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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Chapter 2.
추격자들을 피해 숲으로 달아나다
네르시아의 부친인 오웬 백작!
그가 통치하는 영지들은 대륙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륙을 한복판을 가르는 헤인바이츠 산맥의 끝자락과 거의 맞닿아 있다.
남부에서 오웬 백작의 권력과 세력은 쉽사리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백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왕과 마찬가지로 군림했다.
그러나 오만한 오웬 백작도 두려워하는 인물이 딱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남부의 평야 지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버몬트 후작!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후작의 지위가 백작보다 높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작의 세력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삼대 세력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남부의 비옥한 땅에서 나는 소출이 제국 전체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60퍼센트(%)에 달한다.
그렇다! 무려 60퍼센트다!
황실에 바치는 세금을 제외하면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수익이 후작의 차지다.
그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버몬트 후작은 황실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 백작이 어찌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웬 백작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네르시아는 바로 그 버몬트 후작의 정혼녀이기도 했다.
한낱 도망친 노예 놈 하나 때문에 혹여 딸에 대한 추문이 후작의 귀에 흘러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오웬은 황급히 긴급회의를 열어 가신들을 불러들였다.
가신들이 황급히 회의실에 모였을 때는 이미 오웬 영주의 얼굴은 그야말로 붉으락푸르락!
백작은 불편한 심기를 조금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웬은 회의실 탁자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쾅!
그건 더할 나위 없이 화가 났을 때 보이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피해가 그깟 노예 놈 하나 때문에 생긴 거란 말인가?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냔 말이다!”
“…….”
가신들은 영주가 머리끝까지 화났을 때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화가 풀릴 때까지는 눈을 마주치지 않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것이 좋다.
어차피 다혈질인 오웬 영주는 화를 잘 내는 만큼, 또 금방 풀리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집기를 마구 집어던지며 화를 내던 오웬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은 화가 풀렸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이에 집사인 브라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영주님. 피해 자금을 복구할 방안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오웬 영주는 갑자기 손을 휘저으며 집사의 말을 끊었다.
“보고는 나중에 하고 일단 그놈을 잡아들여. 고문 기술자를 불러들여 광장에서 고문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 주라고! 그 정도는 해야 내 위신이 서지 않겠나?”
위신도 위신이거니와 다른 노예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서도, 도망친 노예 놈은 반드시 잡아들여 산 채로 해부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든 노예들이 도망을 꿈꾸게 될 것이다.
집사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럼 용병 길드에 현상금을 걸까요?”
“그래! 노예 사냥꾼들이 모조리 군침을 흘리며 몰려들 만큼 충분한 돈을 걸어 두라고! 그리고…… 맥베스!”
영주는 집사와 대화를 하다 말고 불쑥 맥베스란 사내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기사단장인 맥베스는 힘차게 대답하며 영주 앞에 섰다.
“자네도 가서 그 노예 놈을 잡아 오게. 기왕이면 우리 손으로 노예 놈을 잡아들이는 게 모양세가 더 좋지 않겠나?”
“영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맥베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외쳤다.
반드시 전력을 다해 도망친 노예 놈을 잡아오겠다는 각오를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영주님! 저도 보내 주십시오! 제가 꼭 그 녀석을 잡아 오겠습니다!”
“크라이슨!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맥베스는 감히 자신의 말허리를 잘라먹은 수하 놈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찮은 노예 놈 따위에게 당하더니…… 근신하고 있어도 시원찮을 마당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솔직히 말해 맥베스는 크라이슨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알량한 무력만 믿고 체계와 위계질서를 제멋대로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한 번은 그의 버릇을 잡기 위해 대력을 펼쳤지만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된 적이 있었다.
이후로 맥베스는 더욱 그를 싫어하게 되어 기사단에서 은근히 따돌려 버렸다.
그의 수하들도 비천한 용병 출신인데다, 기사단장을 함부로 대하는 크라이슨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하튼 맥베스는 크라이슨에게 몇 마디 더 쏘아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오웬 영주가 불쑥 그들에게 말했다.
“좋아! 크라이슨 자네도 같이 가도록 하게.”
“영주님!”
무어라고 항의하려는 맥베스를 손짓으로 제제한 영주는 곧바로 다시 말했다.
