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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만! 뭐든 요청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더 이상 아가씨를 괴롭히지 마라!”
결국 맥베스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제 겨우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된 건가?’
위협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판단한 모용명은 분근착골을 멈추고 네르시아의 마혈을 짚어 마비시킨 후 입을 열었다.
“네가 이자들의 책임자인가?”
맥베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
“너희들은 물과 식량을 건네주고 내가 충분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호위를 서라!”
그의 뻔뻔스런 요구에 기사단장은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며 외쳤다.
“우리는 오웬 백작님의 기사다! 네놈의 따위의 호위를 서 달란 말인가?”
모용명은 그를 타이르듯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기사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네르시아는 네 주인이자 보호해야 할 가냘픈 여성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녀를 위해 고작 그 정도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가? 거절한다면 그녀의 목이 부러질 텐데도?”
“으음…….”
사실 이처럼 네르시아를 인질로 삼아 기사들을 호위로 써먹는다는 발상은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제국에서 기사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인 만큼 명예로운 일이었다. 실제로 기사의 규율을 다 지키고 사는 자들은 드물다. 그러나 기사들은 스스로를 더없이 명예로운 존재라 여겼고 체면이 깎이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때문에 활을 쏘는 것도 비겁한 일이라 여겼고 여인을 함부로 겁탈하지 않았으며 적에게 죽을 위험에 처하더라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해도 체면이 깎이고 명예가 추락하는 순간 그걸로 끝이었다.
추문에 휩싸이게 되면 기사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고 그렇게 쫓겨난 기사를 받아 주는 군주는 대륙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세가 되면 갈 곳은 용병단밖에 없는데, 기사로 존경받다가 거친 용병 생활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십중팔구는 용병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술이나 도박에 중독되어 폐인처럼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기사단장인 맥베스는 여느 기사들과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그는 이미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전례가 있었다.
네르시아가 악착같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결국 무릎을 꿇고 노예처럼 채찍질을 당했던 것이다.
원래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워지는 법이다.
‘젠장! 이미 엎질러진 물! 이대로 네르시아 님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백작님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랴? 수하들은 입단속하면 되고 용병들은 원래 허튼소리를 잘하는 족속들이니 헛소문이라고 밀어붙이면 돼! 여차하면 용병단장들을 매수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문제는…….’
맥베스가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크라이슨이었다.
그는 자신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순순히 입을 다물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수하들은 모두 내 편이니 크라이슨 녀석을 모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만약 그것도 힘들어진다면 죽여 없애버리면 돼!’
맥베스는 결국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은 원래 막다른 곳에 내몰려 여유가 없어지면 종종 극단적인 결정을 하게 되기도 한다. 속이 좁고 옹졸한 인물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맥베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모용명에게 말했다.
“음…… 요구를 들어주고 나면 네르시아 아가씨는 언제 풀어 주는 건가?”
원하는 대답을 듣게 된 모용명의 낯빛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맥베스를 향해 말했다.
“인질을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도 내겐 부담스러운 일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그녀를 넘겨주겠다!”
모용명의 대답은 기간을 확실히 정하지 않아 애매모호했지만, 맥베스는 무엇보다 네르시아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요구대로 해 주겠다. 대신 네르시아 님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된다면 그 즉시 이 계약은 끝이다! 너 역시 아가씨가 다치지 않게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 몸처럼 정성껏 보살피도록 하지!”
기사단장이 그의 요청을 수락하자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크라이슨은 망설이지 않고 맥베스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그건 안 됩니다! 단장님. 노예 놈 따위를 호위한다는 건 기사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키는 일입니다! 게다가 저 교활한 노예 놈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기사들의 동요가 더욱 커졌다.
‘저 자식은 어째서 사사건건 날 방해하는 거지?’
맥베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시끄럽다! 지금은 기사의 명예보다 아가씨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걸 어찌 모른단 말이냐! 나 역시 좋아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치욕을 무릅쓰고라도 난 반드시 아가씨를 구해 내겠다!”
