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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제14장.
테로이실 칠기(漆器)


어느덧 이런저런 소동들을 뒤로하고서 테로이실 자작령에도 봄은 지나가, 여름의 첫 달인 저울의 달로 접어들었다.
한 해의 첫 달인 노루의 달에 자작의 작위를 받아 이곳 영지에 부임해 왔으니 에딜린이 이곳의 영주로 지낸지도 어느덧 석 달이 지나가는 셈이었다.
그동안 영지의 첫 사업으로 사활을 걸고 진행했던 가구의 제작도 어느덧 진척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막막했던 일이 성격은 모났지만 실력은 좋은 드워프 가구장이인 딜라잇 듈람을 얻게 되어 조금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고, 거기에 우연찮은 옻의 발견으로 칠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계획이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규모 자체는 커진 것이 전혀 없었다.
나무를 벌채한 땅을 농토로 주겠다고 꼬드겨서 일을 하게 된 동네 청년 일곱이 나무를 벌채한다.
그 나무를 가져오면 지랄 맞은 드워프 딜라잇 듈람이 가구를 짠다.
딜라잇 듈람이 열심히 가구를 짜는 동안 멍청한 탓에 결국 노역살이를 하게 된 도뷜이 열심히 옻나무에서 옻을 짜낸다.
마지막으로 드워프가 짠 가구에 펠 영감이 옻을 칠해 칠기를 완성한다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딜라잇 듈람이 에딜린에게 괄시 당하면서 열심히 만들어 댔던 가구들에 이 옻을 연습 삼아 칠해 보았는데, 깔끔하고 매끄럽게 칠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생에서 옻을 다뤄 본 적이 없는 에딜린은 옻의 용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아주 옻이 이런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옻을 이만큼 다루어 내어 깔끔하게 칠하기 시작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게다가 그 칠해 놓은 가구를 보니 나무에 윤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뿐더러, 가구가 쉽게 좀먹지 않고, 목재를 습기에도 강하게 해 주는 것이 확실히 성과가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옻이 이런 데 쓰이는 줄은 전혀 몰랐군.”
이제는 옻독이 좀 가라앉아서 옻에 조금은 면역이 생긴 딜라잇 듈람도 옻을 발라서 완성된 자기의 가구를 보며 내심 심심한 감탄을 내어 보였다.
“뭔가 조금 부족해…….”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준의 칠기 가구였지만 에딜린은 조금 더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것에서 말씀이신지?”
칠기에 매료된 딜라잇 듈람은 에딜린의 까다로움도 이제는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고의 가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 정도의 수고는 사실 변변찮은 것이었다.
“칠기 자체는 매우 독창적이지만, 가구의 양식은 겔라하윈의 것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 같네.”
“겔라하윈의 가구 양식은 그 자체로 완성미가 있는 탁월한 방식입니다.”
“모든 것은 발전하고 변화하는 법이지.”
사실 겔라하윈에서 유행하는 가구 양식도 거의 120년 전에 등장하여 발전해 온 것으로 이제 그 유행이 시작된 지도 한 세기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직각의 단단한 느낌을 지는 조형 방식으로 짜인 겔라하윈의 가구들은, 추상적인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촘촘하게 박아 넣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둥글고 부드러운 형식의 유려한 미보다는 직선적이고 정형화된 양식이 그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딜린은 같은 방식으로 승부해서는 아무리 칠기를 칠한다고 한들 겔라하윈을 이겨 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본부터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다.
“잘 보게나.”
에딜린은 종이를 꺼내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가구의 도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창의적으로 발상해 내기가 녹록지 않았지만, 그동안 딜라잇 듈람이 만들어 온 겔라하윈 양식의 가구들을 꼼꼼하게 살피며 파악했던 문제점과 개선 방안들을 이제는 종이에 새롭게 그려 낼 수 있었다.
“아!”
에딜린이 그려 낸 몇 개의 가구 도안들을 보는 순간 딜라잇 듈람은 감탄성을 흘렸다.
자연적인 곡선을 강조하고 추상적인 무늬를 대신해서 현실적인 조각을 부여한 방식은 새롭고 독특한 것이었다.
기존의 나뭇등걸이를 대신하여 가죽으로 마감한 등받이를 의자에 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테로이실에는 가죽질을 마감할 무두장이 없습니다만.”
“그렇군…….”
하나부터 열까지 테로이실에서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구도 적고, 뛰어난 장인도 없으며, 심지어 자원도 넉넉하지 못한 이 테로이실에서 하나의 도약을 이뤄내기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제가 예전 로쉬엠에서 알고 지내던 염료공과 무두장이가 여럿 있습니다만…….”
“연락해 볼 수 있겠나?”
“다만 로쉬엠에서 버는 수입 이상을 보장해 줘야 이곳까지 들어올 텐데, 과연 그게 쉬울지…….”