“단, 크라이슨 자네는 기사단장인 맥베스의 지시대로만 움직여야 하네. 자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더군. 이번에도 말썽을 부린다면 기사의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겠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영주님!”
한편, 그 시각에 은밀히 오웬 영지를 떠나는 무리가 있었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쉿! 이제부터는 절대 아가씨라는 말을 쓰지 마!”
남루한 옷차림으로 변장한 여행자는 놀랍게도 네르시아였다!
그녀는 제논을 지옥에 빠뜨린 원흉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더니, 홧김에 그를 사지로 밀어 넣었긴 했지만 그녀는 곧 후회에 빠졌다. 이후로 제논과의 달콤한 입맞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잠을 설쳤던 것이다.
괘씸한 노예 놈 따윈 잊어버리려 했지만, 네르시아는 그때 느꼈던 미묘한 열기를 잊지 못했다. 억지로 잊으려 할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황홀한 열망에 더욱더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비록 더할 나위 없이 비천한 노예 놈이긴 했지만, 네르시아에게 제논은 태어나 처음으로 입맞춤을 한 남자였다.
게다가 그는 거칠고 조잡한 옷을 걸치고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게 잘생긴 남자가 아닌가?
네르시아는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
인형처럼 잘 차려입힌 뒤, 파티에 데리고 나가 아름다운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한껏 뽐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입맞춤을 하고 싶었으며, 차마 입에 올리기 민망한 많은 것들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하면 즐거운 일들이 무궁무진할 것 같았다.
‘그 노예 놈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아버지에게 붙잡히기 전에 내가 몰래 빼돌려야겠어! 좋은 옷을 입히고 분장으로 얼굴을 조금 고친다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 혹여 알아본다고 해도 그 노예 놈이 아니라고 우기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네르시아는 제논에게 했던 몹쓸 짓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저 구해 주기만하면 그 비천한 노예 놈은 자신이 베푼 은혜에 감격해 마지않으며, 사랑과 헌신으로 보답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다.
나중의 일들은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달 정도 근신하면 되리라 편하게 생각해 버렸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내린 결정이지만 그것이 더없이 네르시아다운 행동이었다.
그녀가 이렇듯 막무가내 성격이 된 것은 순전히 나쁜 품성을 타고났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웬 영주는 그동안 막내딸인 네르시아를 덮어놓고 편애하기만 했다. 때문에 그녀는 이처럼 제멋대로인데다가 철부지로 자라나게 된 것이다.
“저는 불안해 죽겠습니다.”
“뭐가 걱정이야? 보석도 두둑이 챙겨 왔겠다. 필요한 물건을 잔뜩 구입하고 용병을 고용해 녀석을 뒤쫓으면 돼.”
시녀는 온통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여주인을 바라보았으나, 네르시아는 걱정이 많은 것도 병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아가씨! 다시 한 번 생각…….”
“시끄러 쓸데없이 주절거리지 말고 입 다물어! 만약 너 때문에 들키게 된다면 발가벗긴 후 광장의 가로수에 거꾸로 매달아 버리겠어!”
그녀의 표독스런 말에 시녀는 그만 사색이 되어 싹싹 빌었다.
“그, 그것만은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시녀가 이렇듯 크게 놀란 것은 네르시아가 한다면 정말 하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채로 광장에 매달릴 바에야 지금 혀를 콱 깨물고 죽어 버리는 것이 나았다.
“알아들었으면 그 입 꿰매 버리기 전에 꽉 다물어!”
네르시아의 말에 깜짝 놀란 시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오웬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헤인바이츠 산맥.
사람들은 헤인바이츠를 광룡의 산맥이라고 불렀다. 천 년 전, 그러니까 까마득한 옛날부터 히젠하를로데란 이름의 광룡이 살고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도 떠벌리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광룡이 지하의 레어(Lair)에서 잠들어 있을 뿐, 분명 실존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히젠하를로데의 실존에 대해서는 불분명 하지만, 마룡의 산에 유난히 몬스터들이 많이 서식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자연히 출입이 뜸해지고 언젠가부터 광룡의 산맥은 여행자들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모용명은 곧 있을 추격을 피해 울창한 침염수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깊은 산속에서는 쉽사리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나무줄기에 붙어 있는 이끼나 나뭇가지의 무성함을 보고 대충 방향을 잡았다. 이끼가 끼어 있는 쪽이 북쪽, 가지가 많고 길게 뻗은 쪽이 남쪽이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병사들에게 빼앗은 검으로 나무 기둥을 잘라 나이테를 확인했다.