그의 표정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더없이 진지했고 격양된 목소리와 손짓은 결코 거짓으로 꾸며 낸 것 같지 않았다.
기사단장의 자리에까지 갖은 고초와 모략을 겪어 왔던 맥베스는 이미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기사들은 기사단장의 말에 호응하듯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단장님.”
“저희는 단장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기꺼이 이 한 몸 희생하겠습니다.”
무릇 분위기를 잘 살피고 큰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출세하는 지름길이다. 괜스레 맞서 봤자 윗사람의 눈 밖에 날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맥베스는 그들의 응원에 힘을 얻어 종지부를 찍듯 강경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모두들 기사단장인 나의 어려운 결정에 따라 주길 바라네!”
이번에는 크라이슨의 얼굴이 와락 구겨져 버렸다.
‘이런 바보 같은 결정을…… 저런 녀석이 기사단장이라니!’
그는 지금의 상황이 더없이 갑갑하게 느껴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이들의 모략 때문에 오웬 백작도 자신을 탐탁히 않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크라이슨은 결코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영지에 돌아가는 즉시 백작님께 모든 일을 소상히 보고해야겠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백작님도 맥베스가 결코 기사단장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자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모용명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들 중 열 명은 내게 등을 보인 상태로 천천히 다가와서 세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둥글게 호위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용병들을 위협해 멀리 쫓아내라!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다칠 경우 네르시아의 목숨은 없다!”
기사들은 별수 없이 그의 지시를 따라 호위하는 동시에 용병들을 쫓아냈다.
네르시아가 인질이 된 이상 현상금을 노리고 온 용병들도 함부로 모용명을 공격할 수 없었다. 자칫 네르시아가 다치기라도 했다간 한낱 용병에 불과한 그들은 어찌 백작과 후작의 분노를 감당하랴? 게다가 그들은 기사들과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다.
결국 용병들은 별수 없이 투덜거리며 멀리 물러났지만 돌아가진 않았다. 저 노예 놈이 언제까지 네르시아를 인질로 잡고 다닐 수는 없을 터! 상황을 좀 더 관망하며 다시 기회가 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본 크라이슨은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쯧! 명색이 기사인데 어쩌다가 도망친 노예 놈 따위를 호위하는 신세가 된 건지…….”
혼잣말이라기엔 목소리가 너무 컸다.
당연히 기사들은 그가 하는 말을 들었지만 못들은 척 무시했다. 괜히 대꾸해 봐야 모양새만 더욱 좋지 않아지기 때문이다.
치부를 찔린 맥베스는 더없이 분노하여 크라이슨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살기에 가까운 광망이 어른거리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네 녀석을 반드시 기사 작위를 박탈하고 내쫓기게 만들 것이다! 술이나 도박 따위에 빠져 폐인이 되어 가는 너의 모습을 보며 비웃어 주지! 결국 도박 빚 때문에 노예로 팔리게 되면 내가 너를 사들여 친히 이마에 노예의 낙인을 찍고 가축처럼 철저히 부려 주겠다! 제일 못생긴 노예와 동침시킨 후 네가 보는 앞에서 즐거운 얼굴로 딸을 강간하고 아들은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게 하리라! 그리하면 너는 내가 보는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고 피눈물을 쏟게 되리라! 정말 기대되는군! 그 즐거운 날이! 크하하하하!’

한편 모용명은 기사들에게 얻은 빵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천천히 물을 마셨다.
쫓기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라 허겁지겁 먹다간 배탈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네르시아를 인질로 삼아 상황을 극적으로 역전시키긴 했지만 다시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 원래 변수란 항상 느닷없이 일어나는 법이다.
오웬의 기사들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마음 푹 놓고 있다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때일수록 체력 관리를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혹시 모르니 내공을 전부 회복해 둘 필요가 있어!’
