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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추격자를 따돌리고 느긋하게 내공을 쌓는다면, 머지않아 지금 받은 모든 수모와 치욕을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새롭게 얻는 몸은 양강(陽剛)의 내공인 적양신공과 상성이 잘 맞았다. 아직까지 동정을 지키고 있어서 진전이 빠른 것인지도 모른다.
양강 계열의 내공은 천지 만물을 생동하는 음양이기(陰陽二氣) 중에 양(陽)에 속하는 것!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적합한 무공이며 양기가 강한 사람일수록 빠르게 익힐 수 있다.
아직 여체를 모르는 순수함과 양기에 가까운 복사의 보혈을 마신 것이, 마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적양신공의 증가를 가속화시켰다.
그렇다고 적양신공을 익히면 평생 동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모용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운기에 집중했다.
산에서는 밤이 빨리 온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졌건만 모용명은 한숨도 쉬지 않고 운기행공에만 몰입했다.
동굴에서 마셨던 백사의 보혈이 모조리 녹아들며 내공이 조금 증가했다.
이제 평범한 무림인이 1년 정도 수련해야 성취할 내공을 얻게 된 것이다.
예전의 모용명은 화경(化境)의 경지에 이르러 내공을 아무리 소모해도 단전이 바닥나지 않았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내공이 솟아나는 것이 화경의 경지니까.
그러나 지금은 굳이 따지자면 상승(上乘)의 경지 정도 될까?
상승의 경지라는 것은 무공 수위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상승이란 무예에 입문한 뒤 무공을 익히는 속도가 폭발적으로 가속화되는 특정한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무림인은 평생 상승의 경지에 들지 못한다.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야 무림의 고수가 될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다.
‘현재의 무공 수준은…….’
내공 수위로 보면 아직 3류 무사에게도 못 미친다.
그러나 무학에 대한 이해와 응용력 측면까지 고려하면, 2∼3류 그 사이쯤 도달했다고 평가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승(上乘)의 시기를 맞아 진기를 쌓은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니 2∼3년 후에는 1류 고수가 되어 절정(絶頂)의 경지를 넘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경지이니 절정을 넘어 무벽(武壁)을 깨고 곧 화경의 경지에 도달하리라!
‘무공의 경지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시바삐 세력을 규합해 대연(大燕)을 다시 세워야 해! 그것이 반드시 내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
언제 추격을 뿌리치고 무공을 높이며 각지의 세력을 규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지금으로서는 아득할 정도로 까마득한 일이다.
그러나 너무 멀고 길이 험해 보인다고 정상에 오르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모용명은 먼 훗날 황제로 우뚝 설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리며 각오와 의지를 새롭게 했다.
어떤 일에 집중하다면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기도 한다.
운기행공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버렸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왔지만 아직 주위는 밝아지지 않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기 때문에 날이 밝아지려면 평소보다 더 시간이 걸릴 듯했다.
호위인지 포위인지 애매한 이유를 그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음?”
그때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운기에 심취해 있던 모용명의 눈썹이 갑자기 꿈틀거리며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불길한 느낌에 그는 운기를 중단하고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그의 탄성을 듣고 깨어난 기사 한 놈이 물었지만 모용명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기사 놈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마지못해 입을 닫았다.
모용명은 진기를 뽑아 올려 청각을 증폭해 보았다.
그러나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인가? 아니다! 분명 뭔가가…….’
딱 집어서 설명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가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무림인의 이목과 감각은 일반인들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착각할 리는 없었다.
그때 하늘이 번쩍거리며 천둥이 내리쳤다.
우르릉― 콰광!
번개가 내리치자 순간적으로 어둠이 부서지며 주위가 밝아졌다.
있다!
모용명은 순간 흑의를 입고 접근하고 있는 사내 셋을 발견했다.
그들은 바로 블러드 문(Blood Moon) 소속의 어쌔씬!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어쌔씬들은 동시에 날카로운 금속을 쏟아 냈다.
쉐에에엑―!
어디에 그렇게 많은 암기를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암기가 빗줄기처럼 마구 쏘아졌다.
“으헛!”
“으아아악!”