‘1차적인 추격은 따돌린 것 같군. 휴식을 취하기 전에 우선 물을 얻어야겠어.’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 최대 90일까지 버틸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못하면 사흘(3일)을 버티기도 힘들다.
모용명은 우선 근처의 능선(산등성이)이를 찾아 올랐다. 능선이나 정상에 올라서면 시야가 트이면서 현재 위치가 파악되기 쉽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계곡이 발견되었다. 방향을 정한 그는 계곡을 향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것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산짐승들은 물론 몬스터들도 물을 찾아 모인다. 때문에 모용명은 곧 계곡에서 물을 마시는 몬스터 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것들은…… 홉―고블린이라고 했던가?’
모용명은 제논에게서 흡수한 기억을 더듬었다.
홉―고블린(Hob―Goblin)!
그들은 피에 가까운 짙은 선홍색을 선호하며 사냥한 생물을 뼈를 가공해 몸을 치장하는 것을 즐긴다.
비록 소형 몬스터이긴 하지만 몸집이 작다고 얕보면 큰 코 다지게 된다.
잔인하고 집요한 성격이며 호전적이고 인간의 군대에 비할 만큼 치밀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 개체가 약한 대신 항상 무리지어 다니며, 대롱을 불어 치명적인 마비독이 발린 독침을 발사할 수 있다.
때문에 숙련된 용병들은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상급 몬스터보다, 오히려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소형 몬스터를 더 경계했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상급 몬스터들보다 자주 마주치게 되는 소형 몬스터들의 잔혹함이 오히려 더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용명은 그들의 독침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선뜻 계곡으로 다가갔다.
끼릭? 끼리리리―
그를 발견한 홉―고블린이 특유의 목소리로 동료들에게 무엇인가 위험신호를 날렸다. 이에 새까맣게 깔린 녀석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기에 언뜻 섬뜩한 느낌이 드는 광경이었다.
푸슛― 슈아아!
홉―고블린은 대롱을 불어 독침을 쏘아 냈다.
일제히 날아오는 독침이 마치 하늘을 수놓은 하얀 눈송이와 같았다.
모용명은 소매를 휘저으며 가문의 절기인 두전성이를 펼쳤다.
샤아아아―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독침들이 가로막히며 순간적으로 하얀 구체를 만들었다.
모용명은 소매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듯 가볍게 휘둘렀다.
파앗!
독침들이 튕겨 나가며 홉―고블린 무리를 날카롭게 찔렀다.
께륵―!
홉―고블린들은 비명 비슷한 것을 지르며 독침에 마비되어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이것이 바로 상대의 수법으로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두전성이의 교묘한 이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쓰러지는 모습이 바다의 파도를 연상시켜 일종의 장관을 이루었다. 독침에 실린 힘은 아주 작았기 때문에 그 숫자에 상관없이 모조리 튕겨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전의를 상실한 홉―고블린 무리는 재빨리 흩어져 도주해 버렸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계곡의 물을 마신 모용명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물속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계곡물은 기껏해야 그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결가부자를 틀고 자리에 앉자 수면은 그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진기요상술(眞氣療傷術)의 구결 중에는 큰 항아리에 맑은 물을 가득 채우고 항아리 속에 앉아 체내의 독이나 탁기를 배출하는 수법이 있었다.
무릇 인체의 7할(70%)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물속에 독을 배출하는 것이 공기 중에 배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진기요상술의 구결에 의하면 부상으로 상한 피도 일종의 독으로 취급한다.
모용명은 물 항아리를 대신 계곡의 물에 몸을 담고 단전의 진기를 운기하여 상처를 통해 체내의 상한 피를 쏟아 냈다.
순식간에 맑은 계곡물이 혼탁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고, 혈도에 쌓인 탁기를 모조리 배출해 낸 그는 한결 가벼워진 안색이 되었다.
‘피를 보충하려면 신선한 음식이 필요하다!’
모용명은 계곡물을 향해 장력을 방출했다.
파아앙―!