어느 정도 허기를 면한 그는 네르시아를 단단히 품에 안은 상태로 눈을 반쯤 감았다.
주위를 경계해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평소에 좌공(坐功)을 즐겨 하던 터라 선 자세로 운기행공을 하는 건 몹시 불편했다.
하지만 돌발 상황에 신속히 반응하려면 서 있는 편이 좋았다.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되긴 했지만 좀 전에 바위에 기대에 운기조식을 할 때보다는 마음이 한층 안정된 상태였다. 네르시아를 방패처럼 품에 안은 한 추적자들도 쉽사리 그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운기에 집중하자 평소에 비해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바닥난 단전이 조금씩 차오르며 잃어버린 기력을 서서히 되찾게 되었다.
적양신공의 공력이 전신에 퍼지자 그의 온몸이 뜨거워지며 점점 온도가 올라갔다.
“…….”
그 후끈한 열기 때문인지 의식을 잃고 혼절했던 네르시아가 깨어났다.
마혈과 아혈을 모두 제압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곰곰이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제논이 왜 날 공격했지? 어째서?’
네르시아는 자신이 제논에게 저지른 잘못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불유쾌한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 단순한 뇌를 가진데다 워낙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성격이었기에 뭐든 자신이 좋을 대로 해석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그녀는 무엇인가 깨달았다.
‘아! 나를 인질로 삼아 목숨을 보존하려 했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아프게 할 것까진 없잖아? 너를 만나려고 내가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데…….’
네르시아는 속으로 한없이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그건 마치 제멋대로 구는 애인에게 하는 원망 같은 것이었다.
자기중심적인 네르시아는 그가 자신을 당연히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미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막 봉오리를 피운 청초한 꽃처럼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지 않는 남성은 장님들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이 괘씸한 노예 놈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용명은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동안 격렬하게 움직여 싸우는 바람에 옷자락이 여기저기 찢어졌고 옷을 동여매던 끈이 저절로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네르시아는 탄탄한 가슴과 단단한 팔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끼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마셔 향긋한 살 내음을 마음껏 맡고 싶었다.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상상하며 그녀의 몸이 잔뜩 달아올랐다.
‘아! 이런 상황에서 창피한 생각을 하다니!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네르시아, 정신 좀 차려!’
네르시아는 이제 막 남자를 알게 되었지만 그와 고작 입맞춤 했을 뿐이라서 황홀한 즐거움을 상상하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억지를 부려 가며 악착같이 기사들을 따라온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민망한 상상으로 몸이 한 번에 확 달아오르며 혈관 속의 피가 뜨거워졌다. 그녀의 몸은 이미 하나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상태!
그녀의 심장은 미칠 듯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아! 제논이 내 심장 소리를 들으면 어쩌지? 내가 잔뜩 흥분했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처럼 천박하고 쉬운 여자라고 여기게 되지 않을까?’
무림인의 감각은 일반인과 다르다.
이렇게 밀착해 있는 상태라면 일반인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기에 운기 중에도 주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모용명은 그녀의 심장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다니…… 왜 그런 거지? 혹시 혈도를 잘못 건드려서 그런 건가?’
네르시아의 상태가 걱정된 그는 운기를 멈추고 눈을 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크라이슨이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가며 그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두치자 녀석은 와락 소리를 내지르며 츠바이핸더(Zweihader)를 휘둘렀다.
“우아아압!”
부우우우웅―!
제법 기습적인 공격이었으나 모용명은 재빨리 손바닥을 펼쳐 장력을 쏟아 냈다.
콰아아앙!
장력과 마나가 실린 검이 부딪히자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일어났다.
모용명은 네르시아를 품에 안은 채 뒤로 튕겨나듯 물러났다.
타앗―!
순간 전신 근육에 저절로 부드러운 탄력이 일어나며 충격이 교묘하게 해소되었다.
“이놈! 무슨 짓이냐?!”
불같이 화를 낸 모용명은 네르시아의 혈도를 눌러 분근착골을 펼쳤다.