기사들은 어쌔씬들의 암기에 맞고 쓰러졌다.
죽은 것 같진 않았는데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니 암기에 마비 성분의 독이 발려져 있는 듯했다.
기사단장 맥베스와 크라이슨 등은 방패와 검을 휘둘러 재빨리 암기를 튕겨 내긴 했지만 어쌔씬들과 정면으로 싸우려 하진 않고 몸을 사렸다.
‘하긴! 저들이 적극적으로 날 도와야 할 이유는 없지!’
모용명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암기들을 향해 쇄심장을 펼쳤다.
슈아아아아앙―!
맹렬한 장력에 암기들과 빗방울이 함께 휘말려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나 어쌔씬들은 어렵지 않게 몸을 날려 쇄심장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움직임이 매우 날렵한 것을 보니 분명 마나(진기)를 사용하여 경공 비슷한 걸 쓰고 있군!’
어쌔씬들의 움직임은 마치 강호의 살수문파를 연상시켰다.
쉐에에엑―
곧바로 숨어 있던 어쌔씬들이 그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팀을 나누어 돌아가며 끊이지 않게 암기를 퍼붓는 모양이지만 모용명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소매를 떨쳐 두전성이의 절기를 펼쳤다.
샤아아아아―
세차게 날아오던 단검들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그들에게로 되돌아갔다.
파앗―!
“커억!”
어쌔씬들은 다급히 단검을 피했으나 몇몇은 피하지 못하고 맞고야 말았다.
조그만 상처를 입은 것에 불과한데도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니, 단검에 치명적인 독이 발려져 있는 것 같았다.
타앗―
암기가 별 소용이 없음을 느낀 어쌔씬들은 즉시 바닥을 박차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칼날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검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모두 스물일곱 명이군!’
모용명은 단전의 진기를 최대한 끌어 올리며 쇄심장을 날렸다.
슈아아아아아아앙―!
세차게 날아간 장력에 빗방울이 튕겨나가며, 마치 거대한 수룡(水龍)이 물살을 해치고 나아가는 것 같았다.
콰아앙!
“크아아악!”
마치 뇌성벽력이 내리친 듯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장력에 휘말린 다섯의 어쌔씬들은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며 튕겨나갔다.
그사이 모용명에게 접근한 어쌔씬 셋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앙―!
대략 20년 정도의 마나(내공)가 실린 공격!
정면으로 받아치기엔 공력의 차이가 너무 컸기에 그는 즉시 두전성이를 사용했다.
푸욱!
칼날이 살을 꿰뚫은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모용명의 몸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다.
“으윽…….”
서로의 몸을 꿰뚫은 어쌔씬들은 경악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검에도 독이 발려져 있었기에 그들은 즉시 숨이 끊어졌다.
이제 남은 적은 모두 열아홉!
타앗―
모용명은 바닥을 박차고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의 손바닥이 붉게 물들며 강맹한 장력이 쏟아졌다.
슈아아아아앙― 콰앙!
“크아아악!”
장력에 얻어맞은 어쌔씬들은 갈비뼈가 모두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며 바람에 휩쓸린 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그제야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어쌔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딜!”
모용명은 도주하는 그들의 등 뒤로 가차 없이 장력을 쏟아 냈다.
슈아아아아앙― 콰아앙!
“크아아악!”
어쌔씬들은 완전히 투지를 잃었으나 모용명은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감히 내게 독을 쓰다니!’
믿고 있던 아내에게 독살당했기 때문일까?
그들이 지독한 독을 쓰는 것을 본 모용명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삐이익―
그런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호각을 불어 신호를 날렸다. 문뜩 주위를 둘러보니 용병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달려오고 있었다.
분하지만 지금은 저들을 모두 상대할 힘이 없었다.
내공이 바닥나면 두전성이를 쓸 수 없으니 될 수 있는 한 포위당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모용명은 포위망이 완전히 구축되기 전에 바닥을 박차며 경공을 펼쳤다.
타앗―!
“엇? 어딜 가는 건가?”
“젠장! 쫓아라!”
모용명이 어쌔씬과 싸우는 동안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관망만 하고 있던 기사들이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이 녀석들은 이제 쓸모가 없겠군!’