돌을 내리쳐 물고기를 기절시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다만 스케일이 좀 방대할 뿐!
정신을 잃은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는 대어와 잡어를 구분할 것 없이 모조리 집어 씹어 삼켰다.
우드득―
생선의 신선한 육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눈가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계곡물 속에서 서식하던 생선들은 모조리 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치 외과 수술을 하듯 상한 부분을 모조리 쏟아 낸 것 뿐, 손상된 장기를 진기요상술로 치료하려면 상당할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 어딘가?’
다소 무식한 방법이지만 기력을 회복하려면 무엇이든 많이 먹는 것이 좋다. 모용명은 물고기를 더 잡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다시 장력을 펼쳤다.
슈아아아― 파앙!
마치 거대한 해일이 휘몰아치듯 장력이 미친 곳이 온통 소용돌이치며 바닥을 드러냈다.
그 바람에 계곡에 떨어지던 폭포수까지 휘말리며, 마치 장막을 걷어 버린 듯 숨겨진 절벽이 드러났다.
“이런 곳에 동굴이?”
절벽의 바위 틈 사이에는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쪽에 충분한 공간만 있다면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폭포수가 마치 휘장처럼 동굴 입구를 가려 주고 있는데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몸의 체취마저 감춰 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정리해 자신의 흔적을 지운 모용명은 동굴 입구로 몸을 들이밀었다.
입구는 몹시 좁았지만 다행히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졌다.
습기 때문에 이끼가 잔뜩 피어 있긴 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동굴 속에는 주인이 있었다.
쉬이잇―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머리를 번쩍 들어 올리며 혀를 날름 거렸다.
우윳빛의 백색 비늘에 몸통의 두께가 2척(60cm)나 되어 보이는 것이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측하고 있었기에 모용명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엉뚱한 생각을 불쑥 떠올릴 여유마저 있었다.
‘백사는 원기를 회복하는 약재로 쓰기도 한다던데 정말 효능이 있을까?’
모용명이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살피고 있을 때 백사가 갑자기 공격해 왔다.
슈앗―!
백사는 몸길이의 3분의 2를 번쩍 들어 올리며 손목 안쪽의 혈관을 노리고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평범한 자들이라면 손쓸 틈도 없이 손목을 물릴 속도였다.
그러나 무림인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가진 모용명은 공격 궤도를 가볍게 꿰뚫어볼 수 있었기에 왼손을 번쩍 들어 민첩하게 뱀의 목을 틀어잡았다.
뱀의 힘이 생각보다 대단해, 그의 팔을 감아 죄면서 입을 벌리고 머리를 물려고 대들었다. 뱀의 입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졌다.
“이 녀석! 지독한 독을 품고 있군.”
모용명은 왼손을 휘둘러 뱀의 머리를 바닥에 후려쳤다.
파악!
반복해서 후려치자 뱀의 머리가 깨져 버리고 어느 순간 꿈틀거림이 멎어 버렸다.
그는 뱀의 머리를 검으로 잘라 낸 뒤, 껍질을 벗겨 냈다.
기력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그대로 몸통을 입안에 털어 넣고 으적으적 씹어 버렸다.
그런데 다 먹기엔 뱀의 몸통이 너무 길었다.
이번에는 살점을 뜯어 먹는 대신 뱀의 피를 꿀꺽 빨아 마셨다. 뱀의 피가 뱃속에 서서히 퍼지자,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샘솟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내단은 없었지만 나름 영물이었던 모양이다.
백사의 보혈을 마신 모용명은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영물의 피는 영약(靈藥)과 비슷한 효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운기행공을 시작하자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며 공력이 조금씩 불어나는 것 같았다.
‘영물의 피로 단전을 키우는 동시에 진기요상술을 펼치자!’
추격이 다시 따라붙기 전에 최대한 몸을 회복해야 했다.
모용세가의 적양신공을 끌어 올리자 후끈한 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습기로 가득한 동굴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며 동굴 벽의 이끼가 바짝 말라붙어 버렸다.
적양신공(赤陽神功)의 성취는 고작 1단계!
7단공을 쌓았던 예전의 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새롭게 얻게 된 신체는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근골도 형편없었다.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천부적인 무골(武骨)을 타고났다고 칭송받던 예전의 몸에 비해서, 황실에 진상하던 주옥(珠玉)과 길가의 자갈만큼이나 자질의 차이가 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관절이 유연하고 손발이 길다는 것!