우드득―
뼈와 살이 모조리 뒤틀려 분리되는 것 같은 고통에 네르시아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끼아아악!”
기습에 실패한 크라이슨이 낭패한 듯 얼굴을 와락 구겼다.
“멈춰라! 이 흉악한 놈!”
맥베스가 기겁한 목소리로 다급히 소리쳤지만 모용명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속을 어긴 건 그쪽이다!”
이마를 찌푸린 맥베스가 고개를 돌려 크라이슨을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크라이슨! 어째서 무모한 짓을 한 거냐? 네놈은 아가씨가 다치길 바라는 거냐!”
“그럼, 멍청히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놈이 그래도!”
혈압이 잔뜩 오른 듯 소리치던 맥베스는 다시 모용명을 바라보며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제발! 아가씨를 괴롭히지 말아 주게!”
모용명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약속을 어겼으니 당신들은 벌을 받아야 해!”
그는 기사들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분근착골을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주도권을 확실히 잡지 못하면 앞으로 이러한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만! 제발 멈추게! 자네와 함께하는 동안은 절대 다른 마음먹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네!”
맥베스가 간절한 태도로 호소했으나 모용명은 그 후로도 네르시아에게 분근착골을 몇 번 더 펼쳤다.





Chapter 3.
블러드 문의 추격을 받다



제국 남부의 실질적인 지배자 버몬트 후작!
모든 남부 세력의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군주!
후작은 그 명성에 실린 무게와는 달리 어디서나 흔히 마주칠 듯한 온화한 인상을 가진 노인이었다.
겉모습만 보게 된다면 아무도 그가 남부의 지배자라는 걸 알아맞히지 못할 것이다.
버몬트 후작은 틈날 때마다 개인 서재를 보조 집무실처럼 사용하는 소박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의 가신들이 얼마든지 친밀하게 찾아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무시무시한 권력과 재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수하들을 살뜰히 살피는 군주!
그런 식으로 후작은 가신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차갑고 냉혹한 본성을 숨겨 덕망 높고 인품이 훌륭한 군주로 자신을 포장해 왔다.
또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보고를 받을 때에도 주로 이 서재를 이용했다.
지금도 버몬트 후작은 서재에서 은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정말 틀림없는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후작의 말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하녀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네르시아 아가씨가 가출한 이유는 제논이란 노예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아…….”
가볍게 탄식하던 버몬트 후작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자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괜찮으니 호들갑 떨지 말게.”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버몬트 후작은 온통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져 있었다.
그는 감춰진 냉혹함으로 수많은 결단을 내렸지만 네르시아에게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달콤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네르시아! 어째서 그런 짓을…….’
버몬트 후작은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5년 전 그는 오웬 백작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아름다운 소녀를 보고 한눈에 빠지고 말았다.
마치 갓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그녀는 아름다움과 청초함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었다.
네르시아는 한때 사교계에서 눈부신 미모로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어머니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다만 눈매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것이 흠이었지만 버몬트 후작의 눈에는 그것마저 당차고 깜찍하게 보였다.
파티가 끝날 무렵, 그는 오웬 백작을 은밀히 불러 요청했다.
“둘러서 말하지 않겠네! 자네 딸을 정혼녀로 내어 주게.”
“네? 죄송하지만 제 딸들은 혼처가 정해져 있습니다. 단지 막내딸 녀석만 아직 어려서 어느 가문에 보낼까 궁리 중입니다.”
귀족 가문에서는 여아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혼약을 맺기도 하였으니 혼처가 다 정해졌다는 백작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오웬은 몹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 내 딸들과 혼인을 추진했을 때는 한사코 거절하시더니 갑자기 무슨 변덕을 부리시는 건가?’
버몬트 후작은 원래 웬만한 가문과는 함부로 혼약을 맺지 않았다. 후작에게는 오웬 백작의 가문도 그리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버몬트 후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막내딸을 내게 달라는 말이네!”