어쌔씬들의 무력이 너무 강해 기사들은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네르시아의 생사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이제 그녀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다한 셈이다. 오히려 그녀의 무게 때문에 경공을 펼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렇게 판단한 모용명은 마치 쓸모가 다한 물건을 버리듯 기사들을 향해 네르시아를 던져 버렸다.
휘익―!
“앗! 아가씨!”
기사단장 맥베스는 몸을 날려 가까스로 네르시아를 받아 냈다.
그사이 홀가분한 몸이 된 모용명은 한줄기 바람이 된 듯 멀리 사라져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기사들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지만 지금 네르시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동자엔 독기가 가득 찼다.
‘비천한 노예 놈 주제에 감히 나를 낡아빠진 신발처럼 내던지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내 반드시 너를…….’
꽉 움켜쥔 손은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렸고 그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시뻘건 핏발이 쫙 섰다.
네르시아는 결국 제 분을 못 이겨 부들부들 떨다가 혼절해 버렸다.
털썩―
“앗! 네르시아 님!”
“정신 차리십시오! 아가씨!”

그 후로 이틀 동안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반복되었다.
추격자들은 갈수록 점점 늘어났고 특히 어쌔씬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 모용명을 압박해 왔다.
쉐에에엑―!
잠시 발걸음을 멈춘 모용명을 향해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그는 짜증과 피로가 잔뜩 서린 얼굴로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정말 성가시게 하는군…….’
블러드 문의 어쌔씬들은 교활한 전략을 세웠다.
두전성이 때문에 공격이 잘 통하지 않으니 기습과 도주를 반복하며 그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불행이도 이 전략은 모용명을 몹시 힘들게 했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으니 운기행공을 할 수 없고 잠도 잘 수가 없었다. 독을 곳곳에 살포해 물을 마시거나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포위망을 뚫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쌔씬들은 3인 1조로 조를 짜서 상당히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한곳이 공격당하면 주위에 있던 다른 조들이 신속하게 포위망을 구축해 왔다.
어쌔씬 측에 추종술(追從術)에 정통한 자들이 있는지 어딘가에 숨는 것도 불가능했다.
가히 천라지망(天羅地網)에 비유할 만큼 훌륭한 작전이었다.
“이대로는 얼마 못 버텨…… 어떻게든 녀석들의 추적을 따돌려야 한다!”
반복되는 기습에 모용명의 단전은 거의 비어 버린 상태였다.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해서 그런지 귀에서 윙― 하고 이명(귀 울림)이 들려왔다. 반쯤 치유되어 가던 상처가 다시 터지며 고름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아주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잠깐이라도 쉬는 기색을 보이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어쌔씬들이 곧바로 단검을 날렸다.
쉐에에엑―!
장력을 쏟아 낼 내공도 없어서 검을 들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단검을 쳐 냈다. 최대한 기력과 공력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공격이 실패할 것을 예상했는지 어쌔씬은 곧바로 모습을 숨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실비실한 모습을 보여도 좀처럼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두전성이에 혹독하게 당해서 그런지, 완전히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뭔가 다른 수를 내야 해! 뭔가!’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고심했지만 언뜻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모용명이 이렇듯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새로운 강적이 그를 향해 은밀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자의 정체는 블러드 문의 특급 살수인 파필리오(Papilio)!
파필리오는 고대 신성어로 나비라는 뜻이며 그가 사용하는 나비 모양의 한 세트로 된 아티펙트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 특별한 모양의 아티펙트는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마법 물품으로 잊혀진 시대에만 존재했던 독특한 마법 스펠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마법 라테레(Latere)!
이것은 8서클인 투명(Invisibility) 마법과는 달리 겉모습은 물론 기척까지 완벽히 숨겨 주는 마법이다.
파필리오는 이 고대 마법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임무를 완수해 왔고 특급 살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고대 마법인 라테레를 믿고 모용명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그의 뒷목에 단검을 꽂아 신경을 절단하면 임무 완료!
생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니 칼날이 동맥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하면 된다.
파필리오는 시퍼렇게 날이 선 예리한 단검을 뽑았다.