신묘한 변화의 극한인 두전성이의 특징과 상성이 잘 맞았다.
무릇 고급 무예도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어서 사람과의 상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어떤 이에게는 최고의 절예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도무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일 때가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무공을 창시한 대종사가 가진 성격이나 기질 혹은 그의 신체적 특징과 비슷할수록 그의 무공을 빨리 익힐 수 있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몸의 기질과 특징을 파악에, 그에 맞는 무예를 골라 익숙하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
모용명은 강호에 존재하는 방대한 무공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이는 두전성이를 창안한 무학대종사이자 인세에 다시없을 무학귀재로 평가받은 모용룡성(慕容龍城)이 이룬 업적 때문이었다.
사실 두전성이의 오묘한 이치를 모조리 펼칠 수 있었던 건 모용룡성 한 사람뿐이었다. 이후의 후손들은 물론, 나름대로 무학의 천재라 불리게 된 모용명도 두전성이를 완전히 깨우쳤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두전성이의 진실한 위력은 단지 힘의 방향을 바꾸는 사량발천근의 묘리에 그치지 않았다.
진정 신묘한 부분은 상대의 공격에 숨어 있는 내력의 운용 경로를 순간적으로 파악, 그 경로를 통해 상대편의 초식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에 있었다.
즉, 두전성이 절기에 완전히 통달했던 모용룡성은 당시 상대했던 무림인의 절기를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강호의 영웅들은 모용세가가 강호의 모든 문파의 절기를 모조리 터득하고 정통한 것이라 착각하며 은근히 두려워하게 되었다.
‘다행히 두전성이와 쇄심장(碎心掌)은 상성이 잘 맞는 것 같고……. 새로운 몸에 맞는 검법과 보법을 우선해서 익혀야 하겠군.’
모용명은 일시에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절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것 하나를 정하고 나머지를 버리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것보다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뛰어난 경지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운기행공와 고민을 반복하는 동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분명한 것은 다시 해가 지고 밤이 깊어졌다는 사실 뿐!
모용명의 몰입이 깨진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추격자들인가?’
인기척으로 추정하면 적은 6∼9명 정도.
하지만 추격자들은 근처에 더 있을지도 모른다. 공력이 아직 부족해 멀리의 소리까지 들을 수는 없었으니까.
흔적을 지운다고 지우긴 했지만 전문적으로 추적술(追跡術)을 익힌 자가 있다면 약간의 단서만으로도 발각될 것이다.
모용명은 조심스럽게 동굴 입구로 이동했다.
쏴아아―
내공을 끌어 올려 시신경을 자극하자, 그는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줄기 너머로 어른거리는 형체들을 볼 수 있었다.
이대로 웅크리고 있다가 비좁은 동굴 입구에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적의 포위망이 완전히 구축되기 전에 뛰쳐나가 상대할 것인가?
모용명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비좁은 동굴을 이용한다면 아무리 많은 적이 몰려와도 한 번에 한 명만 상대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공간이 매우 비좁기 때문에 적들이 독이나 벽력탄(霹靂彈)을 사용하면 피할 곳이 없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주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이다.
‘무력(武力)으로 길을 뚫는다!’
마음을 굳힌 모용명은 폭포수를 꿰뚫고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손바닥에 붉은 기운이 어리며 강맹한 장력이 거침없이 뻗어 나왔다.
“쇄심장(碎心掌)!”
슈아아아앙―!
백사의 보혈을 마시고 하루 온종일 운기(運氣)했기 때문일까?
내공이 좀 더 깊어진 탓인지 쇄심장의 위력도 더욱 강해졌다.
물줄기를 빨아들인 장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적들을 향해 직격했다.
콰아앙!
“크아아악!”
느닷없이 쇄심장을 얻어맞은 세 명의 용병들은 피를 토하듯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실제로 갈비뼈가 왕창 부서지며 날카로운 뼈가 폐를 찔렀으니 엄살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근처에 있던 추격자들이 제법 민첩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쉐에에에엑―!
어둠 속인데도 불구하고 화살은 정확히 그의 심장과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꽤 뛰어난 궁술이었으나 상대가 나빴다.
