이 백작에게 직접 무언가를 여쭈러 간다는 것은 살이 벌벌 떨리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전에 연회에서 에딜린에게 술통돌기를 겨루자고 청할 때는 옆에 귀족들이 득실거리고 있음에도 술기운에 분위기에 휩쓸려 저지른 만행이었다 쳐도, 맨 정신에 직접 백작을 상대하는 것은 도뷜로서는 천근과도 같은 부담이었다.
“휴… 한숨 돌렸네.”
백작이 기거하는 내성을 나와서야 도뷜은 한숨을 쓸어내렸다.
루비외넨 백작은 본디 성정이 모난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도뷜 같은 촌무지렁이에게 왕족의 혈통을 지니고 있는 루비외넨 백작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물론 그것은 포 마델이나, 에딜린도 마찬가지였지만, 테로이실 시골에서 초막이나 다름없는 거관에 지내는 두 사람과 이런 꽤 규모 있는 성채에서 여러 가신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백작이 주는 위압감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수고하쇼!”
무거웠던 마음이 완전히 풀리고 기분이 좋아진 도뷜은 백작성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문지기들에게 손을 들어 껄렁대고 나서는 휘파람을 불며 거리로 나섰다.
루비외넨 성은 바쉴강과 루비외넨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성의 좌우로 흐르다,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강은 성을 삼면으로 방어해 주는 구조였다.
강을 면한 곳에는 나루가 있었고, 강이 흐르지 않는 북동쪽으로는 성으로 드나드는 커다란 성문이 있었다.
성은 다시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었는데, 강가를 따라 둘러쳐진 외성에는 오밀조밀한 시가(市街)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안쪽 깊은 곳에 있는 내성은 바로 백작의 거주지였다.
내성은 바쉴강과 루비외넨강이 만나는 지점에 단단하게 선 언덕의 암반 위에 지어졌는데, 때문에 내성에서 보면 외성의 거리와 주변의 강과 들판이 고스란히 보이게 되어 있었다.
도뷜은 이 내성을 나와 제법 규모 있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외성의 거리로 내려온 것이었다.
루비외넨 성의 인구라 봐야 겨우 오천 명 규모였지만, 이것은 알뵈스 섬 안에서는 본토와 이어지는 좁은 협만에 위치한 큰 나루인 외달뵈스(北알뵈스라는 뜻의)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성읍이었다.
때문에 거리에는 여관과 주점, 그리고 대장간과 구둣방, 이발소 따위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촌놈인 도뷜에게는 올 때마다 신기한 거리였다.
“어디 보자, 금괴는 잘 있고……. 아직 이틀 시간이 있으니 좀 놀아 볼까.”
인장을 만들라고 에딜린이 준 금괴는 허리춤에서 잘 있었고, 수중에는 여비로 받은 금화 몇 닢도 두둑하니 우선은 간만에 루비외넨 성으로 나온 김에 놀고 싶은 마음에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좀 더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면 금괴를 혹여 잃어버릴까 싶어 대장장이를 먼저 수소문해 인장을 만드는 일부터 맡겼을 테지만, 처음부터 백작을 만나는 일을 두렵게 여겼지 인장 만드는 일은 왠지 쉽게 생각했던 도뷜이었기에 우선은 놀고 보자는 심보가 동했다.
금괴야 자기 허리춤에만 안전히 있으면 걱정 안 하고 술도 마시고 여자도 품어 보고 시원하게 놀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에딜린이 여비로 넉넉하게 쥐어 준 금화면 그렇게 쓰고도 남을 돈이었다.
아직 물가를 정확히 모르는 에딜린이 도뷜에게 생각보다 거금을 쥐어 준 것이다.
“여보시오, 주인장. 맥주 넉넉히 부어 주시고 닭도 한 마리 잡아서 내어 주시오.”
루비외넨 외성의 골목길에 위치한 이름 없는 여관에 들어선 도뷜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술과 음식을 주문했다.
“거 낯선 분이시구만.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코끝이 붉고 배가 나온 주인이 우선 맥주를 내어 주며 묻는다.
“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테로이실 자작님의 명을 받아 백작 각하에게 서한을 전하고 오는 길인, 바로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올시다.”
거들먹거리며 말하지만 겨우 전령이라는 소리다.
주인도 도뷜이 말하는 행간에서 그것을 읽고는 코웃음치며 말한다.
“그거, 겨우 전령이란 소리 아니오.”
“흥! 겨우 전령이라니, 날 뭘로 보고. 이래 봬도 테로이실 자작님의 신임받는 가신이란 말이오.”
“가신이라면, 귀족이시오?”
주인이 의외라는 듯 물어오자, 도뷜은 그만 기가 팍 죽고 말았다.