“…….”
오웬 백작은 터무니없는 요구에 말문이 막혔다.
‘늙은이가 노망이 났군.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된 딸에게 눈독을 들이다니…….’
버몬트 후작의 나이는 그때 72세.
보통 15세는 되어야 성인식을 받고 혼인을 할 수 있게 되니, 만약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면 신랑의 나이가 무려 77세나 되는 셈이다.
게다가 버몬트 후작에겐 이미 여섯 명의 처가 있지 않은가? 처가 많은 것이 딱히 흠은 아니지만 오웬 백작에게 네르시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딸! 결코 아무 곳에나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중늙은이의 일곱 번째 부인이라니!
백작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버몬트 후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허! 부끄럽게도 난 네르시아를 본 순간 첫눈에 빠지고 말았네. 날 더 이상 창피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허락해 주게! 지참금으로 칼렌츠 영지를 내어 주지.”
칼렌츠 영지란 말에 오웬 백작의 눈이 번쩍 빛났다.
‘칼렌츠 영지라면 그야말로 알짜배기인 곳인데……. 이 양반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군.’
그렇다면 좋은 거래다.
버몬트 후작이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처지인 오웬 백작의 입장에서는 불가학력의 일이다.
어차피 막지 못한다면 기꺼이 내주고 충분한 이득을 취하는 쪽이 현명하다.
나이 차가 너무 심한 것이 딸을 팔아먹는 아비로 보일까 봐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귀족 가문에 태어난 여식은 어차피 정략결혼에 팔려가야 할 운명!
이 기회에 버몬트 후작과 단단한 결속의 끈을 맺어 둔다 생각하면 오히려 아주 잘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후작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버몬트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네르시아……. 나와 혼인하는 게 그렇게도 싫었느냐? 그깟 노예 놈과 불장난을 하고 싶을 만큼? 혼인하고 나면, 겉보기와는 달리 나의 열정이 젊은이 못지않음을 몸소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너를 만족시켜 줄 자신이 있는데! 어찌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실망과 분노 그리고 질투의 감정들이 서로 엉키며 버몬트 후작은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그때 음울한 목소리가 다시 서재를 울려 퍼졌다.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잠시 고민하던 후작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명령을 내렸다.
“블러드 문을 움직여라!”
“그 말…… 진심이십니까?”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자는 후작의 말에 조금 당황했다. 무심코 너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닌가 생각하던 그는 흠칫하며 생각을 멈췄다.
어디까지나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주인인 버몬트 후작의 몫! 그는 어디까지나 그림자처럼 은밀히 명령을 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반드시 그 노예 놈을 생포해라! 그놈을 처참하게 고문한 뒤, 내 손수 놈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소문이 퍼지지 않게 철저히 막아.”
분노한 후작의 머릿속에 갖가지 흉흉한 고문 수법이 떠올랐다.
그 노예 놈의 입에서 어서 죽여 달라고 애걸하는 소리를 들어야 화가 좀 풀릴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블러드 문(Blood Moon)은 테넨로베프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어쌔씬(Assassin) 길드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실상 블러드 문은 버몬트 후작이 키운 비밀 세력이었다.
40년 전 버몬트 후작은 블러드 문을 구축했다.
블러드 문의 어쌔씬은 어린 노예들 가운데 후보자를 선별한 후에 갖은 혹독한 방법으로 훈련시켜 인성이 파괴된 살인자를 만든다.
그들은 후작의 명령만 듣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 교육 과정이란 바로 강한 마약과 여성을 이용한 것이다.
지독한 마약과 여체에 매력에 중독된 그들은 오직 그 향락을 상으로 받기 위해 후작에게 충성한다. 평소에는 폐쇄된 장소에 갇혀 지내며 다른 즐거움을 맞볼 기회는 철저히 차단된다.