단검의 날은 종잇장처럼 얇아서 마치 수술용 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모용명의 뒷목을 향해 주저 없이 칼날을 꽂았다.
그런데 그때!
모용명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그건 그저 막연한 육감일 뿐이었으나 그는 무림인으로 단련된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허리를 숙이는 동시에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켜 뒤쪽으로 장력을 쏟아 냈다.
슈아아아아앙―!
실로 섬전(閃電) 같은 반격이었으나 파필리오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기습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즉시 몸을 피해 장력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모용명을 향해 나비 모양의 암기를 쏘아 냈다.
아무런 소리도 형태도 없이 날아간 이 암기는 목걸이와 한 세트인 아티펙트였다.
물론 고대 마법인 라테레(Latere)가 새겨져 있다!
이번에는 모용명도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기척을 느낄 수 없으니 두전성이의 절예로 받아 낼 수도 없었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암기가 오른쪽 어깨에 거의 근접했을 때야 겨우 어깨뼈가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용명은 즉시 허리를 틀며 어깨를 움츠렸으나 반응한 시점이 너무 늦었다!
파앗―!
나비의 날카로운 날개가 어깨를 스치며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순간 머릿속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어깨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지독한 독이다!’
치명적인 독이 혈관 속을 파고들며 어깨와 오른팔이 동시에 마비되어 버렸다.
모용명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내어 심장을 보호하고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게 막아 냈다.
그와 동시에 무작정 신행미종보를 펼쳤다.
타앗―!
모용명은 적의 암습을 피하기 위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홀로 수련할 때처럼 방위(方位)대로 보법을 펼쳤는데 이는 적이 예측할 수 없는 방위로 번개처럼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뭐, 뭐야? 이건?’
파필리오는 몹시 당황했다. 모용명의 움직임이 너무 기괴하여 도무지 어디로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필리오는 포기하지 않고 이동 방향을 어림잡아 암기를 던졌다.
나비 모양의 암기가 소리 없이 날아갔으나 모용명에게 맞지 않고 번번이 빗나갔다.
원래 신행미종보의 오묘한 요결을 모르고 그저 눈으로 뒤쫓으려 한다면 결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사이 모용명은 공력을 집중해 조금씩 독을 배출했다.
어깨의 상처를 통해 검붉은 독액이 밀려나오며 겉옷에 스며들었다. 어느 정도 독을 몰아낸 그는 사방을 향해 무작정 쇄심장의 장력을 발출했다.
슈아아아아아앙!
적을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무작위로 공격하는 수밖에!
모용명은 숨을 한 번 들이쉴 동안에 총 여섯 번의 장력을 격발했다. 그런 속도로 계속해서 쇄심장을 쏟아 내자 사방팔방이 장력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비록 내공의 소모는 극심했으나 결국 보이지 않는 상대를 적중시키는 것은 성공했다.
슈아아아앙― 파아앙!
“크억!”
장력에 명중당한 파필리오는 내장이 터지는 고통을 느끼며 신음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충격으로 라테레(Latere) 마법이 잠시 깨지며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잡았다!’
모용명은 상대를 노리고 연거푸 장력을 쏟아 냈다.
슈아아아아아앙!
파필리오는 재빨리 바닥을 박차로 뒤로 튕겨나듯 물러섰지만 부상을 입은 탓에 몸이 둔해져 장력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파아앙!
“커억!”
폭죽이 터져 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마치 육중한 무언가에 부딪힌 듯 파필리오의 가슴이 움푹 꺼졌다.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져 나가며 폐를 찔렀다.
쇄심장의 무시무시한 공력이 혈도를 파고들었으나 심장을 박살 내기엔 위력이 조금 부족했다. 그를 잡기 위해 장력을 무수히 격발하는 바람에 단전에 남아 있는 내공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상을 입은 파필리오의 몸은 평소의 기만함을 잃고 바닥으로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쿠웅!
여기에 딱 한 번만 더 공격할 수 있다면 파필리오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근처에 은신하고 있던 어쌔씬들이 그를 호위하듯 막아섰다.