“그, 그런 건 아니오만.”
귀족 사칭은 중죄에 해당하는 만큼, 뻔치 좋은 도뷜도 여기서 만큼은 귀족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맥주를 시원스레 들이키고 나서 되레 역정을 부리는 것은 가능하다.
“아, 그 시원찮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빨리 요리나 해 주시오. 돈은 두둑이 있으니까 술이고 음식이고 많이 내어 오라, 이 말이오.”
도뷜이 괜히 큰소리를 떵떵 치자, 주인은 고개를 좌우로 내젖고서는 요리를 하러 화덕이 있는 주방으로 몸을 치웠다.
도뷜은 괜스레 민망해져서는 손가락으로 코끝을 훔치고서는 나온 맥주를 그냥 물 마시 듯 들이켜 대기 시작했다.
루비외넨 백작령 일대에서 생산되는 보리의 품질이 좋은 덕에 이곳에서 만드는 맥주의 맛도 일품이었는데, 테로이실 계곡에서 터럭 같은 보리로 만드는 쓰기 만한 맥주와는 그 맛이 비교할 바 못되었다.
“술이란 것은 이 정도 맛은 되어야지.”
원체 술을 좋아하는 도뷜이다 보니 술이 한번 들어가기 시작하면 시간을 잊고 마신다.
어느새 주인장이 만들어 온 닭도 허브로 적당히 간을 해 먹음직스럽게 상 위에 올려지고, 닭을 손으로 뜯어 먹으며 맥주를 들이키기 시작하니 한시름 잊고 기분이 좋기만 하다.
사실 시름이랄 것도 없이 사는 도뷜이었지만, 최근의 걱정거리 중 하나인 철없이 귀족인 에딜린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아델리에의 사랑을 쟁취하는 일과 어떻게든 에딜린의 비위를 잘 맞춰서 기사 자리라도 하나 쟁취해 볼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잔뜩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런 시답지 않은 걱정도 얼마 가지 않았는데, 슬슬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지니 그저 단순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여자도 좀 불러 주오.”
술집이니 만큼 작부(酌婦)도 있게 마련인데, 도뷜인 얼굴이 불콰해져서는 여자까지 찾기 시작했다.
아직 젊은 호기에서 그러는 것이지만, 사실 총각인 도뷜로서는 여자를 불러달라는 말은 꽤나 용기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
물론 내심은 아델리에에게 순정을 주고 있기 때문에 동정을 작부에게 바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괜히 엉뚱한 에딜린에게나 정신을 팔고 있는 아델리에에 대한 질투 때문에 못난 일이나 벌이고 있는 것이다.
“넬리에라고 해요.”
육덕지고 미소가 고혹적인 갈색 머리의 여자가 옆에 앉자 도뷜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자가 자신의 허리춤을 손으로 안고 들어오자 몸에 전기가 통하는 기분이 들면서 전신이 부르르 떨린다.
처음 닿는 여자의 손길이었다.
그러나 이미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도뷜은 여자가 귓가에다 뭐라고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술상으로 엎어졌다.
도뷜은 그 뒤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 날, 도뷜이 일어난 자리는 따뜻한 백작성의 침대도 아니고, 하다못해 술을 마신 여관의 짚을 채워 넣은 이부자리도 아닌, 루비외넨 성벽 아래의 진창길이었다.
몸이 온통 오물과 진흙으로 뒤범벅된 도뷜은 머리가 깨어질 듯한 두통에 시달리며 정신을 겨우 수습했다.
일어나자마자 토기가 치밀어 올라 한 사발 토를 뱉어 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상황이 겨우 파악되기 시작했다.
“아, 젠장! 여기는 또 어디야?”
어제 여관에 들어가 술을 실컷 마시고 술김에 여자를 부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도무지 자기가 왜 여기 엎어져 있는지는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도뷜을 기겁하게 한 것은 진흙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별 생각 없이 물건이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려 더듬은 허리춤에서 아무런 느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허겁지겁 허리에 매어 두었던 전낭(錢囊)을 확인해 보았지만, 전낭은 텅텅 비어 있을 뿐, 에딜린이 여비로 쓰라고 준 금화도 전부 사라지고, 심지어 더 꽁꽁 싸매 둔 인장을 만들라고 맡긴 금괴도 사라져 있었다.
‘씨발, 좆 됐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곰곰이 해결책을 생각해 보려 하지만 머리가 굴러 갈 턱이 없었다.
진창에서 밤새 퍼질러 자 엉망이 된 몸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도뷜은 일어난 자리 주변을 맴돌았다. 혹시나 금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떨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순도 높은 금괴가 멀쩡히 도뷜의 옆에서 잘 머무르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밤새 무슨 봉변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