이렇게 양성된 어쌔씬들은 오직 후작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은밀히 암살 업무와 조사 업무 등을 병행해 왔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이 사내 역시 블러드 문 소속의 어쌔씬이었다.
버몬트 후작은 거듭 강조했다.
“반드시 생포해!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블러드 문의 어쌔씬들은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주인의 명령을 이행한다.
지금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다.

네르시아를 인질로 잡은 뒤 맥베스의 기사단은 모용명의 충실한 방패 역할을 해 주었다.
현상금을 노리고 쫓아오던 용병들은 기사들의 견고한 방어에 가로막혔다. 또한 오웬 백작의 딸이자 후작의 정혼녀인 네르시아에게 상처를 입힐까 두려워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시일이 지날수록 지친 용병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3일이 지난 후에는 대부분의 추적자들이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다.
“이쯤하면 되지 않았나? 이제 네르시아 아가씨를 돌려주게!”
맥베스가 간곡한 어조로 요청했지만 모용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아냐! 추적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판단되면 그때 돌려주겠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별로 급할 것이 없었다.
네르시아를 인질로 잡고 있는 한 기사들을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데 굳이 서두를 이유가 뭐가 있으랴?
모용명이 고집을 피우자 맥베스는 속이 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왕 저지른 일이요 엎질러진 물이니 이제 네르시아를 돌려받을 때까지 좀 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깟 며칠을 참지 못해 지금까지 공들여 온 일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이틀이 지나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폭우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은 그들이 이동하면서 남긴 흔적을 지워 주고 있었지만 동시에 물에 빠진 듯 몸을 흠뻑 젖게 해 버렸다.
아직 초봄인지라 비에 젖어 버리자 몹시 추웠다. 꽃샘추위가 겨울보다 더 매섭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모용명은 더 이상 체온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렸다.
적양신공의 후끈한 열기가 한차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자 몸이 따뜻해졌다. 그의 겉옷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젖어 버린 옷자락이 바짝 말라버렸다.
그러나 장대비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기에 일순간만 따뜻해질 뿐,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야겠군!’
모용명은 임시로 일행이 된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비를 피할 만한 동굴 같은 곳을 찾는 게 좋겠다! 흩어져서 찾아봐!”
“노예 놈 주제에 어디다 대고 감히 명령이야?”
“이 치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
기사들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핏대를 세웠지만 모용명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다시 말했다.
“아가씨의 목숨이 내 손이 달려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네르시아의 목숨으로 협박하자 기사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기사단장 맥베스는 되도록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애쓰며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모두 조용히 해! 아가씨가 비를 맞고 있으니 일단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는다.”
“네! 단장님.”
기사단장의 명령까지 떨어진 후에야 기사들은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숲 속에서 괜찮은 장소를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한참을 헤매고 다닌 뒤에야 겨우 몸을 피할 곳을 찾았다.
바위 밑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는데 나무뿌리가 얽혀 있어서 그럭저럭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았습니다! 단장님.”
“이쪽입니다!”
기사들은 맥베스에게 알렸고 잠시 후 그들은 그곳에 도착했다.
‘공간이 별로 넓지 않구나!’
모용명은 네르시아를 품에 안은 채 비집고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나니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어차피 기사들을 안으로 들일 생각이 없는데다 전방을 제외한 모든 곳이 막혔으니 방어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기사들이 그들을 호위하듯 바깥에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게 되니 좋구나!’
그러나 그곳이 마냥 아늑하고 안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좁은 공간에 비집고 들어가 앉자 바닥의 습기가 바지를 축축하게 적셨고 이름 모를 벌레들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불편함을 무시하고 눈을 반쯤 감았다. 정신을 집중해 적양신공을 운기하기 위해서였다. 매일같이 부지런히 운기조식을 해야 내공을 조금씩 늘릴 수 있었다.
‘폭우 때문에 추적하기 힘들어졌겠지? 희미해진 흔적을 찾아 추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모용명은 폭우를 이용해 남은 추적자들을 멀리 따돌려 버릴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