무리하면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용명의 상태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파필리오와 대결하는 동안 대부분의 내공을 소모했으며 공력으로 독을 밀어냈지만 아직 완전히 해독한 것은 아니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지!’
모용명은 그를 공격하는 대신 즉시 경공을 펼쳐 멀리 달아났다.
타앗―!
그렇게 쫓기는 사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용명은 경공을 펼쳐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스치듯 통과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이건만 그는 한 번도 나무기둥에 부딪히지 않았다.
“크윽―!”
겉으로 보기에는 뽐내듯 유유히 신법을 펼치는 듯 보였으나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파필리오에게 부상을 입은 뒤 어쌔씬들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그를 기습했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상처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심각하게 악화되기 마련이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져 출혈이 계속되었다.
단 한 호흡 정도만 쉴 시간이 있다면 옷자락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면 되는데 그 잠깐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상처를 통해 스며든 독도 문제였다.
체내에 남아 있는 배출하려면 공력을 운용해야 하는데 내공이 부족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쉐에에에엑―!
또다시 등 뒤를 노리고 수십 개의 단검이 쏟아졌다.
모용명은 소리만으로 위치를 파악해 등 뒤로 장력을 뻗었다. 손바닥에 붉은 기운이 어리며 응축된 진기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간다.
슈아아아아앙― 파앗!
장력에 휘말린 단검들은 모조리 튕겨나갔지만 비명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쌔씬들은 단검을 던지는 즉시 몸을 피하는 영악한 수법으로 그의 반격을 피해 냈던 것이다.
‘으윽!’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 냈다.
부족한 내공을 억지로 뽑아낸 대가로 약간의 내상을 입었다.
비릿한 피가 식도를 역류했지만 그는 약세를 보이고 싶지 않아 피를 토해 내지 않았다.
‘능선(산등성이)로 가야 해! 높은 곳으로…….’
모용명은 나름대로 노리는 바가 있어서 능선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러나 단전에 남아 있는 내공은 고작 1할(10%) 정도뿐! 내공을 거의 없으니 이동속도도 자연히 느려졌다.
약세를 감추려고 했지만 결국 얼핏 보기에도 역력히 지친 기색이 보이게 되었다.
“허억…… 허억…….”
그러자 마치 약한 짐승을 덮치는 맹수처럼 어쌔씬들의 공격이 더욱 활발해 졌다. 어쌔씬들은 사방에서 그를 둘러싸듯하며 각기 다른 암기들을 날렸다.
쉐에에에엑―!
모용명은 내공이 너무 부족해 두전성이나 쇄심장을 펼쳐 내지 못했다. 남은 내공을 모조리 써 버리면 신법을 펼쳐 달아날 수도 없게 될 테니까!
대신 그는 민첩하게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암기를 피해 냈다.
무림인들은 이처럼 흙투성이가 되도록 바닥에 뒹구는 수법을 매우 치욕적으로 생각했다.
분노를 느낀 모용명의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빛났다.
‘네놈들을 반드시 멸문시키리라! 네놈들의 가족과 친인척은 물론 키우던 개나 고양이까지 모조리 죽이고 말리라!’
뜨거운 분노로 혈관속의 피가 모조리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그에게 반격할 힘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들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쉐에에에에―!
피할 곳을 남겨 주지 않겠다는 듯 폭우처럼 쏟아지는 암기!
모용명은 어쩔 수 없이 진기를 끌어 올려 두전성이를 펼쳤다.
샤아아아―
두전성이의 신묘한 수법에 날아오던 단검들이 동시에 정지해 일종의 벽을 이루었다.
다음 순간!
암기들이 날아온 경로를 그대로 역행했다.
순간! 뜻밖에도 제멋대로 날뛰던 진기가 그의 분노에 호응하여, 모조리 뿜어져 나왔기에 위력이 극대화되었다.
반탄력에 모용명의 진기가 더해져 속도가 위력이 증강된 것이다.
파악!
“으악!”
“크아아악!”
어쌔씬들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모조리 쓰러졌으니, 그야말로 상대의 수법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두전성이의 신묘한 위력이 여지없이 발휘된 것이다.