딜라잇 듈람은 내심 촌구석인 테로이실의 상태를 보고 어렵지 않겠냐고 하는 말이었지만, 남들이 모르는 뒷주머니를 차고 있는 에딜린으로서는 사실 장인 몇을 고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불러만 주게. 어떻게든 그 삯은 내가 마련할 테니.”

딜라잇 듈람이 도피하던 시절에 로쉬엠에서 신세를 진 덕에 인연을 맺게 된 염료공 가쉬엔과 무두장이 빌렘이 테로이실로 몇 명의 도제들을 거느리고 찾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
“…….”
두 사람은 테로이실 자작령의 밤나무 골로 들어선 뒤에 말을 잊고 말았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형편없는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작령이라고 했었지 않나?”
“나도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이 궁색한 영지에서 자신들에게 약속한 매달 2딤닛의 금화를 봉급으로 지불할 능력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2딤닛은 적지 않은 액수였는데, 로쉬엠에서도 가족과 도제들을 먹여 살리고 공방을 운영할 수입으로 매월 1딤닛의 금화를 필요로 했었으니, 그 두 배인 두 딤닛은 로쉬엠의 공방을 포기하고 시골까지 이들을 들어오게 할 충분히 매력 있는 요인이었다.
“어서 오시게나. 껄껄.”
이들이 밤나무 골의 풍경을 보고서 당황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을 불러들인 딜라잇 듈람은 껄껄 웃으며 이들을 환영했다.
“자네 예전 버릇대로 우리에게까지 사기 치는 것은 아니겠지?”
“도대체 드워프는 믿을 만하다는 말은 다 옛날 거짓부렁이라니까. 이런 사기꾼 드워프 같으니라고.”
드워프와 인간이라는 종족을 넘어선 우정을 나누고 있던 이들이었지만, 도무지 이 상황은 딜라잇 듈람을 불신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었다.
사실, 딜라잇 듈람도 자신이 없기는 했었다.
에딜린이 아뎀데나펜에서 주조된 금화도 아니고, 겔라하윈 금화로 이들에게 미리 일 년치를 선불로 주라고 두둑하게 쥐어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네들에게 줄 급료는 이미 1년 치가 마련되어 있네. 선불로 줄 테니 어서 와서 짐부터 풀게나.”
두 사람은 선불로 급료가 마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으로 안내된 두 사람이 처음 마주한 것은, 옻칠이 잘 마감된 새로운 형식의 가구들이었다.
기존의 겔라하윈 양식의 가구를 뛰어넘는 유려하고 섬세한 가구를 보는 순간 이들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옻칠이 된 표면은 광택이 일고 있었고, 쉽게 상하거나 좀먹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이거… 대단하구만.”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이 이 의자 따위에 편안한 가죽 쿠션 따위를 대는 일이란 말이지?”
“흠… 이런 시골에서 대단한 물건이 나오겠구만.”
염료공 가쉬엔과 무두장이 빌렘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이유라면 이런 시골에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 보는 것도 무모한 도전은 아닐 것 같았다.
“우선은 공방의 책임자인 펠 영감과 인사하도록 하게.”
딜라잇 듈람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들에게 책임자를 만나 볼 것을 권했다.
그러나 가쉬엔과 빌렘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자네가 책임자가 아니란 말인가? 뛰어난 가구공인 자네가 있는데 또 누가 공방을 책임진단 말인가?”
“나는 부끄럽지만 죄를 지어서 노역형에 처해져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네……. 쩝.”
이들의 물음에 딜라잇 듈람은 씁쓸하게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렇게 됐구만…….”
한때 딜라잇 듈람이 겔라하윈에서 로쉬엠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수배를 피해 다닐 때, 이들은 딜라잇 듈람과 교분을 맺고 숨겨 준 친구들이었다.
그러니 결국 딜라잇 듈람이 이런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새삼스럽게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딜라잇 듈람과 그의 친구들이 잠시 침묵에 잠긴 사이, 공방 한쪽의 쪽문이 열리고 허리 굽은 노인 한 명이 어기적 어기적 들어왔다.
“어서들 오시오.”
다름 아닌 그저 변변찮은 목수에서 제재소 주인으로 은퇴 아닌 은퇴를 했다가, 이제는 다시 대륙 유일의 옻칠 장인으로 거듭난 펠 영감이었다.
그는 오늘따라 멋을 부린 흰 수염 아래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으며 이들을 반겼다.

테로이실 칠기 가구가 어느 정도 생산이 되기 시작하자 에딜린은 우선 이것을 루비외넨 백작에게 보내어 선물했다.
“허어……. 가구를 만들겠다더니 이런 대단한 것을 몇 달만에 생산해 낼 줄이야.”
루비외넨 백작 갈렙 가쉬엘레딘은, 그 육촌 형제인 에딜린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그 시골 구석에 영주로 부임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런 탁월한 가구를 생산해 낼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어머나, 표면도 어쩜 이렇게 매끄럽고 부드럽게 만들어졌을까?”