모용명은 싸늘하게 안색을 굳히며 소매를 휘둘렀다.
두전성이!
신묘한 위력이 화살의 방향을 바꾸었다.
화살이 직각으로 꺾이며 근처에 서 있던 동료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악!
“크악!”
“으아악! 어딜 보고 날리는 거야?! 눈이 삐었어?”
“미안해! 하지만…… 제대로 보고 쏜 건데?”
모용명은 적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 바닥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제대로 경공을 펼치기도 전에 무엇인가 음침하게 웅얼거리고 있던 적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이어 볼!”
화르륵―
그러자 허공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나타나 그를 덮쳤다.
‘허공을 격하고 불덩이가 나타나다니? 격공장(隔空掌)의 일종인가?’
모용명은 그것을 이계의 마법이 아닌 특이한 무공 정도로 생각했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가볍게 쇄심장을 날려 받아쳤다.
슈아아아앙― 콰앙!
“으아아악!”
쇄심장에 맞고 튕겨난 불덩어리가 마법사의 몸에 직격했다. 상대는 불꽃에 휘말려 피부가 모조리 타 버리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전신을 파고드는 참혹한 고통에, 마법사는 다른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숯 덩어리가 되어 죽어 버렸다.
그때 모용명을 향해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쉐에에에엑―
여유 있게 두전성이를 펼쳐 화살을 받아 냈지만 모용명의 안색은 조금 어두워졌다. 예상보다 추격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략 삼백 명 정도 되겠군. 오웬 영주가 영지의 병력을 동원한 건가?’
그의 짐작과는 달리 이들은 영주의 사병이 아니라, 현상금을 노리고 덤벼든 노예 사냥꾼들이었다.
모용명에게 걸린 상금은 무려 5,000골드!
기사들의 1년 봉급이 고작 20골드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오웬 백작의 딸이자 버몬트 후작의 정혼녀인 네르시아의 순결과 명예에 관계된 일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어마어마한 거금을 걸지 않았을 터!
이렇게 벌이가 좋은 의뢰는 흔치 않는 것이었기에, 용병단 몇 개가 동시에 움직이게 된 것이다.
화살을 되돌리는 신묘한 기예에 기가 질릴 법도 하건만! 베히모스 용병단의 용병단장인 마커스는 용명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일제 공격!”
쉐에에엑―
수백 개의 화살이 어둠을 꿰뚫었다. 개중에는 마법사가 날린 마법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모용명은 따로 구분하지 않고 두전성이를 펼쳤다.
샤아아아―
신묘한 힘이 화살과 마법이 사방으로 튕겨 냈다.
“크아아악!”
운수 나쁘게 눈먼 화살에 맞은 용병들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제게 도대체 무슨 마법이지?”
적들이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모용명은 기세를 살려 쇄심장을 날렸다.
슈아아아앙― 콰앙!
“으아아아악!”
강맹한 장력에 맞은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그는 바닥을 박차며 재빨리 포위망을 벗어났다.
“달아난다!”
“잡아라!”
용병들은 황급히 활시위를 당겼다. 그것을 본 용병단장 마커스가 눈을 부릅뜨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화살은 안 돼!”
그러나 저지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쉐에에엑―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들!
모용명은 장난처럼 등 뒤로 소매를 흔들었다. 두전성이의 기이한 위력이 다시 한 번 펼쳐지며 화살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화살을 피하기 위해 용병들이 엎드린 몸을 움츠리는 순간, 모용명은 분광소영신법을 펼쳐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쇠 그물이 떨어졌다.
‘함정을 설치했구나!’
쏴아악―!
방심을 노린 나름대로 치밀한 함정이었으나 모용명은 즉시 경공을 펼치며 마치 디딤돌이라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박차고 몸을 빼냈다.
그러나 용병들이 설치한 함정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다.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방향에서 연속적으로 쇠 그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쏴아악―!
피할 곳을 남겨 두지 않고 사방팔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물! 꼼짝없이 쇠 그물에 잡힐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치 누군가가 실을 연결해 확 잡아당긴 것처럼, 모용명의 몸이 갑자기 한쪽으로 쏠렸다.
그곳은 그물들 사이의 교묘한 사각지대!
쇠 그물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휴우.”