‘새로운 몸은 그야말로 분노와 상성이 잘 맞는구나. 지금이야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광인(狂人)이 될지도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마공을 익힌 무림인들의 최후가 흔히 그렇듯, 격렬한 감정은 무공의 위력을 극대화하지만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져 스스로를 해치게 될 수도 있었다.
타앗―!
모용명은 다른 추격자들이 몰려오기 전에 얼마 남지 않은 진기로 경공을 펼쳤다.
산등성이로 올라가자 시야가 트이며 드넓은 숲과 계곡들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주위의 풍경을 감상할 틈도 없이 뒤쫓아 온 추격자들이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쉐에에에엑―
날카롭게 쏘아진 화살! 바닥을 보이는 내공!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
모용명은 갑자기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절벽의 높이는 무려 20장(약 60미터)!
아래에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수면 위에 떨어져도 충격으로 내장과 뇌가 파괴되어 즉사하게 될 것이다.
슈아아아아―!
낙하 속도가 빨라지며 일어난 날카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옷깃이 마구 펄럭이며 피부가 찢겨질 것 같았다.
그러나 모용명은 침착히 균형을 잡고 눈을 떴다.
불안정한 자세이지만 조금이라도 운기(運氣)해 내공을 모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 대연국을 다시 세워야 해!’
문득 과연 이 방법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모용명은 자신의 사명을 떠올리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순식간에 계곡이 확대되며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전력을 다해 쇄심장을 내뻗었다.
“으아아아압!”
슈아아아아아아― 파아앙!
장력이 수면을 때리자 폭발음과 함께 바닥이 보일 정도로 수면이 움푹 파였다.
수면이 다시 복구되며 반발력으로 그를 항해 물줄기가 솟구쳤다.
쫘아악!
순간! 모용명은 이를 악물며 단전과 혈도에 남아 있는 진기를 쥐어짰다. 그리고 솟구치는 물줄기를 향해 사력을 다해 두전성이를 펼쳤다.
샤아아아―
물줄기의 방향이 직각으로 급격하게 꺾이며 모용명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파앙!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는 충격을 느꼈지만, 모용명은 그 힘을 빌려 수면과 수평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의 몸은 수면을 스치며 쏜살같이 쏘아졌다.
파앗! 팟!
마치 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뜬 것처럼, 그의 몸이 수면에 가볍게 튕기며 낙하 충격을 대부분 분산시켰다.
낙하 충격이 모두 해소되자 그의 몸은 부드럽게 계곡 물에 잠겨 버렸다.
‘크하하! 성공했다!’
단순히 살아남게 된 기쁨만은 아니었다.
모용성이 아이처럼 기뻐한 이유는 가능성이 희박했던 도박에 성공하며 두전성이의 기예가 더욱 신묘해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두전성이를 창안한 모용룡성(慕容龍城)처럼 관유(觀流)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그 이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아가면 손에 잡힐 듯한데, 딱 한 걸음이 모자라 지극한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보일 듯 말 듯 길이 보이지 않고, 열릴 듯 말듯 문이 열리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지만 언제까지 아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계곡물이 유속(流速)이 너무 빨라서 물속의 바위들이 마치 거대한 암기처럼 쏘아져 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모용세가에서 수집한 강호의 무공들 중에는 이추유영신법(鯉鰍遊泳身法)이라는 수공(水功)이 있었다.
모용명은 수공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바위들을 피해 냈다.
원래 이추유영신법은 매우 뛰어난 수공이라서, 유속에 상관없이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지만 내공이 바닥나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다만 온 신경을 집중해 간신히 바위에 부딪히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속이 더욱 빨라지며 어디선가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콰콰콰콰!
‘서, 설마?’
불길한 예감은 항상 잘 들어맞는 법인지, 갑자기 깎아지른 듯 가파른 폭포가 나타났다.
모용명은 물가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결국 폭포에 휘말렸다.
폭포의 높이는 대략 5장(15미터)!
모용명은 억지로 진기를 모아 먼젓번과 같은 요령으로 두전성이를 펼쳤지만, 도중에 내공이 끊어지며 그대로 폭포수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파아앗!
차가운 물속에 내리 꽂힌 모용명은 충격의 여파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