가구를 보고 감탄한 것은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루이나 백작 영애 또한 가구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해 버릴 정도였다.
“겔라하윈의 가구보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훨씬 탁월 한 것 같습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케레빌 자작까지도 눈이 트인 느낌을 받고 있을 정도니 식견이 있든 없든 이 테로이실의 새로운 특산품인 칠기 가구가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은 확실한 듯했다.
“하지만 겔라하윈의 가구 제품들은 오랜 세월 여러 나라에서 인정받은 탁월한 예술품들입니다. 이런 시골에서 만들어 낸 번들거리기만 하는 조잡한 탁자들과 비교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전부터 에딜린을 고깝게 여기고 있던 림바델 준남작의 생각은 달랐다.
왕실이 존망에 처한 지금에도 종친이라는 자가 천박하게 가구 놀음이나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어설픈 종친을 앞세울 바에는 자신 같은 신실한 인재가 루이나 영애를 보필하며 왕실의 말예(末裔)를 사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림바델 준남작 혼자만의 생각일 뿐, 그의 자부심 넘치는 고견에 대한 반격은 다름 아닌 가장 뼈아픈 곳에서 들려왔다.
“도대체 어디가 모자란다고 그렇게 삐딱하게 말씀을 하세요, 림바델 준남작님.”
한창 테로이실 칠기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빠져 있던 루이나 영애가 림바델 준남작의 혹평에 섭섭하다는 듯 따져 온 것이었다.
“저, 저는 그냥…….”
내심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루이나 영애의 앞에서, 한때 결혼 상대로 거론되었던 에딜린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었기에 이런 가슴 아픈 반격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림바델 준남작은 괜히 멋쩍은 기분에 코를 훔치고서는 그냥 한 발짝 물러서기로 했다.
“제가 보는 안목이 조금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으세요. 그래도 정말 아름다운 가구들인데 그런 혹평을 받기는 지나친 것 같아요.”
루이나는 정말로 이 가구들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진 것처럼 보였다.
직선적이고 추상적인 겔라하윈의 가구 양식은 여성적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남성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귀족의 권위를 강조하고 무게를 주며, 위압감과 압도하는 힘을 나타내는 데 적절한 가구였다.
반면, 테로이실에서 이번에 생산해 낸 칠기 가구들은 부드럽고 곡선적이며, 내실(內室)이나 응접실에 놓기 적당한 매우 여성적인 느낌의 가구들이었다.
때문에 루이나 영애의 마음에도 꼭 맞았던 것이다.
“루이나, 네가 이 가구들이 매우 맘에 드는 모양이구나. 자작에게 부탁해 네게 알맞은 가구들을 맞춰 보내 주도록 하마.”
“정말이신가요, 아버지?”
“그럼, 얼마든지 해 주도록 하지.”
루비외넨 백작은 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기뻐졌다. 가구야 얼마든지 넣어 줄 수 있었다.

가구 공방을 일으켜 고급의 칠기 가구를 생산하는 일은 여차여차 잘 풀려 나갔지만, 문제는 판로였다.
물건을 아무리 만들어 내도 팔 수가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아뎀데나펜의 상업은 주요한 상업 거점을 중심으로 일종의 마을과 마을 사이를 정기적으로 오가며 물건을 사고 파는 소규모의 순회 상단(巡廻商團)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로 귀족들이 소비하는 고급품의 경우에는 이러한 순회 상단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뎀데나펜은 대륙의 남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바다에 면한 특성 때문에 육로보다는 해상으로 외국과의 무역이 이뤄지고 있었다.
여러 개의 항구에서 선단이 정기적으로 출항하지만, 가장 큰 무역항은 일곱 공작들 중 아무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자유도시인 로쉬엠이었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인 아뎀데나펜에 들어오는 사치품들은 거의 외국산으로, 로쉬엠의 거상(巨商)들 만이 의류, 가구, 향신료, 유리 등의 고급 제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니 고급 가구를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이 로쉬엠의 거상들과 접촉하지 않는 이상 판로를 개척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알뵈스 섬에서는 외달뵈스가 가장 큰 항구로 이곳에 로쉬엠의 여러 거상들이 설치한 상관(商館)들이 있다. 한 번 접촉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구에 대한 식견이 높지는 않은 만큼 그간 한 발짝 물러서 있던 포 마델이 에딜린에게 유통에 관해서 조언하고 나섰다.
“로쉬엠의 거상들이라면 어떤 이들이 있죠?”
“누가 뭐래도 지금 당대의 로쉬엠에서 가장 큰 상인이라면 알렌 기쉬이지. 기쉬 상회는 벌써 6대째를 물려 오며 로쉬엠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상회다. 그 외에도 악덕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루가멜 사도레, 동방무역에 집중해서 재산을 모은 갈렙 다레뉠 등이 있지. 그 외에도 중견 상인들이 여럿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