모용명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박한 상황에 몰려 도박하듯 신행미종보(神行迷踪步)를 펼쳤는데, 다행히 보법이 무리 없이 펼쳐진 것이다.
새롭게 얻은 몸이 신행미종보와 상성이 잘 맞는 편이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될 뻔했던 모용명은 치욕감에 분노에 휩싸였다.
‘감히 장차 황제(皇帝)가 될 이 몸을 농락하다니! 용서치 않겠다!’
분노에 이끌려 적양신공이 저절로 움직이자, 그의 두 눈이 피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붉어졌다.
슈아아아앙―!
공력을 잔뜩 머금은 쇄심장이 용병들을 향해 강맹하게 뻗어 나갔다.
콰아앙!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장력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적들이 피를 쏟으며 나가떨어졌다.
용병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겨 버렸다.
명중하면 반드시 심장을 파괴하는 쇄심장!
‘쇄심장의 위력이 제대로 발휘되었군! 새로운 몸은 분노(忿怒)에 특화되어 있구나.’
때로 활화산처럼 분출된 강렬한 감정이 무공의 위력을 증대시키기도 한다.
저마다 핵심적인 감정은 다르다.
깨달음을 얻어 화경(化境)의 경지에 이르면, 격한 감정은 사라지고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해진다. 그러나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특정한 감정이 무공의 성취를 높이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
격한 감정으로 무공의 위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반면 주화입마의 위험성도 높아진다. 거기다 흥분으로 심박이 빨라지면 내공이 소모되는 속도도 빨라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비켜갈 수 있다면?
활용 방법에 따라 구명절초로 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전생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모용명은 전생에 이미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고, 새로운 몸을 얻으며 정기신(精氣神)의 조화가 완전히 깨졌다.
이제 다시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의 변화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도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슈아아아아― 콰앙! 콰앙!
여하튼 모용명은 쇄심장을 펼쳐 연속해서 강맹한 장력을 날렸다.
“크아아악!”
위력적인 장력에 맞은 적들은 어김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얻어맞기만 하면 반드시 죽어 나가니 용병들의 기세가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화살을 되돌리는 괴이한 능력과 뼈와 내장을 부수는 위력적인 공격! 거기에다 마족을 연상시키는 붉은 눈!
공포감을 느낀 용병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흔히들 용병들이 용맹하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몸뚱이가 그들의 유일한 재산이라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몸을 사린다.
결과적으로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다!
모용명은 재빨리 신법을 펼쳐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통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화살을 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모용명의 뒤를 쫓는 방법뿐인데, 용병들은 경공(輕功)을 펼치며 달려가고 있는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화살을 쏘지 않아서 다행이군!’
사실 모용명은 좀 전의 충돌로 적지 않은 내공을 소모했다.
백사의 보혈을 마시고 내공이 좀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 봤자 6개월 정도 수련해야 성취할 공력을 얻었을 뿐이다.
내공이 바닥나면 평범한 열다섯 소년보다 못하게 되리라. 심하게 다친 몸이니까.
다행히 적들이 겁을 먹어 쉽사리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가 달빛을 가려 주고 있기 때문에 추격을 따돌리기 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수풀 속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오며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앙―!
허를 찌른 공격이었지만 모용명은 민첩하게 두전성이를 펼쳐 받아 냈다.
공격을 튕겨 내고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크라이슨이라 했던 그 기사 놈이군!’
알고 보니 성벽 앞에서 한 번 맞붙었던 기사였다.
“이놈! 요상한 마법 따윈 집어치우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자!”
크라이슨이 호탕한 척하며 하는 말에 모용명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해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죄다 사술(邪術)로 몰아붙이는 건 강호의 무림인들과 다를 바가 없군! 게다가 사냥감을 몰듯 몰아대면서 무슨 정정당당을 논한단 말인가?’
심기가 살짝 나빠진 모용명은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입을 열었다.
“진정 정당한 승부를 원한다면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단둘이서 붙어 보자.”
“…….”
차갑게 쏘아붙이는 말에 크라이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대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느껴졌고 게다가 그는 별로 말재간이 없는 편이었다.
모용명은 멈칫하는 상대를 향해 쇄심장을 날렸다.
슈아아아앙―!
크라이슨은 재빨리 츠바이핸더(Zweihader)를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콰아앙!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크라이슨의 검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우우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